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미셸 앙리, 비-지향적 현상학: 미래의 현상학의 과제(2)

aurorepark 2010. 11. 21. 07:38

13. 자기증여 autodonation의 개념에 대해서 나는 이 글의 처음에서부터 그것에 대한 분석을 도입하면서, 증여는 그 자체로 주어져야 하고, 증여 그 자체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타남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선 그 자체로서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타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냈다 - 고전적인 언어로 말하면, 만일 의식 그 자체가 순수한 의식으로서 의식적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의식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고전적인 사유가 정확히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기증여의 개념이 아주 역설적이고 부조리한 방식으로 존재자 그 자체에 적용된다. 그것이 역설적인 이유는 자기증여는 증여하고만 관계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부조리한 이유는 그 자체로 증여에 낯선 존재자는 자신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선험적으로 결여된 것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기증여- 후설이 Selbsgegebenheit라고 말하듯, 핑크가 자기증여 Selbstgebung라고 말하는 것처럼 - 현상성 그 자체를 지시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현상성은 다음의 방식으로서만이다: 즉 현상성은 존재가 존재자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생각되었으며, 자기증여의 개념은 전적으로 전복되고, 모든 가능한 그것의 의미를 상실한다. 그것은 더 이상 증여 그 자체의 궁극적인 내적 가능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존재자가 나타난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지향한다.



14.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자는 주어지는가? 핑크는 후설 대해서 "후설 현상학의 가설은 지향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지는 본래적인 의식은 존재에의 진정한 접근이라는 전제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L'accès à l'être, 존재에의 접근, 다시 말해 결국 존재자에의 접근을 의미한다. 나타남이 일단 지향성에 맡겨지고 나면, 존재자의 나타남,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자이기 위해서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핑크는 "존재자의 자기증여가 탐구되었다"라고 말한다. 이 탐구는 핑크가 "존재자의 자기증여의 지향적 분석의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향성의 사유 작용적-대상적 상호관계(corrélation noético-noématique)의 명시화를 말한다. 물론 그가 한 작업의 중요성과 그것이 가져온 결론들을 무시하거나 최소화할 수 없다. 그의 탐구가 가져온 긍정성과 그것의 혁명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현상학의 프로그람에 대한 진정한 대답인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인지 물을 수 있다. 질문은 후설 현상학의 가설이 유지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지향성이 우리에게 유일한 존재에의 접근인지 묻는 것이다.


15. 자기증여에 대한 질문이 존재적(ontique) 미끄러짐에서 나오자마자, 존재자와 비-고유한 방식으로 관계하기를 그치자마자, 이 질문은 고전적 현상학의 획득과 그것의 주장을 그 토대에서 뒤흔든다. 왜냐하면 그 질문이 자기증여를 그것의 고유한 장소로, 즉 증여 그 자체로 이끈다면, 그리고 고전적인 현상학의 증여가 지향성이라면,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존재자를 주는 지향성 그 자체에 우리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여전히 지향성에 의해서인가? 우리는 지향성의 질문 그 자체는 "존재에 진정한 접근"을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고전적인 현상학의 주장에서 지향성 그 자체를 빼어낸다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지향적인 현상학이 스스로 현상학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때, 즉 증여, 현상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때, 현상학이 이 질문을 지향성에서 제기할 때, 지향성을 현상학의 근본원리로 정립하는 지향적인 현상학은 스스로 파괴될 것이다. 


