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존재의 범주로 해석되는 부정성
- 이 장에서 부정성이 어떻게 존재의 범주로 승격하는지를 앙리는 보여준다. 부정성은 단순히 방법론적인 절차도 존재적인 행위도 아닌 "존재론적인 본질"의 자격으로 존재의 범주, 말 그대로 모든 존재를 명령하는 것이다.
앞장에서, 존재의 내적 분리는 존재의 현상의 열로의 승진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이 분리는 다름 아닌 부정성의 작업이다. 부정은 결정된 작용을 지시하지도 과정을 혹은 존재적인 행위를 지시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본질이다. 존재가 자신 안에 본질적인 구조의 이름으로 부정성을 지니는 한에서, 존재는 이원론으로 보내지는 것처럼 보인다. 부정성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에 대립하는 것이다. 부정성은 존재와 더불어 태어난다. 부정성은 존재의 분리의 조건이다. 부정성은 이어서 현시의 가능성을 근거짓는 것이다. 이 부정의 작업은 삶이 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은 자기를 현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성의 작동에 의해서 존재는 있는 바의 것이고, 주어진다.
이런 부정성은 주체의 본질이기도 하다. 주체는 자신의 본질 안에 순수하고 단순한 부정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주체는 두 부분으로 단순히 분리된다. 이 분리 때문에 주체는 우리의 인식의 기원이다. 부정성은 밤의 무의식 안에 "내적 구분"을 도입하고, 이 구분 덕분에 지식의 빛이 빛나는 공간이 열린다.
헤겔이 말하듯, 절대는 다만 실체가 아니라 주체이다.* 이것은 그 안에 부정성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자리는 부정성 그 자체가 산출하는 것으로 부정성의 인식의 가능성을 근거짓는 이 열림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행위에 의해서 부정성은 절대적인 동일성에 균열을 만들고, 부정성은 이 존재가 나타나는 것을 허락하는 거리를 설립하고, 부정성은 존재가 현상으로 존재하도록 한다.
부정성이 절대 한 가운데 자리하기 때문에, 절대는 변증적인 운동을 낳는다. 아니 차라리 부정성은 이 운동 그 자체이다. 변증적 운동은 부정성이 동일한 존재를 밀어내는repousse 작동에 의존한다. 이 거부의 작용 안에서 부정성은 존재를 빛 안에서 자기와의 거리에서 설립한다. 왜냐하면 부정의 작업인 이 거리의 설립에 의해 동일한 존재 - 그 자체 빛을 결여한 존재 - 는 "현상"이라는 새로운 조건 안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변증법은 존재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변증법의 구조는 현상, 헤겔이 이해하는 현상의 본질적인 구조와 다른 것이 아니다. 경험의 가능성은 변증법의 사유에 앞선 본질 안에서 자신의 기원을 발견하지 않는다. 반대로 변증적 사유는 현시의 본질인 절대의 존재론적인 실재와 다른 것이 아닌 경험의 가능성 위에 의존한다. 하이데거가 지적하는 것처럼( H, 169-170), 헤겔은 변증적인 경험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본질로부터 변증적인 것을 사유한다. 변증의 구조에 대한 이해는 그것이 현상의 본질의 이해로 이어질 때 설립된다. 변증의 운동에 의해 부정은 긍정에 이른다. 그런데 이 두 긍정과 부정의 계기는 그 자체 추상이다. 그것들은 동시에 그들의 실재와 그들의 본질 - 현시와 다른 것이 아니며,부정성인 본질 - 을 발견한다. 현시된, 주어진 존재의 조건하에서 존재의 현시는 동일성의 무의식적인 밤 안에서 잠겨있는 순수하고 단순한 존재의 부정을 함축한다. 존재의 부정은 자신의 토대를 부정성의 작동 그 자체 안에서 발견한다. 부정성은 순수한 존재를 밀어내고 그것을 거리를 가지고 유지하는 현상학적인 지평을 연다. 이 존재의 부정은 따라서 빛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융기와 더불어 존재하며, 현상으로의 승진과 더불어 존재하며 - 결국 자신의 정립과 긍정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어서 부정성은 부정성으로서 스스로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그가 부정한 것의 긍정과 혼동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시된 존재의 현시와 혼동되기 때문이다. 부정의 자기-부정은 긍정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은 자신의 토대를 현시의 본질 안에서 발견한다.
