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 앙리의 "철학과 주체성"(1989)은 Encyclopédie philosophique universelle (vol I p. 46-56)에 실린 것으로, 그의 논문집 Phénoménologie de la vie II: De la subjectivité, p. 25-55에 실려있다. 아래 번역에 붙은 번호들은 원문에는 없는 것으로 읽기의 편의를 위해 덧붙여진 것들이다.
1. 주체성(subjectivité)이란, 우리에게, 자기가 자기를 느낌(s'éprouve soi-même)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느낌"이라는 속성을 가진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서 그 자체로 고려되는 한에서 자기가 자기를 느낌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말한다. 자기가 자기를 느낌, 이것은 모든 경우에 이 나타남이 어떤 겪음(une épreuve)의 의미를 가지며 그 나타남이 겪음들 가운데 하나인 방식으로, 자기에게 자기가 나타남(s'appraître à soi-même)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것이 주체성으로서 나타남 그 자체와 다르지 않기에, 주체성이 내적으로 구성되고, 자신의 본질을 전개하는 것은 항상, 다만 나타남이 자기가 자기에게 나타남이라는 방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 subjectivité, 주체성, 주체적인 것, 그 말이 가진 아주 오래된 본래의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리스가 형이상학 Z 편에서 upokeimenon, sous-jacent-au-fond, subjectum, subjectité(subjectivité가 가진 근대적인 의미와 구분하기 위해, subjectum 말 그대로 아래 놓여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subjectité라고도 쓴다) 바닥에 놓여있는 것, 감춰져 있는 것으로, "다른 모든 것이 이것에 의해 말해지면서 자신은 다른 것에 의해서 말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부른 것, 다시 말해 "한 주어의 술어일 수 없으면서 다른 모든 술어들이 이것에 의해서 말해지는 것", "절대적인 주체", "궁극적인 주체"라고 칸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의 개념을 상기하면서 불렀던 것(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위한 서문, § 46), 내적 현상과 관계하면서, 알려질 수 없으며, 전혀 어떤 하나의 개념이 아닌, "최소한의 개념도 (이름도) 없는 실존에 대한 감정"(§ 46, 주. 4)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칸트가 불렀던 것,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알려질수 없는 것"으로 "순수질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알려질 수 없는 이유는 알려질 수 있는 모든 것은 형상과 질료의 결합에 의해서 일 뿐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실체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속성을 제거해 보라!, 거기에 남는 것은 알려질 수 없는 근저에 놓여있는 것 뿐이다. 레비나스도 같은 시도를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 존재자들을 다 부정해 보라!, 거기에 남는 것, 잔여는 무엇인가? 무? 모든 속성이 제거되고 나서 남는 것, 그것은 무엇이라고 손으로 지시할 수 없는, 이름할 수 없는 다만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마치 텅빈 방에서 울리는 웅웅거리는 울림처럼 울려오는 "il y a", "...있다"는 느낌, 경험만이 남는다... 현대 철학의 주체성의 문제는, 아니 이미 데카르트가 근대철학의 문을 열면서 열어 놓은 주체의 문제는 그 근원에서 가야할 길들의 괴적을 이미 그리고 있다. 그 이후의 칸트와 헤겔을 거쳐, 후설과 하이데거를 거쳐, 근대 철학이 열어 놓은 주체성의 문제는 멀리 아리스트텔레스의 근원적인 주체에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가 열어 놓고 가지 않은 길을, 이제 때가 되어서 열릴 길들을 펼쳐보인다. 레비나스의 주체성에 대한 이론이, 그리고 여기서 앙리가 밝히는 현상학의 새로운 주체성의 이론은 이 말이 일반적으로 가진 사전적 의미를 전복한다. 앙리는 주체성이란 말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s'éprouver soi-même 자기가 자기를 느끼는 것, 자기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 자기가 자기를 견디는 것, 자기가 자기를 겪는 것, 자기가 자기를 경험하는 것, 자기가 자기를 체험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s'apparaître à soi-même 자기가 자기에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며, ce qui apparaît 나타나는 것이 appparaître lui-même 나타남 그 자체가 다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나타나는 것과 나타남 그 자체가 하나인, 자기가 자기와 다르지 않은, soi가 Soi와 다르지 않은, (자기가 자기를 느낄 때, 여기서 말해지는 두 자기 사이에), 존재자와 존재가 다르지 않은, 조금의 간격도, 최소한의 거리도 없이 자기가 자기에 붙어있는, 숨이 막힐 지경으로, 목을 죄듯이, 못 박혀 있는, 도망칠 조금의 자유의 공간도 없이 붙어있는 것, s'éprouver soi-même, 이것은 앙리가 말하는 순수한 존재에 대한 혹은 삶에 대한 순수한 경험, 체험, 시련, 느낌을 의미한다. 마치 사르트르가 la conscience de soi를 la conscience (de) soi라고 적으면서, 자기와 자기와의 거리를 제거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반성의 회로를 거울의 즉각적인 반사로 설명한 것처럼, 앙리는 자기의 자기에 대한 이 관계에서 자기와 자기 사이의 거리, 그 관계를 제거한다: 자기-촉발 auto-affection. 그런데 이 무관계에서 어떻게 자기는 자기와 관계하는가? 달리 물으면, 거리, 간격이 없는 것에서 어떻게 주체의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가?
