미셸 앙리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무엇인가? (1)

aurorepark 2012. 5. 30. 03:41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글은 1977년 캐나다 쾨벡대학에서 처음 발표된 것으로, 그의 유고집 『삶의 철학』 1권 39-57쪽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으로 나눠서 읽는다. 이 글의 반은 삶의 철학에 대한 전통적인, 앙리의 표현으로는 고전적인 서양철학 안에서 삶에 대한 접근의 시도와 실패와 그리고 그 결과들을 다룬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앙리 자신의 입장, 혹은 그의 제안, 혹은 그의 대답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글에서 그리스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서양철학의 한 전제를 발견한다. 그것은 존재를 탈자로서 '외재성'에 의해 이해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삶, 실존은 산산이 부서지고 사라진다.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삶이라는 말은 아주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그것은 유기체의 기본적인 현상들을 지시할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일상의, 정신적인 경험을 의미하기도 한다. 삶에 대한 많은 정의들과 언어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된 책에서, 키르케고르가, 혹은 맑스가 삶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안에서 우리를 움직인 어떤 것, 우리를 흔드는 어떤 것, 우리인 바의 것, 그것,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 어렴풋이 느끼고 말하는 이 삶, 나의 삶, 당신의 삶이라고, 혹은 나의 '실존'이라고, 나의 실재라고 우리가 말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의 질문은 직접적으로 이렇게 물어지지 않는다. 보통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혹은 그 이전에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가진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또 '그것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라고, 혹은 더 나아가 '삶의 구원은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이 모든 것에 접근하는 한 길은 우선, 이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해하는 것일 것이다.       

 

'삶'이라고 말은 최소한의 유기체에 이른 모든 존재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먹고 재생산하는 기본적인 현상들을 지시할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일상 혹은 더 나아가 정신적인 경험들을 의미하기도 하는 다양한 의미들을 가진 아주 모호한, 막연한 관념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엄격한 철학이 이 다양한 의미들에 대한 정확한 해명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 철학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 다양한 의미들 안에서 신비한 하나의 같은 본질, 살아있는 우리 자신과 다르지 않은 어떤 본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주 오래된 책에서 "나는 길이고 진리고 삶이다"라는 진술을 발견할 때, 또 키르케고르가 "진리, 그것을 위해 우리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을 때, 또 맑스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아니며, 그들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삶이다"라고 선언했을 때, 우리는, 언어 분석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 안에서 심하게 흔들린다. 우리가 말하는 이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vivre= être가 동격으로 이해될 때, 다시 말해 서양 존재론에 의해 이해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사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개념이 갑자기 존재론의 장, 존재론의 과제로, 다시 말해 철학 그 자체의 장으로 그려지자마자, 이 개념은 갑자기 그것이 지녔던 비규정성을 벗어난다. 따라서 삶이 존재를, 존재의 사실을 지시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삶을 특수한 현상들, 예를 들어 생물학이나 신비주의가 다루는 현상들, 삶을 규정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과 같은 이름으로 삶을 전제하는 이 현상들과 더 이상 혼동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삶에서 먹거리, 성sexuallité, 등등 이 삶의 실체를 형성하는 모든 활동을 떼어낸다면, 이 삶의 구체적인 특징을 형성하는 것ㅡ바로 그것으로 인해 그 단순한 말이 우리를 감동시키는데ㅡ은 상실되지 않는가? 먹고, 입고, 만나고, 타인을 끌어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되고, 삶에 낯선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들은 삶의 최초의 현시들manifestations이며, 반박할 수 없는 현시들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왜 이러한 규정들이 삶의 규정들이며, 왜, 어떻게 이 규정들은 살아있는 것이며, 어떤 본질의 토대 위에서 그러한가다. 또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카프카가 "매번 눈에 보이는 한 입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한입이 우리에게 주어지며, 매번 눈에 보이는 옷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이 주어진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철학이, 존재론에 의존하는 서양철학이 삶을 사유할 수 없는 이 무능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때 존재는 삶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며,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서양철학 ㅡ 그리스적 전통으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ㅡ 존재론으로서 자신을 명시적으로 혹은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서양철학을 특징짓는 것은 존재의 개념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 안에 삶의 본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배재한다. 이것은 극복되어질 수 없는 방식으로 그러하다. 바로 여기에 삶의 개념이 철학에 눈에 의심스럽게 보이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삶이 모호하고 의심스런 어떤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ㅡ그것은 가장 확실한 것이다ㅡ, 이 철학이 삶을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삶은 자신의 존재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근본적인 내재성으로서 가장 고유한 자신의 본질 안에서 구성되기 때문에, 그리고 삶은 거의 사유될 수 없는ㅡ가까스로 사유되는ㅡ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서양철학을 특징짓고 규정하는 것은 외재성이다. 만일 예를 들어 이 방의 벽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것은 테이블과 다른 개별적인 실재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그 존재도 다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해 벽을 벽이게 하는 것과 테이블을 테이블이게 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 이 벽의 존재, 이 테이블의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피히테가 말하듯이ㅡ다만 그의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진술 안에서 ㅡ 그것은 "자신의 존재 밖의 자신의 존재"이다. 벽의 존재는 벽 그 자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벽의 존재는 벽을 영원히 자기와 분리하는 무한한 차이 안에서 벽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자기에 이르지 않으며, 자신의 동일성을 이 차이 안에서, 외재성 안에서, 그것에 의해서 발견한다.