부정성은 현시의 본질이다. 부정성은 존재가 현재하는, 거기에 존재하는 조건이다. 존재는 우리에게 그것이 부정되는 한에서만 현전으로서 주어진다. 존재의 변증적인 제거는 그것의 고유한 도래와 일치한다. 그것은 존재를 우리 옆에 유지하는 것이며, 존재를 예비하는 것이고, 존재를 보존하는 것이다. 헤겔의 지양의 애매성은 가장 엄격하게 존재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의미에 일치해서, 부정성은 본질이며, 이 본질 덕분에 헤겔은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초월성의 작업을 생각하며, 그것에 본질적으로 연결된 유한성의 본질을 사유한다. 존재 안에서 변증적 제거의 본질에서 살아남는 것은 규정된 존재의 사실이다. 부정성의 아님은 존재의 존재 그 자체를 구성한다. 이러한 구성 안에서 존재는 우리에게 규정의 형식하에서 나타난다. 부정성의 본질, 현시의 본질로서 이해된 본질은 우리가 규정의 본질을 사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규정은 부정의 작용에 의해서 현시된 존재 그 자체의 구조와 다른 것이 아니다. 부정성은 그것이 존재를 초월론적인 공간 안에 - 그 안에서 부정성은 존재가 자기를 전개하며, 현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공간 안에 - 놓는 한에서 존재를 규정한다. 이 이 최초의 존재론적인 영역 안에서 나타나는 존재자entité는 그 영역과 절대로 동등할 수 없다. 이 장은 그 자체 이 존재자를 초월한다. 이 초월은 아주 근본적이 때문에 이 존재자의 변증적인 제거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제거의 행위 그 자체 안에서, 그것에 의해서, 이 존재자는 규정되고 유한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존재자는 거기에 존재하고, 현전 한에서 우리 곁에 머무는 방식을 발견한다.
부정의 본질은 현전의 본질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특수한 존재자를 부정하는 부정성은 이 존재자와 다르지 않다. 부정성이 그것을 존재하게 한다. 부정성은 이 존재자가 현재하는 한에서 자신의 본질 그 자체이다. 부정성은 이 거기-존재être-là [오래전부터 쓰이던 용어로 Dasein을 의미한다]- 거기에 존재하는 한에서 - 의 존재이다. 초월적인 이 존재자 자신의 현전 안에서 부정성 그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존재자는 변증적으로 자기를 스스로 제거하는 행위이다. 부정성은 초월적 규정을 구성하는 범주이며, 부정성은 이 규정의 요소이다.
부정성을 존재론적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에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부정성과 그것이 부정하는 순수하고 단순한 존재 사이에 우리가 존재론적 차이라고 규정하는 차이가 존재한다. 부정은 말하자면 그 자신의 본질 안에서 이 차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차이는 동일성에 낯선 것이 아니다. 차이는 자신을 존재라고 주장하는 동일성의 본질 그 자체이다. 동일한 존재의 현시는 그 자신 안에서 이 차이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 차이는 자신의 본질에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차이에 의해서만, 동일한 존재는 동일성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차이는 동일성의 토대이다. 이 토대 위에서 동일한 존재는 그 안에서 규정의 본질적인 특질과 더불어 자신을 전개한다. 이 규정의 존재는 부정적인 본질이다. 부정성과 동일성은 거의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행위l'acte에 의해 동일성은 규정 안에서 구체적인 삶에 이르며, 이 행위는 부정성 본질이 표현되는 이 행위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 헤겔은 "구체적인 삶의 규정은 그 자체 자신을 해소하는 작용"( PhE, I, 48)이라고 말한다.
존재는 거기에 존재하는 한에서만 실재적이다. 그 과정에 의해서 존재는 실재적이 되며, 그 과정은 이 부정성의 본질 안에서 자신의 기원을 가진다. 부정성이 존재에 거기-존재 안에서 실재를 부여하는 것은 외재성이 아니다. 거기-존재는 그 자체 안에 부정적인 것을 포함한다. 부정성은 본질이며, 실재와 거기 존재하는 존재의 삶이다. 거기-존재는 부정성과 분리되지 않으며, 말하자면 개념과 분리되지 않는다. "거기-존재는 자신의 개념 안에 존재한다"(PhE, I, 40). 부정성은 존재의 본질이다. 존재가 자신의 본질을 부정성 안에서 발견하는 한에서 존재는 현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며, 존재는 거기에 존재한다.
