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전집 2권에 "힘과 기원"의 일부(pp. 111-120)이다. 이 글은 앞서도 말한 것처럼 <후설과 하이데거와 더불어 실존을 발견하면서> 안에 실려있는 논문 "기술에서 실존으로"(De la description à l'existence)(pp.91-107)와 거의 같은 내용을 구성한다. 이 글은 레비나스의 현상학과의 거리를 이해하는 데에, 또한 그의 철학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어디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에도 중요한 글이다. 후설과 하이데거 철학이 어떻게 데카르트나 플라톤의 관념론과 다른지, 그리고 후설과 하이데거의 관념론은 왜 결국 실재론으로 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레비나스의 철학적 읽기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글이다. "기술에서 실존으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글 중의 밑줄은 레비나스의 것이고, [ ]안에 든 것은 레비나스가 여백에 적어 논 것들이고, ( )안에 든 것은 편집자 R. Calin의 '주'이다. 여백과 주는 다 옮기지 않았다. - 이하에 적힌 것들은 나의 것이다.
"단순한 방법이 철학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가? -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의 방법이 철학이 되는지를 드러내는 것은 무익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철학은 현상학적인 탐구의 "스타일" 안에, 그리고 그 방법의 과정 안에 함축되는가?"("기술에서 실존으로"의 첫 몇 줄에서.)
현상학자들은 기술(description)을 강조한다. <논리연구> 1부에서 후설은 심리주의와의 논쟁에서 현상학적 논증의 모든 자원들을 고갈한다. 2권부터 여전히 논쟁적임에도 불구하고, 방법은 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취하고 추론과 결별한다. 그 "이유들"은 현상의 우선성을 세우고, 현상들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이다.(여기서 레비나스가 언급하는 논리연구는 1900-1901년 판으로 두 권의 <논리연구>이다. 1권은 <순수논리에 대한 서언>이고, 2권은 6개의 <논리연구>를 담고있다. 1913년 2권은 다시 둘로 나눠져서 하나는 5개의 <논리연구>를, 다른 하나는 여섯 번째 <논리연구>를 담고 1921년 출간된다.) 그 "이유들"은 현상들을 그것 이상(au-dessus)으로 고양하지 않는다. 감각적 지각의 종합은 절대로 완성되지 않으며, 외적 세계의 실존은 상대적이고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논증은 기술과 독립적인 의미(signification)를 가지는 주장에 이르지 않는다. 외적 세계의 상대성과 불확실성은 감각적 지각의 종합을 완성할 수 없음과 다른 것이 아니다. 상대적인 세계의 실존과의 관계에서, 이상적인 절대적인 실존은 [절대적인 의식(l'absolu de la conscience)] 직관에 의한 충만(Erfüllung) 안에서, 사물과 지성의 일치(adoequatio rei ac intellectus)에 대한 기술에서, 그리고 반성에 의한 내적 지각의 기술에서 빌려온다. 결론적으로 절대적인 실존은 - 스콜라 철학과 데카르트의 증명 안에서처럼, 더 나아가 칸트의 "관념론 반박"에서처럼 - 이성의 원리와 소여의 조합(combinaison)에 의해 최고의 진리에 이르지 않는다. [전통과의 대립, 스콜라, 데카르트, 칸트, 베르그손] 또한 이것은 예외적인 순간에 의식의 직접적인 소여가 되기 전에 기술을 넘어서 "마치 모든 것이 그렇게 일어나는 것처럼", 사실과의 접촉에서 예감된 진리로 향하는 베르그손적인 직관에 이르지도 않는다. 베르그손의 직관은 특권적인 성질을 보존하며, 신비적인 어떤 것으로 머물며, 인간의 조건을 초월할 가능성을 지닌다.(베르그손, <사유와 운동>, PUF, p. 218: "그런데 철학은 인간 조건을 초월하고자 하는 노력이어야 한다.") 현상학 안에는 "사물로의 회귀"를 통해, 절대로 사물들과 멀어지는 것에 대한 거부가 있다. 다만 "사물 자체로"("Zu de Sachen selbst")뿐만 아니라, "절대로 사물들과 멀어지지 마라"("nie von den Sachen weg")도 기억해야 한다.
