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비르지니 까루아나와의 대담

aurorepark 2012. 4. 29. 20:53

2000년 1월 잡지 Philosophique에 실렸던 것으로 그의 『대담집』(2007, 113-123쪽)에 다시 실린 비르지니 까루아나Virginie Caruana와의 대담이다. 이 대담은 2000년 그의 저서 Incarantion, une philosophie de la chair,『육화, 살의 철학』이 발표되고 바로 있었던 대담으로 그의 이 책의 기획과 그 이전의 그의 입장들에 대한 그 자신의 변명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그의 기독교에 대한 삼부작 - 『내가 진리다』(1996), 『육화, 살의 철학』(2000), 『그리스도의 말들』(2002) - 이라고 불리는 것들 중의 하나로 이 안에서 그가 "살의 고고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전개한다. 고고학은 말 그대로 "이전"으로 거슬러 내려가는/올라가는 것이다. 앙리는 이와 더불어 그의 철학의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더 이상 인문학의 고고학의 문제가 아니라, "살의 고고학"이 문제가 된다.  





Virginie Caruana -  L'essence de la manifestation, 『현시의 본질』에 대한 강독은 신체의 현전에 대한 질문을 남겨 놓았다. 삶과 신체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삶은 어떻게 육화되는가?


Michel Henry - 『현시의 본질』의 기획은 고전적인 주체성에 대한 비판이었다. 우선 칸트에 대한 비판으로, 그에게 주체성은 순수히 형식적인 주체성으로 여기서 삶은 부재한다. 그의 주체성은 공허한 "나는 할 수 있다le je peux"이다. 왜냐하면 그의 주체성은 세계에 대한 이해의 범주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주체성은 불가피하게 세계로 향한다. 나의 기획은 그 때 주체성은 구체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가 경탄해 마지 않는 키르게고르의 철학 - 불안으로 이뤄진 그의 철학 - 은 우리가 이해하는 인식의 주체, 즉, 객관적인 주체와 전적으로 다르다. 현시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나는 우선 신체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나의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신체의 중요성의 토대를 정립하고, 주체성은 신체적이며, 그것은 신체이며, 신체는 주체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때, 내가 의존한 철학자는 멘느 드 비랑이었고, 그의 존재론에 대한 나의 책은 처음에 『현시의 본질』의 한 장을 구성 했었다. 그런데 신체와 삶에 대한 반성이 그 중요성을 더해감에 따라서 나는 그 부분을『현시의 본질』에서 떼어냈다. [멘느 드 비랑과 신체에 대한 철학은 그의 책 『신체의 철학과 현상학』에서 발견된다]. 그런 이유로 『현시의 본질』은 신체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지 않는다. 『현시의 본질』은 현상학적인 방법에 의존한다. 여기서 나는 나의 현상학적 전제들을 전개했다. 나의 현상학은 이원론을 주장한다: 세계의 탈자적 현상성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보다 더 중요한 삶의 현상성이라는 전적으로 다른 현상성에 대한 인식이 있다.   이것은 순수한 두 현상성으로 우리가 <나타남의 이중성 혹은 이원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이어서 이 전제들을 맑스의 철학에, 그리고 『야만』Barbarie에서 문화에, 그리고 예술에서 칸딘스키에 대한 연구에 적용하고자 했다. 일단 나의 고유한 체계가 세워진 후에 나는 후설 - 나에게는 현상학자들 중에 가장 탁월한 - 을 다시 읽었고, 이번에는 나의 현상학을 무의식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것은『정신분석의 계보학』이었다.


