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레비나스, 힘과 기원(4)

aurorepark 2011. 5. 4. 00:19

<힘과 기원>의 두 번째 강연(1949년 2월 3일)을 읽는다. pp. 133-154에 해당된다. 두 번으로 나눠 읽는다. 첫 날의 강연이 "기술에서 실존으로"를 거의 그대로 취했다면, 두 번째 강연의 전반부(지금 읽는 부분)는 <존재에서 존재자들>, 그리고 <시간과 타자>의 주제,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운동, 레비나스가 "hypostase", 동사의 명사화, 실체화라고 부르는, 혹은 정립 혹은 자리잡기(position)라고 부르는, 결국 존재자의 "고독"에 이르는 주체의 주체화의 일단계를 다룬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던져져 있음", "버려짐"에 대한 비판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취하면서, 어떻게 주체의 정립, 주체의 자리잡기가 존재의 일반경제로부터 자신의 힘의 기원을 구성하면서 주체가 이 기원에 대해서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지를 보여준다. 그 이유는 주체가 이 기원에 종속되어서가 아니라, 주체는 거기서 자신의 지반, 자신의 도피처, 자신의 안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레비나스는 우리가 보았듯이, 또 다시 보겠지만 한 존재자와 기원의 관계가 힘의 무능, 종속과 지배,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닌, 결국 인식과 진리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관계를 설립한다. 존재(l'il y a)와 존재자와의 이러한 관계의 구조는 <전제성과 무한>에서 유한과 무한의 관계로 다시 드러난다. 



                                                        * 


- 오늘 읽을 부분은 pp. 133-138에 해당된다.


이성으로서 힘은 우리에게 우리가 연루된 실존(l'exister)의 모험 밖에 자신을 놓을 수 있음 안에서, 이 모험의 지배 안에서, 자유 안에서 나타난다. 이 힘은 자신의 조건으로 물러섬(retro-scendance)으로, 무한의 이념의 소유로서, 그리고 이 이념으로부터 나의 조건의 한계를 건너뛰는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의식을 파악하는 힘으로서, 자기를 보는 것(se voir)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봄으로서 의식은  실재 안에 연루된 한 존재가 이 실재를 너머(au-dessus) 고양하는 상황의 구체적인 완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의식의 양태로서 무한의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의식을 가짐은 이미 무한의 소유이며, 유한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빛은 이성의 요소(l'élément) 자체이다. 빛에 의해 나는 나에게 도달하는 것 밖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나에게 도달하는 것의 주인이다. 나는  밝혀진 것(est éclairé)에 대해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밝혀진 것은 마치 우리로부터 나온 것처럼 보이며, 나는 그것을 이해하고 빛 안에서 모든 것은 내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빛"편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구절들이다. (EE, 71쪽 이하)


관념론은 의식에 대한 반성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수동성의 능동성으로 전향. 나와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가 빛의 관계인 한에서 실재론은 불가능하다. 가장 요소적인 감각(sensation)에서조차도 소여는 나의 것이다.


                                                

모든 비이성주의(irrationalisme)에 비해서 근대 이성의 새로움은 상황 밖에 자기를 놓을 가능성을 반박하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관념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반박이다. 그런데 이 비판은 힘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실존을 책임지는 것의 불가능성 - 무한의 상실로부터 결과하는 힘의 한계는 여전히 비극적인 것으로, 던져져 있음(Geworfenheit), 버려짐으로 나타난다.


- 하이데거의 관념론에 대한 반박, 인간 실존의 한계의 지적, 세계-내-존재로서 상황지어진 존재를 통한 관념론 반박은 레비나스가 위에서 말하듯 관념론에 대한 근본적인 반박이다. 이 글의 처음에서 우리가 말한 것처럼, 이 비판은 의식의 힘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선택은 더 이상 힘과 무능, 능동과 수동의 양자택일에서 해방된 기원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론과 실재론의 양자택일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더 자세히 보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기원을 안식처로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이데거와 그의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따라서 범신론적 무한 안에서 의식의 현전의 관념론적 개념화가 포기되어야 한다면, 의식 그 자체 안에서 의식을 넘치는 사건, 더 이상 힘에 의해 더 이상 정식화되지 않는 사건을 탐구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식 안에서 예외적인 내용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새로운 양태를 발견하는 것이다; 의식의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는 것. 중요한 것은 존재의 사건과 존재론을, 존재 일반의 경제 안에서 진리에 한 자리를 부여하면서, 존재의 사건과 진리를 분리하는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 하이데거의 관념론에 대한 반박의 불충분성을 너머 그 비판을 더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더 이상 힘에 의해 정식화되지 않는 사건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존재론과 진리와 구분되는 사건이어야 한다. 이것은 존재의 일반 경제 안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사건, 즉 레비나스가 자리잡기라고 말하는 존재자의 정립의 사건과 그로부터 존재가 자신을 완성해 가는 존재의 작업(oeuvre)을 지시한다.  


