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정감성

aurorepark 2011. 1. 7. 22:57

1. affectivité라는 개념의 어려움


"affectivité" 라는 개념을 파악하고 한정하는 어려움은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현상학자 마크 히시르 Richir가 엔치트로페디 유니베살리스에 <affectivité> 항에 16쪽을 할애하고 있다.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어난지 일 세기도 안 된 이 말은 이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말이 되었다. 이 용어, affectivité, 그리고 이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affect" 혹은 "affection"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명확해진 것이 아니라) 애매성을 실어날랐다: 이 말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 것으로 본래적으로 수동성을 함축한다. affectivité는 affects(정감)의 "장소(lieu)" 혹은 그것의 "체계"이다. 때때로 이것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passions(정념)의 "장소" 혹은 그것의 "체계"로 이해되었다. [...] 철학과 심리학 사이의 경계에서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채, 이 용어는 19세기 중반에 생겨나서 이중적인(équivoque)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촉발되어질 수 있는 힘(le pouvoir d'affecté)과 동시에 정감의 체계(le système des affects)를 의미한다. 그리고 affect는 이것이 내적인 촉발(endogènes)이라는 점에서 외적인 것에 의해 촉발되는(exogènes) 외적 느낌(sensation)과는 구분된다. 따라서 affectivité는 심리적인 내재성을 의미하는 주체성과 외적인 세계의 외재성 사이의 구분을 전제한다. 반면에 affect라는 말은 affectivité보다 더 오래된 말로 18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말은 별 구분 없이 감정 sentiment, 감동, 혹은 정서émotion, 정념passion을 지시한다. 이 말은 그 말보다 더 오래된 라틴어 afficere에서 나온 것(dérive)으로, 이 말은 l'aptitude d'être touché 촉발되어질(만져질, 느껴질, 상처입을) 수 있는 능력이면서 et implique une modification subie par ce qui est ainsi "touché 촉발된 것에(느껴진 것에, 만져진 것에) 의해 수동적으로 겪게되는 변형을 함축한다".  따라서 affectivité의 개념에는 수동성의 개념, 더 나아가 주체를 구성하는 수동성을 함축한다. 이것은 이 용어를 passion 이나 pathos와 연결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pathos는 희랍어로 souffrance 고통 passion 정념, 수난을 의미한다). 주체의 문제와 관련해서 생겨나는 문제는 주체에서 내재적으로 촉발되는(endogène) affectivité가 엄격하게 주체와 공-근원적co-originaire인지, 아니면 외적 대상 혹은 외적 사건과의 만남에 의해 전개 되어지는 가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주체는 본래적으로originairement 촉발되며affecté 촉발적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아는 것이다. [...] 사정이 어떠하든 이 용어는 현대 철학의 형성 안에서 주체성의 주체의 문제의 틀에서 솟아난다. affectivité라는 말이 아주 최근의 "발명"이라고 해서 이 말은 이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는가?"


이어지는 글을 요약하면, 비록 같은 용어(affectivité)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할지라고, 철학사 내에는 이 개념에 등가인 것들을 발견할수 있다. 가장 가까이 이 개념을 체계적으로 접근한 사람은 칸트이며, 하이데거는 affectivité(하이데거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후설이 사용한 Gemütssphäre(이말은 불어로 affectivité로 옮겨진다) 대신에 Stimmung Befindlichkeit를 사용한다)와 subjectivité 사이의 분리를 그의 철학의 주제로 삼으면서 우리에게 철학사에서 이 개념과 유사한 것들에 접근할 수는 있는 풍부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이어지는 페이지는 칸트로부터 시작해서, 플라톤, 그 이전의 희랍의 비극, 데카르트, 라이프니찌, 스피노자, 루소,  니체, 후설, 하이데거, 쉴러, 메를로-퐁티, 앙리 등등의 affectivité를 다룬다. 