Virginie Caruana - 두 종류의 신체성coporéité을 구분해야 한다면, 어떻게 이 신체성들은 서로 관계하는가? 삶과 세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Michel Henry - 나의 대답은 살la chair이 우선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현상학적인 물질성matérialité phénoménologique을 가지는 한에서, 다시 말해 이 자기가 어떤 물질matière을 소유하는 한에서, 살은 초월론적인 자기le Soi transcendantal와 동일하다. 그런데 그 물질은 진정으로 말하면 물질들 중의 한 물질이 아니라 - 부조리해 보이겠지만-, 그것은 자기가 고통이거나 기쁨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살을 자기-인상성auto-impressinnalité으로, 정감적인 물질la matière affective로서 이해해야 하며, 이 자기-인상성은 세계가 필요없는 자기-촉발의 살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진정한 신체성과 갖는 관계는 정념적인 자기-촉발l'auto-affection pathétique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살은 세계에 무지하다. 그 관계는 아주 복합적이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유기적인 신체의 전개이며, 그것은 순수한 주체성이다.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다"는 내적 세계라는 지속적인 저항에 부딪친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세계가 없는 놀라운 어떤 세계이다. 그런데 밖으로부터 우리는 잡고 만질 수 있는 신체의 형식을 본다. 그런데 사실 나의 객관적인 신체는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하이데거가 잘 말한 것처럼, 탁자는 벽을 만질 수가 없으며, 스탠드는 그것 위에 놓일 수도 없다. 그것이 주장하는 것은 신인동형론이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나의 손은 탁자를 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나의 경우, 나의 손은 객관성 안에서 탁자를 만질 수 없다. 그것은 멘느 드 비랑이 주장한 유기적 신체의 내적인 것으로부터,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부터만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육화, 살의 철학』에서 나는 이 분석을 에로티즘에 적용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에로티즘은 우선 벗기는 행위에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난다. 사람들은 에로티즘을 모순적인 기획으로 환원한다. 여기서 한 주체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외적 신체로서 세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사실 에로티즘은 내적인 신체 안에서만 느껴질 뿐이다. 삶은 절대로 세계와의 외적인 관계에서 스스로 느끼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비록 내가 가시적인 외적인 세계에 속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은 비가시적인 것 안에서 일어난다.


Virginie Caruana - 삶은 세계를 필요로 하는가?


Michel Henry - 그것은 신비이다. 17세기 한 철학자, Jacob Boehme는 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했다. 왜 신은 세계를 창조했는가? 자기를 현시하기 위해, 계시하기 위해. 이것은 독일 관념론의 선구자의 역할을 한다. 그는 다만 객관적인 계시만을 고려한다. 사실 세계의 객관화와 다른 계시가 있다. 왜 세계가 존재하는가? 나는 그것에 무지하다. 현상학은 그것을 기술하는 데에 만족한다.


Vitginie Caruana - 『현시의 본질』과 전쟁 후에 두 저작, 즉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그리고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사르트르에 대한 당신의 비판은 무엇인가? 또 메를로-퐁티가 주장하는 신체의 지위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식을 신체와 세계와 연결하는 그의 주장은 너무 멀리가는가? 이런 의식의 자연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Michel Henry - 『현시의 본질』은 『존재와 무』를 고려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에 정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나는 멘느 드 비랑, 또 데카르트, 헤겔, 하이데거, 후설과의 관계에서도 그들에게 도전했다. 이 작업에서  『존재와 무』와 마찬가지로 『지각 현상학』은 이미 나의 고려 밖에 놓인다.


Virginie Caruana - 당신은 그들을 믿지 않는가?


