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미셸 앙리, 비-지향적 현상학: 미래의 현상학의 과제(3)

aurorepark 2010. 12. 22. 08:41

27. 앞서 내가 그린 삶의 현상학은 환원, 현상학적 환원 안에서 구성된다. 여기서 말하는 환원은 갈릴레이적 환원도 후설에 의해서 행해진 현상학적 환원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이 두 환원에 반한 것이다. 비-지향적인 환원, 즉 삶의 현상학을 이끄는 현상학적인 환원은 어떤 존재자와도 관계하지 않고 현상성 그 자체하고만 관계하는 근본적인 현상학적인 환원이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행위 안에서, 이 환원은 우리는 그리스래로 우리에게 보여질 수 있고 인식과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을 드러낸다고 믿는 세계의 현상성, 가시화의 탈자적 지평을 박탈한다. 세계의 지평이 정지될 때, 자신의 고유한 현상성 안에서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다시 말해 삶의 비-탈자적 파토스 안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최초의-드러남 Archi-Révélation만이 지속된다. 이 근본적인 현상학적인 환원은 『영혼의 정념론』 26에서 데카르트가 세계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결국 이것을 몽상과 같은 것으로 유지하면서 보편적인 꿈에서 더 이상 세계의 현상화가 아닌, 정감성, 예를 들어 두려움 - 그리고 모든 영혼의 내적인 양태들에서 드러나는 현상화만을 타당한 것으로 유지했을 때, 그에 의해 실천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꿈을 꿀 때, 꿈에서 내가 보는 모든 것은 거짓이다. 그런데 만일 항상 이 꿈에서 내가 어떤 두려움을 느낀다면, 이 두려움이 꿈과 관계된다고 할지라고, 이 두려움은 내가 느끼는 것으로 절대적으로 실존한다.


28. 비가시적이고 비우주적인 정념적인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근본적인 현상학적 환원은 우리를 결국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고, 일종의 신비주의에 갇한 밤으로 인도해서 세계를 잃어버리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우선 비-지향적인 의식만이 우리의 세계에로의 열림 그 자체와 이어서 이 세계의 내용 그 자체 근거지운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그 내용이 문제가 되는 경우, 세계의 나타남은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에 의해서 밝혀진 것dévoilé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야한다. 밝혀진 것, 그것은 존재자이다. 세계의 탈-자ex-stase 안에서 밝혀짐은 사실 환원 불가능한 현상학적인 어떤 성질들, 특히 지평의 타자성 안에서 다른 것으로 드러남이라는 성질을 존재자에게 부여한다. 어쨌든 여기서 하나의 일반적인 특질은 개별적인 존재자의 특수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자를 자기 밖으로 던지면서 그것의 실재를 비우면서 원리적 비실재 안에 존재자를 세운다.  세계 안에는 어떤 실재의 내용도, 어떤 실재의 "존재자"도 가능하지 않다. 세계의 나타남은 예를 들어 시인이 말하는 사물들과 내가 책을 읽고 있는 이 서재를 채우고 있는 사물들을 차별화할 수 없다. 지향성들의 후설적 분리도 이것을 더 잘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느낌sensation, 다시 말해 삶의 조건 하에서만 지각의 의미에서 지각하기 때문이다.


29. 세계의 "내용"에 대한 우리의 주장에 대해서 말해보자. 그것은 삶의 객관화일 뿐이다: 삶의 세계적 현시화가 다만 표상, 즉 자신의 실재를 포함하지 않는 삶의 "현상"인 한에서, 그리고 이 현상의 진정한 실재는 자신의  정념 안에서만 존재하는 한에서, 세계의 내용의 "실재"는 삶 그 자체이다. 태평양의 산호초를 제외한다면, 세계의 내용은 맑스가 아이러니하게 말한 것처럼, 사회적 실천parxis이다: 이 사회적 실체를 움직이는 법칙들은 세계의 현상성, 그것의 이미지(칸트가 예를 들어 아주 정교하게 그것의 구조화를 드러낸 것)가 아니라, 그것은 비가시적이고 정념적인 법칙들이다. 그것은 삶의 법칙들이다. 그것은 정감성 안에 힘의 뿌리박기이며, 정감의 무게 아래서 일어나는 충동의 돌출이며, 그것은 삶 안에서 모든 사회, 예를 들면 생산과 소비의 사회로서 세계의 내용을 규정하는 필요와 행위의 규정되지 않은 반복intération이다.


