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이데거를 읽을 것인가? 어떻게 하이데거를 이해할 것인가?
"우리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개념들을 가지고 하이데거와 논의하고자 하면, 하이데거는 그것들이 아직 자신의 사유의 빛 안에서 검토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유가 결여된 것이라고 비난한다ㅡ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레비나스 전접 1권, p. 467)
"Ce qu'il faut, c'est un point de vu nouveau."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와 논쟁하기 위해서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결정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새로운 관점은 그의 초기의 논문 "탈출에 대하여"에서 이미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이데거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함이 없이 레비나스는 이 글 안에서 하이데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새로운 관점을 고안하고 있었다. 47년 "기술에서 실존으로",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힘과 기원"에서 우리는 그가 35년 "새로운 방법으로 존재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라고 했을 때, 이 "새로운 방식"(nouvelle voie)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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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주의 측면에서, 실존철학의 새로움은 우리에게 동사 "실존하다"(exter)의 타동사적(transitif) 성격의 발견 안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떤 것을 존재하게 한다(on existe quelque chose). 실존은 그것이 본래 타고난 어떤 속성에 의해서 초월적이 아니라, 그것의 실존함은 초월하는 데 있다. [...]
하이데거의 실존의 개념이 도입한 새로운 언어는 확실히 존재에 대한 직관의 해석이며, 형이상학적으로 시간과 무한이 참여하는 관계 사이의 구분에서 유지되며, 나아가 사유와 실존의 구조 사이의 유비에서 유지된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철학은 이러한 개념화에 정반대에 놓여 있지 않은가? 그의 철학의 새로움은 사유의 힘, 관념론에 의해 선언된 이 사유의 힘을 존재론적인 조건들에 종속시키는 데에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그의 철학은 존재는 의식을 결정하며, 사유는 자신의 활동에서, 내적인 장애를 만나며, 더 나아가 결국 사유에서 외적 장애만을 발견하는 실재론이고자 하지 않는가?
그렇다. 그런데 사유 안에는 타동성(transitivité, 전이성)이 있으며, 무한에 대한 파악이 있다. 보통 우리가 자신과 동일화하는 사유는 하이데거에서 더 이상 이론적인 사유가 아닌 어떤 것에 종속된다. 사유는 우선 자신의 무관심적인 성격을 읽어버리고 사유의 정감적(affectifs)이고 능동적인(actifs) 요소들을 강조하며, 정감성(affectivité)과 능동성(activité) 사이의 긴장을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긴장의 성격을 순수히 그리고 단순하게 실존과 동일화하고, 실존철학은 결국 힘들고 걱정스런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성격의 강조와 동일하다고 상상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철학이 실행하는 존재의 범주의 고유성을 강조하기보다 염려와 불안의 정념적인(pathétique) 성격을 강조한다.
사실, 이론적 사유의 평정심(impassibilité)은 정확히 사유의 무한에 대한 파악을 의미한다. 이론적 사유는 그것이 활동(action)이 아니기 때문에 평정한 것이 아니라, 이론적 사유는 자신의 조건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유는 자신의 뒤에 머문다. 이런 의미에서 유한의 사유는 이미 무한의 사유이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는 옳았다. 모든 의식의 파악은 무한의 규정 혹은 통각이다. 실존철학의 고유성은 무한과 무관하게 유힌을 생각하는 것(penser)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사유가 아닌 어떤 유한한 것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한과 무한의 관계가 아니라, 끝내는(finir) - 죽음에 이르는(mourir) 사건이다. 사유가 아닌 유한과의 관계, 이것은 실존이다. 이미 실존 철학에서, 그리고 후설의 현상학에서 반성은 인간적 사실들에 대한 규정을 명상하는 데 있는 것도, 규정에 따라서 인간적 사실들을 설립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사실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의도를 분석하는 데 있다. 사실은 존재론적 과정의 지표도 증상도 아니며, 보편적인 우주의 법칙의 검토도 아니다. 사실은 과정 그 자체이며, 사건이다.
예를 들어 실존하기는 실존을 이해하는 것이다. ...죽음은 종말(fin)의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끝내는 사실(le fait de finir)이다. 이제 유한성(finitude)은 더 이상 양적이 아니라 질적이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도, 이념도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끝내는 사건에 의해, "종말의 의도"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실존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절대 안에 놓는 사유의 본질적인 주장을 제거하는 것은 이미 칸트에서 발견된다. 실존 철학자들이 칸트에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성과 분리된 오성은 무한과 관계하지 않는 사유에 대한 최초의 직관이었다. 그리고 실천 이성의 개념과 실천적 진리들은 이미 이론적인 진리와 구분되는 완성 안에서의 진리인 실존적인 진리의 개념을 예고한다. 물론 칸트의 도덕은 무한의 실재들과 만난다. 다시 말해 칸트의 도덕은 무 위에 실존을 근거짓지 않는다. 칸트에서 이론적 진리와 실천적 진리 사이의 구분은 이미 데카르트적 사유의 구조가 더 이상 아닌 사유의 개념을 가져온다.