Michel Henry - 믿지 않는다. 그들은 나의 관심 밖이다. 나는 『현시의 본질』에서 "상황"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데 그것은 순수히 비판적이고 그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방식으로 말해졌다. 나는 그들을 다만 이차적인 저자들로 고려한다. 그 책의 "상황"의 절을 봐라[§ 43]. 내가 『현시의 본질』을 쓸 때 메를로-퐁티는 이미『지각 현상학』의 저자였으며, 그의 유고들의 모음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출간되기 전이었다. 그가 이해하는 지각에 대한 비판은 명백하다. 그것은 주관적인 신체에 대해서 말한다. 아주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그것은 후설의 영향 아래에서 그렇게 한다. 다시 말해 의식과 주체성은 본질적으로 지향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신체는 세계를 향해서 자신을 던지며, 항상 사물들과 관계한다. 어디에서도 신체가 자기 안에 휴식을 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반면 나의 주장은 신체성, 이 자기-느낌l'auto-sentir은 지향성에 앞선 것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정념pathos 안에서 지향성은 지향성 없이 자기에게 계시된다. 그런 이유로 메를로-퐁티가 항상 감각적인 것le sensible을 말하면서 절대로 본래적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내적인 것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인다. 하이데거에게 내적인 것은 없다. 후설에 의하면 의식은 지향적이며, 그러면서도 그는 지향성 - 이 밖으로의 추월dépassement vers le dehors - 을 일종의 내재성 안에 놓고자 한다. 이것은 아직 그가 진정으로 데카르트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르트르의 경우 그는 절대로 삶의 내재성을 파악하지 않는다. 그에게 존재는 영원히 무화되는 것이고, 그래서 항상 나와 나 사이에 거리가 있게되며 자기와의 관계는 타자와의 관계가 된다. 자기와의 관계가 이렇게 생각될 때에만 자유가 역할을 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치 연애인처럼 카페의 종업원처럼 간주된다.그런데 삶 안에서 이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는 개인은 전적으로 자신을 기만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기를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정의할 수 없다. 즉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실재-실천에 의해서 정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체적 주체성에 의해서 정의해야 한다. 내가 맑스를 연구할 때 내가 맑스에서 통각한 것은 바로 이 신체적이고 본질적인 주체성이다. 이 주체성은 모든 경제분석의 원리로, 그것은 바로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며 살아있고 실재적인 노동이다. 모든 경제는 이 노동의 가치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제는 삶에 비해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는 삶 그 자체의 기획 위에서가 아니라 다만 실재의 대체인 표상의 기획 위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로 되돌아와서 다시 말하자면, 나는 그 안에서 발견되는 위험을 진정으로 고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나의 것의 아닌, 본래적이 아닌, 그래서 삶에서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리는 한 현상학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진정으로 비난하는 것은 헤겔의 영향 아래에서 그가 행한 것이다. 사르트르 안에는 부정성이 있다. 부정성은 정신이 거리를 가지고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의 최초의 행위는 시간이다. 시간은 거리를 놓으며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존재의 진리의 기원이다. 과거로 넘어가면서 현재를 파괴하면서만 이런 존재의 진리는 가능하다. 『물질 현상학』에서 후설에 대한 나의 비판은 바로 이 거리놓기이다. 후설 자신도 그것이 현재를 파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지난 순간l'instant écoulé으로 환원된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나의 『내가 진리다』C'est moi la vérité에서 나는 이 파괴적인 거리내기로서의 시간의 개념화를 다뤘다. 이 거부는 이미 내 안에서 사르트르를 거부했다는 것을 말한다. 나의 가장 최근의 책 『육화, 살의 철학』은 메를로-퐁티에 대한 비판에 집중한다. 이 번에는 그의 『지각 현상학』이 아니라, 그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 더 정확히 그가 모든 것의 기원이라고 말하는 '보는 자-보이는 것voyant-visible'이라는 짝의 키아즘에 대한 비판에 집중한다. 나의 비판이 좀 심한 것같지만 나는 아주 엄격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르트르에서 인정하는 것은 연극적인 재능이다. 『존재와 무』에서 의미있는 진정으로 연극적인 한 장면이 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한 남자가 한 여자의 손을 잡았을 때, 그 잡힌 손을 중성화하는 여자 주인공이다. 그녀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치 자시 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녀는 다른 것을 생각한다. 이것은 특히 키르게고르의 불안의 개념을 나에게 불러일으킨다.


Virginie Caruana - 그런데 우리는 [삶과]떨어진 의지une volonté détaché를 생각할 수 없는가? 우리는 "삶에 반해서" 의지할 수 없는가?


