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의 현상학, 하이데거의 근본적인 존재론, 또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그리고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으로부터 레비나스는 길어내는
새로운 실존철학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철학사 안에 전적인 새로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항상 새로움은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것이 다 전개하지 못한 것, 그것의 말하기를 끌어내는 것이라면, 철학사에 다시 읽기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예비적이고 필수적인 과정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이 특히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면, 그의 철학적인 시도는 그의
철학으로부터 그의 철학이 발딛고 있는 공간과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에서 어떻게
하나의 철학을 다른 철학으로 이동시키는지를, 그 방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진술은 하이데거의 후설의 현상학을
자신의 근본적인 존재론으로 이동시킨 철학사적인 사실을 지시할 것이다. 레비나스가 이동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인 <탈출에 대하여>(1935)에서 발견되는 "자기에 못박혀 있음(le fait
d'être rivé à soi)"은 더 이상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정도로, 마치 자기의 가능성에 던져진 다자인처럼, 자기에
던져진 존재자를 그린다. 그런데 이 던져짐(Werfen)은 하이데거처럼 기투(Entwurf)로 이행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실존을 가능성들 가운데 던져진 것으로 환원해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 즉 사실성을 가능성 안에서 떠맡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나의 힘(나는 할 수 있다), 가능성들(pouvoirs)과 관계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Geworfenheit 의 개념의 근본화는 레비나스 초기의 저작에서부터 발견된다. <탈출에 대하여> 이전, 1932년 하이데거에 대한 논문(Revue philosophique
1932년 6-7월) "마틴 하이데거와 존재론"(이 글은 <후설과 하이데거와 더불어 실존을 발견하면서>에 실려있기도
하다)에서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보다 자세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더 명시적으로는 <시간과 타자>의 "존재자 없는
존재"에서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면서 다시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에서 자아의 자유의 한계로서, 자아의 유한성으로 말해지는 이 던져져 있음, 이 버려짐, 사실성에 대한 사유는 레비나스에서 더 근본화되면서 자아의 자유 뿐만 아니라, 자아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무능, 다시 말해 나의 존재의 가능성들에 대한 근본적인 무능으로까지 이끈다. 이러한 해석은 <탈출에 대하여>의 자끄 롤랑이 붙인 긴 서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던져져 있음에 대한
레비나스의 반성은 실존이 더 이상 주어진 상황을 넘어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 즉 던져진-존재가 자신을 던지는 모든 가능성들이
마비되는 그러한 상황을 발견하고 기술한다." 레비나스에서 하이데거의 사실성의
근본화는 우선 존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관념론의 불충분성을 지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그로부터 새로운 방법에 의해
존재로부터 탈출할 것을 제안한다. "존재에 대한 관념론의 극복은 존재에 대한 평가저하에 의존한다. 이로부터 관념론이 존재를
극복했다고 믿는 순간 전적으로 존재에 의해 점령된다. 자신의 이념 안에 우주를 사라지게 한 관념론은 ...존재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DE, 126) 그런데 관념론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또한 하이데거의 근본적인 존재론을 겨냥한다. 특히 그의 사실성에
대한 사유도 관념론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사실성을 강조한 후, 사실성을 가능성들 가운데 던져진 실존으로, 그리고 기투에 의해 이
가능성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존재의 무게를 과소평가한다.
전집 2권에 실린 1949년 강연 "힘과 기원"(pouvoirs et origine, 1949년 2월 1-3일 강연)은 하이데거의 힘 혹은 가능성의 개념과 진리에 대한 염려 사이의 연대를 문제 삼는다. 이 글은 <기술에서 실존으로>와 거의 같은 주제를 다룬다(이글도 EDE에 실려있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행하는 관념론과 현상학에 대한 비판은 인식을 통해 인간이 존재와 그것의 기원에 힘을 가할 수 있다는 주장을 문제 삼는다.
*
첫 번째 강연: 몇번으로 나눠 읽는다. 오늘 옮긴 부분은 이 글의 서론에 해당된다.