이러한 기획은 가능한가? 나는 앞선 강의들에서 이것을 시도했다[여기서 레비나스가 언급하는 앞선 강의들은 <시간과 타자>와 <말과 침묵>을 지시한다].


"il y a"로서 익명적인 존재로부터 출발한, 모든 주체에 앞서서 절대적으로 놓여진, 힘과 무능(non-pouvoir) 밖에서, 나는 존재자들이 실존한다는 단순한 사실(le fait d'exiter) 안에서  인간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변증법의 시초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변증법이 시작하는 힘의 염려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리잡기(l'hypostase)는 어떤 의미에서 힘의 설립이다;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힘(지배). 자기의식은 바로 이 최초의 지배이다. 그런데 이미 이 힘은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관념론이 보통 공간 밖에 놓는 사유와 의식은 본질적으로 - 추락이나 타락에 의해서가 아니라 - 여기(ici)이다. 사유는 출발점을 가진다. 위치화하는 의식만이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위치화(localisation)가 문제이다. 이 위치화는 이어서 의식으로 흡수되지 않는다. 바닥 위의 나의 자리(position)는 어떤 사유, 어떤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l'acte)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는 나의 정립, 즉 나의 자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나의 조건은 나의 지식들과 분리된다. 지식의 지식은 여기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물질적 밀도로부터, 돌출부(protubérance)로부터, 머리로부터 나온다.


- 이 부분부터 나오는 것들은 <존재에서 존재자들>의 "자리잡기"(L'hypostase)편에서 다시 발견되는 것들이다. (EE, 109쪽 이하)


순간적으로 세계 안에 퍼진 사유는 여기에 모일 가능성을 보존한다. 사유는 절대로 여기와 떨어지지 않는다. 사유의 기원은 자신의 도약을 위한 발판(tremplin), 도피처, 안전성이다. 의식은 정확히 비인격적이고 중단되지 않는 긍정인 "영원한 진리"가 단순히 하나의 사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 잠이 없는 자신의 영원성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머리 안에서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는 사실, 스스로 켜지고 꺼지고 자신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머리는 어깨로 떨어지고 잠이든다. 이 도피처는 사유의 연습 안에서 사유에 열린다. 사유는 우선 사유이고 이어서 여기인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원성과 보편성 밖에 놓인다 (다시 말해 마치 비를 피해서 (비로부터 보호되어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장소처럼, 영원성과 보편성 밖에(그것들로부터 보호되어 안전하게) 놓이다.)


- 이 부분은 <존재로부터 존재자로>의 "여기"(l'ici)부분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말 번역의 마지막 구절은 오역이다. (민음사, 115쪽 "En tant que pensée elle est déjà ici, déjà à l'abri de l'éternité et de l'universalité.") 

 


사유의 조건화(conditionnement)인 여기는 힘이 있고 없고의 구분과 절대적으로 상관없이 머문다. 잠(sommeil)의 분석에 의해 이 조건화는 명시화된다.

잠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잔다는 것은 심리 물리적인 활동의 일시적인 정지이다. 그런데 공중에서 부유하는 추상적인 존재에게는 이 중지의 본질적인 조건인 장소(lieu)가 결여되어 있다.

