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현상학』 1권 (p. 105-121)
1. 비-지향적 현상학의 의미를 먼저 명시하자. 이런 현상학은 지향적 현상학에 대한 비판하는 듯이 보이고, 사실 그렇다. 이 비판의 범위는 단지 고전적인 현상학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현상학을 넘어 철학 일반을 견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비-지향적인 현상학의 주장은 과장된 듯이 보일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비판적 주장은 현상성이 스스로 현상화하는(la phénoménalité se phénoménalise) 본래적이고 근본적인 양태를 회피하는 듯이 보이는 현상성의 환원주의적 개념화의 정체를 밝히고 그것을 반박한다. [...] 현상성을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concevoir la phénoménalité autrement), 그것은 단번에 사유의 새로운 장과 더불어 새로운 사유의 절차를 요구한다.
- 첫 단락의 앙리의 주장은 명백하다. 고전적인, 혹은 역사적인 현상학, 즉 후설 그 이후에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현상학의 흐름의 한 전통 안에서 그들이 제기하는 현상학의 현상성의 질문은 잘못 제기 되었으며, 그로부터 현상성, 나타남의 본질은 전적으로 가려지거나 변질되었다고 앙리는 주장한다. 그들과 다르게 현상성을 생각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현상학, 새로운 철학의 장을 열 것이다.
"현상성이 스스로 현상화한다(la phénoménalité se phénoménalise)"는 것으로부터 그의 l'effectivité, effectif의 의미가 나온다. 이것은 현상학의 나타남의 실제성, 즉 그것의 실행성, 실천성을 의미한다.
2. 비-지향적인 현상학은 지향성 그 자체를 근거짓는 과제를 가진다. 그것은, 한편으로, 지향적 현상학이 전적인 비규정성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 현상학적으로 이 지향성의 토대를 세우면서, 후설이 길을 잃는 익명성에서 지향적인 삶을 끌어내면서, 비-지향적인 현상학은 지향성을 그것보다 더 오래된 토대에 다시 기입한다. 그리고 비-지향적인 현상학은 지향적인 현상학 안에서 그것을 완성하는 비-지향적인 것을 알아차린다. 지향적인 것 안에 비-지향적인 것의 재기입은 이로써 현상학의 궁극적인 가능성을 담보하며, 지향성을 불확실성과 비결정성에서 구해낸다.
- 비-지향적인 현상학은 지향성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지향성의 가능성의 발견으로 그것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부터 그것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이다. 동시에 후설이 길을 읽었다고 앙리가 말하는 익명성에서 주체의 주체성을 구해내는 것이다. 후설 이후에 현성성에 대한 질문은 하이데거가 그랬듯이 주체의 주체화(subjectivation)의 질문을 전적으로 가리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절차는 주체가 아닌 주체가 본래적으로 속한 세계로 향한다. 이 나타남은 현상의 진정한 현상성을 왜곡하고 가릴 뿐이라는 것이다.
3. 현상학의 지향적인 혹은 비-지향적인 성격에 대한 논의는 현상학의 진정한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파악으로부터만 이뤄질 수 있으며, 그것은 현상을 현상이게 하는 현상성 그 자체, 나타남 l'apparaître이다. 이 대상을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을 방법으로 규정하는 비본래적인 사유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감춰진, 드러난 지향적 행위에 함축된 의미를 보여주고, 그것을 명시화하는 과정으로 이해되는 이러한 방법은 나타남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어떤 것이 나타나는 한에서만 그것의 명시화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상학적인 방법은 현상학의 대상으로 보내지고, 그것은 후자에 의존해서만 가능하다.