Michel Henry - 모든 것은 내재성 안에서 일어난다. 진정으로 말해서 "삶에 반한 의지"라는 것은 없다. 모든 거리내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삶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거리내기는 삶을 파괴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당신의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취한다고 해보자. 고통은 다만 표상의 대상으로 당신은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서양의 윤리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초기의 정신분석이 취한 태도이다. 자신의 트라우마trauma를 제거하기 위해 그것을 의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그의 후기에 와서 전이에서 일어나는 자기-변형une auto-modification을 알아차리고 이것을 수정한다. 프로이트가 처음에 구원이 자기의식의 파악에 놓이는 그리스적 기획에서 출발해서 이어서 구원은 삶 그 자체로부터만 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미움이 사랑으로 전이되는 미움의 기획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 때 내가 생각한 것은 기독교이다. 내재성 안에서는 의식의 파악은 없으며, 자기의 느낌만이 변형되고 그것만이 심화되며, 삶을 떠남이 없이, 다만 이 내적 심화 안에서만 변화는 산출된다. 삶 안에서만 필요는 나타나며, 그것은 즉각적으로 만족과 연루된 실천이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변형une auto-transformation이다. 실천의 기획 위애서 삶 그 자체는 땅을 파고 먹기 위해 씨를 뿌린다. 인간은 그 자체 주관적인 어떤 결과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행위해야 하고 노력의 감정un sentiment d'effort 안에서 자신의 신체의 내적 가능성들을 흔들어 깨워야 한다. 그의 행위는 절대로 대상으로 향하는 시선과 동일화될 수 없다. 이 시선에서 행위, 삶은 사라진다. 따라서 연인들의 사랑에 대한 Les élégies de Duino 『두이노의 비가』에서 릴케의 절규를 이해해야 한다: "Ah, comme le buveur alors de l'acte étrangement s'évade(아, 그 때 마시는 행위는 이상하게도 사라진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때에 본래적인 과정은 사라진다.


Virginie Caruana - 우리는 삶의 시간성을 생각할 수 있는가? 생각할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Michel Henry -  오늘날 두 종류의 시간성이 있다. 하나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후반부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시간성은 세계이다. 더 정확히 시간성의 시간화이다. 다시 말해 외재성의 형성으로 이것은 '자기 밖hors de soi'을 의미한다. 이런 시간성은 삼차원적인 탈자에 의해서 형성된다. 이것은 헤겔의 부정성을 다시 생각하는 방식이다. 부정성은 그것이 부정한 것을 드러내며, 그것은 고유한 현상학적인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 이 순간 부정성은 사변적인 실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적인 문제가 남는다. 어떻게 시간성, 부정성은 그 자체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가? 다만 거리를 만드는 부정성을 생각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거리를 만드는 가능성 그 자체, 삶 그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 때 어떻게 그 자체 내재성인 삶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성을 가질 수 있는가? 기독교는 내가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말씀le Verbe의 생성인 절대적인 삶의 내적인 과정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없는 시간성, 내재적 운동은 자기 자신으로 향하면서 절대로 자기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세계에의 의존을 배재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메트로 에크하르트의 주장을 취했다. 그는 "신은 마치 나처럼 생성된다"고 말한다. 나는 자기와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 이 내재적인 시간성에 속한다. 이 운동은 신의 내적 과정이다. 왜냐하면 신은 필연적으로 자기로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삶 안에 물론 자기가 존재한다. 자기의 자기성 안에서 자기 자신을 정념적으로 느끼고 견디는 자기-촉발이 없는 삶은 없다. 따라서 이 시간성 안에서 자기와 나의 초월론적인 자기가, 그리고 살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살은 내가 내 자신을 느끼고 견디며 내 안에 도래하는 삶의 자기-촉발의 순수한 현상학적인 물질la matière phénoménologique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삶 안에는 최초의-살Archi-chair처럼 삶의 실체인 최초의-정념Archi-pathos이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실체이며, 그것은 욕망의 실체이다. 어쨌든 나에게 속한 나의 살은 유한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기를 자기 안에 스스로 가져오지 않는다elle ne s'apporte pas elle-même en soi. 이 때, 절대적인 삶의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 안에, 살 안에 자기를 가져온다. 구원은 그것을 지적으로 파악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직접 사는 데vivre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위에 갑자기 덥쳐오는 이 힘puissance을 느끼는 데에 있다. 우리가 그것을 직접 살 때에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이 삶/생명이 우리 안에 존재할 때에만 삶/생명의 말la Parole de la Vie인 성경les Ecritures을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정신만이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 절대적인 삶은 자기를 자기 안으로 가져오며 나도 나 자신을 정념적인 자기-촉발 안에서 자기 안으로 가져온다. 삶은 본질상 정감적이다. 삶은 자기-촉발 안에서 시련을 견디고Souffrir과 향유하는Jouir 근본적인 정조들tonalités이 나타나도록 한다. 따라서 우리 삶의 다양한 정조들은 이 두개의 근본적인 정조들의 양태들일 뿐이다. 따라서 고통souffrance은 이 원초적인 시련Souffrie의 격변화/변양déclinaison이다. 『현시의 본질』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자기에의 도래, 즉 자기-시련se souffir soi-même의 원초적인 양태로서 시련을 견딤le Souffrir은 자기-향유le jouissance de soi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자기성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르게고르에서 절망은 지복으로 전향된다고 말한다.