잠을 부르는 것은 눕는 행위에서 이뤄진다. 눕는다는 것은 정확히 실존을 장소에, 자리에 한정하는 것이다. 장소는 무차별적인 "어딘가"(quelque part)가 아니다. 그것은 지반(la base)이고 조건이다. 잠은 토대로서 장소와의 관계를 세운다. 자기를 어딘가에 눕히면서, 자기 위해 한 구석에 몸을 감추면서, 우리는 한 장소에 자기를 포기하고, 이 장소는 도피처가 된다. 우리의 모든 존재의 작업은 따라서 휴식하는 데에 있다. 자는 것, 그것은 장소의 모성적 기원과 함께 보호자와의 접촉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잠을 청하는 것은 일종의 더듬기를 통해 이 접촉을 찾는 것이다. 깨어난 자는 자신의 알 껍질 안의 알처럼 자신의 부동성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의식이 도래하는 것은 휴식(le repos)으로부터, 정립(la position)으로부터이다. 정립(자리잡기)은 의식이 결정한 행위로서 의식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자신에 도래하는 것은 정립으로부터이다. 의식이 여기라는 사실은 이어서 의식의 사실도 사유도 감정도, 의지도 아니고, 의식의 정립이다. 의식은 대지와의 접촉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 인식의 "대상"인 것은 주체를 지지한다. 그리고 주체가 어딘가에 존재하는 토대 위에 자신을 정립하는 사실에 의해서이다. 의식의 여기는 - 잠의 장소 - 는 근본적으로 하이데거의 다자인의 저기(Da)와 다르다. 하이데거의 다자인은 세계를 함축한다. 우리가 출발한 여기는 - 정립의 여기는 모든 이해 모든 지평 모든 시간을 앞선다.


- "여기"는 나의 신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염려는 저기를 가로지른다. 이해에 의해서 밝혀지는 저기는 이미 탈자적이다. 위치화의 기술에서 여기는 기원이고 토대이며, 기원으로 향하는 운동의 끝(terme)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비-운동, 비-초월성, 자기에의 의존(in-sistance), 정확히 정립 즉 자리(position)이다. 그런데 이것은 타성적이 아니다.  정립은 역동적이다. 그런데 초월성이 없는 역동주의, 운동에 의해 지향된 지점이 또한 이 운동을 지지하는 점인 제자리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다. 이 점은 운동의 안전보장(sécurité)과 도피처이다. 여기는 이미 정립 안에 정착한, 정립으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지향성들과의 관계에서 본래적인 지향성(intentionnalité originaire)이다.


정립된(posé) 존재가 현상성과의 관계에서 어떤 이상의 것을 동반하는 것은 정립에 의해서, 바닥(sol) - 지향의 대상이 아니 "지향적 상관자" - 위에 정립(자리잡기)에 의해서이다. 다시 말해 보통 정립이 동반하는 힘이 여기에는 없다. "이 제자리에서 운동"(mouvement sur place), 이 자기에의 의존(insistance)의 본래적인 지향성, 모든 힘에 앞선 자리잡기의 선행성을 밝히는 것은 존재가 하나의 기원을 가진다는 사실,  또 기원에-대해-어떤 힘도-가지지 않음모든 힘의 지반(assise)이고, 안전을 획득하는 본래적인 지향성으로서가 아니라, 사실에의 종속과 봉사로, 혹은 힘의 한계로 해석하는 모든 추론을 반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 관념론에 대한 한 비판으로서 하이데거의 "던져져 있음"이 다시 기투(Entwort)로, 힘의 흔적으로 다시 발견되는 것을 막는 한 전략으로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대안은 존재의 기원을 힘의 한계나, 그것에의 종속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존재의 지반, 안전을 위한 안식처, 잠을 위한 장소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안에서 놀랍게도 우리는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지배 - 의식의 최초의 자리잡기, 자기성의 획득 - 가 힘의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로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철학의 처음에서부터 그가 취하는 긍정적인 방식이다. 부정의 철학이 이를 수 있는 길은, 헤겔이, 그리고 하이데거가 보여주듯이, 항상 부정을 통한 더한 긍정에 이를 뿐이다. 부정의 방법이 아닌 긍정을 통한 과장의 방법은 전제에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것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레비나스가 전기의 저작에서 헤겔의 것이 아닌 일종의 변증법(une dialectique)이라고 부르는 이 존재의 운동(혹은 레비나스가 존재의 작업oeuvre d'être라고 종종 표현하는 것)은 헤겔과 달리 부정의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무수한 긍정(Oui)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헤겔처럼 비극적 인식 안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이 극적(dramatique)이라고 할 때, 이 극은 비극을 의미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가 종종 말하듯, Comedie divine, 혹은 Felix culpa에 해당된다.     


존재 안의 힘의 지반은 힘의 장애가 아니라 그것의 조건, 그것의 특권, 말하자면 힘을 현상 너머로, 단순한 빛의 놀이 이상으로 고양하는 그것의 영광(gloire)이다. 여기서 힘은 위엄(dignité)을 갇는다.