- 앙리는 현상학을 방법으로 규정하는 비본래적인 사유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 현상학을 방법으로 규정함은 현상학의 환원의 방법, 더 정확히 말하면 현상학적 초월론적인 환원의 방식을 통한 의미 직관을 지시한다. 위에서 앙리가 비-지향적인 의식은 지향적인 의식보다 오래된, 그 이상의 것이라고 말했듯이, 의미의 지향적 밝힘은 그 것에 앞선 것, 나타남, 현상학적 대상에 의존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가시적이 것과 비가시적인 것과의 관계는 마치 보이지 않는 것이 드러난 것의 이면으로 이해되는 현실태적인 것과 잠재태적인 것과의 관계, 은패와 탈은패의 관계로 이해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레비나스가 "l'envers sans l'endroit", "정면 없는 이면"이라고 말할 때 그는 앙리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앙리의 주장은 현상학의 방법과 대상의 일치, 다시 말해 어떤 목적에 이르는 방법에 이미 그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면, "l'accès à l'objet fait partie de l'être de l'objet, 대상에의 접근의 대상의 존재의 부분을 이룬다"(EDE, 115)는 후설의 현상학의 탁월한 생각에, 우리는 "절대로 거기에, 의미에, 존재에 이르는 사다리를 제거하지 않는다"(Humanisme de l'autre homme, p. 33)는 생각에 대해 앙리 그리고 레비나스는 처음부터 후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출발이 두 철학자를 같은 길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두 철학자의 차이는 아마도 앙리가 인용하고 있는 카프카의 한 구절, "하나의 목적있는 데 길이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것, 그것은 주저이다[.]"? 의 물음표와 마침표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 문장에 끝에 앙리는 "?"를 붙인다. 여기에 마침표 "."를 찍는다면, 그 진술은 레비나스의 것이 될 것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에서 하나는 자기-촉발과 육화(incarnation)를 다른 하나는 타자-촉발과 영감(inspiration)과 흔적과 깨어남을 말한다.
알려질 수 있는 것(l'intelligible, le pensé, le phénomène, l'objet l'infini, l'Archi-intellogibilité, le but, l'être, le Soi, le Dire)과 지성(l'intelligence, la pensée, le logos, le méthode, le fini, le chemin, l'étant-la conscience, le soi, le moi, le dit) 사이의 이러한 일치는 후설의 의미직관에서, 하이데거의 진리의 개념에서, 그리고 메를로-퐁티의 "근본적인 역사성"의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앙리는 이 둘 사이의 일치를, 물론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와 다른 방식으로, 레비나스는 이 둘 사이의 간격, 흔적을 만드는 간격, 말해진 것과 말하기 사이의 최소한의 내적 간격을 기입한다. 이로부터 육화로서의 살과 영감으로서의 감성적 신체가 나온다.
4. 현상학적 방법이 그것을 근거짓는 나타남과의 관계에서 생각되어질 때 조차, 후자는 심각하게 손상되고 이미 변질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나타남은 정확히 방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데, 이 나타남의 전개는 봄과 보여줌의 장을 연다. 지향성이 던져지는 나타남 안에서, 지향성은 그것이 관계되는 것과 관계된다. [...] 이 때의 나타남은 가시성의 탈자적 지평이며, 여기서 모든 사물은 보여지고, 이어서 방법과 봄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현상학적인 방법은, 매번 직관의 채움을 찾는 지향의 운동에 의해서 실제적인 매 직관이 지향성 주변에서 새로운 지평의 무한한 연쇄를 드러내는 한에서, 세계의 경험과 유비적인 방식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지향적 현상학의 모든 비판은, 그 비판이 지향성을 탈자적인 나타남으로 보내는 한에서, 모든 현상학적인 의미를 상실한다.
5. 이제 원천적으로 그것이 지향적이든 아니든 현상학의 성격에 대한 우리의 탐구의 출발점으로, 그것의 방법이 아닌, 그것의 대상을 취하자. 이것은 후설이 여러번 다루는 것으로, 해석가들에 의해 사물이 아니라, 사물들이 주어지는 방식에 의해 구성된 것을,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안에서 대상들(Gegenskunde im Wie)"(『강의』, puf, 157)을 지시한다. 따라서 현상은 매번 특수한 내용 안에서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어지는 방식 안에서 고려된다. 이 한 현상의 증여의 어떻게는 현상의 순수한 현상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나타남 그 자체이다.