2. 나는 지속적으로 세계를 체험하고, 내가 발을 딪고 있는 바닥을 체험한다. 그런데 바닥은 스스로 자기를 체험하지 않는다. 바닥은 전혀 자기에 대해 존재하지 않기에, 바닥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내 안에서, 나에 대해서 세계는 나타나고 세계는 나에게 주어진다. 매순간 나에게 세계를 주는 주체성은, 우리가 세계라는 말을 있는 바의 모든 것으로 이해한다면, 주체성은 이 모든 것들의 토대이며, 그 위에서 모든 것들이 관계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이다.
3. 주체성이 세계를 느끼는 한에서, 아니 차라리 주체성이 이 느낌인 한에서, 주체성은 순수하고 단순한 느낌, 즉 주체성에 대해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이 없는 벙어리 자기-촉발(auto-affection muette)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체성에 대해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절대적인 주체성인 우리 안에 이 자기의 최초의 느낌의 토대 위에서만 세계를 느낀다. 여기서 어떻게 그리고 왜 이중의 느낌이, 즉 주체성이 세계에 대해서 느끼는 것과 주체성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느끼는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그리고 일종의 이 두 개의 촉발이 서로 어떻게 관계하는 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촉발(affection)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명시화하는 것은 위에서 제기한 질문을 밝히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매번 "느낌(éprouver)" 안에서 "무엇에 의해 촉발됨(être affecté par)"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느낌 혹은 이 촉발이 나타남 그 자체 안에 존재하는 한에서 나타남의 본질을 질문하는 것이다.
- 항상 참만을 말하는 순수한 감각의 벙어리의 현상학은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서 말해진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와 시간> 7절에서 이를 상기하기도 한다. 후설도 "처음, 그것은 순수한 경험이고, 말하자면 아직 벙어리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을 이 처음을, 이 벙어리인 경험을 그것의 고유한 의미로부터 순수한 표현으로 이끄는 것이다"(데카르트적 성찰, § 16)라고 말한다. 자기 촉발, 자기가 자기를 만지는 것, 자기-정감, 자기-경험, 자기-체험, 만지는 것과 만져지는 것 사이에 어떤 간격도 없다. 여기서 자연적으로 어떻게 이 순수한 경험이 자기를 표현하는가? 이 벙어리의 촉발은 어떻게 말을 시작하는가?
4. 따라서 현상학의 의무가 제시된다. 현상학의 대상은 과학이 담당하는 현상 전체가 아니라, 매번 그것들을 그와 같은 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 즉 그것들의 증여의 양식, 즉 주체성이다. 현상학과 더불어, 철학은 자신의 고유한 대상을 획득한다. 그리고 현상학은 주체성의 철학이며, 그것은 이런 방식으로 다른 모든 과학들과 구분된다. 특히 심리학과 구분된다. 심리학은 자신도 주체성에 대해서 말한다고 믿지만, 심리학은 그것을 모든 가능한 존재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이어서 유기체, 외적 세계, 사회적 환경 등등 나머지 존재들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다룬다. 그것은 원리적으로 주체성을 결하고 있다.
- 현상학의 과제, 의무, 대상이 제시된다. 초월론적인 현상학, 그것을 그것되게 하는 조건으로서 줌의 양식, "대상들의 어떻게", 주체의 주체성을 밝히는 것이다.
