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4절로부터 레비나스는 본격적으로 후설로부터 자신의 철학의 가능성을 개진한다. 아래에서 읽을 4절의 처음 부분은 앙리를 읽으면서(주체성과 철학 (3)) 이미 한 번 읽은 것이다. 다시 읽는다.
4. 데카르트적 성찰 6절과 9절에서 환원된 의식 위에서 반성의 필증적인 이성성은 더 이상 직관이 채우는 의미작용 안에서 직관의 정합적인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필증성은 비정합적인 직관 안에 거주한다. 필증성의 의심할 수 없고 혹은 원리적인 특성은 여기서 어떤 명증성의 새로운 특질도, 어떤 새로운 빛도 입지 않는다. 필증적인 것은 한정된 한 부분에, 다시 말해 "고유하게 정합적"이라고 말해지는 의식의 장의 한 핵에 자리한다. 바로 이 곳은 살아있는(vivant)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다음의 진술들이 나타나는 곳이다: "이 핵, 이것은 나의 나 자신에 대한 살아있는 현전이다(die lebendge Selbstgegenwart, ce noyau, c'est la présence vivante du moi à lui-même)" 혹은 조금 뒤에 "나는 존재한다의 살아있는 명증성(während der lebendigen Gegnwart des Ich bin, l'évidence vivante du je suis)" 여기서 후설이 말하고 있는 이 명증성의, 혹은 이 현재의 살아있는 특성은 정합적인 것으로 덮이는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예외성은,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그것의 지식의 명석 판명함에서 유지되는가?) 삶의 생동(vivacité de la vie)은 의식으로부터 해석되어져야 하는가? 이것은 "erleben 살다"의 이름 하에서, 혼동된, 어두운, 다만 주체와 대상의 구분에 앞선, 전-주제화, 전-지식이 아닌가? 의식의 정신의 삶(psychisme)을 다르게 말해야 하지 않는가? 후설의 진술의 처음에서부터 관형어 "살아있는(vivnant)"은 주체의 방식(la façon du sujet)을 표현하는 단어 Erlebnis,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가? Erlebnis - 체험(le vécu)라는 용어가 지시하는 나의 전-반성적인 경험은 마치 파악(Auffassen)전에 질료(hylé)처럼 전-대상화의 계기일 뿐이다. 살아있는 현재 - 우리는 이 용어가 시간에 대한 그의 유고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내적 시간에 대한 강연들>이 베르그손의 지속 안에 현재의 특성과 유사한 폭발적이고 놀라운 특성을 가진 원-인상의 개념 안에서, 언급하는 이 개념의 중요성을 안다. 그것이 예측할수 없는 것은, 그것은 과거를 지닌 어떤 종자 안에서 준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 인상의 용출의 자발성과 혼동되는 이 절대적인 트로마티즘은 그것이 정합적 지식에 제시하는 감각적 성질만큼 중요하다. cogito-sum의 살아있는 현재는 다만 자기 의식, 즉 절대적 지식의 모델 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영혼의 동일성과의 단절, 내재성의 동일자와의 단절이다: 깨어남과 삶(réveil et vie).
후설의 <현상학적인 심리학>에서, 감성(sensibilité)은 질료가 소묘(Abschattung)의 기능을 입기 전에 체험된다. 그것의 내재성은 자기에의 현전의 시간의 수동적 종합 안에 모음이다. 그런데 이 자기에의 현전은 이 체험이, 자아와 구분되는, 그리고 <이념들 I>에서 "내재성 안의 초월성"으로 인정된 자아의 체험인 한에서, 어떤 단절에 의해 산출된다. 자기에의 현전의 동일성 안에 - 전-반성적인 침묵의 동어반복 안에 - 동일자와 동일자 사이의 차이, 위상차(déphasage), 내밀성 안의 차이가 기입된다. 여기서 차이는 항상 화해에 이르는, 자가화를 통해 극복가능한 상반자에 환원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자기 의식이라고 주장되는 것은 단절이며, 타자는 의식의, 즉 체험의 동일성에 균열을 만든다: 타자는 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의식을 부른다. Waches Ich - 깨어있는 자아(moin en éveil). ... 내재성 안의 초월성, 가슴은 그를 깨우는 것과 혼동됨이 없이 깨어있다. 후설은 "잠은, 잘 들여다보면, 깨어있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의미를 가지며, 자기 자신 안에 일어남의 잠재성을 지닌다" (심리적 현상학, Husserliana, IX, 209)라고 말한다.
