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대담, 보이지 않는 것과 계시

aurorepark 2012. 1. 22. 08:32

아래는 1993년 잡지, Autrement n° 12, La curiosité, vertige du savoir, <호기심, 지식의 현기증>에 실린 앙리와 세비스티앙 라브뤼스와의 대담, "L'invisible et la révélation보이지 않는 것과 계시"라는 제목을 가진 대담의 번역이다(이 글은 그의 대담들을 모은 Entretiens (Sulliver, 2007(2005)), 97-112쪽에 해당된다.





위의 조각은 프랑스 남쪽 깊은 산중, 산길을 둘러둘러 가다보면 이르는 Conques라는 작은 마을에 보물처럼 숨어있는  성당 "Sainte Foy"의 Tympan의 일부이다. 이 부분은 전체 Tynpan의 태두리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관심없이 보면 잘 안 보인다. <호기심le curieux>이라는 제목을 가진 것으로 같은 모습들이 연이어서 전체 Tynpan을 두루고 있다. 





인식의 활동인 한에서 보고자 하는 욕망, 즉 호기심이  (그 욕망의) 분산dispersion에 의해서 위협받을 뿐만 아니라,  예술과 윤리와 종교와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의 거대한 영역을 한 쪽에 남겨 놓을 때 - 여기서 후설의 희망, 정신의 보편적인 주체성의 희망, 마찬가지로 헤겔의 절대정신의 희망은 거부된다 -, 호기심은 그 본래적인 원리, 즉  칸딘스키가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확실한 것이다" - 우주는, 우리의 삶이 역동적이고 정념적인 삶인 한에서, 우리 삶 안에 자신의 실재를 가진다 - 라는 원리로 되돌아간다. 보이지 않는 것만이 호기심을 정당화할 수 있다.



 


Sébastien Labrusse - 보통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우리는 인식이 태어나는 것은 호기심, 즉 지식에 대한 욕망과 함께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칼은 지식을 심화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불신한다. 그리고 그는 호기심은 헛되고 무용하다고 선언한다. 당신은 호기심 - 어떤 호기심 - 이 지식의 실질적인 모터라고 생각하는가?


Michel Henry - 나는 기꺼이 호기심은 과학science의 실질적인 모터라고 믿는다. 더욱이 이것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을 반성해 보면, 과학은 결국 그것이 아닌 다른 것, 그것에 앞선 어떤 것을 모터로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동기가 호기심이라고 말하는 것 - 그것이 어떤 종류의 호기심인가에 문제로 곧 돌아갈 것인데 -, 그것은 과학이 우리 삶, 그것의 어떤 특질들에 그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호기심은 삶의 한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은 자기 자신 안에 토대를 가진 듯이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설립하는 모든 것을 정당화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성적인 활동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전제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적인 전개이다. 지식savoir으로서 인식을 호기심에 연결하는 것은 지식이 자신과 다른 어떤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예비적인 어떤 것 un préalable이고, 이 예비적인 것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비록 지식이 거의 의심스런 suspecte호기심의 형식 아래에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이 사실은, 호기심이 삶의 운동인 한에서, 이 자율적이고 객관적인, 더 나아가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지식은 우리가 아직 말하지 않은 어떤 것, 즉 삶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식의 욕망인 한에서, 다시 말해, 봄voir의 욕망인 한에서 - 왜냐하면 지식은 보는 것이기 때문에 - 호기심은, 따라서 지식과 다른 것으로부터 나온다. 지식에 앞선 지식에 대한 욕망이 있다. 이 호기심은, 비록 그것이 애매성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과학적 지식만이 세계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지식은 우리의 실존에 기입된다. 이것은 나에게 아주 본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과학이 되는 이 지식의 욕망는 맥락contexte과 떨어질 수 없다. 다른 것이 있으며, 지식은 파스칼이 말한 그 맥락과 상관함이 없이는 독립적으로 자신을 전개할 수 없다. 결국 이 맥락에 궁극적인 정당화justification를 요구함이 없이는 자신을 전개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이미 호기심의 윤리학의 출발점이 자리한다.