후설의 모든 분석에서, 매 명증성은 자신의 뒤에 그것이 나온 다른 모든 명증성들을 동반한다. 그로 인해 모든 명증성들은 무거워진다. 본질 직관은 범주적 직관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직관과 근본적으로 연결된다; 과학의 대상은 우리를 상위의 영역 안으로, 이성이 다른 공기를 호흡하는 진정한 실재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대상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감각적 직관에 붙어있으며, 대상은 비지성적인 것으로 남아있으며, 역설과 과학의 비-의미(non-sens)와 위기에 그대로 노출되어있다. [감성적 직관과 본질 직관 - 과학의 대상] 현상학은 전적으로 유동하는 명증성들 안에서 그것들을 지지하는 잊혀진 모든 명증성들을 발견하는 것에 바쳐진 듯이 보인다.
고전 철학에서, 인식의 분석은 이 인식의 한계에 대한 기술에 이르며, 절대적인 인식의 예감에 의해 움직인다. 철학자에게 주어진 완벽의 이념은 유한성의 기술을 허락한다.[유한을 기술하기 위한 완벽의 이념] 반면에 현상학적인 기술은 유한 안에서 유한의 의미를 찾는다.(나의 밑줄) 그래서 인식의 불완전성은 지향된 대상을 한 쪽으로 치워두는 대신에, 그것을 정확히 규정한다. 여기에 기술의 특별한 스타일이 있게된다. 매번 고전 철학이 인식의 현상의 불완전성을 강조할 때마다, 현상학은 이 불완전성에 포함된 부정에 만족하지 않는다. 대신에 현상학은 이 부정을 현상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정립한다. 만일 감정이 심리적 삶의 어둡고 혼동된 사실이라면, 현상학적 기술은 이 어둠 혹은 이 혼동을 감정의 긍정적인 특징으로 취한다: 감정은 명증성의 이상과의 관계에서 어두운 것이 아니다; 반대로 어둠은 감정 그 자체로서 감정을 구성한다. 만일 기억이 항상 현재에 의해서, 지식에 의해서 변형된다면, 현상학은 잘못된 기억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며, 이 변형을 기억의 본질적인 본성으로 다룬다. "신 조차도" - 다시 말해 인간의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결함을 가지지 않은 인식에 주체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레비나스 자주 인용하는 것으로 후설의 <이념들 I>의 §52와 관계한다. "신도 원자나 전기와 같은 방식으로 실험실을 통과해야 한다"]. 만일 불안이 어떤 대상이 없는 것이라면, 이 대상의 부재ㅡ 무는 무에 대한 특권적인 "경험"으로 불안에 대한 긍정적인 규정이 된다.
- "기술에서 실존으로"에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대한 언급 이전에 그의 철학의 진리에 개념에 대한 글이 덧 붙여있다: "우선 우리가 하이데거의 방법에 접근할 때, 일련의 오해와 혼돈을 피하기 위해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철학적 인간학도 우리가 (프랑스의) 실존철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구분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인간을 위해 인간을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우선 존재에 관심을 가진다. 게다가 이제 모든 이들이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철학의 문제는 존재자도, 이전이 철학이 존재와 혼돈했던 절대자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 동사(être verbe), Seiendes가 아닌 Sein이다. 그런데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하나의 조건을 가진다: 존재가 드러나기 위한 가능성 자체. 존재와의 모든 관계의 조건인 존재의 본래적인 탈은폐는 존재의 진리이다. 하이데거에게 진리는 존재 밖에서 존재에 덧붙여지는 것도, 인간의 사실도 아닌다. 그것은 존재의 사건이다. 인간의 실존 혹은 초월성으로서 혹은 탈존으로서 다자인은 진리를 완성한다. 따라서 진리가 있기 때문에 사유가 있고, 인간은 철학적 문제에 중심에 놓인다. 이러한 상황은 플라톤을 생각하게 한다: "만일 사물들(이념들)이 존재하면 영혼도 존재하며,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영혼도 존재하지 않지 않는가?"(Phédon, 76e). 존재와 동시대적인 진리는 정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존재와 존재의 지성 사이의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전개하는 존재와 시간은 처음부터 인간학에 무관심하다. 그것은 사유의 조건과 사유의 조건으로서 진리를 탐구한다. 인간 실존은 이러한 전망 아래에서만 나타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기술하는 것도, 의식 혹은 주체를 기술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진리의 존재론적 사건을 탐구한다.