존재에 부정성의 본질적인 내재성(존재의 외재성은 존재 안의 부정성의 내재성의 결과일 뿐이다)은 존재론적인 동기를 구성한다. 여기에 헤겔이 형식주의에 가하는 비판의 의미가 존재한다. 헤겔에게 사유의 본질은 부정성이다. 이어서 이 사유는 그것이 사유하는 내용에 외적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만일 형식이 내용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구체적인 내용에 외적인 형식주의를 적용할 수 없다. 사유는 "낯선 사물로서 내용을 다루는 작용"이 아니다. 사유는 내용과의 관계에서 그것의 거의 낯설지 않기 때문에ㅡ 사유의 작용은 거의 변증적으로 자신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내용의 작용 그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지식의 활동은 이 내용 안에 전적으로 침몰한다. 정신 현상학의 서문은 헤겔의 체계를 지배하며, 논리학의 테제들의 도움으로 주체와 대상의 외적인 대립이라는 개념화를 제거한다. 헤겔이 주체와 대상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이해하고, 그 내용 안에 자기의 내재성을 이해한 것은 바로 변증법의 존재론적인 해석의 빛에 의해서이다.
변증법은 우리에게 변증적인 과정 전체, 즉 전체성 그 자체만이 실재적이라고 알려준다. 전체성에 의해 실재le Réel를, 다시 말해 자신의 현전 안에서 존재 그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 유일하게 구체적인 이 전체성과의 관계에 의해 동일성과 부정성은 추상적인 용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부정성의 제한이라는 언급이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 부정성은 본질이 아니며, 부정성은 유사-존재론적인 본래성일뿐이다.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의해 새롭고 자율적인 존재론적인 영역을 여는 것과 멀리, 부정성은 실제로 존재의 존재론적인 영역의 계기일 뿐이다. 부정성은 본질이 아니라, 범주이다.
여기서 우리가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헤겔의 이원론적인 주장이다. 존재의 분리 division, 존재가 현상으로 승진하기 위한 조건은 우리가 외적으로 대립시킬 수 있는 실재를 두 개의 본질로 분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분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종류의 존재의 정립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자연적 존재와 인간적 존재의 분리와 같은 것이 아니다. 분리는 존재의 조건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리에 의해 정립되는 것만이 유일하고 동일한 존재이며, 그것은 "초월적 존재"의 탐구라는 틀 안에서 명명된다. 자신 안에 부정성을 포함하는 본질은 바로 이 존재의 정립이다. 이 정립은 존재에 외적인 것이 아니며, 존재와 다른 것이 아니며, 임의적으로 존재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한쪽에 실체substance가 있고 다른 쪽에 주체Sujet가 있는 것이 아니다. 헤겔은 실체 그 자체는 "그 자체 안에서" 주체라고est 말한다. 주체는 고유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체의 존재이다. 실재가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인 관념론을 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반대로 정신, 혹은 주체는 그 자체로 절대로 자신의 고유한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종종 헤겔의 자신의 변증법을 자연의 영역에까지 연장했다고 비난한다. 힘과 삶의 변증법은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현상학 안에서 의식의 변증법을 예비한다. 이것들은 사실 정신적인 영역으로 이것들이 설명하고자 하는 이 영역들, 자연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의 "일원론"의 주장을 환원하기 위해서는 변증적인 본질을 인간존재에 대한 해석과 그것들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제한하는 "이원론"을 대립시키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특히 코제브의 해석이기도 하다). 앞선 분석들은 왜 이런 비판이 헤겔의 사유에 부수적인지를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헤겔에게는 존재의 두 영역이라는 것은 없다. 다시 말해 한 영역이 변증적인 본질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그런 영역은 없다. 순수하고 단순한 존재는 거의 이 본질을 회피하지 않으며 반대로 그 안에서 존재는 자신의 존재의 토대를 발견한다. 동일성은 차이이다. 동일성은 마치 부정성이 존재의 다른 영역과 관계하는 것처럼 그것 밖에 부정성을 놓지 않는다. 부정성이 동일한 존재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면 이 부정성은 어떤 존재의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가? 초월적 존재의 영역은 헤겔주의가 아는 유일한 존재론적인 영역을 구성하며, 부정성은 이 존재의 영역에 전혀 낯설지 않으며, 반대로 부정성은 이 존재의 본질과 토대를 구성한다. 부정성은 다시 한 번 반복하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 실재의 존재를 본질로서 이해된 부정성으로부터 해석하는 것은 헤겔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이해에서 전적인 실수를 저질르는 것이다. 부정성은 본질이 아니다. 그것의 존재의 범주이다. 이런 자격으로 부정성은 인간 실재의 존재를 다룬다. 그런데 부정성 위에 근거지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인간 존재에 어떤 특권도 부여하지 않는다. 인간은 헤겔주의 안에서 고유한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 헤겔에게 나중에 하이데거에서, 같은 궁극적인 이유에서, "다른 존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안의 존재의 토대가 문제인 경우 우리는 어떤 가치도 가지지 않는다". 헤겔이 말하듯, "우리는 무이다". 그런데 자연 또한 무이다. "어둠은 무이고, 공간과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모든 것이 무이다"(Realphilosophie d'Iena, Oeuvres complètes, XX,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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