SL -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한 장에서 호기심을 다룬다. 여기서 호기심은 "존재자에 대한 놀라운 통찰"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더욱이 하이데거는 "동시에 모든 곳에 있으면서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는" 호기심의 "역마살(bougeotte)"을 비난한다. 주의attention에 방해가 되는 이러한 분산dispersion이 호기심에 내적으로 속하는  것이라면, 호기심은 우리가 "명상적인 태도attitude contemplative"라고 부른 신비주의적 태도와 반대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다자인의 일상성으로의 추락Verfallen의 한 예로 수다(§ 35)에 이어 호기심(§ 36)을 다룬다. 그리고 § 68에서 호기심의 시간성을 다룬다. "존재자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학, 지식에 이르는 순수한 동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타우마체인", 놀라움, 혹은 경이를 말한다.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는, "역마살" 혹은 "무정주성Unverweilens /l'incapacit" de séjourner(Martineau)"이라고 옮겨지는 것(이기상 번역)으로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아무 것에도 없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태는 "분산" 혹은 "산만함 Zerstreuung / dispersion / distraction"(이기상)이라고 불린다. 파스칼의 disvertissement을 상기시키는 호기심curiosité / Neugier 은 그  어원에서 curiositas, cura로 근심, 즉 souci / Sorge(curare)와 같은 어원을 가진다. 그런데 그 둘의 차이는 하이데거에서 전자가 단순한 시선의 파노라마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히는 것이라면, 후자는 다자인의 고유한/진정한 시간성 안에서 세계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MH - 하이데거가 호기심을 다루면서, 그것을 일종의 이곳에서 저곳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도약하는 것으로 분석했을 때, 그는 호기심의 문제를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호기심은 오늘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오늘의 시간의 호기심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메디아적인 세계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우리는 동의한다. 그런데 현재성actualité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제가 아닌 것이며, 내일이 아닌 어떤 것이다. 이 현재성 안에는 모든 역사적 깊이 밖에서, 모든 유지와 도달 밖에서, 모든 연속성 밖에서 솟아나는 점적인 용출이 있다. 여기서 이미지의 현재성은 다만 한 순간 정신을 차지하기 위해서만, 그리고 곧 이어서 사라지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순간성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 현재성은 무의미성insignifiance이라는 두 번째 성질을 드러낸다. 무엇인가 도래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보고, 무의미한 것처럼 그것은 즉각적으로 다른 것에 자리를 양보하고 사라져야 한다. 근본적으로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도약하는 이런 종류의 시간성은 호기심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의 토대를 제공한다. 물론 우리 시대의 인간의 호기심에 관한한 하이데거가 옳다. 주의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 호기심은 다른 대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만 주의를 요청한다. 따라서 봄 그 자체 안에 내적 모순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봄은 그가 보는 것에 진정으로 관심이 없으며, 그것을 분석하는 대신에 즉각적으로 같은 운명을 따르는 다른 것을 보기 위해 이것을 포기한다. 이런 호기심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모든 악을 말할 수 있다.


SL - 그런데 여기에  하이데거에게 고유한 어떤 비판이 있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가 호기심에 건네는 모든 전통적인 비난이 아닌가?  


MH - 그렇다. 이것은 파스칼적인 주제와 겹친다. 사실 이런 호기심의 특수성은 항상 존재했었다. 따라서  무엇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곧이어서 이것을 포기하는 이런 종류의 호기심에 대한 분석을 심화해야 하며, 이런 호기심은 결국 자기로부터의 도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호기심은 내가 아닌 어떤 것, 사건과 항상 연관된다. 그런데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어떤 것과 연관된다는 것, 외재성 안에서 찾는 것, 그것은 구조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의 한 영역과 분리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익/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 어떤 영역을 위해, 자신의 고유한 삶을 박탈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음 ne pas s'occuper soi-même"은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절망이다. 또한 호기심은, 그것의 특징들 중의 하나가 항상 외부로 향하는 것인 한에서 - 그리고 여기서 봄 그 자체게 문제가 되는 한에서 -  실제로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어떤 것으로 이끄는 호기심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다른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기 때문이다. 호기심은 우리를 외부로 향하게 한다. 그런데 그것은 세계가 아닌 어떤 것, 우리의 삶 그 자체로부터 등을 돌리게 한다. 


SL - 우리는 더 나아가 우리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이 사실이 호기심의 기능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  


MH - 그렇다. 이 기능은 어떤 가치를 가진다. 즉 세계 안에 도래하는 것에 주의하는 것이다. 바로 이로부터 호기심은 본질적으로 애매하며, 이 가치는 근본적인 반-가치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확실히 관심이 있는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더 중요한 어떤 것, 내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에 무관심한 것이다. 또한 자기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분산이 호기심에 본래적인 것이라면, 호기심을 주의에, 호기심보다 상위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과 보이는 것에 속하는 주의에 대립시켜야 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주의는 호기심과 반대로 의향une visée이며, 그것이 보고자 하는 것에 자신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의는 보이는 것의 진정한 현전화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 현전화는 명상 혹은 분석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호기심과 마찬가지로 주의, 이 둘은 모두 봄의 양태이다. 다만 주의가 봄의 진정한 양태하면 호기심은 의심스런suspecte 양태이다. <야만>을 읽은 후에 한 위대한 물리학자는 나에게 자신은 평생을 미립자 연구에 전념했으며, 이것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매혹적인 것이었으나, 그 동안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고한다. 따라서 봄의 세계 안에서, 이 세계가 보인 것 안에서 그 자체 주어지는 한에서, 침묵 아래 지나간 것은 바로 단독적인 자기로서, 본질적인 것으로서 개인이다.