어떻게 던져져 있음, 버려져 있음 (Geworfenheit)의 저주가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 레비나스의 이 질문은 그의 전-중기 철학의 모든 기획을 설명한다. 여기서 영광(gloire), 레비나스의 저작에서 어렵지 않게 종종 발견되는(특히 후기, <존재와 다르게>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 말은 어원적으로 kavod(cavod),즉 존재의 무게를 강조한다. 그런데이 무게는 <탈출에 대하여>에서 "자기에 못박힌", "자기의 존재의 무게에 으깨진"...등등에서 발견되는 비극적인 절망의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아주 가까이는 <말과 침묵>에서 조금 멀리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우리는 이 말이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수 있다. 코기코의 분리는 무한인 신에게 영광으로 드러나듯이 이제 존재에 무게는 존재를 부정하는 대신에 그것에 의해 긍정된다.  


이것을 위해서는 존재의 실존(l'existence de l'être 존재자의 존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을 모나드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실체(hypostase)의 단일성 - 실존의 개념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존재자의 단일성 - 은 절대적인 방식으로 말해져서는 안되며, 실존(l'exister)은 다원성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하며, 실존의 행위는 파르메니데스에서처럼 단순 명백하게 단일성과 일치해서는 안되며, 존재는 또한 지속(베르그손) 혹은 탈자(extase, 하이데거)로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단일성으로 생각된 존재는 어떤 한계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원의 단일성일 것이다. 안전(sécurité)으로서 기원의 발견은 존재의 다원적 구조의 지표이며,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단일성이라는 동등성과의 단절이다.


만일 지속의 생성이 파르메니데스의 단일성을 대체할 수 있다면, 힘이 만날 수 있는 모든 한계와 비교해서 기원의 개념의 새로움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지속이 홀로 주체(un sujet seul)의 지속인 경우는 불가능하다. 


홀로 주체의 미래는 지속적 시간 안으로 자신을 던진다. 시간으로부터 솟아나는 새로운 시간 안에서 주제는 자신을 인식하고, 자기를 발견하고 주체는 시간을 지배한다. 주체의 자유는 하나의 역사인 자신의 역사를 쓴다. 그리고 그는 역사의 주인이다. 힘에 목마른 인간, 자신의 신성화(divination)를 열망하는 인간, 고독한 인간은 자기에 대한 환상적인 부정인 이런 초월성에 의해 나타난다. 그런데 힘의 주체인 인간은 자신의 힘 안에 곧 갇히고 자신의 고독 안에서 슬프다. 힘은 자신의 동일성 안에 갇힌다. 자신의 탄생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환원되어지지 않는 감금! 이러한 갇힘은 주체의 의도들 각각, 자유로운 자신의 동일성 안에 갇힘이라는 사실에 존재한다. 이것은 자유의 개념의 가장 심오한 역설이다. 자유를 책임에 연결하는 종합적인 관계는 자유의 개념의 가장 큰 역설이다. 


실체화의 변증적인 구조는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한다 - 이것은 우리에게 주체의 성(sexualité)에서 나타난다. 주체가 동일한 대상과 다른 것이라면 그것은 주체가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상의 초월은 주체를 그의 동일성에게 나오게 하지 않으며 반대로 동일성을 외화시킬 수 있는 모든 다양을 동일성으로 이끈다. 표상은 다양의 동일화이다. 초월은 그것이 주체의 동일성을 잘라내는 결정적인 절차를 완성하지 않는다면 초월성이 아니다. 대자가 전제하는 자기의 부정은 여기에 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정되는 주체는 이 부정의 주체로 머물기 때문이다. 부정에 의해 자기를 초월하는 주체는 자신의 초월성 안에 갇힌다. 그것은 변종(avatar)일 뿐이다.


- 앞서서 다음의 구절을 읽었다: "창조된, 성적인 한에서 인간은 존재에 대해 힘 혹은 노예의 관계, 능동적 혹은 수동적 관계와 다른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가?"  L'homme en tant que créature ou en tant qu'être sexué n'entretient-il pas avec l'être une autre relation que celle de la puissance sur lui ou de l'escalvage, d'activité ou de passivité?


이어지는 글에서 레비나스는 에로스와 성에 대해서 말한다.   





'레비나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비나스, 힘과 기원(3)  (0) 2011.04.24
레비나스, 힘과 기원(2)  (0) 2011.04.16
레비나스, 힘과 기원(1)  (0) 2011.04.11
레비나스, 철학과 각성(3)  (0) 2011.03.19
레비나스, 철학과 각성(2)  (0) 2011.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