16. 여기서 그려진 지향적 현상학에 대한 비판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오해를 잠식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이 비판이 하이데거가 후설에 가한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후설은  현상학에서 지향성의 존재를 질문하지 않은 채 그늘 아래 내버려 두었다고 비판한다. 일반적으로, 현상학은 존재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이 존재에 대한 의미를 제기하지 않는다. 존재에 대한 질문은 현상학의 고유한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존재론이 두 번째 자리로 물러서자마자 현상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으로 데카르트에 의해서 파악되고 공식화된 현상학의 이론적인 전제는 존재를 나타남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지향성의 질문은 그것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의 나타남이며 - 왜냐하면 지향성은 존재자의 다양한 양태들에 의한 그것의 나타남이기 때문이다 - 지향성의 나타남의 질문은 이 나타남이 존재자의 나타남과 같은 종류의 것인지, 동일한 것이지, 지향성의 나타남이 지향성 그 자체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17. 처음에, 아포리가 아니라면, 일련의 어려움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지향성의 나타남, 다시 말해 지향성을 작동하는 지향성으로 만드는 나타남은 지향성이 자신의 작동 안에서 - 즉 존재자를 산출하는 지향성의 보여줌 안에서 - 산출한 나타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서 우리는 이 보여줌(fare-voir)의 현상성은 존재자의 보여짐과 다른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도 봄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봄 그 자체는 정확히 이 보여짐(l'être-vu) 그 자체 안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봄은 절대로 보여짐이 아니며, 지향성은 절대로 자신의 고유한 대상이 아니다. 지향성은 대상이 아니며, 존재일 수가 없다. 핑크에 의해서 다시 취해진 후설의 현상학에서 어려움은 증여의 "어떻게"가 관계하는 카테고리들은 증여 안에서 주어진 것에서 빌려올 수 없다는 것이다.


18. 핑크는 다음과 같이 서둘러서 묻는다: "우리는 개념적으로 어떤 것에 의해 (Wodurch)우리가 사물들과 대상들에 대해 가치를 가지는 개념들과 더불어 이 사물들과 이 대상들을 가지는지 규정할 수 있는가?" 결국 현상학의 근본적인 개념에 의해서 우리는 사물들과 대상들을 가지며, 이것은 지향성이다. 이 질문 안에 함축된 것은 지향성은 지향성을 생각하기에 적절한 현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고유한 드러남을 완성하는 것은 지향성이 아니며, 나타남의 자기-나타남은 존재자의 나타남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19. 후설에서 난제는  1905년 『강의』 39장에서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의 자기-드러남, 다시 말해 - 증여인 의식 - 증여의 자기증여에 대한 질문이 명시적으로 제기되었을 때, 우리를 눈멀게 하는 빛 아래서 발생한다.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후설은 지향성을 불러낸다. 의식과 모든 종류의 나타남이 지향성인 경우, 지향성 자신이 스스로 지향성을 드러내야 한다. 자기 드러남의 방식으로 자기와 지속적으로 관계하는 지향성은 흐름의 자기 구성의 과정이며, 이 과정은 이 흐름의 구조 그 자체로서 생각된다. 이렇게 감춰진 그런데 아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행해진 철학적 결정에 의해 의식의 삶의 구조는, 의식의 자기 드러남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나타남으로서 지향성에 맡겨지는 한에서, 자기 드러남의 조건으로 접힌다. 다만 이 흐름의 자기 구성의 과정 안에서만, 흐름의 구성하는 측면과 구성되는 측면은, 비록이 둘이 서로를 덮는다고 할지라도, 서로 구별되어져야 하며, 핑트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구성된 측면에 적절한 범주들은 구성하는 측면에 적용되어질 수 없다. 결국 우리는 후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된다. 바로 여기서 현상성의 원리는 밤으로 가라 앉는다. 그런데 만일  고전적인 현상학 안에는 나타나지 않음의 나타남이 가지는 현상성의 다양한 방식만을 기술하고 열거해야 한다면, 우리는 밤의 심연으로 빠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고전적인 현상학이 가차없이 자신의 실패한 다양한 공식화들을 - 그것의 최후의 표현은 의심의 여지없이 하이데거의 존재의 감춤이다 - 전개하도록 내버려두자.