6. 그런데 나타남은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는 한에서만 그것 안에서 나타나는 사물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물은 스스로 나타남 안으로 자신을 가져올 수 없기에, 그리고 자신을 현상의 조건으로 고양시킬 수 없기에, 나타남이 나타남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나타나지도,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따라서 나타남 자체에서 나타남에 대한 질문, 증여, 줌 그 자체의 줌에 대한 질문, 현상성 그 자체의 실제적인 현상화에 대한 질문은 현상학의, 그것의 "사물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7. 만일 지금 우리가 대상을 통한 후설의 정의로 돌아간다면, 즉 현상이 어떻게 주어지는가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아주 큰 애매성과 마주한다. 이것은 그의 방법으로서의 현상학에 대한 정의로부터 나온다. "어떻게 안의 대상"이 나타나는 맥락은 체험의 흐름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지향적인 단일성인 흐름으로서 시간에 대한 내적 의식의 체험의 흐름의 분석에서이다. 이 때에, 이 대상의 증여, 줌(donation)의 어떻게의 본성이 명백히 지시된다: 그것은 원천적인 종합의 삼중의 양태를 따르는 지향성 그 자체로, 이 종합에 의해서 지향성은 내적 시간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 현재, 과거지향, 미래지향: "어떻게의 형식은 방향설정이다: 현실태, 막 지나간 것, 올 것." 이것은 시간을 구성하는 원천적인 지향성들로, 이것들은 내적인 체험들을 제공한다. 이 내적 체험 안에서 지향된 단위들은 그 자체 지향성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에, 이 소여의 정조, 후험적으로 초월적인 소여는 지향성으로부터 길어지며, 그 안에서 이 증여의 어떻게를 발견한다. 지향성은 보편적인 증여, 줌를 완성하고, 지향성은 이 증여 그 자체, 줌 그 자체의 어떻게이다.
8. 증여, 즉 대상의 줌이 지향성에 맡겨지면, 아주 특별한 현상학적인 상황이 창출된다. ... 이 상황은 증여를 완성하는 힘이 그것이(힘이) 주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다시 말해 나타남과 나타나는 것이 다르며, 현상성은 현상과 다르다 - 지향성은 그것의 상관자인 의식 대상과 다르며, 그것이 보여주는 "객관성"과 다르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언어 안에서 역사적인 현상학과 고전적인 철학과의 기밀한 친밀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한편으로 나타남(의식)을, 다른 한편으로 무엇인가, 존재자를 가진다. 존재자는 그 본성상 나타남에 이질적이며, 스스로 자신을 현상화할 수 없다. 나타남은 자신의 편에서, 필연적으로 자신과 다른 것, 존재자의 나타남이다. 나타남은 아주 근본적으로 그리고 아주 폭력적으로 자기로부터 등을 돌리고 전적으로 자기와 다른 것으로, 밖으로 향한다 - 그리고 이 나타남은 지향성이다. 나타남은 그것이 지향성인 한에서, 본질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faire apparaîre)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나타남이, 나타나는 나타남이 아니라, 그것은 그것 안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즉 존재자. 현상학의 대상, 그것의 "사물-자체"는 이렇게 그 본성을 잃어버리고, 이 대상은 더 이상 나타남이기를 그치고, 그것은 존재자의 나타남, 결국 그것이 나타나는 한에서 존재 그 자체가 된다.
9. 여기서 감춰진, 그런데 아주 결정적인 의미작용 안에서, 나타남이 존재자의 나타남이 되는 나타남에 대한 규정이 드러난다. 이런 나타남은 아주 특수한 나타남이며, 어떤 경우에도 이런 나타남은 현상학의 "사물-자체"를 구성하는 본래적인 나타남일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나타남은 아주 명시적인 방식으로 현상학의 중심적인 테마, 주제가 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비본래적인 나타남은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에 대해서 고려되지 않는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나타남이 자기로부터 등을 돌리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를 자신과 다른 것, 사실 나타남 안에서만 나타나는 존재자로 던지기에, 이 나타남이 나타남으로서 스스로 나타나는 한에서, 이 나타남의 근본적인 규정 - 나타남의 자기-나타남 - 은 (현상학 내에서) 사라진다. 이 근본적인 나타남의 규정은 나타남과 존재자와의 관계, 즉 지향성에 의해 대체된다. 1935년 핑크는 그의 논문에서, 후설의 주장을 반복한다: "봐야 하고 다만 보아야 한다." [...]
10.현상학의 원리, 유일한 기준이 되어버린 봄(voir), 지향성은 나타남을 짖누르고, 그것을 자신의 봄으로 환원한다. 여기서 지향성은 더 이상 자신을 자신 안에서 유지하지 않는다: 보여주는 것(faire-voir)것인 한에서 지향성은 보여진 것(le vu)으로 향한다. 그리고 지향성의 봄은 실제로 보여진 것의 보여짐, 사유(의식) 대상적인 대상(l'objet noématique)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후자의 현상학적인 지위는 그것의 대상적 조건[즉 사유 작용 noèsis]에 의해 규정되고, 그 안에서 고갈된다: 시선 앞에 놓여진다는 사실 안에서 고갈된다. 나타남은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고, 이 나타남의 현상성은 이 앞(Devant) 그 자체 [대-상, Gegen-stand 의 대, en face-, gegen]이며, 순수한 외재성, 존재자의 나타남인, 그런 나타남일 뿐이다.