그런데 <존재와 시간>은 동시에 인간학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다자인 안에서 완성되는 존재의 이해는 이론적인 사유의 구조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유가 그것을 실현하기에 불충분해서 여기에 정념적이고 감정적인 인간의 실존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사유가 존재의 지성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유가 대상으로 향하고 무엇인가에, 즉 존재자에 이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의 지성은 있는 자의 것이며 무인 존재자의 존재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사유에 대립된 실존은 정확히 이 존재자의 존재의 지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존재자를 사유하는 것이 존재자의 존재를 가정하는 한에서 모든 사유는 실존을 전제한다. 어떻게 사유가 전제하는 실존 혹은 존재의 지성은 완성되는가? 하이데거가 후설에서 빌려온 방법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미 후설 안에는 철학을 실존의 개념으로 향하게 하는 본질적인 소여들이 이미 다 모여있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방법은 우선 후설보다 더 멀리 가는 듯이 보인다. [하이데거의 방법] 하이데거는 한 번은 "현상학적인 구성"(<존재와 시간>, § 72)이라는 대담한 말을 사용한다. 이로부터 하이데거는 현상학을 단순한 기술 이상으로 이끄는 것처럼 보인다. 염려(souci)라는 개념이 세계-내-존재의 조건으로 나타날 때, 그리고 시간이 염려의 조건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조건지어진 것에서 조건으로의 물러섬에 참여한다. 어쨌든 이러한 연역의 특징은 소여에 이성을 적용하는 데에 있지 않다. 이행은 인간 실존의 구체적인 사건으로 남는다. 철학적인 연역은 실존 너머에서 산출되는 지적인 사건일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사건들과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역사적인 사건과 닮아있다. 이러한 상황은 신체를 위해 죽는 철학자나 인간성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파이돈과 대립된다. 하이데거의 고유하지 않은 실존의 고유한 실존으로의 이행은 고유하지 않은 실존에 의해서 완수된다; 고유한 실존으로의 회귀는 고양 그 자체를 표시하는 모든 추락의 가능성을 보존한다.
철학의 가능성은 그것의 불가능성과 실패와 아주 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코이레의 탁월한 논문(Koyré, "L'évolution de la philosophie de Heidegger", in Critique, 1946, n° 1-2)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진리의 개념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것과 멀리, 이 모순은 현상학의 정신의 근본적인 독창성을 강조한다. 이미 후설에서 연역적 이성의 자유의 기능에 불신을 표시하면서, 자유는 전적인 반성의 힘으로서 현상학적인 환원으로부터 유래한다. 하이데거에서 인간은 자신의 조건을 벗어날 어떤 방법도 없다. 여떤 경우에도 이성은 이 기능을 담당할 수 없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자신의 조건의 전체성을 지배하고 밖으로부터 고려되어질 수 있는 절대점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후설처럼 인간은 적어도 자신의 고유한 기원과 일치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여전히 조건지어진 존재의 작품이지, 플라톤에서처럼 어떤 것을 위해 죽고 존재의 사슬에서 풀려난 존재가 아니다. 후설에서 우리는 어떤 개념도 그것의 기술과 분리되지 않으며, 그것의 생성과 분리되지 않으며, 하이데거에서 어떤 사유의 과정도 인간의 조건과 분리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현상학을 관념론과 실재론에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사물들에 앞선 정신을 긍정하면서 관념론은 결국 인간의 위엄의 이론이 된다.