Virginie Caruana - 그것은 지속되는가?


Mchel Henry - 그것은 삶이 있는 한 지속된다. 그것은 내가 삶에서 그것의 자기성으로 이행에 대한 질문에 대해 준 대답이다. 그런데 아버지에서 아들로의 이행은 없다. 이것은 왜 요한이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말하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다시 말해 자기의 향유 안에서 삶의 자기-완성은 자기 안에 도래하는 삶의 과정에 속한다. 이것은 최초의 살아있는 것의 생성génération으로서 삶의 자기-생성l'auto-génération이다.


Virginie Caruana - 삶의 철학은 윤리를 근거짓지 않는가? 윤리는 어떻게 진술되는가?


Michel Henry - 우리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윤리를 취한다면, 모든 윤리는, 그것이 실천과 연관되는 한에서 문명과 문화와 더불어서 시작하기 때문에, 윤리는 우선 지속subsistance을 만족시킬 필요와 관계한다. 나의 최초의 대답은 나의 책 맑스에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서 윤리는 필요의 정당화로서 정의된다. 그것이 함축하는 모든 완성의 양태들을 포함해서.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이다. 노동은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맑스가 노동이 인간에 대한 착취를 동반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말이다. 따라서 윤리는 세계의 중요한 문제들을 고려하자마자 시작된다. 나의 두 번째 대답은 윤리의 토대와 관계하는 것으로 그것은 문화의 창조와 관계한다. 왜냐하면 필요의 만족은 최초의 지반 위에서, 사랑과 같은 이름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서도 욕망은 객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은 삶의 내적인 것 안에서 신체적인 주체성 안에서 자신의 기획 위에서 완성된다. 노동자가 공장에 갈 때, 그가 공장에 간다. 그의 주관적인 신체가 일을 하며 그의 주체성은 한 발도 그를 떠나지 않는다. 『야만』에서 나는 이 문제를 다뤘다. 나의 세 번째 대답은 기독교의 윤리와 관계한다. 만일 종교가 삶에서 초월론적인 자기의 내적 관계 안에 존재한다면 이 관계는 어떤 역사를 가진다. 그 관계는 변화된다. 성경 안에서 아브라함의 시대에, 이 관계는 숭배와 계약alliance이었다. 이어서 선민은 우상이 된다. 선민은 사치를 실천하게 되고 힘과 돈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진정한 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윤리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약이 깨지고 그것이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선 그것은 모세의 법이고, 이어서 바울의 비판은 어떻게 이 법이 무능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삶의 사랑 안에 있는 삶의 힘만이 절대와의 관계 안에서 인간을 다시 세울 수 있다.    


Virginie Caruana - 『내가 진리다』 이후의 당신의 작업의 방향은 무엇이었는가? 이상적인 현상학의 현재의 의무는 무엇인가?


 Michel Henry - 내가 얼마 전에 끝낸 책은 '육화'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의 살 안으로의 도래이다. 여기서 나의 전망은 멘느 드 비랑에 대한 나의 작업과의 관계에서 많이 변형되었다. 어휘는 전적으로 변화했으며 내가 질문하는 일련의 역사적인 용어séquence는 요한 복음과 교회의 사제들 등등의 용어들로 이것은 근대의 신체에 대한 담론보다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살의 현상학 혹은 살의 고고학을 하는 것이다. 즉 삶의 살로의 도래를 밝히는 것이다. 나의 현상학은 그리스 이래로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다른 많은 현상학자들이 의존하는 고전적인 개념을 고발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경험에 대해 반성하고자  하면서 나는 나의 전제들을 타자에 대한 질문에 적용했다. 왜냐하면 이 지점은 현상학과 철학이 내가 보기에는 성공하지 못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삶의 현상학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시험했다. 그리스도의 신비한 신체를 기억하고, 바울을 불러내서 내가 맑스에서 했던 것을 기독교에서 시도했다. 