11. 나타남을 지향성으로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두 결과가 산출된다: 한편으로, 나타남 그 자체는 보여짐(l'être vu) 그 자체, 거기 앞에 존재함의 사실과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관점(vision), 보여줌(faire-voir), 봄(voir)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이 봄에는 봄 그 자체가 가려진다. 그 봄 앞에 남는 것은 보여지는 것, 그 봄의 보여짐만이, 이 앞(ce devant)만이 남는다. 다른 한편, 이 보여짐은 절대적으로 보여진 진 것의 보여짐, 존재자의 나타남이다. 이 나타남은 존재자에게 적합한 것이며, 이 나타남은 그에게 고유한 것이며 -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적합성(covenance)는 아주 강해서 이 존재자는 나타남과 상호성을 갖게된다. 사실 나타남과 존재자는 상호관계(corrélation)이다. 현상학이 문제가 되는 경우, 나타남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되며, 그것의 줌, 증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된다. 반면에 존재자가 거기서 주어진다. 본래적인, 진정한 (authenntique)증여는 그것이 고유한, 진정한 존재자의 증여인 한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만일 현상학 - 여기- 현상학(phénoménologie-là) - 이 대상들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취한다면, 이 때에 이 대상들의 진정한 존재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나타남(혹은 가상,apparence) 혹은 그것들의 비본래성을 넘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존재자는, 우리가 그것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 안에서 스스로 주어져야 한다. 후설과 핑크의 현상학에서 문제가 된 이러한 증여는 존재자와의 본질적인 관계를 함축하며, 증여인 한에서, 이것은 하나의 봄(vue)으로, 그 안에서 존재자가 자신의 진정한 존재 안에서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발견되는(벗겨지는) 그러한 봄이다. "만일 존재자에 대한 진정한 지식이 가능해야 한다면, 본래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나타내는 자(un se-manifester),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자(un se-montrer), 진정한 존재자의 어떤 나타남(un apparaître) 위에서만 근거지어진다." 지식, 결국 나타남은 일종의 자율적인 방식으로, 존재자와 독립적으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와 정반대로, 그것은 그것의 나타남의 본성 안에서, 존재자의 나타남인 한에서만 있는 바의 것이며, 이 이름, 이 자격으로서만 그러하다: "지식을 앞서서 인식(préconnaître)하지 마라, 반대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존재자의 옆에서(auprès de l'étant) 그것의 존재 안에서 지식을 규정하라. 이것은 존재자를 철학적인 반성의 본래적 영역으로 만드는 것이다."
12. 이로부터 다음의 두 결론이 나온다.
1/ "현상성은 존재의 진정한-보여짐이다."
2/ 현상학에 대한 한 정의: "현상학은 존재자의 자기증여(auto-donation)의 우회로를 거쳐서 인간의 지식을 스스로 근거짓고자(autofondation)하는 시도이다."
-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의 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존재에 대한 이해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거치지 않고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과 타자』에서 다른 방식으로 말해진다: "Aborder l'exister dans l'existant, c'est l'enfermer dans l'unité et laisser échapper Parmédide à tout parricide que ces descendants seraient tentés de commettre contre lui. La solitude est dans le fait même qu'il y a des existants." , "존재자 안에서 존재(실존)에 접근하는 것, 그것은 실존을 단일성 안에 가두는 것이고 파르메니데스에 대항해서 그의 후손들이 자행한 모든 부친살해에서 파르메니데스를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존재자들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 안에 고독이 존재한다." 이러한 생각은 앙리에서 "존재는 존재자로부터 드러난다 L'être manifeste de l'étant"이라는 표현으로 그대로 반복된다. 물론 두 철학자의 동일한 비판이 동일한 지점, 동일한 목적을 위해 행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레비나스는이 실존의 심연, 이것의 괴물성, 그것의 과잉(l'excès)을 드러낸다면, 앙리는 이것의 생명성, 일치, 동일성을 드러낸다.
- 여기까지는 후설과 특히 하이데거, 메를로-퐁티로 이어지는 현상학의 한 흐름 안에서 그가 "고전적인"이라는 관용사를 붙이는 현상학에 대한 앙리의 정의이다. 이어지는 단락들은, 이런 현상학의 부조리성에 대해서, 이런 현상학에 대한 전적인 비판과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갱신된", "전복된" 현상학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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