그런데 이 위엄 - 인간이 더 이상 사물과 같은 열에 놓이지 않는 위엄 - 은 이성에 의해서 정의된다. 이성은 여기서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확실성의 보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어떤 방식을 통해 인간 밖에 놓는 힘의 역할을 수행한다. 만일 실재론이 인간과 비교해서 세계의 외재성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관념론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외재성에 대해서 긍정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관념론은 필연적으로 과학적 사유 안에서 정신과 존재의 본래적인(고유한) 관계를 탐구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과학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인간의 절대적인 외재성을 보존하기 때문이며, 학자는 그가 연구하는 실재의 밖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 것에서, 예를 들어, 그의 신체나 그의 정념처럼, 그는 그가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를 채택하고, 그가 시선을 던지는 사건들 안에 연루되지 않는다. 인간은 한발 뒤로 물러서는 힘을 보존한다. 관념론은 항상 이성, 그 말이 가진 강한 의미에서 경험에 의해서 산출된 "원리"를 함축할 뿐만 아니라, 고양, "추론", 운동, 상승의 원리를 함축한다. 관념론은 근본적으로 플라톤주의이거나 데카르트주의이다: 출발점은 인간 안에 놓여 있으며, 인간이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자신에 대해 의미를 가지며,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의미의 내재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허락하는 완벽의 이념과의 관계에서 놓여 있는 한에서, 인간은 지배된다. 따라서 존재론적 논증은 초월성을 완성하고, 규정하며, 관념론의 초석으로 머문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철학 안에는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 현상학은 이성이 없는 관념론의 역설이다. 왜냐하면 관념론에서 인간은 인간 없이 세계로부터 의미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을 지배하기 위한 필요한 도구를 소유한 관념론과 달리, 하이데거는 인간을 마치 스스로 자신을 책임질 수 없는 것으로 정립한다. "던져져 있음(Geworfenheit)"은 지상의 한계를 그린다. 인간 한 가운데에서 관념적인 의식을 실존으로 변형하는 핵이 나타난다. 세계는 인간 덕분에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인간은 전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로부터 하이데거에서 전통적인 실재론의 주제가 다시 출현한다: 이해와 구분되는 실재에 대한 주제. 후설에서, 비록 그가 인간의 완벽한 지성체를 호흡한다고 할지라고, 그리고 현상학적 환원의 가능성이 지성체를 허락한다고 할지라고, 지성체(intelligibilité)는 기원과의 일치를 넘어서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기원은 세계 안에서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의미를 획득하는 용어들에 대한 기술 밖에서는 말해지지 않는다. 후설의 관념론은 이성 없이 일어난다: 그것은 자신을 구체적인 실존의 밖에 놓음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는 원리를 가지지 않는다. 이성의 해방은, 상기도, 타고난 이성의 씨앗의 작업도, 어쨌든 그것은 세계 안에 삶 그 자체와는 다른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기술이다. "이성"의 작동은 "비상하는"(décoller)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원과 일치하는 데에 있디; 세계를 갱신하는 데에, 자기 뒤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플라톤의 죽음과 유사한 작동을 통해 세계 뒤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인간 실존 안에서(dans) 파열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실존과 일치한다. 인간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빛의 원리도 없으며, 명증성의 빛을 조건짓는 빛도 없다. 데카르트의 세번 째 성찰이 이르는 무한의 빛에 의한 코기토의 명증성의 넘침, "valde credibile est...illam similitudinem, in qua Dei idea continetur, a me percipi per eandem facultatem, per quam ego ipse a me percipior..."(t. VII,p. 51, "il est fort croyable ...que je conçois cette ressemblance(dans laquelle l'idée de Dieu se trouve contenu) par la même faculté par laquelle je me conçois moi-même..." t. IX, p. 41.) 이런 강한 믿음은 - 그 능력에 있어서 신과 나의 닮음(그 닮음 안에 신의 이념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 같은 능력에 의해 내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은 - 후설의 철학에는 부재한다. 철학은 특권적인 순간에 삶과 분리되지 않고, 그것과 일치한다, 철학은 삶의 본질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자신의 한계를 건너뛰지 않는 사건이다. 우리는 더 이상 primium vivere deinde philosophari(우선 살고, 나중에 철학하기)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철학 그 자체는 실존이며 사건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힘의 지배의 이념(관념)의 명백한 포기에 참여했다. 자기의 지배의 불가능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실존의 이념으로의 길에 참여했다. 사실, 우리는 힘의 새로운 개념화의 길을 열고 있는 중이다 - 더 이상 완벽의 이념에 의존하지 않을 때 가질 수 있는 힘. 그리고 결국 완벽의 이념에 의존하지 않는 힘은 지향성의 이념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현상학적 기술의 새로운 특질을 파악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실존 철학으로의 저항할 수 없는 진화를 알려온다.