위에 서론에서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사실들은, 히스르의 논의를 믿는다는 전제하에서, affectivité와 affect는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afficere와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 affectivité는 본래적으로 이중적이라는 사실이다. 정감(affect)이면서 동시에 힘(force)으로, 정감 혹은 정념의 체계를 지시한다. affectivité를 정감성, 정서성, 정조성으로 혹은 촉발성으로 혹은 감응성으로 말하는 것은 이 이중성에서 어떤 하나에 좀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affectivité를 무엇으로 옮기든지 간에 이전의 오성과 이성만을 철학의 대상으로 다루던 전통에서 감정의 영역, 즉 그것의 체계와 그것의 능력과 그것의 운동의 방식을 다룬다는 것이다. 마치 이성의 이성성이 이성의 체계와 그것의 운동과 그것의 능력을 다루듯이 말이다. 이성의 이성성이 존재하는 것의 질서와 진리를 밝히듯이 이제 affectivité가 그것을 대신하거나 그것을 근거짓거나, 그것을 보충한다. affectivité에 철학적 전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affectivité의 지위와 그것에 따른 그것의 존재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의 구분에 의하면 참과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진술, 즉 apophansis만이 과학과 형이상학 그리고 논리학의 영역에 속하며,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수사와 시의 영역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사(학)와 시작법(시학)이 학(science)과 구분되어서 다뤄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감정이 철학의 한 영역으로, 인간의 능력 faculté의 하나로 정확히 말해지는 것은 칸트에 이르러서이다. 칸트 이후에 후설의 철학사적인 기여는 이 감정의 영역을 능력의 구분이 아닌 진정한 철학의 질료로서 발견한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접근은 이 영역을 이론의 우위 하에서 인식의 틀 안으로, 객관성으로 흡수한 데에 있을 것이다. 후설과 더불어 이제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진술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고,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구분되어서 그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가졌던 것이 이제 전적으로 인식의 영역으로, 객관성의 영역 안에서 설명되고 환원된다. 이제 후설과 더불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진정한 하나의 학, 수학에서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 감정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진정한 학의 이념에 이르게된다. 뒤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후설에 이은 하이데거의 철학사의 기여는 무엇인가? 그는 후설의 이론의 우위성을 비판하면서, affectivité로부터 다자인의 세계-내-존재와 그의 근본적인 존재론을 끌어낸다. 후설과 하이데거 이후 이 개념은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에서, 그리고 레비나스와 앙리에서 다시 발견된다.


우리가 이성(raison)의 이성성(rationalité)이 이성의 체계와 그 능력을 말하듯이, 지향(intention)의 지향성(intentionnalité)이 지향의 체계와 그 능력을 말하듯, 인상(impression)의  인상성(impressionnalité), 물질(matérial)의 물질성(matérialité)이 그 각각의 체계와 그 능력을 말하듯, 정감(affect)의 정감성(affectivité)은 정감의 체계와 능력을 다룰 것이다. (여러 말들 중에 정감이란 말을 선택했다. 감정의 느낌, 느끼다se sentir, 느낄 수 있음, 느껴질 수 있음을 말하면서, affection, 보통 우리가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감정, 정감, 애정, 촉발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러 말들 중에 affectivité의 두 의미를 모두 지닌 것은 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라고 옮길 수도 있지만 sentiment이라는 말이 동의어로 사용되는 사정에서 두 단어를 모두 감정으로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체계와 능력의 각 철학자들 사이의 차이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레비나스와 앙리의 affectivité에 대한 논의는 직접적으로 칸트, 후설과 하이데거의 것과  관계한다. 사정이 이러한 경우 이들의 affectivité를 다루는 것이 레비나스와 앙리를 이해하기 위한 순서일 것이다. 칸트로부터 후설, 하이데거로 가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나는 우선 하이데거를 읽고 이어서 후설과 칸트를 읽을 것이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의 철학은(나의 경우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기에) 하이데거의 affectivité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시작해서 후설로, 칸트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에 대한 논의 이전에 서론격으로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해서 예비적으로 살펴보자.


하이데거는 라틴어에  그 근원을 가진 affectivité라는 말 대신에 StimmungBefindlichkeit라는 말을 사용한다. 철학자가 자신의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본질적인 방향을 결정한다. 하이데거를 수용하면서 프랑스에서 이 말들을 불어로 옮기면서 그들이 겪은 어려움은 이 말들의 번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하이데거의 "Stimmung" 이라는 개념은(『존재와 시간』의 §29 §30에서 중심적으로 다뤄진다) 독일어 'Laune', 보통 우리가 '기분' humeur이라고 하는 것과 또 'Gefülhl', 즉 sentiment 감정 옆에서 번역자에 따라서 tonalité 혹은 affectivité 혹은 disposition이라고 옮겨진다. 우리말로는 '기분'으로  옮겨지기도 하는 것이다(이남인의 경우). 이 말은 우리가 잘 알 듯이 이러 저러한 단순한 심리적 현상을 지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이데거에게 근본적인 존재론적인 경험을 지시한다. 이 단어와 긴밀한 연결을 가지는 다른 단어는 Befindlichkeit로 이 말은 Bohem과 Waelhens에 의해  처음으로 1964년 <존재와 시간>의 1부 번역에서 "le sentiment de la situation 상황에 대한 감정"으로, 그리고 Vezin에 의해 완역이 출판되면서 1986년 disposibilité로, 이어서 Martineau는 24년 하이데거가 아우구스티누스의 affectio를 Befindlichkeit로 옮긴 것을 들어 이 말을  85년 그의 <존재와 시간> 번역에서"affection"으로 옮긴다(이 책은 많은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인용하면서 공식판권이 없는 비매품이다). 레비나스는 1932년 <마틴 하이데거와 존재론>에서 이 말을 "disposition affectif"라고 옮긴다. 이 말은 많은 하이데거 연구자들 사이에서 현재는 거의 "disposition"으로 기울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최초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번역인 Bohem과 Waelhens의 번역과 연관이 있다. "상황의 감정"이라는 말 자체는 보엠이 역자 주에서 밝히듯이 이 용어가 객관적이며 주관적인 두 측면을 다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자인이 여기 있음이러저러한 상황에 처해(se trouve là)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느끼는 것(se sentir)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는 독일어 sich befinden의 이중적 의미(se trouve là, se sentir)에 정확히 대응한다. 이러한 것을 지시하는 적절한 불어는 "disposition"이다. 이 말은 위의 독일어의 두 의미를 모두 가진다. 이 말의 우리말 번역은 여러가지이다. 처지, 처해있음, 심정성, 근본처지, 정상성 등등. 앞의 4개가 두 의미 중의 하나만을 말한다면, 마지막 정상성(한자어)은 이 둘을 모두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위에서 말한 "상황에서의 감정le sentiment de la situation", 혹은 정감적 처해있음(disposition affective)를 표현한다.   