 

외재성은 왜 존재의 본질을 지시하는가? 이 질문은 빛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것이 자연의 빛이든 정신의 빛이든, 보인 것은 결국 그것이 나온 것으로 돌아간다. 내가, 우리가 지성의 빛에 의해 본 것은 그래서 결국 우리와 같은 것이 된다. 여기의 빛의 대자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직관은 칸트에서 탁월하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한다. 

 

왜 외재성은 존재의 본질을 지시하는가? 왜냐하면 존재는 나타남, 드러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재성의 전개는 이 나타남의 실체, 스스로 현상화되는 순수한 현상성,  벽의 나타남,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선 나타남 그 자체의 나타남, 이 나타남이 자기에 대한 직관에 이르는 장, 가시성의 가시화, 그리고 결국 비추는 행위의 실질성 안에서 빛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외재성은 바깥 그 자체에서 어떤 것의 드러남 안애서 자신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왜재성 그 자체 대자적이다.  

 

공간을 말하는 것은 결국 시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외재성으로서 존재의 개념은 자신의 단순한 공간화로부터, 즉 의식의 즉각적이고 순진한 봄에서 결과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간을 다음의 방식으로 통각한다. 즉 공간 그 자체는  존재가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과 다른 것을 지시하지 않는 초월론적인 지평 안에서만 현시된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공간은 그자체 모든 현상들의 조건으로서 이해된 시간 안에, 즉 그것들의 현상성 안에 존재한다. 그런데 시간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게 그 대답을 듣자. "시간성은 즉자 대자적으로 본래적인 외재성이다"(SZ, 329). 헤겔 이후로 서양철학을 인도하는 시간으로서 정신의 해석은 항상 자기도 모르게 서양철학을 규정하는 전제들의 재확인 뿐이다.

 

그런데 고전 철학은 적어도 데카르트 이래로 의식 철학으로 자신을 제시하는 한에서 이 이 전제들을, 이 외재성으로서 존재의 이 해석을 회피하지 않는가?

 