사유에서 전이성을 빌려오고 무한의 사유를 버리는 이런 사유는 우리에게 실존의 실존주의적 개념으로 나타난다. 범주들의 나라에서 일어난 이 혁명의 형이상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사유에 의해 자신을 사유 뒤에 놓을 모든 가능성을 제거한 실존, 자신의 토대와의 모든 관계를 제거한 실존, 창조의 이념의 관념론적 대체가 제거된 실존은 물질로도 사물로도 실존하지 않으며, 조용히 현재 안에 휴식하지도 않는다. 이런 실존은 힘(pouvoir)[이 말은 앞서도 한 번 언급한 바가 있지만, "존재할 수 있음"(pouvoir-être)의 의미에서 힘, 가능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현실태에 앞서서 존재하는 가능태(puissance)의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이다. 실존이 힘이라는 것은 사유에 의해 완벽과 무한 안에 이미 자신을 놓는 한 존재 안에서도 이미 이해되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이 힘의 개념을 사유의 힘의 개념과 분리한다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만일 실존함이 자신을 실존함 뒤에 놓을 수 없음이라면, 어떻게 실존함은 힘을 의미할 수 있는가? 절대로 시선을 향하지 못하는 실존은 미래로의 운동이다. 절대로 향하는 행위에 의해 실존은 자신의 조건으로, 과거로, 이 과거 너머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래로 향하는 운동은 사유의 전이성(타동성)을 보존할 것이고, 미래 자체가 절대에 대한 부정인 한에서, 사유의 부정일 것이며, 비-존재일 것이며, 무일 것이다. 사유가 아닌 힘 - 그것은 죽음이다(Le pouvoir qui n'est pas une pensée - c'est la mort). 유한한 존재의 힘(가능성) - 그것은 죽음(mourir)이다. 죽음의 전이성(transitivité)이 없는 실존의 철학은 반드시 사유의 철학으로 돌아 올 것이다. 초월성의 한 항(terme)인 "어떤 것"(quelque chose)은 데카르트 이래로 우리가 알듯이 그것이 떨어져 나온 무한의 토대 위에서만 제시될 수 있다. 미래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현실태의 앞서 존재하는 현실태에 의해 지지되는 가능태(puissance)의 현실태화(actualisation)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끝까지 사유를 실존의 회복할 수 없는 유한성 안에 근거짓는 칸트의 테제를 전개한다.
이런 사유는 플라톤, 특히 파이돈에서 드러나는 그의 사유와 대립한다. 파이돈에서 철학은 사유에 의한 죽음에 대한 승리이다. 다시 말하면 사유의 조건으로서의 죽음의 개념화이다. 철학은 인간이 신체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간 안에서 어떤 것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즉 인간이 자신의 조건과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인간의 최상의 원리는 인간에게 접근 가능하며, 그래서 죽음은 자살이 아니며, 인간의 가능성(pouvoir)이 아니다. 파이돈 초반부의 신화적 형식 하에서 자살에 대한 선고는 - 자살이 무의 문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 자살의 불가능을 말한다. 사유의 원리들은 사유에 대한 힘을 보존한다 - 근저에서 사유는 이념들에 대한, 존재에 대한 명상에서 자신을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스로 자신에게 죽음을 주는 것은 실존의 모든 의무를 책임지는 것이며, 준비되지 않은 사후의 삶의 우연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 수동적인 죽음은 진정하고 좋은 죽음이다. 플라톤에게 진정한 죽음은 무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이지 삶의 모순이 아니다. 죽음은 여전히 존재에 속한다. 죽음의 미래는 이미 주기적인 운동의 계기이며, 다시 말해 어떤 의미에서 과거이다. 무로 향한 초월성은 실존철학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 자신의 조건을 통각하면서 유한한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유는 죽음 안에서 유한성을 감당하면서(assumer, 책임지면서) 유한성을 극복하는 실존에 대립된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라는 공식은 죽음을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 정립하는 사유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전자는 무를 인간의 힘(가능성)이 감당하는(책임지는) 것으로 정립하며, 후자는 단순히 인간의 자유가 부딪친 사실로서 정립한다.