데리다가 항상 말하듯 각각의 언어가 가지는 idiome은 번역 불가능하다. 특히 하이데거의 언어는 불어로 옮기는 데 많은 하이데거 전문가들이 어려움을 가진다. 독일어를 잘 모르는 나에게는 그 말들이 가진 뉘앙스를 제대로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철학자 Françoise Dastur에 의하면(Heidegger, Vrin, 112-119), 예를 들어 위의 Stimmung은 우선 법률적인 의미에서 목소리의 의미 Stimme, donner sa voix, 즉 자신의 목소리(의견)을 주는 것, 선거vote의 의미를 가지며, 이로부터 "entendre la voix," 즉 목소리를 듣다(이해하다), 이로부터 "부르다", "명명하다"의 의미로, 더 나아가 음악적인 조율의 의미에서 "조율하다", "일치시키다", 그리고 결국  d'être disposé...한 상태에 놓이다 혹은 ..할 마음의 준비가 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로부터 Stimmung은 기분disposition, 정조 tonalité, 분위기ambiance 등의 의미를 가진다. 이 지점에서 다스튜어는 이것과 관련해서 어떤 단어가 다른 언어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발생하는 다른 기입들에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특히 "이 말은 독일어에서 주관적이 아닌 분위기(ambiance, 다소 객관적인)를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에 그리스어로 (이 말에 대응하는) le pathospaskhein 즉 subir, souffrir고통의 겪음이라는 수동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틴어에서 나온 언어들의 경우, 예를 들어 불어에서 "affections" 혹은 "affects"는 현상들로서 facere(faire)l'action d'un agent, 즉 어떤 행위를 일으키는 것과 그것의 결과(당하는 자의 수동성)으로 생각된다. affectivit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따라서 "정념passion"의 질서에 속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행위, 작용l'action, l'acte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후설이 감정을 l'acte de sentiment 으로 이해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이런 설명이 위의 히스르의 설명과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둘이 전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희랍적인 전통과 라틴적인 전통의 차이는 바바라 카셍의 <유럽 철학 용어 사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위에 히스르의 서문에서는 그것을 다 밝히고 있지 않을 뿐이다.(뒤에서 후설과 하이데거 그리고 칸트 메를로-퐁티를 다루면서 그 차이들을 지시한다) 특히 다슈튜어는 하이데거는 affectivité를 라틴적인 전통과 다른 독일어의 고유성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러한 사실은 히스르의 논문의 하이데거에 대한 언급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라틴어의 전통을 따라서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의 대립이 우리가 "affectivité"라고 부르는 것을 잘 설명하는지를 물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어쩌면 문법학자들이 중성적인 목소리,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의 중간이라고 명명하는 것을 기입하고 있는 않은지 물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어가 여격으로 쓰이는 비인격적인 형식들이 영향을 미치는 독일어가 제공하는 가능성들에 강조를 두어야 한다: "Er ist mir übel"; "es ist mir ein Vergnügen", "er iste mir zumeute", là où le français ne peut que dire: "je me sens mal", "j'ai le plaisir", "j'épreuve". [위의 독일어와 불어의 번역을 비교하면 독일어에서  문장의 형식적 주어는 중성이고 문장의 진정한 주어는 여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불어를 보면, 중성은 사라진다. 불어에는 중성이 없다. 우리말은 어떠한가? 우리말에는 주어를 표현하지 않는다. "좋지 않다(아프다)", "기쁘다" "느끼다". 그것이 나에게 나쁘다(독). 나는 아프다(프), 아프다. 등등] 같은 맥락에서, Stimmung이라는 용어는 - 그것에 대해서 앞서서 말한 것처럼 주체 안에 그 자리를 가지지 않는 (non localisable) 현상을 지시하며, 그것은 (parole, Rede)의 인간적인 질서로 보내진다(envoie).(113-114) 