대상에 대립한 주체로서, 더 나아가 하나의 나, 자아un moi로서, 이 자아un moi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제시하는 이 의식과 함께 우리는 세계와 다른, 그리고 그것과 대립하는 내재성의 주관적인 영역에 현전하지 않는가? 우리가 나는 생각한다의 이 자아를 근대 철학의 출발점으로 간주할 때, 우리는 데카르트 그 자체에서, 코기토의 이 순간이 얼마나 허약하고 달아나는 것인가를 지적하는 것을 잊는다. 나는 생각하고, 의심하고 욕망하고, 원하고,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의식에 자아의 속함 위에서, 두 번째 <성찰>은 "의심하고 이해하고 욕망하는 것이 나라는 사실은 그 자체 아주 명백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하는 것에 만족한다. 자아가 근대 사유가 전개될 그 전망의 중심에 정착하는 그 순간에, 이 자아의 자기성에 대한 진지한 모든 문제제기의 부재는 근대 사유의 주장된 원리가 문제일 때, 그 철학의 연속적인 불확실성과 길읽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왜 이 자아는 이어서 같은 용이성을 가지고 의식 안에 포함되거나 배재되는지를, 왜 아믈렝Octave Hemelin은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해서는 안되고 "그것이 생각된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선언하는지를, 그리고 메를로-퐁티는 "나는 느낀다je sens"가 아니라 "우리는 느낀다on sens"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그리고 결국 오늘날 주체는 갑자기 "문제제기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장중하게 묘지로 인도하는 그 사람의 동일성에 대한 최소한의 생각도 가짐이 없이 땅에 묻어버리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자주 한 같은 저자에서, 그것도 유명한, 인용하자면 후설, 사르트르에서 의식의 장champ과의 관계에 의해 자아가 연속적으로 내재성으로 혹은 초월성으로 말해지는 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철학, 주체성을 구원할수 있었던 그의 철학은 다시 잘못된 이해와 미끄러짐으로 다시금 외재성으로서의 존재의 개념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런데 우선 애매성 안에 머무는 것은 이 장의 존재, 의식 그 자체의 존재이다. 물론, 이 의식이 다른 실재와 다른 특별한 실재, 즉 대상에 대립되는 주체라는 환상을 제거하는 것은 타당하다. 순수한 개념 안에서 파악된 의식은 이 의심임의 속성을 가지는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임의 사실, 의식적 조건, 즉 현상적인, 요약하면 순수한 현상성 그 자체, 하이데거가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지시한다. 그런데, 의식의 철학을 특징짓는 것은 의식이 서양철학 일반, 그리고 특히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같은 존재의 개념, 즉 외재성으로서의 존재의 개념을 함축적으로 전제하거나 명시적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피히테가 존재론적으로 의식의 존재를 사유했을 때, 그는 의식의 존재를 존재 일반과 동일화한다. 의식의 존재, 그것은 정확히 벽의 존재이다. 즉 벽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이 벽의 고유한 외재성, 즉 외재성 그 자체이다.  또 더 나아가, 벽의 존재는 자기의 대립opposition, 즉 자기의 표상이며, 의식은 이 표상이다. 주체는 따라서 대상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대상의 현상적 조건, 그것의 표상, 즉 그것의 객관성 그 자체를 지시한다. 주체의 주체성은 서양 철학에서 대상의 객관성일 뿐이다.

 

이 운동에 의해 주체의 주체성은 외재성과, 그것의 전개와 같은 것으로 드러나고, 이 운동은 역사적으로 일련의 단계들을 겪는다ㅡ데카르트, 칸트, 후설, 하이데거에서...

 

데카르트에서 "사유cogitatio"라는 이름 아래에서, 체험된 경험으로서, 따라서 삶의 계기로서 주체성의 이해, "느끼는 것, 그것도 사유하는 것이다"라는 결정적인 진술에서 알려져 오는 이해는 오랫동안 그 철학자를 붙잡지 못한다. 자기성의 본질은 말할 것도 없고, 주체성의 구조에 대해서도, 그것이  삶과 동일한 것이고 것일 수 있는 한에서, 데카르트는 질문하지 않는다. 반대로 아주 빠르게 <제 3 성찰>에서 탐구의 관심은 의식과 그것의 상관자의 관계로, cogito와 cogitatum의 관계로 이동한다. 이 의식의 상관자 그리고 그것으로 향하는 의식의 운동은 점진적으로 "으로 향하는 운동"으로, 외재성의 열림으로 환원되고, 철학적 문제의 주제가 된다. 신의 이념, 지향적 내용으로서, 사유대상cogitatm 일반, 명석 판명한 이념 안에서, 명증성 안에서, 즉 객관성 안에서 신이 자신을 제시하는 양식, 이것은 자신의 실질적인 완성의 현상학적인 양식들을 따라서 이제 탐구를 이끄는 텔로스, 목적으로 궁극적으로 세계의 실존을 설립하고, 그것에 대한 주장 전체를 합법화하고, 즉 초월론적으로 인식의 이론과 과학적 지식 일반을 근거짓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후설의 위대한  데카르트적 기획 안에서....

 