5. 주체성으로서 모든 것의 토대의 대한 해석 - to upokeimenon, 아래 놓여있는 것 - 은 처음으로 데카르트에서 완성되었다. 그의 코기토는 근대철학의 문을 연다. 이미 고대철학에서 회의주의는 세계 그 자체의, "객관적"이며 "사실"인 세계 그 자체의 환상을 비판하면서, 세계를 주관적이고 변화하는 소여의 양태들로, 본질상 상대적인 감각들로 환원하면서, 주체성의 방향에서 즉, 사물들의 존재의 문제가 해결될 최후의 그리고 동시에 모호한 계기로 향하는 것에서 자신을 알려왔다. 지식과 진리에 필증적인 질서의 토대를 부여하기 위해, 비록 아직 그것의 최후의 주체성으로서 자기 합법성으로 이해되지 않았다고 할지라고, 고대 사유에 도약을 제동했던 것은 바로 이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 아마도 앙리는 데카르트의 의심을 고대의 회의주의와 비교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는 듯이 보인다. 결국 이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도약을 제공하는 수단으로서의 회의, 자신의 철학의 궁극적인 가능성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과학의 질서의 객관성에 자신을 양보하는 데카르트의 여정에 대해서, 그리고 그로부터 출발하는 후설에의 유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듯이 보인다. 그는 데카르트 철학적 성찰 중의 제 1 성찰과 제 2 성찰만을 가치있는 것으로 본다. 그 이후의 성찰은 자신이 본 것을 끝까지 이끌지 못하는 실패로 나타날 뿐이다.
6. 데카르트의 두 개의 성찰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주체성은 그런데 그것의 궁극적인 결과들에 이르지 못한다. 주체성을 영혼으로 만들면서 즉 신체와 구분되는, 그런데 결국 그것에 겹쳐지는 실재로 만들면서, 데카르트는 모든 실재의 근원으로서 주체성을 이 실재의 조각으로 만들기 위해, 주체성을 줌(증여)으로 생각하기를 그친다. 그가 주체성의 기능, 즉 코기토로서, 그것에 대해 모든 사유들이 존재하는 주체성의 증여하는 기능을 유지하는 반면에 그는 그것으로부터 서둘러서 세계의 과학적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면서 코기토의 체계적인 탐구를 끝까지 추구하지 못한다. 이렇게 주체성은 자기 의식에서, 그것의 내기에서 충만하게 전개되지 못한 채, 그것의 고유한 초월론적인 의미작용 안에서 알려질 수 있었다.
7. 반면에 이러한 유사 전개는 후설에서 현상학의 출발점을 정의한다. 현상학은 주체성을 탐구의 주요한 주제로 앞에-내어 놓는(pro-duire) 현상학적 환원에서 실현된다. 이 환원은 우리가 후설의 유언으로 간주하는 <위기>에서 여러번 다뤄지고 이중의 운동으로 드러난다. 우선 환원이 한 일은 데카르트가 자신 앞에서 발견했던, 그것의 전개가 사유의 양태와 유럽인들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개념을 전적으로 전복한, 인간을 있는 바의 것으로 만든 갈릴레이의 과학적 세계를 괄호 안에 넣은 것이다. 과학적 인간의 개념화에 따르면, 인간의 주관적인 나타남들과 이해들의 상대성과 변천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진정한 존재, 즉 주관적인 모든 것을 넘어서, 그것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인식 안에서 기하학적 규정만이 유일한 인식을 구성하는 시-공간적인 우주의 추상적인 형식만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감각적 성질, 일반적으로 주체성과 관계하는 모든 것을 한쪽으로 치워놓는다. 감각적인 것을 고려에서 제거하자마자 그로부터 "새로운 자연", "초-주관적인" 것이 솟아오른다. 세계의 직관적인 소여 전체는 자연에 대한 주관적인 제시일 뿐이며, 자연 그 자체의 한계의 형식으로서 수학적인 이념성 덕분에 자연에 대한 파악이 추진된다. "갈릴레이, 그는, 기하학으로부터, 그리고 감각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과 수학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세계로 향하는 시선 안에서, 개인적 삶을 실어나르는 인격으로서의 주체들을 추상하고 정신에... 속한 모든 것, 인간적 실천에서 사물들에 속한 모든 실제적인 속성들을 추상한다"(위기, § 10) 정신들의 세계, 즉 정신 과학들의 대상이며, 갈릴레이적 자연과의 분리를 통해서 얻은 정신들의 세계는 갈릴레이의 자연과 절대로 대칭적이지 않다. 그 자체 닫힌, 그 자체 충분한, 자율적인 우주를 구성하는 것과 달리, 정신들의 세계는 반대로 인간과 동물의 정신성인 한에서 자연 위에 그 토대를 가진다. 즉 자연에 의해서 설명 가능하고 그것에 의해서 알려질 수 있는 물체성 안에 그 토대를 가진다. 모든 경우에 주체성은 환원되어야 할 가상이며, 과학은 이 환원이다.