나의 삶의 현상학은 다른 삶의 현상학, 다시 말해 내가 나의 개인적인 진실이라고 믿었던 삶의 현상학의 현전에서 발견된다. 나는 이미 삶, 자아, 주관적인 신체, 살에 대해서 연구했다. 어쨌든 나는 살의 현상학이 아니라 육화의 현상학에, 자아의 현상학이 아니라 자아 이전un avant moi의 현상학에 직면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자아가 자아 안에 도래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한 이 책을 생각했다. 이 책은 근본적인 현상학에 대한 것으로 우리 삶의 앞서서 오는 것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 안에 존재하는 것에 의존한다. 이런 강독은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말해 주체 이전, 자아 이전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한다. 육화는 "살 이전avant la chair"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이전의 나의 모든 연구의 성과들을 종합한다. 나는 우선 기존의 현상학에 나의 것을 놓으면서 그것의 전복에 전념했고, 다음으로 살의 현상학에 그리고 이어서 육화의 현상학에 전념했다. 삶, 그것은 내재성이며, '...안의 현전présence-dans'이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것le vivant 안에 삶의 흔적들이 아니라, 절대적인 삶이 있다. 이것은, 절대적인 삶이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는 것에게 준다는 의미에서, 살아있는 것에 앞서 온다Elle vient avant lui en ce sens qu'elle le donne à lui-même. 그런데 그 자신lui-même[살아있는 것]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기 전에, 일종에 이 자기-증여auto-donation 안에 존재한다. 이것이 나의 테즈이다.

다른 한편 나는 일련의 역사적 단계로서 영혼과 신체의 이원론에 무지한 유대-기독주의와 플라톤주의와, 즉 이원론에 의존하는 그리스의 철학의 충돌의 계기를 선택했다. 이러한 거대한 충돌에 대한 분석은 나의 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플라톤적인 기독교인으로서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자들로 요한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씀이 살이되었다"라는 요한의 이 말은 반대로 나를 즐겁게 했다! 나의 반성은 따라서 『물질 현상학』의 연속성 안에 자리한다. 왜냐하면 그 책에서 나는 삶의 실체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 삶의 실체는 후설이 "인상"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래서 후설은 수학적인 판단 의식도 인상을 가진다고, 게다가 본래적인 인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본래적인 인상은, 최초의-자기인 최초의-살 안에서, 즉 말씀 안에서, 절대적인 삶의 정념적인 자기-증여이다. 후설에서 본래적인 인상이 시간 안에서 도래하는 한에서, 인상은 미래로부터 와서, 즉각적으로 과거로 미끄러지는 이상적인 한계일 뿐인 현재에 도달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어떤 "살아있는 현재"도 없다.

나의 작업은 계시 안에서 최초의-살, 최초의-정념, 즉 사랑의 살을 알아차리기 위해, 계시의 순수한 '현상학적인 물질'의 탐구로 향한다. 사랑은 공허한, 형식적인 시선으로 환원될 수도,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로 던져질 수 없다. 최초의-살은 삶의 두께이다. 이런 이유로, 최초의-살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최초의-살은 헤겔, 사르트르의 부정성 안에 뿐 아니라 지향성 안에 거주한다. 현시의 본질에는 하이데거가 키르케고르에서 빌려온 불안의 개념에 대한 비판이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의미를 전적으로 왜곡한다. 이런 의미에서 『육화, 살의 철학』에서 내가 에로티즘에 대해 쓴 것들은 키르케고르의 이름에서 하이데거의 불안에 대한 비판이다. 키르게고르에서 불안은 시간과 이행에 의해 설명되지 않으며, 세계 안에 자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영원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한 "도약saut"이기 때문이다.

왜 고고학인가? 앞서 오는 것이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철학이 변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인문학의 고고학이 아니라, 살의 고고학이다. 우리 자신의 어느 것도 객관성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안에는 삶이 없기에 - 이 전언은 때때로 아주 어렵게 전달된다 - 우리는 세계의 존재자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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