SL - 만일 과학이 인간의 자연적인 호기심에 의해 진보한다면, 지식의 의지 안에는 인류에 대한 어떤 위험이 있지 않은가? 사실 <야만>에서  당신은 문화의 위기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우선성과 연관해서 문화의 파괴를 전개했다. 이러한 문화의 죽음, 즉 예술과 윤리와 종교의 죽음이 호기심의 죽음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 왜냐하면 지식들은 분산되고 전문화되기 때문에 - 당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MH - 그 대답은 이미 앞에서 말해졌다. 문화의 위기는 지식이 산출되는 호기심을 왜 지속하도록 내버려 두는가? 사물의 본성 안에는 인간이 따를 수 있는 두 개의 길이 있는 듯이 보인다. 인간은 호기심의 길을 따라서 전문적 지식을 전개하면서, 우리가 만나는 예술, 윤리, 종교와 같은 다른 길을 한 쪽에 남겨 놓는다. 쉬메르나 이집트와 같은 고대의 문명 안에서 지식의 전개는 문화의 개화와 조화를 이뤘다. 우리의 현재의 문명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에 참여하는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 각각 개별적인 과학적 지식의 성장과 점점 기우는 문화와의 분리라는 역설에 직면한다. 이 역설은 문화가 호기심, 지식 그리고 봄의 영역과 다른 곳에서 전개될 때에만 사라질 수 있다. 문화는 객관적인 지식과 다른 질서에 속하며, 이 후자의 집중화는 삶의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을 분리한다. 그런데 문화는 객관적인 지식에 의해 버려진 삶의 영역으로부터 일어난다. 어쨌든 봄이 던져지는 물질적인 객관적인 세계를 주제화하는 과학적인 지식과 다른 지식이 존재하는가? 그럴 경우, 그 지식은 어떤 질서에 속하는가? 바로 이것을 분석해야 한다.


SL - 오늘날 바로 그 지식이 파편화되어 있다. 철학이 더 이상 과학과 혼동되지 않으며, 또한 더 이상 신에 연관되지 않을 때, 철학이 새로이 지식의 통일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MH - 당신의 질문에 대한 한 대답이 있다. 그것은 바로 후설의 철학이다. 왜냐하면 후설은 엄격한 과학적 인식의 이상적인 합법성에 전적으로 설득되었던 사람으로, 바로 지식의 이러한 파편화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그가 잘 본 것처럼, 과학들은 그것들이 진보함에 따라서 분화되고, ...문자 그대로 각자의 영역으로 파열한다. 각각의 과학은 조각난 지식이었다. 만일 인류의 통일성 - 다시 말해 인간들 사이의 일치 - 가 지식에 의존한다면 - 이것은 일종의 요청으로,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지만 -, 인식의 통일성을 전제하는 인류의 도덕적  통일성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이 때에 지식들의 파열은 이러한 통일성에 비해 아주 심각하다. 이에 대한 후설의 대답은 만일 과학들이 산출되는 것은 "초월론적인 주체성"의 활동이라고 불리는 정신의 활동에 의해서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이러한 통일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기하학적인 형태들 혹은 추상적인 관계들이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나아가 가치와 같은 것들도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과학적 실재들을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그것들은 인간의 정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객관성을 그것들을 구성한 창조적인 작동들로 환원하는 운동을 완성하는 것은 바로 통일성의 장소 un foyer d'unité를 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과학들을 창조하는 것은 하나이며 같은 이 정신이기 때문이다. 또한 후설에게 우리가 그가 구성하는 주체성이라고 부르는 주체성에 이를 수 있다면, 이 주체성은 개인적이 아니라, 보편적인 정신의 주체성인데, 그 때 우리는 통일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인류는 정신의 창조적인 활동으로서 사유될 수 있고 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지식의 세계로부터 말하지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을 허락하는 놀라운 해답이 있다. 만일 지식들이 그것들의 객관적인 측면들 안에서 고려될 때, 그가 인식대상적이라고 부르는 것 - 즉 사유된 것 - 안에서 파열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에 인식작용적인 측면들 안에서, 다시 말해 사유하는 것, 즉 사유의 측면에서 지식들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 안에서 우리는 또한 사유의 창조적인 능력 안에서 분자로 환원된 인간-대상을 부인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재발견한다. 인간의 초월론적인 인간성humanitas은  우리가 자신을 사유작용적인 측면으로 환원되지 않고, 사유하고 창조적인 사유로 환원되지 않는 일종의 전체성으로 이해하는 이 지식의 세계 안에서 무한히 자유로운 정신으로서 구원된다. 비록 우리의 산출들이 우리에게 객관적인 것으로 놓여진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 아주 좋은 해결책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선 이 구성하는 활동은 익명적이기 때문이며, 이 활동들은 우리가 보는 것을 산출하며, 이 활동들 자체는 일종의 익명성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다른 영역으로 보내진다. 비가시적인 인식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 모든 현상학적인 방법의 문제제기가 걸려있다. 이 문제제기에 대해서, 비록 내가 현상학자라고 할지라도, 나는 아주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나의 후설에 대한 비판은 과학적인 대상들뿐만 아니라, 대상들 그 자체를 산출하는 밤의 그리고 신비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들이 감각적인 소여들을 구성하는 지각 활동이 있기 때문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 우리의 세계는 이미 다 이뤄진 세계가 아니다. 그것의 구성은 밝혀야 하는 복잡한 종합의 작용들의 활동이다. 이 때에 그 절차들을 밝히고 인식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나는 후설에 반해서 그것이 봄에 의해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선을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대신에 결국 주체로 향하게 하는 시선의 단순한 전향에 의해서 보여줄 수 있었다. 우리는 다만 보이는 세계에 대한 경험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시적인 것과 다르게 삶의 활동의 계시를 가진다. 삶은 인식의 활동에 의해서 고갈되지 않는다. 이 후자는 삶의 한 양태일 뿐이며, 그 외에 다른 많은 것들이 있다. 따라서 후설의 과학적 지식에 대한 존중할 만한 반성은 부분적인 것으로 남는다. 지식의 통일성을 발견할 가능성은 따라서 구성된, 인식대상적인 측면이 아니라, 구성하는 활동의 측면에 놓인다. 이것은 그것의 궁극적인 심급으로서 삶의 지식le savoir de la vie을 함축한다.  


