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두 번째 지점부터 시작하자. 자기 자신 앞에 도달할 수 없는 주체성의 무능은 후설 현상학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주체성의 현상학으로서 현상학을 근거짓고 현상학의 명시적인 전제를 구성하는 것은 현상학의 뒤집힌 가능성으로, 그에게 주체성은 명증성의 완벽한 직관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스스로 파악할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의 진술을 인용하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체험의 고유한 존재의 유형은 직관적인 지각의 시선이 본래의 현전으로서 실제적이고(wirkliche) 살아있는 모든 체험으로 향하는 것을 함축한다."(<이념들 I>, Ricoeur 번역, p.146, § 45)
- 앞의 단락 17에서 앙리는 후설이 환원을 통해 발견한 주체성의 자기는 이중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나는 반성 안에서 자기-계시의 불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 안에서 주체성이 자신을 자신 앞에서 발견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었다.
19. 우리는 후설이 철학을 궁극적인 자기 합법화 안에서 자기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이르는 진정한 과학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잘 안다. 자기 합법화는 궁극적인 원리라는 이름으로, 절대적으로 명증한 소여들 전체에 대한 소유를 함축한다. 이로부터 명증성은 문제적인 것(le problématique)이 된다. 명증성은 한편으로 정합적인 명증성 즉, 의식의 명증성으로 의식의 의미 직관들이 자신의 직관적인 채움을 발견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필증적인 명증성은 그 내용이 그 내용을 위해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의심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어디에 이런 종류의 명증성이 존재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주체성에서 세계에 대한 질문은 주체성이 세계를 구성하고 근거짓는다는 사실에 의해서 추동될 뿐만 아니라, 이 질문은 주체성이 필증성의 요구와 그것의 실현을 위한 독점적인 자리를 제시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세계에 대한 경험이 원리상 비정합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한에서, 다만 추론일 뿐이라면, 이것은 대상의 한 측면에 대한 지각은 항상 잠정적인 지각의 지평으로 보내지고, 그 가능성은 이어지는 경험에서 현재의 지작을 반박할 수도 있고, 그것을 비-존재로 드러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체험 그 자체의 내재적 지각은 전혀 이것과는 다르다. 나의 반성이 나의 체험을 파악하기 위해 그것에 적용될 때, 나는 그 안에서 절대를 파악하며, 그것의 실존은 원리상 부정될 수 없다. "어떤 제한도 없이 필연적으로 나는 존재하고, 이 삶은 존재하고, 나는 산다. 다시 말해 나는 생각한다(Je suis, cette vie est, je vis: cogito)고 말하기 위해서는 삶의 실재적 현전 안에서 흐르는 그 삶 위로 나의 시선을 던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행위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이 삶의 순수한 주체로서 파악한다"(이념들 I, p. 149, § 46).
- 철학과 문명의 위기 앞에서 후설의 용기있는 선택은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과학적 진리를, 심지어 필증적 지식으로 믿어졌던 수학적 진리마저 주관성 안에, 주체성 안에, 다시 말해 주체의 진리 안에 근거짓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초월론적인 현상학(la phénoménologie transcendantale)이다. 앙리는 이 주체성의 현상학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존재하고, 이 삶은 존재하고, 나는 산다. 다시 말해 나는 생각한다." 앙리가 문제 삼는 것은 이 삶에 이르기 위해 후설이 행하는 환원, 후설이 이 삶에 던지는 반성의 시선이다. 이 반성의 시선 안에서, 그 앞에서 이 사유, 이 삶, 이 존재의 직접성, 그 실재는 그 근본에서 전적으로 변질된다고 말한다.
20. 자신의 의심할 수 없는 실존 안에서 파악된 이 삶에 던져진 시선은 횐원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내적인 초월론적인 경험이다. 그런데 이 경험은 그것의 필증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심각한 문제를 유발한다: 1/ 반성의 시선이 절대적인 주체성에, 더 자세히 말하면 그것의 실재 그 자체 안에서 주체성에 이를 가능성, 2/ 후설이 초월론적인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과 내재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의 분리, 다시 말하면 세계의 경험과 주체성의 경험의 분리로 인해, 후자의 특권적인 지위, 절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실존의 영역을 구성한다는 주장이 위협받는다.