그리고 결국 데카르트주의에서 초월적 구성들만에 대한 주장만을 보존함에도,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의식적 물질에 대한 관심에서ㅡ"질료"라는 이름 아래에서 고려된 계기ㅡ지향성으로, 즉 외재성의 승리에 찬 용출로의 미끄러지는 것을 관찰할 필요가 있는가? 후설은 삶으로서 의식을 말한다. 경험은 그것이 사는 것, Erlebnis, 체험이다. <시간의식>에서 후설은 본래적인 현전의 장으로서, 살아있는 현재로서 이 삶의 실체를 한정하고자 한다. 그런데 현재는, 이 현재를 구체적인 전체성으로 만드는, 그런데 지향성들로서 존재의 자기의 외재성으로의 최초의 파열일 뿐인, 그리고 그것의 규정되지 않은 반복réitération일 뿐인 과거지향과 미래지향이라는 단절되지 않는 연결고리와 연결되는 한에서 순간이라는 추상적 한계를 넘어설 뿐이다. 사실, 후설은 아주 천재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삶을 주는 것은 경험의 본래적인 수동적 종합인 이 지향성들이 아니라는 것을 통각한다. 왜냐하면 과거지향에 주어진 이 삶은 과거에 속한 삶일 뿐이며, 미래지향에서 삶은 미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전의 최초의 솟아남, 즉 삶은 인상에서 과거로의 영원한 미끄러짐에 앞선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최초의 인상Ur-impression으로서 인상 그 자체에 자리한다. 다만 후설의 사유는 정확히 이 인상 앞에서, 삶의 본질과 다른 것이 아닌 이 내적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무능으로 인해 죽는다. 인상은 이 때 물론 실존을 포함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칸트주의와 흄의 경우에 그러했던 것인데, 그것은 그것의 존재 안에서 신비적이고 이해되지 못한 소여로, 불투명한 내용으로, 아주 정확하게 말하면 삶의 정반대로 제시된다. 왜냐하면 삶은 진리이고, 그것은 자기 계시로서, 자신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전적으로 이 계시에 의해서 구성된 것으로서 살아있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설이 삶을 현상학의 규칙들을 따라서 다루고자 했을 때, 그가 이 계시의 완성을 지향성과 다른 가능성un pouvoir에 맡길 수 없었다는 것은 아주 주목할 만하다. 의식의 흐름은 이 흐름을 따라서 흐르는 종단적 지향성들의 작용에 의해서만 자기의 현시에 도달할 수 있으며, 존재 안에서 각각의 국면을 유지할 수 있으며, 매 순간 존재를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다. 이 흐름의 놀라운 대자적 존재는 자기에의 지향적 상관성이며, 자기-증여로서 최초의 증여는 외재성공동空洞creux과 다른 자리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현상학이 단지 구성적인 문제들의 검토로만 정향한다는 것을, 즉 존재의 초월적 구성만을 다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존재는 매번 지향적 상관자, cogitatum이며, 후설의 철학은 고전적 사유의 관념론과 이성주의의 길, 혹은 막다른 길를 재발견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가 이미 암시한 것처럼 이런 사유의 가장 명백한 한계를 나타낸 철학자는 칸트이다.

 

삶을 파악할 수 없었던, 혹은 그것의 본질을 예감할 수 없었던 칸트의 철학적 문제(제기)la problématique의 무능은 삶의 개념과 동일한 영혼의 개념에서 그것의 모든 합법성을 빼낸 이성적 심리학의 유사논리의 그 유명한 비판 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비판>이 이 자아 그 자체를 회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자아의 실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현상만을 안다는, 우리의 자아는 현상들 중의 하나라는 변명 아래에서 그러하다. 칸트의 논증의 힘을 만드는 현상성의 주장은 여전히 서양철학의 존재의 개념에 의존한다. 현상의 양식 위에 존재은 칸트에게 사실 직관에 주어진 것이고, 오성에 의해 사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유와 직관은 둘다 표상이다. 다시 말해 가시적 지평의 탈자적 투영projection이다. 자아의 실재적 존재는, 칸트가 증명하는 것처럼, 직관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없으며, 그것에 대한 어떤 개념도 없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것은 표상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성의 본질은 외재성에 환원불가능하다는 것을 혹은 칸트 존재론의 전제들은 삶의 존재에 갇혀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로부터 칸트주의는 칸트가 적어도 나의 현상적 실존이라고 부른 것의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감의 내용은 아무 것도 이 자아, 다른 자아가 아니라, 혹은 낯선 존재가 아니라, 이 자아에 덧붙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눈먼 맹목적인 인상이다. 나le je의 이 표상이, 비판의 저자에 의하면, "어떤 내용"(CRP, A 381)도 가지지 않는 한에서, 이 감각의 형식은, 왜 이 내le je가 표상을 동반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표상의 공허한 형식일 뿐이다. 