SL - 이제 호기심의 윤리의 문제가 제기된다. 당신은 호기심이 윤리적인 영역 안에 자리를 가진다고 믿는가? 우리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호기심을 가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호기심은 아주 자발적인 태도 éthos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의 윤리학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이것은 호기심을 측정하고 위험할 경우 정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어떤 가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MH - 만일 호기심이 과학적인 지식을 그것에 앞선 운동들 안에 놓는다면, 우리는 호기심을 단지 지식의 연장으로 고려할 수 없다. 반대로 호기심을 과학 그 자체가 기입되는 맥락에 연결해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호기심의 주체에게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호기심은 사실 여기서 자발적인 태도로서 제기되며, 결국 삶의 운동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결국 호기심은 우리를 윤리의 영역으로 이끈다. 다시 말해 삶에 대한, 그것의 자발적인 운동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호기심은 선한 것인가? 삶의 자발적인 태도, 즉 보고자 하며, 과학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태도는 합법적인가? 누가 호기심을 평가하는가? 그런데 가치들은 호기심을 판단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가치들 그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가치들은 누가 정립하는가? 이 가치평가의 원리는 무엇인가? 이 원리는 무엇이고, 그것은 가치를 가지는가? 이것은 거대한 윤리의 문제이다. 호기심은 우선 과학적인 봄에 한정되며, 갑자기 그것의 맥락에 의해 인간성humanitas에 대한 질문들이 솟아난다.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해서 프로그래마크한 방식으로만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잠정적으로 윤리는 삶의 영역으로 보내진다고 말할 것이다. 왜? 세계 안에, 과학이 작동하는 세계 안에는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가치들이 있기 위해서는 평가가 있어야 한다. 이론적이 아닌 실천적인 이 원리는 무엇인가? 누가 평가하는가? 그것은 삶이다. 이 가치평가는 무엇에서 그 존립이유를 가지는가? 삶은 삶과의 관계 안에서 사물들을 평가한다. 삶은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의 기준이다. 그리고 이것이 양식nourriture에 의해 시작한다. 바닥에서 솟아나는 것의 수준에서 최초의 가치론적인 차별이 생겨난다. 삶의 세계의 바닥에서, 후설이 삶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에서 가치들이 있다. 그리고 이 가치들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자étant brut로부터는 설명될 수 없다. 이 가치들은 삶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 삶에 의해 제기된 가치들이 선한 것이라는 것을 지지하는 유일한 방식은 삶이 선한 것이라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고 이해하는 것이다. 삶이 선한 것이기 때문에, 삶의 평가 체계는 합법적이다. 사악한 혹은 도착적 삶la vie perverse, 혹은 니체가 "병"이라고 말하는 것을 가정해보자. 이 삶은 반-가치평가들로 진행된다. 게다가 이 삶은 가치들을 전복할 것이다. 진정한 삶의 가치들은 거짓으로 드러날 것이다. 호기심의 평가는 결국 병이 아닌 삶으로부터만 가능하다. 병든 삶은 절망한 삶일 것이고, 절망한 삶은 삶을 거부할 것이며, 삶으로부터 도망칠 것이며, 객관적인 세계, 물질적 세계에만 전념할 것이다.


SL - 금지는 위반을 부르고 호기심을 촉발한다. 최초의 호기심, 아담과 이브의 호기심으로 선과 악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호기심과 위반은 어떤 관계를 가진느가? 무엇에서 신과의 정면 대립이 존재하는가?