21. 초월론적 경험의 비판은 <데카르트적 성찰>에서 "필증적인 명증성의 범위"를 측정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전개된다. 이러한 비판은 § 20에서 예기치 않은 진술에 이른다: "순수한 의식의 현상학의 가능성은 선험적으로 의심스러워 보인다." 그 이유는 주체의 현상들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요소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헤라클레이토스적인 흐름"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안에서, 마치 주체가 자신의 고유한 대상들을 자연과학으로 만드는 것처럼 정해진 개념 안에서 궁극적인 요소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주체의 끝없이 사라지는 양식을, 그리고 그런 양식을 따라서 대상들이 주어지는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은 모든 경우에 "비록 이 양식들이 아무리 요동한다고 할지라도, 그로인해 우리가 그것의 어떤 궁극적인 요소들을 파악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것들은 전적으로 작의적이고 우연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규정된 실재로서의 의식인 한에 있어서, 항상 동일한, 분리될 수 없는 동일한 유형의 구조와 연결된다."(§ 21) 우리는 여기서 주체성의 구체적인 양식들의 실재가 유형적인 것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초월론적인 삶의 근저에서 주체성의 양식들의 파악할 수 없는 생성과 그들의 사라짐 한 가운데에서 이 양식들이 복종하는 유형적인 것을 발견한다. 본질주의가 자신의 실제적이고 실행적인 실재성 안에서 절대로서 사물을 드러내는 소여의 양식을 대신하고, 이어서 이러한 양식은 원리적으로 사물을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 <데카르트적 성찰>의 20절, "지향적 분석의 독창성"은 레비나스가 후설로부터 그 자신의 철학을 끌어내는 보고이다. 전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이 절은 앙리에게도 "보고"이다. 하나는 그 안에서 현상학의 최상의 가능성을 다른 하나는 그 안에서 후설 현상학의 최악의 불가능성을 감지한다. 비록 그들이 어떤 지점에서 서로 공유하는 많은 지점들을 가진다고 할지라고 그들이 후설과 대면하는 방식은 아주 다르다. 하나가 후설 아래에("나의 글쓰기의 기원은 후설에 있다")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고 그와 대화하고자, 다른 하나는 그 이름을 전적으로 지우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후설의 작업도, 그와의 "대화"도 아니다. ...우리는 그의 전제들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싶어한다. 이 두 철학자는 참으로 말하는 방식이 다른다. 레비나스는 칸트나 후설을 그 이외에 다른 철학자들을 읽는 방식은 항상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그들 철학의 다른 가능성, 그들 철학 안에 기입되어 있는 새로운 가능성들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끌어낸다. 여기에 그의 철학사 읽기의 탁월함이 자리한다. 반면에 앙리는 칼이다. 한번 잘라진 목을 다시 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후설의 이 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후설은 이 절에서 앙리가 위에서 인용하듯이 주체의 경험 안에서 헤라클레이토스적인 흐름, 즉 익명적인 의식의 삶을 끌어낸다. 이 삶으로부터 레비나스는 실존, 익명적인 존재, 익명적인 살, "l'il y a"를 끌어낸다. 그리고 이 삶으로부터 초월성의 의미를 끌어낸다. 그것은 긴 이야기이다. 사실 같은 곳에서 철학자들이 자신이 보는 것들을 끌어낸다. 메를로-퐁티는 같은 곳에서 게스탈트의 이론을 봤을 것이다. 앙리도 같은 것을 보지만 그는 그것에 현상학의 주체성의 상실을 발견한다.이 장에서 후설은 지향적 분석을 통해 드러난 의식의 이면, 현실태적인 코기토의 이면인 잠재적인 코기토의 함축을 발견한다. 현대의 무의식의 발견이라고 불리는 이 발견은 의식의 익명적인 삶의 발견이다. 결국 후설은 의식의 이중적 삶을 발견한다. 프로이트의 "분리"에 해당하는 이러한 의식의 삶의 균열 안에 현대 철학은 그 기원을 가진다. 또한 이 곳은 후설이 <논리연구>에서부터 집중했던 의미론의 절정이기도 하다. 레비나스가 인용하기를 그치지 않은 후설의 한 문장을 읽어보자.