8. 우리 시대의 과학적 실증적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주장들에 대한 후설의 전복은 그의 철학적인 사유의 주요한 분석들 중의 하나이다. 과학의 수학적 이념성들의 세계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 후자 안에서 일상적인 삶의 관심들과 객관적인 것들이 전개된다. 이것은 수학적인 이념성들의 세계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세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수학의 이념적인 세계는 감각적이고 실천적인 세계의 이념화이며, 후자를 토대로서 전제한다. 그 위에서 전자는 구성되고 피할 수 없이 후자로 보내진다. 한편으로 과학적인 이념화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다만 이 삶의 세계에 대해서이며, 다른 한편 전자는 이것을 산출하는 주관적인 작동을 전제한다. 주체성을 가상으로 환원하는 대신에 과학의 세계는 주체성 안에서 과학의 가능성의 영원한 조건으로서 그것을 지속적으로 낳는 원리를 발견한다. 모든 인간과 동물의 정신성을 설립하는 자연은 결국 과학과 그것의 추상적인 이념성들의 세계가 아니라, 그것은 삶의 세계, 주관적인 줌의 감각적인 양태 안에서 지속적으로 직관될 수 있고, 느껴질 수 있는 세계이다. 갈릴레리의 환상은 실재의 세계에 대한 유일한 인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믿어진 수학적인 세계를 실재의 세계 그 자체로, 주체성 안에서 느껴지고 직관될 수 있는 세계 그 자체로 간주한 것이다.
9. 주체성은 삶의 세계와 필연적으로 관계하는 과학의 수학적인 세계의 이념화만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성은 우선 삶 그 자체의 세계를 산출하며, 삶의 세계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절차, 양태들 전체 즉 근본적인 방법론과 다르지 않다. 항상, 지속적으로 우리는 앞서서 주어지는 세계에 던져져 있으며, 이 세계는 우리에 대해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는 것 전체를 자신 안에 가두며, 이 세계는 모든 존재자의 보편이며, 존재자들의 모든 행위와 그들의 모든 목적들의 영역이다. 모든 가능한 대상들, 모든 전념들 이 세계의 지평 안에 자리한다. 그런데 이 존재자들, 이 세계 그 자체는 절대로 마치 그들의 성질들의 아래 놓여있는 것(substrats)으로서 거기에 즉각적으로, 말하자면 그 자체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정확히 그들의 주체의 나타남의 변화하는 양태들 안에서, 이 양태들의 "어떻게" 안에서만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직접성은 이 줌(donation)의 직접성이며, 이 줌과 혼동된다.
10. 우리가 이 사물들의 주는 양태들에 주의하지 않고, 더 나아가 이것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종합적으로 연결된 양태들이 완성되는 절차의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는 작용은 절대로 외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입방체, 혹은 집의 한 측면에 대한 지각은 지나간 혹은 올 모든 지각들, 대상들의 내적, 외적 지평들의 지각들, 기억들, 기대들 등등을 함축한다. 따라서 세계의 타당화의 모든 실제의 작동은 절대적인 주체성의 흐름 안에서 함께 기능하는 함축적 타당화의 무한의 지평, 즉 무한한 지향적 보냄의 놀이를 따라서 구성하는 경험의 앞선 획득들과 저변의 전체성, 살아있는 지평과 분리될 수 없는 맥락을 전제한다. 항상 주체의 변천들 안에서 이미 앞서서 주어지는 삶의 세계 너머, 한 목소리의 과학적인 세계 너머, 정립은 주체의 변천들에 의존하는, 그것들을 전제하는 최상의 주체의 형성일 뿐이다.
11. 주체의 모든 제시들에 따라서 삶의 세계는 그것들의 출현들과 주체의 지향들의 변화를 통해서 유일하고 보편적인 가치로서 우리에 대해 산출되기를 그치지 않으며, 이것은 아주, 자주 감춰져 있다. 자연적인 삶은, 그것이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그것의 아주 자연스런 태도를 따라서 존재자들과 자연적 삶의 눈으로 그것들이 구성하는 목적들 앞으로 실려간다. 그래서 이 삶은 그것들 안에서 그 삶이 제시하는 가치들에 빠져서 일종의 도취, 후설이 말하듯 "길 읽음"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잊어버린다. 즉자적 세계에 대한 순진한 개념화, 과학 안에서 재산출된 개념화는 이런 자연적인 태도로 부터 나온다. 그 안에서 삶은 항상 세계 안의 세계를 위한 삶이며, 이 삶을 위해서만 세계는 존재한다.