- 이 내재성 안의 초월성, 즉 "자기에의 현전의 동일성 안에 - 전-반성적인 침묵의 동어반복 안에 - 동일자와 동일자 사이의 차이, 위상차(déphasage), 내밀성 안의 차이가 기입", 레비나스의 용어로 말하면 동일자 안의 타자(l'autre dans le même), 레비나스가 외재성이라고 부르는 이 내밀한 것보다, 이 최상급보다 더 내밀한 내재성, 그런데 그것에 레비나스는 "외재성"이라는 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라캉은 이 말 대신에 내밀성(intme)에 조응해서 외밀성(extime)이라고 부른다. 이 내재성 안의 초월성은 자기 안의 자기와의 균열을 가져온다. 레비나스는 위에서 깨어나는 나와 깨우는 나(내가 자는 동안에 가슴은 깨어있네라고 노래할때)를 혼동함이 없이, 깨어있는 나를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앙리와 레비나스 사이의 드러나는 하나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앙리는 자기와 자기 사이에는 어떤 균열도, 조금의 간격도 없는 자기-촉발이라고 말한다. 느낌으로서 감정에는 어떤 균열도 어떤 간격도 없다. 어떤 간격도 거리도 없는 곳에는 관계가 일어날 수 없다. 전혀 움직일 수 있는 조금의 자유의 공간도 없는 곳에는 언술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자기에 자기에 대한 촉발로 어떤 관계, 말하자면 "관계 아닌 관계"라면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성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앙리는 이런 종류의 레비나스가 말하는 초월성에 전적으로 무지한가? 우리는 그의 텍스트 안에서 이와 유사한 운동을 발견할수 있지 않은가?
5. 이어지는 5절에서 레비나스는 다시 묻는다: "그런데 이 용출하는 자아, 질료의 내재성으로부터 차별을 주기 위해 질료의 자기 동일성을 깨는 이 자아는 이어서 동일자의 동일화의 운동이 아닌가?" 이 집요한 질문에서 레비나스는 환원의 궁극적인 의미가 드러나는 환원의 궁극적인 국면, 즉 상호주체적인 환원을 생각한다. "여기서 주체의 주체성은 인식론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각성의 트로마티즘 안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상호주체적인 환원은 다양한 주체성들 사이의 일치에 의존하는 지식의 객관성을 보증하기 위해, 다만 "나에게 고유한 원초적 영역(sphère primordiale)"의 "유아론"과 그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상대성에 반대해서 나아가지 않는다. 나에 대해서(pour moi) - 원초적 자아(moi primordiale) - 나와 다른 자아(un moi autre que moi)가 가지는 의미의 설명은 타인이 특권적인, 원초적인 의미에서 내가 나를 정립하는 나의 실체화(hypostase), 즉 나의 자리정립에서, 여기에서, 존재의 중심에서, 혹은 세계의 중심에서 나를 뽑아내는 방식으로 기술된다. 그런데 이 뽑아냄은 나의 <나의 것(mienneté)>의 궁극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자아"의 의미를 타자에 의존하는 것 안에서, 또한 내가 나의 의미를 타자에 의존할 수 있는 나 자신의 타자성 안에서, 여기와 저기는 서로 자리를 바꾸기에 이른다. 이것은 공간의 동질화가 아니다. 이것은 나, 자아 - 자신의 "고유한(le propre)" 영역 안에서 최우선적이고 주도권적이고, 자신과 동일한, 나의 표피에, 나의 여기 지금에 존재하는 자아 - 가 두 번째 자리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 자아는 타자로부터 자기를 본다. 나는 타자에 노출되고, 나는 설명해야 할 것들, 계산해야 할 것들(des compte à rendre)을 가진다."
- 여기서 레비나스는 후설의 <다섯 번째 데카르트 성찰>을 읽고 있다. 내가 나의 우선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다른 나, 타아(l'autre moi)와의 관계에서이다. 레비나스가 여기서 두 번째 자리(secondarité)라고 말하는 자리에서, 후설이 말하는 타자의 신체의 표현성, 레비나스 언어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환원을 통해 획득한 나의 고유한 영역의 최우선적인 영역은 그 우선성을 잃어버린다. "주체성은 자아주의적 관점, 에고이즘에서 깨어난다".