따라서 실존의 철학적인 존재주의는 사유에 대립된 실존에서 사유를 특징짓는 힘의 기능을 보존한다. 이해는 하이데가가 인간의 존재의 모든 구조들로부터 풀어낸 것으로, 이 존재적 구조들 - 존재의 구조들 - 은 마치 존재론적인 것으로, 존재의 이해의 사실들로 나타난다. 이해는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이해가 대상의 저항에 부딪쳐서가 아니라, 사유의 실존적 요소가 사유 그 자체의 수준에서, 유한성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기원에 대한 무능(impuissancce)에서 형성된 실존은 죽음에 대한 이해 안에서 감당된다(est assumée). 사유-이해의 존재론적 토대는 무한의 이념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더 이상 이념이 아닌, 더 이상 토대가 아닌 유한한 것에서 존재한다. ...실존의 힘은 상기에 의해 기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기원에 대한 자신의 무능을 파괴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유한 그 자체 안에서 끝낼 수 있는 힘이다. 미래로의 탈존은 ...다자인의 "던져져있음의 유한한 성격을 극복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의 죽을 수 있음으로 그것을 책임진다.
실존으로부터 탈출을 염려하는 철학이 나아갈 방향은 그렇다고 해서 무한과 연계된 실존으로, 상기인 사유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러한 돌아감)은 사실 실존에 대한 사유의 무능, 영혼에 대한 이성의 비효율성, 죽음의 불안에 대한 승리 앞에서 파이돈의 실폐를 고려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하이데거의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인 죽음은 궁극적으로 사유 혹은 미래의 로고스에 모순적이다. 죽음은 그것이 이해, 즉 가능성인 한에서만 사유로 머문다. 하이데거가 결국 실존을 기술하는 것은 이해의 성공과 실패에 의해서이다. 존재의 존재자와의 관계는 그에게 존재론, 즉 존재에 대한 이해이다. 여기서 그는 고전 철학과 합류한다. 관념론과 실재론은 존재론으로 머문다. 존재에 참여하는 것은 존재를 생각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관념론은 전적인 이해이다. 반면에 실재론에서 존재는 이해에서 거부된다. 그런데 어떤 긍정적인 의미도 이 부정적인 의미를 보충하지 않는다. 인식에 의해서만 실재론적 존재는 자신의 두께와 자신의 무게를 긍정한다.
그런데 인간과 존재와의 관계는 다만 존재론적인가? 다시 말해 이해 혹은 불이해와 필연적으로 얽힌 이해, 존재에 대한 지배 한 가운데에서 우리에 대한 존재의 지배인가? 실존은 지배라는 용어에 의해 완성되는가? 창조의 이념을 함축하는 관계는 중세나 고대 철학에서 보이는 원인의 이념에 의해서 고갈되는가? 혹은 인간에게서 세계와 자신에 대한 지배를 제거하는 이해불가능한 기원의 이념에 의해서 고갈되는가? 창조된, 성적인 한에서 인간은 존재에 대해 힘 혹은 노예의 관계, 능동적 혹은 수동적 관계와 다른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가?
- 첫 번째 강연의 마지막 문장은 레비나스의 중요한 철학적 질문으로 끝난다. 우리는 그의 하이데거에 대한 한 글, "L'ontologie est-elle fondamentale?", "존재론은 근본적인가?"를 기억한다. 이 글은 바로 위의 첫 번째 질문, "인간과 존재와의 관계는 다만 존재론적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한다. 이 질문은 결국 존재와의 관계를(그것이 관념론이든 실재론이든) 존재에의 지배와 복종, 주인과 노예, 혹은 수동과 능동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의 불충분성을 지시한다. 마지막 문장 - L'homme en tant que créature ou en tant qu'être sexué n'entretient-il pas avec l'être une autre relation que celle de la puissance sur lui ou de l'escalvage, d'activité ou de passivité? - 에서 물어지는 질문은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질문으로 창조된 존재는 한편으로 창조자에 대한 전적인 자유와 동시에 전적인 의존을 동시에 드러낸다. 성적인 존재는 다른 성에 대한 성적 차이 안에서 절대적인 타자성과의 만남을 제시한다.
탄생과 죽음, 그리고 성은 우리 삶의 내밀한 세 요소이다. 레비나스는 이 셋이 우리 삶의 자기성을 구성하는 한에서 이 셋이 어떻게 그 자체 타자성을 드러내는지를, 어떻게 이 실존들은 힘에 의해, 가능성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전체성과 무한>의 한 구절을 읽어보면, "창조의 이념의 큰 힘은 ...이 창조가 무로부터(ex nihilo)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무로부터의 창조가 질료로부터 창조되는 데미우리구스 보다 더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에 의해서 분리되고 창조된 존재는 다만 아버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58)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죽음에 대해, 그리고 성에 대해서... 우리는 유사한 진술들을 만날 것이다.
- "힘과 기원"의 첫 번째 날 강연(1949년 2월 1일)은 그의 전집의 109쪽에서 132쪽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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