12. 이 삶을 위해, 어쨌든, 이 세계는 그가 전념해야할 유일한 대상인 것처럼 존재한다. 삶을 위해, 주체의 모든 제안들 안에서, 그것들에 의해 삶은 세계에 의미와 존재를 주기를 그치지 않는다. 다만, 이것, 모든 가능한 의미와 모든 유형의 존재의 구성에 의해서 주체성은, 이 구성과 다르지 않은 주체성은 세계를 모른다. 최초의 환원은 우리를 과학적인 세계로부터 앞의 세계의 필수불가결한 토대로 사용되는 삶의 세계로 이끈다. 이 삶의 세계는 주체들 사이를 종합하는 주체의 작동들의 보편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리고 이 세계는 이 주체의 작동들 사이의 상호관계일 뿐이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구성하는 이 삶은 이 세계 안에서 잃어버린 삶의 자연적인 태도 안에서는 만날 수도 알아차릴 수도 없다. 이 삶을 발견하기 위해서, 두 번째 환원을 필요로 한다. 삶의 세계 안에서 우리의 직접적인 삶을,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추상하는 환원은 "내적 삶(vivre dans)" 그 자체를 주제로 즉 대상으로 취할 것이다. 따라서 삶의 세계에서 그 자체로 통각된 앞서 주어진 삶(sa pré-donnée)으로의 시선의 전향이 실행된다. 이런 주제의 이동 안에서 (더 이상 과학적이 아닌) 실재의 세계로의 돌아감 안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주체성에 대한 질문이 행해진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적이고 초월론적인 환원이다.
13. 이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전적인 전복을 의미한다: 환원은 존재의 전적으로 가려진 영역, 지금까지 통각되지 않은 현상 전체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의 철학사에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다. "이 순수하게 주관적인 현상들"은 다른 현상들, 즉 일상적이고 과학적인 경험의 세계를 구성하는 현상들과 겹치지 않으며, 전자는 후자를 근거짓는다. 다시 말해 순진하게 그 자체로 파악된 현상들을 매번 현상들로, 즉 그것들의 현상성으로 만든다. 이 절대적으로 유일하고 본래적인 이 영역은 수 천년 동안 알려지지 않고 감춰져 있었다. 여기에 존재의 감춰진 토대를 우리 눈 앞에 충만한 빛 안으로 던지기 위해 이 기억 불가능한 밤에 끝을 내는 초월론적인 현상학의 환원의 놀라운 사실이 있다.
14. 어떤 조건에서 그럴 수 있는가? 세계에 대한 에포케는 다른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존재와 의미를 발견하는 근원적인 존재의 영역의 초월론적인 의미 안에서 주체성을 밝히는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명백하게 파악되어야 한다. 최초의 환원은 세계의 영역 위에서 유지된다. 자연적인 태도에서 나는 집을 지각한다. 그런데 이 집에 대한 나의 지각에 주의하지 않는다. 항상 나는 이 세계를 의식하며, 그런데 절대로 나는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의식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데 또한 자연적인 반성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의식 그 자체를 질문하고, 그것을 대상적인 지향 안에서 파악하는 것은 의식을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다루는 것이다. 인류의 습관적인(일상적인) 통각은 이런 식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성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통각은 주체성의 자기-대상화일 뿐으로, 존재자로서의 의식의 종말을 의미한다. 세계의, 존재하는 모든 것의 대한 괄호치기만이 주체성을 이러한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떼어내면서,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면서, 주체성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존재의 속성 안에서 "궁극적인 심급 안에서 절대적으로 유일하게 기능하는 자아"(위기, § 55)를 보존한다.