MH - 만일 호기심이 봄의 사실이고, 그것이 자기 자신을 믿고,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 봄이 봄을 근본적으로 회피하는 영역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할 때, 위반trangression이 있을 것이다. 비가시적인 영역이 존재한다면, 어떤 봄도 그 영역 안에서 위험을 무릅쓸 수도, 무릅써서도 안된다. 만일 봄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실폐가 정해진 폭력일 것이다. 위반은 윤리적 편견이 아니라, 그것은 순수히 철학적이고 현상학적인 질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영역이 존재하는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호기심이 저질를 수 있는 위반이 어떤 위반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이 영역이 존재한다면 - 삶이 그 영역을 드러낸다면 - 이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자 하는 의지는 위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의지는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뇌를 분해하고 뇌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은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cogitatio, 즉 자기에 대한 경험을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호기심은 신과의 대결로 이끌리는가? 삶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신을 보고하는 하는, 신을 나의 시선으로부터 내가 지배하는 것의 조건으로, 내가 전적으로 명시화 할 수 있는 것의 조건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SL - 호기심이 인간에게 어떤 위험을 표상한다면, 종교의 신비들에 대한 최상을 지식을 의도하는 헤겔적인 절대지식을 포기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이런 호기심의 위험에 직면해서 가장 이성적인 해결책을 불가지론agnosticisme인가?


MH - 절대지식의 야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헤겔이 의도하는 지식이 어떤 종류의 것이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절대지식은 의식의 지식이며, 대상적 의식의 지식이며, 그런 의식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본다. 의식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인 봄 안에서 자기 자신을 표상한다. 이런 이유로 절대지식의 헤겔적 규정은 그 원리 안에서 거짓이다. 확실히 절대적인 지식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상적 의식의 구조인 헤겔의 구조에 복종하지 않는다. 여기서 의식, 지속적으로 대상을 가지는 의식, 이 대상은 의식에 지속적으로 비정합적이며, 결국 의식은 자기 자신인 정합한 대상을 찾는다. 그런데 의식은 이 대상을 다시 절대적인 대상으로 발견한다.  절대가 문제인 경우 절대적으로 거짓인 인식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모든 헤겔의 변증법은 실폐에 도달할 뿐이다. 게다가 만일 헤겔이 절대지식에 도달한다면, 이것은 역사의 종말일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계속된다...이 지식은 고전적인 의식, 후설의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기도 한, 이 의식이 획득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을 가지듯이 절대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종류의 지식은 지배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지식이 봄에 맡겨질 때, 봄에 보인 것에 대한 지배가 있기 때문이며, 봄은 보인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보인 것은 그것을 보는 봄이 있기 때문에 보일 뿐이다 - 이것은 인간의 자리를 인식의 주체로서 간주하는 데로 이끈다. 인식이 봄으로 이해되자마자  주체가 있다. 주체는 무엇을 아는가? 대상들. 내가 내 앞에 놓은 대상. 또한 사르트르가  인식의 도식을 따라서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를 기술할 때, 시선들 사이의 투쟁은 각각의 시선이 타자를 자신의 시선의 대상으로 환원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시선에 의해 보는 것과 보이는 것과의 구조에 복종하는 지식 안에  어떤 전능 tout-pouvoir이 잠재적으로 포함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지식은 지배의 지식이며, 과학은 지배의 기술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지식에 가하는 비난은 또한 호기심에도 적용되며, 이러한 비난은 어떤 유형의 지식을 전제한다.


SL -  <현시의 본질>에서 당신은 직관적이고 절대적인 인식에 대한 생각을 전개했다. 메트르 에크하르트는 게다가 이러한 인식의 주장자들 중의 하나로 소개된다.  이 때, 본질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과 당신이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필연적 불가지론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 


MH - 이 화해는 두 종류의 인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즉 하나는 봄의 인식la connaissance du voir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지식le savoir de la vie이다. 이 두 지식의 본질이 서로 다르다면 -  본질적인 것이 문제이고, 본질적인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의 본질은 상대화된다. 이것은 후자를 실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이 가능하고 삶이 자기의 고유한 운명에 복종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사물들을 인식하고 조직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지식은 본질적인 것의 길을 열지 않는다. 이 인식이 우리의 본질적인 것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생물학적이 아니라, 초월론적인 삶인 한에서 우리인 바의 것에 대해 우리에게 충고하는 객관적인 지식의 가능성이 문제일때, 불가지론이며, 회의주의이다. 왜냐하면 이 지식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삶을 다루며, 삶을 분자로, 뉴론으로 환원하면서, 이 지식은  자기도 모르게 생물학적인 삶만이 있다고 말하는 이데올로기로 변형된다.


SL - 윤리적 호기심은 당신이 과학의 객관적인 지식과 대립해서 <야만>에서 "삶의 지식"이라고 부른 것을 선호하는 데 있지 않은가? 당신이 "삶의 지식"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자세히 밝혀줄 수 있는가? 그것은 종교적 삶의 유형인가?