 

공허한 형식, 죽은 내용, 그것이 그것의 다양한 정식화들을 거쳐서 서양철학을 지배하는 형이상학의 상황이다. 존재가 자신을 본질을 탈자의 전시에 의해 전개하는 한에서, 존재는 내재성이 결핍된 존재로서, 그 안에 거주하지 않는 존재로서 산출되고 제시되며, 자신에게 자신의 "바깥"만을, 표면만을, 시선이 미끄러지고 이어서 곧 사라질 어떤 두께도 없는 해변만을 제공한다. 이렇게 우리가 그 존재에 대해서 가진다고 주장하는 인식의 모든 심화는 다만 새로운 객관적인 가상, 새로운 "바깥"의 도래를 의미할 수 있으며, 그리고 존재는 이 가상들의 탈자적인 연속일 뿐이다. 그리고 이 가상들 사이로 존재는 분산되고, 그것의 각각은 외재성, 다시 말해 시간의 집요한 완성과 분리될 수 없는 끝없는 초월성을 따라서 다른 것으로 보내진다. 사물 고유한 필연성을 따라서,사물의 일련의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공간적인 사물들 만이 아니다. 그것의 존재는 그 모습들을 넘어서 이상적인 극으로 머문다. 이 이상적 존재 그 자체는 전적인 시간성omnitemporalité이다. 모든 가능한 존재 일반은 분산의 법칙을 따른다. 세계 안에서 모든 실존은 소외되고 잘려지고, 무차별젹이고, 불투명하고, 우연적이고 부조리하다. 실존은, 그것이 다만 자기 밖에서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의 형태 아래에 존재할 때, 그것이 표상이 될 때 잘려진다ㅡ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관념론의 토대를 인식한다. 실존은 실질성에 그것에 부여한 것이 더 이상 그 안에 자리하지 않고, 정확히 자기와의 관계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외재성 안에서 그것 밖에 존재할 때, 상실된다. 실존은 그것의 전개의 법칙이 더 이상 그 자신의 것이 아니고, 낯선 정신일 때 소외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설립되고 전개되지 않는 실존은 우연적이고, 나의 신체는, 그것이 다 이상 자기와 함께하는 운동, 그리고 욕망의 솟아남ㅡ나인 바의 것과 내가 하는 것ㅡ이 아닐 때, 자기에 외적인 존재 안에서 신체가 부분적으로 낯선 겹침 안에, 기능상 정당화할 수 없는 조합 안에 섞이자마자, 나의 신체는 이러한 이상한 형성의, 다시 말해 외재성 안에서 역설만을 의식의 정신에 제공한다. 탈자의 빛 안에서 드러난 것의 버림은 이 빛과, 이 빛이 완성하는 탈은폐의 양식과 관계한다. 모든 초월성은 극복할수 없는 사실성의 원리이며, 객관성은 삶에 대해 가장 큰 적이다. 

 

이성주의에서,

 

이성에 의해 벗겨진 객관적 존재는 이성주의의 유일한 덱스트이다. 이성주의는 명증성과 증명을 어디서나 찾으며, 이것들은 항상 이런 방식으로먼 세워질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의 명증성에 도래를 의미한다. 모든 보증, 모든 확실성은 대상을 정립하는 데에서 오며, 하이데거는 근대과학이 이상주의 목적론을 완성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근대과학이 이성주의의 진정한 본성을 즉 자신을 대상으로 만들면서 존재자가 따르는 의지를 탈은패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행위는 가장 주목할 만한 형식들 중의 하나이다. 만일 이 행위가 지구를 초토화하는 데 이른다면, 그것은 이 본질이 외재성의 본질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존재자를 한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근대 이론에서 세계의 초토화는 그리스 이론의 결과이며, 기술은 존재의 역사 안에 기입되고, 그것에 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끄러짐은 이성주의의 비판인 실존철학 안에서, 특히 하이데거 안에서...

 

이성주의를 비난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것이 존재론과 동일한 전제들에 의존하는 한에서 실패한다. 이런 것은 이 세기 중간에 실존철학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두드러진다. 주제의 갱신, 삼각형, 공리를 역사적 신체적 실존으로, 타인과의 관계로, 불안으로 죽음으로 대체하는 것은 역사성이 탈자의 완성일 뿐이고 죽음은 그 상관자의 완성일 뿐이라면, 그리고 신체는 지향성에 의해 규정되고, 불안은 그것의 가장 내적인 가능성과, 즉 삶의 정감성과 관계하는 것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보기보다 덜 작동적일 것이다. 세계 안에 던져진 버림, 무에 의해 열린 현재의 개화, "나는 나인 바의 것이 아니다", 모든 유사 파토스, 정념은 그것이 외재성의 오래된 지배와 다른 것을 표현하고, 그것이 삶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면, 너무 일찍 그렇게 늙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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