15. 주체성의 발견은 이렇게 초월론적인 더 이상 자연적이 아닌 반성 안에서 산출된다. 이것은 구성하고 작동하는 나의 삶 그 자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내가 전적으로 지배하는 이 삶 위에 나를 놓는다. "어떤 것 위에"라는 범주는 후설의 모든 기술에 들어오고, 이중의 역할을 가진다. 그것은 한편으로 현상학자(초월론적인 반성)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괄호 안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이로부터 그는 더 이상 삶의 세계 안에 직접적인 삶의 내면성에서 살지 않는다. 삶의 체험 위로의 고양이 이 체험을 변질시킨다면, 이 고양은 체험을 그것의 진리에서, 다시 말해 세계에 그것의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것의 기능에서 보여준다. 따라서 더 이상 세계에 대한 믿음과 공유하지 않는 현상학자는 이 믿음을 그 자체로,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성으로 통각한다. 현상학자는 주체성을 궁극적인 심급 안에서 기능하는 것으로 통각할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안에서 주체성이 구성하는 세계, 다시 말해 주체성과 동시에 현상학자가 그의 시선 아래에서 유지하는 세계, 사유의 사유대상(cogitatum de sa cogitatio)으로서 세계를 발견한다. 세계를 괄호 안에 넣으면서, 환원은 세계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환원은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반대로 환원은 이 세계에서, 더 이상 그것의 사실적이고 순진한 실존에서 고려된 세계가 아니라, 그것의 초월론적인 생성의 질서, 즉 수동적이며 능동적인 생성을 따라서 우리를 드러낸다.
16. 그런데 후설 현상학의 위대한 이러한 주제들은 우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어떤 역설 앞에 놓는다: 나타남이 나타남 안에서 자신을 동반하는 본래의 나타남을 구성하는 주체성 - 마치 모든 가능한 나타남의 원천으로서 - 은 현상성(phénoménalité)의 조건 안에서 그 자신으로부터 나타나지도 그로부터 유래하지도 않는다. 이것을 위해 주체성은 다른 것, 자신의 원리와 다른 원리의 간섭과 특수한 방법, 즉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 안에서의 그 원리의 적용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사실 주체성 자체가 아니라면, 누가, 주체성과 다른 어떤 원리가 주체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현시하는 방법에 개입하는가? 누가 이 환원을 수행하는가? 다시 말하면, 누가 환원 안에서 보고 환원이 보는 것을 보는가? 이 누구는 주체성 그 자체가 아니면 누구인가? 그런데 만일 주체성, 삶의 세계 안에서 직접적인 삶인 이 주체성이 자신을 모른다면, 만일 주체성이 자기가 자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또 현상성 안으로 자신을 데려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주체성은 이 모든 것을 행하는가? 사람들은 환원이 종국적으로 도달하는 초월론적인 반성 안에서 행해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초월론적인 반성도 역시 절대적인 주체성의 직접적인 삶의 양태라면, 반성은 그 자체로 자신 안에 세계 안에 직접적인 삶과 동일한 무능을 가져야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만일 반성이 언제나 이미 자신 안에서, 즉 그 자체로, 그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의해 현상성으로 자신을 데려오지 못한다면, 반성은 어떻게 나중에(즉 환원 후에) 이 과제를 실현하는가?
17. 사실, 주체의 반성의 발명은 자연적 삶 안에서 주체성의 무능을 반복하지 않는다. 반성은 그것을 이중화한다. 반성이 장님처럼, 자신으로부터, 자신에 의해 현상성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주관적인 모든 양태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 삶의 세계 안에 자연적 삶이 그렇듯이 - 다만 직접적인 주체성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 앞에, 탈-자의 빛 안에 세계 만이, 단지 세계 만이 존재한다면, 주체성이 그것 앞에, 주체성의 시선의 봄 앞에, 그것 안에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것도 주체성이 아니며, 주체성일 수도 없다. 그 자체로 그것이 있는 바의 것으로 주체성을 모르면서 반성은 세계의 외재성만을 현시할 뿐이다. 현상학적 환원이 주체성을 발견한다는 주장은 아주 부조리한 방식으로 주체성은 그 자체로 자신의 고유한 발견이, 즉 현상성의 영역 안으로 자신의 직접적인 내적인 상승이 아니라는 것을 정립할 뿐만 아니라, 현상학적 환원 안에서 주체성이 자기를 발견한다는 주장은 이중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우선, 만일 환원이 반성 안에서 이것을 반성한다면, 반성 안에서 주체성은 자신 안에서 자신을 스스로 드러낼 수 없는 무능만을 드러낼 것이며, 이어서, 환원이 이 주체성을 자신 앞에서, 세계 안에서 발견한다고 믿는다면, 주체성은 더 이상 이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발견할 뿐이다.
- 이어지는 글들에서 우리는 앙리의 후설의 환원에 대한, 그의 현상학의 전적인 무능에 대한, 후설 현상학에 전적인 전복을 읽을 것이다. 프랑스 현상학자들 중에 가장 근본적이라고 불리는, 현상의 가능성을 그것이 갈 수 있는, 어쩌면 갈 수 없는 불가능의 지점까지 밀고 간다고 말해지는 한 철학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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