MH - 윤리적 호기심이란 무엇일 수 있는가? 그것은 삶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연결된 것일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과학적인 지식의 원천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지식과 연결된 것으로 호기심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전적으로 다른 호기심의 개념으로 나아가야 한다. 호기심의 새로운 개념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우선 삶의 지식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자. 삶의 지식은 그것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의 원천에 속하며, 삶을 가능하게 하며, 삶과 일치하며, 삶의 본질이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다. 예를 들어, 생물학에 대한 연구를 위해 당신은 인쇄된 책을 읽는다. 이것은 당신이 문자들을 보고 그것을 읽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감각적인 지식에 당신이 처해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문자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한에서 다른 질서의 지식이 도래한다. 그리고 여기에 의미를 형성하는 의식의 지식이 개입한다. 의미를 형성하는 능력은 다만 지각의 능력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은 사물의 부재 안에서도, 그것을 표상하지 않고도, 이미지와 다른 방식으로 사물의 의미와 같은 신비로운 존재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의 지식인 하나의 지식을 가진다 - 의식은 의미를 창출하고, 이미지를 창출한다. 생물학 논문을 읽는 것은 감각적 지식과 지적인 지식이 독서 안에서 작동하는 그런 것이다. 단어들 안에 포함된 의미들에 대한 지적인 파악인 그 지식은 의식의 지식이다. 그 노력으로 피곤해진 독자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도서관을 떠날 때, 보다 단순한 지식, 원초적인 지식 - 이미 감각적인 인식과 지적인 인식 안에서 이미 개입한 지식 - 이 그에게서 일어나고 형성되기 시작한다. 어떻게 우리는 일어나고 걷고 밖으로 나가고 등등 모든 것을 행하는가?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도 이런 어려움에 부딪쳤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생각하는 사물이다" ㅡ une res cogitans. 그런데 cogitatio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은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이 cogitatio와 함께 우리는 이미 삶의 지식 안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정념론>에서 데카르트는 내가 꿈을 꿀때, 꿈에서 내가 보는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데카르트가 전통 안에서 다시 취하는이 꿈의 논의 - 그런데 그는 이것을 근본화한다 -는 내가 보는 것이 감각적인 봄, 더 나아가 지적인 봄, 예를 들어 2+2=4라는 것을 보는 봄과 관계하는 한에서 거짓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데에 있다. 이성적인 진리의 명증성이 반박된다고 가정하자.  내가 2+2=4라는 것을 볼 때, 만일 영악한 천재가 나를 속인다면, 모든 것이 꿈이라면, 확실하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잔여 ce qui doit rester는 보는 것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꿈 속에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 두려움은 사실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확실한 유일한 것이다. 더욱이 이 두려움이  정확히 내가 그것을 그와 같은 것으로 느낄 때  진실이며, 정확히 내가 자신을 그와 같은 것으로 느낄 때 사실이다. 따라서 전혀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대한 자기에 대한 계시가 있다. 이 두려움의 자기-계시auto-révélation는 정념이며, 봄에 전적으로 독립적인 초월론적인 정감성이며, 이것은 삶이다. 삶은 거리 없이 직접적으로, 어떤 봄도 없이 자기 자신에게 계시된다. 이 직접성은 개념이 아니며, 삶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지는 그치지 않는 감정이다. 인식의 양태들을 포함해서 삶의 모든 양태들은 이 질서에 속한다. 나는 이것을 근본적인 현상학이라고 부른다.


- "근본적인 현상학", 그것은 "현상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학이 의존하는 질문 그 자체를 전복해서 모든 것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현상학을 근본화하는"(<물질 현상학> 서언에서) 것이다. 이 근본성(radicalité)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남 그 자체, 현상학의 "어떻게", 현상의 현상성을 질문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미셸 앙리에 의해 물질 현상학의 과제라고 말해진다. 그 나타남 - apparaître, manifestation, révélation 이 모두는 등가의 표현들이다 - 은 밖에, 봄에 의존하는 탈자적, 즉 자기 밖의 나타남이 아니라, 자기-나타남, 자기-촉발, 자기-계시, 자기-현시이다. 이 자기에 대한 직접성, 즉각성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 가지는 그치는 않는 감정으로 초월론적인 정감성affectivité  transcendantale, 즉 초월론적인 물질성 혹은 인상성 - affectivité, impressionalité, matérialité는 앙리에게 등가이다 - 을 의미한다.