30. 그런데 비지향적인 현상학은 세계의 내용의 객관성이 다만 가상일 뿐이며, 본래적이고 실재적인 현상학적 지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어떻게 왜 이 사회적 실재의 명백한 객관성이 합법적으로 이론적으로 근거지어지는 가를 설명한다. 왜냐하면 정확히 삶의 현상학적인 지위는 이 이론적인 객관화를 포함하고 그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삶에 필요한 사용가치 전체로서 자연을 산출하는 삶, 그것을 산출한 살아있는 노동의 척도를 전제하는 이 가치의 교환, 측정할 수 없고 질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주체적인 삶의 양태로서 이 노동 - 경제는 이 정념적인 모든 활동을 경제를 구성하는 객관적인 이념들로 대체한다. 따라서 경제는 삶의 이념적 두블double일 뿐이며, 삶으로부터만 알려질 수 있다. 오늘날 경제 그 자체는 갈릴레이적 기술의 침입에 의해 내적으로 파괴되었다. 기술은 생산의 과장에서 살아있는 노동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이념적 등가 - 돈 - 을 제거한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교환, 즉 경제를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 눈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것, 지구에 퍼진 위험은 궁극적으로 삶의 법칙들로부터만 설명될 수 있다. 이 삶의 법칙들은 자신의 현상성 그 차체로부터 나오며, 비지향적인 현상학만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세계 안에서 우리는 삶의 다양한 대체물들, 다시 말해 "이성적"인, 즉 계산가능한 삶의 구조를 구성하는 대체물들 - 삶 그 자체에 의해서, 말하자면, 자신을 따르고 스스로 성장하는 그림 안에서 삶의 성장 안에서 발명된 대체물들 - 의 초월론적인 생성을 생산하면서 산다. 


31. 끝으로, 이 세계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에의 접근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후설 현상학에서 이 접근은 지향성에 맡겨진다. 지향성은  나타남에서 자신과 관계하지 않으며, 그래서 자신으로 보내진 지향성, 무의식적 봄은 아무 것도 보지 않으며,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열어보여 주지 않는다. 보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보지 않는다. 봄이 자신이 보는 것은  모든 봄에 낯선 최초의 드러남Atchi-Révélation, 삶의 최초의 계시 안에서 자기증여의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 지향성은 없고, 다만 지향적인 삶만이 존재한다. 이 삶에 고유한 현상성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지향성의 봄의 근본적인 이질성 안에서, 정념적인 자기-촉발만이 삶으로서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지향적인 현상학의 의무이다. 


32. 왜냐하면 지향성은 지향적인 삶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향성은 규정되지 않은 혹은 무차별적인 봄이 아니며, 그것이 구성하는 의미들은 그것들의 깊은 동기를 삶 안에서 길어낼 수 있으며, 삶으로 부터 끌어낼 수 있다. 후설의 탁월한 발견인 지향성들의 차이는 삶 안에 자리하는 차이들로 보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보여진 것의 내용은 더 이상 삶의 대체물이 아닌 삶과 관계하며,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것을 보는 방식이 더 이상 아닌 삶과 관계한다. 표상의 우주는 더 이상 자신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으며, 현대 사유는 소펜하우어에서 프로이트까지 그것을 말하고자 시도했다. 그런데 그것의 설명의 궁극적인 원리는  사후세계 안으로 던져질 수 없으며, 사변과 우화로 포기되어질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의 원리가 봄을 회피하면 할수록, 비지향적인 현상학의 필요성을 더 강하게 느께게되며, 그것의 힘이 더더욱 요구될 것이다.


33. 그런데 비-지향적인 현상학은 우리에게  세계를 알려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비 지향적인 현상학은 현재까지 예술이나 정신성의 다양한 향식들이 철학 그 자체보다 더 풍요롭게 단편적으로 혹은 단속적인 직관의 형식으로만 우리에게 제시되었던 것을 탐험하기 위해 특수한 영역, 삶의 거대한 영역을 가진다. 그것의 특수성 안에서 이 영역을 인정하고, 그것이 나아갈 방향을 그리고, 적절한 방법론을 찾는 것, 그것은 비-지향적인 현상학의 과제이며, 내일의 현상학의 과제들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