우리는 서양철학에서 힘(가능성)과 진리의 염려의 연대의 역할을 밝히고자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인간의 대사이고 존재 그 자체의 대 사건이기 때문이며, 힘의 실패는 이 힘과 연대 안에 정립되는 진리를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를 구성하는 다른 범주들을 지시하고자 한다. 이 다른 범주들은 기원의 개념의 자리를 양보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존재의 구조와 진리의 개념 안에서 어떤 새로운 의미를 보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우리는 특히 기원의 개념을 강조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원에 대해 우리는 어떤 힘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탄생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 조건의 가장 큰 추문을 구성한다. 정확히 힘과 자유의 이념이 예외적인 위엄을 누릴 때 그 사실은 추문을 형성한다. 기원에 대한 무능은 우리의 자발적 행위에 가해지는 운명을 표시한다. 그가 원하지 않았던 것을 자행한 오이디푸스는 기원에 대한 그의 무능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럽 철학은 기원 혹은 비극에 대해서 무능을 드러낸다. 존재와의 관계는 힘의 문제이며, 힘의 의지이다. 철학은 영웅의 실패에 대답한다. 철학은 이교도의 의미에서 인류학적이며, 신인동형적이다. 철학은 존재론에 의해, 다시 말해 존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신 보다 더 오래된 존재에 대한 무능을 드러내는 영웅(의 실패)에 대답한다. 존재를 진리 안에서 지배하는 철학자는 비극적으로 (운명)에 복종하는 영웅을 대신한다. 철학자는 우리 실존의 특수한 상황을 지배하지 않으며, 특수한 상황에 의해 얽히기 전에 우리가 어디에 함축되는 지를 밝힌다. 철학자는 우리가 존재 안에 잡혀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지배한다.
철학자는 이해와 인식과 로고스를 통해서 이 사실을 지배한다. 실존 안에서, 철학자는 진리에 의해 실존이 지배되는 지점에 자리한다. 지식에 의해, 실존 한 가운데에서 이 실존의 밖의 한 절대적인 점이 발견된다. 이 점으로부터 철학자는 존재를 지배하며, 존재 안의 자신의 고유한 기원을 지배한다. 그런데 이 "기원 너머"에서 철학자는 기원의 역사적인 개념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영원성에 참여한다.(나의 강조)
플라톤의 상기술은 사실 기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를 이념들의 영원성과 연결한다. 그것은 개념을 기억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반대로 기억을 개념으로 환원한다. 상기에서 "아주 오랜 옛날(jadis)"은 이미 영원이다.
만일 관념론이 기원에 대한 무능을 처음부터 영원으로 고양하는 인식 안에서 사라지는 기원을 통해 극복한다면 - 실존 철학은 영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위엄을 포기하면서, 진리에 의한 지배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존철학은 그것이 가져오는 대상을 지배하지 않는 진리를 고안한다. 우리는 이것을 기술(description)의 진리라고 부른다. 기술은 마치 한 발을 절대 안에 집어 넣은 관념론적 가능성을 포기하는 듯이 보인다. 기술은 항상 그것의 대상이 발견되는 같은 지평에 머문다.
이 강연은 이러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실존철학은 힘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집중할 것이다. 실존철학도 비극의 분위기 안에 사로잡혀 있으며, 비록 존재론과 비극을 대립시키지 않는다고 할지라고, 실존철학의 존재론 그 자체는 비극적이다. 후설 현상학의 처음에서부터 현상학은 존재론으로 향한다 - 존재의 사건은 존재의 이해라는 이념, 결국 존재에 가해지는 힘의 이념으로 향한다.
'레비나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비나스, 힘과 기원(3) (0) | 2011.04.24 |
---|---|
레비나스, 힘과 기원(2) (0) | 2011.04.16 |
레비나스, 철학과 각성(3) (0) | 2011.03.19 |
레비나스, 철학과 각성(2) (0) | 2011.02.16 |
레비나스, 철학과 각성(1) (0) | 2011.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