삶의 지식은 직접적인 지식이라고, 따라서 모든 역사에 무지한, 어떤 공백도 없는, 따라서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감각은 전적으로 자신을 알며, 전적으로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지식은 종교적인 유형의 지식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그렇다면, 왜 삶이 문제인가? 그것은 삶은 성스러운 것sacré이기 때문이다. 삶이 모든 종교적인 것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왜 삶은 성스러운 것인가? 왜냐하면 삶의 지식은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전제하는 지식과 전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지식일 뿐만 아니라. 어떤 지배도 함축하지 않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삶은 자기 자신에 대한 수동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나는 태어나며, 나는 나를 창조하지 않는다. 나는 삶 안에 존재하며, 이 사건에 대해서 나는 절대적으로 책임이 없다. 이 상황은 삶의 본질을 특징지운다. 이 상황은 삶의 매 순간에 재산출된다. 나의 삶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수동적이다. 자기와의 관계에서 삶은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딘다s'éprouve.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에 대해 수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어떤 창발성initiative, 어떤 자유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 삶을 만질 권리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삶을 주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조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권리와 힘/가능성le pouvoir을 가질 수 있는가?! 삶의 본질 그 자체는 하나의 연관un lien으로 이것을 끊을 수 없는 그런 연관이다. 따라서 연속적인 자기-시련une épreuve de soi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가능성 안에 거주하며, 이것은 우리가 보고 걷고 등등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근본적인 가능성/힘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가능성/힘도 가지지 않는다. 종교는 바로 이 근본적인 불-가능성non-pouvoir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들일 뿐이다. 이것은 나의 삶의 수동성 안에 기입된다. "나는 삶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 삶은 나를 가로지르며traverse, 이것은 신비이다. 나는 전적으로 나의 삶 안에 존재하며, 동시에 나는 내가 받은 이 삶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계속적으로 받는 이 삶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가 삶을 훼손할 수 없다면, 이 절대적인 줌ce don absolu 때문이다. 현상학의 지평 위에서 이 삶의 수동적인 증여는 삶의 문제를 신의 문제와 함께 제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삶을 우리가 받은 어떤 것으로 사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에 대한 무한한 존중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것은 이미 종교이다.


SL - 당신의 철학은 삶의 철학이다. 또한 이것은 <현시의 본질>에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그리고 계시에 대해서 당신이 탐구한 삶의 현상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최근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Voir l'invisible>라는 책에서 칸딘스티의 추상화를 연구했다. 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것으로 정의되는 호기심은 보이지 않는 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이 보이지 않는 것의 개념을 명시화해 줄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것은 신비인가? 칸딘스키 예술의 정신성이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MH - <현시의 본질>에서 나는 현상학적인 기획에서 사물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두 방식을 구분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하지 않았다. 세계라는 빛의 공간 안에서, 그것은 또한 지적인 공간이기도 한데 - 나는 사유의 봄에 의해 수학적인 공간 안에서 원과 삼각형을 본다 - 사물들이 나타나는 이 최초의 방식은 차이, 가시성의 지평을 전제한다. 사물들이 영사막écran 위에 나타나는 것은 사물들 뒤에 영사막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사막은 초월론적인 영사막이며, 결국 하이데거의 철학은 그에게는 시간인 이 지평의 기술이다. 그가 탈-자라고 부른 것, 다시 말해 근본적인 저-밖이라고 부른 것, 그 안에서 사물들의 현상성이 솟아난다. 그리고 의식은 현상학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저 밖에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사물들과 관계한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며, 동질적이다unilatéral. 그리고 <현시의 본질>이 하고자 한 것은  이 기술들의 타당성과 한계들을 드러내면서 이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취하는 데에 있었다. 나의 주제는 이 계시의 양식은 그 자체 안에서 전적으로 외재성 안에서 사물들의 드러남과 다르다는 것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 계시는 정감성이며, 자기를 느끼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 존재의 살이다. 따라서 무엇을 느끼는 것은 이 느낌의 자기-느낌을 전제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 삶이 자리한다. 그리고 세계는 우리가 삶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의 세계에의 열림은 삶의 사실이며, 열림은 어떤 빛도 없는 이 직접성 안에서삶이 스스로 느끼는 지점에 이른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비가시성을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취해서는 안된다. 비가시성은 실재로 가장 근본적이고 비밀스런 계시의 최초의 형식을 지시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박할 수 없는,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수준에서 삶의 계시가 산출되며, 나는 본래적인 계시로 이것을 다뤘다.