정감성과 관계하는 이 "정조Stimmung"(Martineau의 번역tonalité)은 하이데거 철학에서 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개념을 한편으로 Geworfenheit, 던져져 있음 Factizitätㅡ 사실성와, 다른 한편으로 Verstehen, 이해 Entwuurt, 기투 Existentialität, 실존성와 연관시키면서, 한 실존의 사실성"La Stimmung révle comment on  se sent" comment on va"", "정조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어떠한지를 드러낸다" (§ 29)는 의미에서, "Gestimmtheit, 즉 이러저러하게 정서적으로 처해있음"의 사실 안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스튜르가 잘 지적하듯이 하이데거의 사실성은 "자신의 고유한 파악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factum brutum 손 앞에 놓여 있는 것vorhanden 이 절대로 아니다"(112). 그것은 "반대로 항상 스스로를 짊어지는 자로서의 그런 사실성이다. 왜냐하면 "이 존재자는 그가 그인 바의 것이 "되어야"하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에로 배달된 자이기 때문이다."(113) 이러한 상황을 하이데거는 Faktizität der Überantwortung, facticité de la remise(§ 29)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Überantwortung, remise 다시 놓음, 이전의 상태로 돌림은 avoir à ...해야하는 <의무>, 주어진, 버려진, 타락한 상태에서 본래적인 상태로 되어야 하는, 되돌아가야 하는, 다시 제자리로 놓아야 하는 의무, 자기의 자기에 대해 대답해야 하는, "자기의 자기에 대한 책임의 전이"(113)를 의미한다. 독일어에서 대답, 책임은 이렇게 위에서 말한 Stimmung의 정조의 울림Gestimmtsein, intoné과 관계한다.


다음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29절의 앞부분의 번역이다. 번역은 프랑스어번역 Emmanuel Martineau 마티노의 번역을 따른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ontologiquement) 정감(affection, Befindlichkeit)이라는 제목 하에서 지시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적으로(ontiquement)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잘 알려진 세계의 것은 정조(tonalité, Stimmung), 즉 정감적 상태에 처해있음(le fait d'être disposé)이다. 심리학적인 모든 정조들에 앞서서 ...이 현상을 근본적으로 존재적인 것(existential, 실존적 범주)(으)로 파악하고 그것의 구조를 한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조들이 전적으로 변화하고 변경될 수 있다는 사실은 단지 다자인이 매번 항상 이미 정조들의 울림(intoné)이라는 것을 지시한다. 아무런 울림이 없음(l'atonie), 즉 지속적인 무관심성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다자인이 스스로 자신을 짊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무게로서 드러난다. 왜? 그것을 우리는 모른다. 만일 다자인이 이것들을 모른다면, 그것은 인식으로의 열림의 가능성들이, 다자인이 거기(Là)로서 자신의 존재 앞으로 운송된 이 정조들에서 고유하게 본래적으로 열리는 것과 비교해서 아주 짧기 때문이다. 어떤 고양된 정조는 이 존재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조의 가능성  조차도 그 안에서 다자인의 숙명의 성격을 연다. 정조는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현시한다. 이 여기(où)에서 울림의 존재는 자신의 거기(La) 안으로 존재를 운반한다(La tonalité manifeste "où l'on en est et où l'on en viendra". Dans cet "où", l'être-intoné transporte l'être en son "Là.)"."


이 마지막 문장의 Vezin의 번역은(Boehm과 Waelhens의 번역에 기초한) 그 뉴앙스가 다르다 : La disposition révèle "comment on se sent", "comment on va". En ce "comment on va" l'être disposé place l'être en son "là".


하이데거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Die Stimmung macht das offenbar, "wie einem iste und wird". In diesem "wie einem ist" bringt das Gestimmtsein das Sein in sein "Da".


하이데거의 우리말 번역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처해있음이라는 명칭으로 게시하고 있는 것은 존재적으로는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일상적인 것인 기분, 기분잡혀있음이다. 그 모든 기분에 대한 심리학 ...에 앞서 이러한 현상을 기초적인 실존범주로서 보고 그 구조를 윤곽짓는 것이 중요하다. ...기분은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상태가 되는가"를 드러낸다. 이러한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음"에서 기분잡혀있음은 존재를 그것의 "거기에"로 데려온다."(이기상 번역, 까치, 1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