데카르트의 관념론이 인간의 주체 안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주체가 자신의 유한성에서 나오면서, 참여하는 무한과 화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주체의 존재와 주체의 이념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에 의존한다. 데카르트에서 무한의 이념과 피조물의 유한성 사이의 화해는 나의 존재와 나의 이념들 사이의 구분에 의존한다. 비록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실체를 사유에 의해서만 규정했다고 할지라도, 사유하기를 그치면 자아가 존재하기를 그친다고 할지라도, 자아는 순수히 그리고 단순히 하나의 사유가 아니다. 존재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이 일치할 때, 어떻게 사유하는 실체는 스스로 무한이 됨이 없이 무한의 이념을 가질 수 있는가? 완벽의 이념의 의해서 사유는 절대 안에 뿌리를 내린다. 그런데 절대에 뿌리를 내린 사유의 실존은 절대 이하이며, 다만 사유이며, 사유 이상이 아니다. 혹은 완벽의 이념에 의해서 사유의 실존이 존재 안에 자신의 토대를 마련한다면, 근거지어진 사실은 존재의 사실과 동일화되지 않는다. 실존의 조건은 실존 그 자체와 구분된다. 하나는 무한하며, 다른 하나는 유한하다. 데카르트에서 중요한 것은 유한한 실존은 무한으로부터 잘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관계는 사유에 맡겨진다; 코기토의 모든 실존을 구성하는 사유는 이 실존에 덧붙여지며, 실존에 절대성을 부여한다. 이로부터 인간 실존은 '사유'가 아니라, '생각하는 어떤 것(사물)(une chose qui pense)이 된다.
지향성의 현상학적인 개념화는 본질적으로 사유(penser)와 실존(exister)을 동일화하는 데에 있다. 의식은 생각하는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으로서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실체적으로 생각된다. 그의 존재의 작업은 사유하는 데 있다. 우리가 후설의 지향성의 개념의 근본성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앞서 분석한 데카르트의 사유의 개념화와의 관계 안에서이다. 이 분석 안에서 완벽의 이념에서 열린 사유는 유한한 존재 안에서, 자신의 유한한 존재와의 관계에서 이상의 것(surplus)이 된다. 후설이 의식은 먼저 존재하고 이어서 자신의 대상으로 향한다는 것을 부정했을 때, 사실 그는 의식의 실존 그 자체는 생각하는 것, 사유 안에 자리한다는 것을 긍정한다. 사유는 존재론적 조건을 가지지 않는다" 사유는 그 자체 존재론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생각하는 사물"의 이념으로의 이행에 대한 후설의 유보는 다만 의식의 자연화 혹은 사물화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의식을 단단하고 정적인 사물로 간주하는 것은 진정으로 위험한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의 존재론적 구조에서 의식을 토대로, 의도의 장 혹은 빼대로 사용되는 어떤 핵으로 생각하는 것을 반박하는 것이며, 의식을 실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는 행위과 실존하는 행위가 주체에게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의 개념 그 자체를 변형하는 것이다. 사유는 존재의 본질적인 속성일 뿐만 아니라, 존재는 사유이다(l'être c'est penser). 이로부터 사유의 전이적인 구조는 존재의 작용을 특징짓는다. [존재의 전이성] 사유는 어떤 것에 의해 생각되고, 동사 존재하다(être)는 항상 직접 보어를 가진다: 나는 나의 고통이고, 나는 나의 과거이고, 나는 나의 세계이다 (je suis ma douleur, je suis mon passé, je suis mon monde). 이 공식에서 동사 être는 계사(copule)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동사는 귀속(attribution)의 관계, 주체와 동일화되는 전체성을 표현하지 않는다. 이 진술들에서 단어est (마치 현대 실존 문학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처럼)를 강조하면서 우리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동사의 전이적인 성격, 동사 être와 동사 penser와 함께 드러나는 유비이다. 존재의 작용은 의도(intention)로서 간주된다. 물론 후설에서 이미 사유의 특징은 존재 한 가운데로 이동한다. 그런데 존재의 개념 안에 도입된 전이성은 하이데거 이래로 그리고 프랑스에서 사르트르 이래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실존의 개념을 준비하는 것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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