"후설의 상호-주체적인 환원의 이론은 놀라운 혹은 트로마티즘적인 - thauma(놀라움)가 아닌 trauma(트라우마, 심상) - 취기에서 깨어남의 가능성을 기술한다. 그 안에서 타자 앞에 자아는 자기로부터 해방되며,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다. 동일자로 흡수되지 않는 타자에 의한 동일자의 방해로서 환원은 인식을 넘어서 불면에서 혹은 깨어있음 혹은 경계심(veille)에서 깨어남을 기술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깨어남은 초월론적인 통각의 단일성 안의 균열, 주체의 균열(la fission du sujet)라고 부른다. "타인인 타자로부터 깨어나기, 이것은 끝없이 나의 동일성을 문제에 놓는다. "타인에 의한 각성 혹은 깨어남은 동일자를 조용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것에 의해 동일자는 처음부터 살아있는 것으로서 잠을 거쳐서 초과된다(excédé). 이것은 인식의 주제에서 비동등성의 경험이 아니다. 이것은 삶으로서 초월성 그 자체의 사건이다."
이 글의 마지막 절인 6절에서 레비나스는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후설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끝까지, 후설에서, 환원은 덜 완벽한 인식에서 보다 완벽한 인식으로의 이행으로 남는다. 환원에서 철학자는 순진한 인식 안에서 용출하는 모순들에 의해 결정되고 그것에 의해 동기지어 진다. 영혼의 삶 혹은 정신의 정신성은 지식으로 남는다; 유럽정신의 위기는 서양의 과학의 위기로 남는다. 존재의 현전으로부터 출발하는 철학자는 - 영혼의 자기와의 동등성, 동일성 안에 다양의 모음 - 절대로 지식과 다른 용어들 안에서 그것의 혁명들을, 그것의 깨어남들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후설 안에는 과학으로부터 나오는 기술(technique)의 비판을 넘어서, 지식으로서의 지식에 대한 비판, 과학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 있다. 지식의 알려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지성체(intelligibilité)는 그것의 동일성 그 자체에 의해 소외된다. 후설 철학에서 환원의 필연성은 주어지는 것에 대한 열림 안에 닫힘, 자발적인 진리 안의 졸음을 증명한다. 이것은 우리가 초월성의 염려(inquiétude)에 반한 브루주와의 저항, 자기 만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동일자의 동일성 안에, 동일자의 자기로의 회귀 안에, 이성은 자신의 완성을 주장하며, 이 동일성 안에 사유는 휴식을 찾는다. 이런 정신의 몽롱함(hébétude), 석화, 게으름을 경계해야 한다. 가장 이성적인 이성은 가장 깨어난 경계심, 즉 경계심 안에서, 상태로서 경계심 안에서 깨어남이 아닌가? 삶의 생동은 내용 안에 담을 수 없는 것에 의한 내용의 추월(excession), 단절 - 각성의 의식이 진리의 의식이 아닌 의식에서 각성, 최초의 운동으로 남는 각성, 상호주체적인 환원의 트로마티즘이 보여주는 타자에로 향하는 최초의 운동이 아닌가? 초월성, 이 용어는 어떤 신학적인 전제를 포함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모든 신학이 전제하는 삶의 추월 혹은 과잉(excession)이다."
마지막 단락에서 레비나스는 우리가 말하는 초월성은 세계의 인식으로서 어떤 배후의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각성(éveil) 혹은 술에서 깨어남(dégrisement)을 말한다. "초월성은 초월성의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험은 주체의 자리(정립)에, 지각된 혹은 자기화된 모든 내용에 예비적인 파악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경험이 헤겔의 경험과 혼동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월성 혹은 인간의 삶 그 자체인 각성은 이미 무한에의 염려이다. 이로부터 철학은 경험의 이야기가 아닌 초월성의 언어이다: "이 초월성의 언어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해진 것들 너머에,...상호주체적인 "얽힘" 안에 놓인 철학자들이다."
- 이 마지막 진술은 레비나스에게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항상 경계심 안에 깨어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한 사람은 바로 후설을 지시한다. 더 나아가 칸트, 테카르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등등... 이렇게 후설의 텍스트는 레비나스에게 무한에의 열림 안에서 상호주체적인 얽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는 블랑쇼에서 무위의 공동체로서 "우정"이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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