나는 그림을 좋아한다. 어느날 나는 칸딘스키의 예술에 대한 놀라운 글을 발견했으며, 거기서 삶의 현상학의 예증들을 발견했다. 그의 그림에 대한 분석은 비가시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현상학을 확인하는 듯이 보였다. 증명이 아주 흥미진진했다. 그것이 천재 미술가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가시적인 것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림은 시각 예술이다. 믿기 어려운 것은 그림은 우리가 잘 아는 외적인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비가시적인 것을 표현해야 한다. 이 환상적인 기획은 우리가 영혼을 가지며, 이 실재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영혼을 그리고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가? 여기의 미적인 질문이 있다. 칸딘스키는 색깔은 다만 시각에 제시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의 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객관적인 성질이 아니며, 그것은 우리의 정념 위에서 작동한다. 색깔들에 대한 역동성에 대한 분석들은 아주 정교하다. 노랑은 공격적이고 파랑은 진정시킨다. 공격과 진정은 우리 영혼의 양태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색깔은 이중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것은 가시적이다. 그런데 비가시적인 것이 그것의 진정한 실재이다. 따라서 그림의 모든 요소는 동시에 외적이며 내적이다. 칸딘스키는 모든 그림, 추상화만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에 의존하며 우리는 색깔의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힘에 의해 색을 선택한다. 따라서 그림은 비가시적인 것이 본질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림은 보는 것을 줄 뿐만 아니라, 느끼는 것을 준다. 그리고 그것이 느끼는 것을 줄 때 비가시적인것을 보여준다. 그림은 비가시적인 것을 보는 것보다 가시적인 것을 더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그림은 가시적인 것을 비가시적으로 만들기 때무이다. 이것이 그림의 깊은 본성이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형식과 색깔로 이뤄진 세계에서 증명을 이해할 수 있으며, 계시가 그 근본에서 이중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 밖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은 내 안의 삶의 전개로서 계시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자신의 시로 또한 연혼의 살로 만든다. 이 살은 우리자신인 것이다. 우주는 따라서 우리 삶 안에서 그것이 역동적이고 정념적인 삶인 한에서 자신의 실재를 가진다.  


SL - <현시의 본질>에서 당신은 메트르 에크하르트의 "신을 아는 인간 l'homme connaissant Dieu(Gottwissedermensch)"이라는 공식을 해석했다. 이런 종류의 인식에 대해서 인간은 신에 대해 알고자/궁금해(curieux)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반대로  같은 전통 안에서 우리는 신이 인간에 대해 알고자/궁금해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MH - 이 질문은 호기심에로 다시 되돌아가서 그것을 보다 더 정확히 정의하는 것을 허락한다. 두 종류의 것은 전적으로 다른 것을 지시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호기심은 지식에 대한 욕망으로 정의한다면, 그리고 이 지식을 봄과 연결함이 없이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은 신에 대해 궁금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닌 한에서, 계시, 결국 감정, 감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문제인 한에서, 모든 능동성, 모든 동요, 모든 기획, 모든 지배를 다 제거한 호기심은 체험되지 않은 이 경험들에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서, 우리가 아직 느끼지 않은 어떤 것들을 느끼는 것, 따라서 근본적으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하는 데 있다.  니체는 인간의 "대사냥la grande chasse"에 대해서 말한다. 나는 이것을 전혀 외부로 향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것은 내적인 경험들로 향한다.  인류는 인류가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더 강한 실천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개인들에게 자신 안에서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힘들과 감정의 우주를 느낄 가능성을 줄 수 있다. 보다 강하고 보다 높은 삶의 형식들에 그들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호기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일종의 믿음을 동반하는 처해있음disponibilité/정감인 한에서, 다시 말해 특권적인 경험의 가능성이 열리도록 허락하는 한에서 그렇다. 여러 경험들 중의 사랑, 그것은 계시이다. 내적인 기쁨이다. 어떤 경험들은 미학적이다. 이 기쁨들은 한정되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으로 존재의 확장을 낳는다. 인간은 신을 궁금해한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의미에서이다. 메트르 에크하르크는 기다림과 비참의 태도는 우리를 우리가 모르는 절대적인 기쁨에 열어준다는 것을 지적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전혀 이 살의 기쁨의 강도를 모른다. 감은 눈의 호기심은 충만하게 그것의 고유한 권리를 가진다. 누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을 아는가?


반대로 신이 인간을 궁금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왜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나는 지속적으로 두 종류의 삶, 하나는 생물학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론적인 것을 말했다. 나의 삶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초월론적인 삶이다. 내가 내 안에서 전개되는 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삶에 주의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나의 삶 안에서 뿐이다. 또한 내가 신을 궁금해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운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삶이 나를 궁금해한다고 말하기 위해 이 무한한 삶 안에 놓여 있지 않다.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이 무한한 삶에 대해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삶은 나의 앞서 있으며 이 삶과 나는 내가 그것을 느끼는 한에서 동시대적이다. 그런데 내 안에는 그 안에서 작동하는 탄생 이전과 같은 것이 있다. 나는 현상학적으로 내가 느끼는 삶을 기술할 수 있으며, 내 안의 이 삶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의 이름 안에서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절대적인 삶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삶이 문제일 때 질문은 그 힘을 잃는다. 질문하는 것은 질문을 어떤 자리에 놓는 것이고, 질문 안에 있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지평 위로 던지는 것이며, 이 지평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리고 질문하기는 "왜"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와 질문하는 것과의 관계에 의해 후자를 외적인 자리에 놓는 것이다. 질문하기는 그래서 명백히 삶과 연관된 한에서 고유하지 않다. 삶은 절대로 자기 밖에 놓이지 않으며, 삶은 지평 안에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부조리하다. 여기서 안젤루스 실레시우스의 말이 나온다: "장미는 이유가 없이 존재하며 꽃이 피기에 꽃이 피고, 자신에 대해 아무 걱정도 없이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을 욕망함이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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