20. 우리가 부딪친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나타남을 책임지는 본래의 나타남이 대상들을 드러내는 지향성의 보여줌과 동질의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현상학적인 환원을 통해 지향성 그 자체, 즉 지향의 보여주는 활동을 그 작용 밖에 놓는 것이다. 지향성과의 거리를 취하는 이러한 환원만이 우리를 자기-나타남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다시 말해 나타남 자체가 나타나는, 나타남 자체가 자기-나타남을 산출하는 그런 나타남으로서 본래적인 나타남의 문제 앞에 놓는다.


21. 이런 "자기-나타남"이 "실존하는지", 그리고 그것은 사변적인 개념, 그 자체 문제적인 것과 다른 것인지 물어야 한다. 현상학에서, 사변적이고 문제적인 개념은 아무 쓸데가 없다. 우리가 말하는 자기-나타남은 자신의 실행적인 나타남 안에서 그것에 의해서, 반박되어질 수 없는 자신의 현상학적인 실행성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기서 명백히 파악해야 하는 것은 나타남을 자기-나타남으로 가능하게 해야하는 나타남의 본질이다. 예를 들어 만약 이 나타남이 지향성의 보여줌이었을 때, 나타남은 자기로부터 지속적으로 등을 돌리며 이런 나타남 안에는 나타남은 자기와의 차이만을 나를 뿐이며, 자기-나타남으로서 자신을 완성하지 않는다면, 이 경우, 지향성은 항상 사물들로 대상들로 보내진다. 자기-나타남을 가능하게 해야하는 나타남의 본질은 현상학의 본질이며, 나타남의 순수한 현상성이며, 나타남의 현상학적인 물질, 즉 나타남이 형성되는 순수한 현상학적인 실체이다.


22.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는 능력을 자신의 고유한 현상성으로 가지는 그러한 자기-나타남을 우리는 어디서 볼 수 있는가? 아무데에서도 그것을 볼 수 없다. 이것은 자기-나타남으로서의 그러한 나타남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나, 혹은 지향적인 봄과 이종적인 것으로 현상학의 원리를 회피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나타남은 지향성에 의해 보여질 뿐이기 때문이다. 손을 뒤집는 것에서 지향성의 봄에서 빠져나온 그러한 나타남을 따로 떼어내지 않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 그것은 지향성 그 자체의 경우,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으로서 근대 사유의 가장 일반적인 의식의 경우, 인식과 이러한 인식의 형식으로서의 과학 그 자체의 경우이다. 


23. 우리가 말하는 본래적인 자기-나타남은 지향적인 봄에서 빠져나오며, 지향적인 방법으로서 현상학적인 방법으로부터 뻐져나오며, 이것은 자기-나타남은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현상성에 의해서, 지향성의 봄에 의존함이 없이, 세계의 가시성에 아무 것도 요구함이 없이 나타난다는 유일한 가능성만을 열어 놓는다. 게다가 지향성 밖에서, 모든  가시성의 탈자적 지평과 독립적으로 나타남의 자기-나타남을 구성하는 근원적 계시(l'Archi-Révélation)는 완성된다. 계시가 근원적인 것은 그것은 모든 탈자 밖에서, 그것과 독립적으로, 그것에 "앞서서avant" 완성되기 때문이다. 자기-나타남으로서 이러한 근원적 계시는 가장 신비한 것이고, 그런데 가장 단순한 것이며, 가장 공통된 것이고, 모든 이들이 아는 것으로, 그것은 삶이다. 


24. 삶은 본래적(근원적)이고 토대를 만드는 것의 의미에서 현상학적인다. 그것은 그것이 현상들 가운데 현상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현상학적이 아니다. 그것이 현상학적인 이유는 그것이 현상성의 창조자(créatrice)이기 때문이다. 현상성은 삶의 형식 하에서, 다른 방식이 아닌 다만 삶의 방식으로, 삶과 더불어 동시에 본래적으로 솟아난다. 현상성은 자신의 본래적인 본질을 삶 안에서 발견한다. 왜냐하면 삶은 자기를 스스로 느낌이 나타남의 자기-나타남인 그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la phénoménalité trouve son essence originelle dans la vie parce que la vie s'éprouve soi-même; de telle façon que ce s'éprouver soi-même est l'auto-apparaître de l'apparaître.


25. 이 진술의 엄격한 의미를 이제 이해해야 한다. 이 진술은 삶의 나타남은 나타남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자기를 정립하지 않으며, 어떤 차이도 세유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조건에서만 이 나타남은 다른 것의, 존재자의 나타남이 아닌 자기-나타남이 된다. 이러한 자기-나타남의 현상성, 이 순수한 스스로 자기를 느끼는  현상학적인 실체, 그것은 두려움, 고통 혹은 즐거움과 같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론적인 정서성affectivité이다. 왜냐하면 이 어떤 것은 스스로를 느끼고, 자기하고만 관계하며, 이 자기와의 관계는 이 어떤 것의 정서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순수한 정서성의(de), 이 정서성에 의한(par) 내재성 안에서 스스로 드러난 양태들, 삶의 모든 양태들에서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정서성은 삶의 현상학적인 본질이며, 이 인상적인 살이며, 이 안에서 지향성의 봄은 어떤 역할, 어떤 자리도 가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적인 살은 순수히 비-지향적이다. 


La phénoménalité de cet auto-apparaître, la substance phénoménologique de ce pur s'éprouver soi-même; c'est une affectivité transcendantale qui rend seule possible quelque chose comme une crainte, une souffrance ou un joie - quelque chose en effet qui s'éprouve  soi-même et ne se rapporte qu'à soi et dont le rapport à soi est son affectivité. ...L'affectivité est l'essence phénoménologique de la vie, cette chair impressionnelle où le voir de l'intentionnalité n'a aucune part - en ce sens le non-intentionnel pur. 


- 앙리에게 정서성, 정서를, 두려움, 고통 혹은 즐거움 같은 어떤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정서성은 자기의 자기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이 어떤 것은 삶의 현상학적인 본질로 인상적인 살이며, 이 안에서 지향성의 봄은 어떤 역할도 가지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살, 이 어떤 것, 이 정서성은 순수히 비-지향적이다. se sentir soi-même, s'éprouver soi-même, 자기의 자기에의 관계인 이러한 정서성 안에는 보는 눈이 부재한다. 보는 눈이 없는 느낌은 느낄 뿐일 것이다. 보는 눈이 없는 느낌은 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벙어리일 것이다. 느낌이 말을 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26. 후설의 현상학은 비-지향적인 것을 모르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그것을 질료로서 의식의 긍극적인 층으로 지시한다. 시간에 대한 <강의>에서 질료는 의식의 구성요소가 아닌 의식을 의식이게 하는 것으로, 의식이 모든 것을 주기 전에 의식을 의식이게 주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질료 현상학을 현상학의 근본적인 분과로 만드는 원인상의 이러한 결정적인 기능는 즉각적으로 전복된다: 질료는 더 이상 밝히는 유일한 힘이며, 물질을 현상으로 만드는 것인 형상을 위한 물질일 뿐이며, 이 형상은 빛을 주는 것이며, 그것은 지향성이다. 따라서 인상으로서 인상의 드러남으로서 현상성의 본래적인 본질, 즉 그것의 인상성, 즉 그것의 정서성은 서양의 모든 사유를 가로지르고 그것을 부패시키는 전통을 따라서 현상의 조건 안으로 승진은 다시금 밖의 빛에, 이 경우 지향성에 맡겨지기 위해 가려진다. 현상성의 본래적인 본질과 비밀스런 기원의 탈자적 형상성에 의한 이러한 감춤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철학적인 사유의 장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하며, 현상학 그 자체에 의해서 외재성으로, 갈릴레이의 과학의 객관주의로 덥힌 황량한 객관주의로 보내진다 - 갈릴레이의 과학은 물질적인 우주의 이성적인 인식의 정의 안에서 주체성, 즉 삶의 놀이의 밖에 놓여진 것으로  정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