"지향적 분석은 다음의 근본적인 명증성에 의해 진행된다: 의식으로서 모든 코기토는 그 말이 가진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가 지향하는 사물의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다. 그런데 이 의미작용은 매순간 "명시적으로 지향된" 것으로서 주어진 것을 매순간 초월한다(dépasse). 코기토는 그것을 초월한다. 다시 말해 그는 너머로 연장하는 "이상"을 욕망한다(Il le dépasse(Mermeinung), c'est-à-dire qu'il est gros d'un "plus" qui s'étend au-delà). 예를 들어 매지각의 국면은 지각 안에서 지향된 것으로서, 대상 "그 차체"의 국면이 아니다. 이 의도 안에서 의도의 초월(dépassement de l'intention dans l'intention elle-même)은 의식에 내재적으로 속하는 것이며, 의식에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런데 이 현실태적인 의미작용의 "초월"은 "동일한" 대상과 관계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의도를 명시화할 수 있고 결국 내가 실행할 수 있는 연속적인 지각과 기억을 수단으로 해서 직관적으로 그 의도를 "채우"는 명증성 안에서 자신을 "드러낸다(récèle)""(§ 20)
위의 글에서 레비나스는 "그런데"로 갈라지는 이 글의 흐름에서 "그런데" 앞에서 진술된 후설의 사유의 가능성을 후설의 씌어진 글을 넘어서 나아간다. 반면에 앙리는 "그런데" 이후에 진술된 것만을, 결국 후설이 이끈 그의 철학적 결론을 비판한다. 이어지는 21절이 "초월론적인 길잡이로서 지향적 대상"이라는 것은 후설이 간 길을 정확히 보여준다.
22. 그런데 이러한 미끄러짐은 다만 경우에 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기>에서 보다 명확한 형식에서 다시 산출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 52에서 "사실적으로de facto 나타나고 사라지는 개별적인individuelles초월론적인 주체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반박"을 다루면서, "어떤 철학자도 환원 안에서 삶의 파악할 수 없는 이러한 종류의 흐름으로부터 어떤 명백한 사실로 나아갈 수 없으며, 철학자는 끝없이 같은 내용들을 반복하고, 그것의 본질과 그것의 어떤 것의 확실성을 획득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반복을 통해, 말하자면 문서를 만들어서 어쩌면 그는 견고한 진술들 안에서 그것들의 본질 혹은 어떤 것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런데 보편적이고 초월론적인 주체성의 구체적이고 충만한 사실성은 다른 의미에서 과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 모든 유형의 개별적이고 상호주체적인 제시들 안에 초월론적인 제시들의 본질의 형식을 탐구해야 한다는 거대한 과제를 제시하는 것은 본질적인 방법 안에서 실제적으로 가능하고 필연적이다....여기서 사실성은 자신의 본질의 사실성으로서만, 그리고 자신의 본질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23. 문제적인 것에서 순수하고 이념적인 가능성들의 왕국으로의 이 가벼운 이행은 후설의 현상학을 규정한다. 이것은 그에게 비록 실재가 더 이상 그 자체로 파악되지 않는다고 할지도, 다만 그것의 본질로부터만 그리고 이것의 가능한 예시화로서 파악될 수 있다고 할지라고, 필증성과 선험적인 인식의 왕국을 유지하고 나아가 무한히 연장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런데 본질 위에서 해석된 이 가능성은 실재가 아니며, 그것은 정확히 그 자체로 비실재, 본질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이념적인(이상적인) 가능성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초월론적인 주체성의 충만하고 구체적인 사실성"이 몸소, 다시 말하면, 넘어설 수 없는 개별성과 단독성 안에서, 그것들 각각의 실행성 안에서, 우리에게 인도하는 본질적인 명증성에 대한 주장이다. 이 단독성과 이 개별성이 이 각각의 양태에 속하는 한에서, 원리상으로 그것에 속하는 한에서, 이 주체성의 충만한 현전은 - 마치 자신의 고유한 실재와 동일한 존재적인 소여의 양태로서 -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자져오지 않는 줌의 양식을 거부한다. 우리는 따라서 현상학적 환원은 후설에서 본질적인 환원으로, 주체성과 다른 것으로 그런데 그것과 떼어낼 수 없이 연결된 현상학적 환원으로 완성되는 것을 본다. 이 본질적인 환원은 현상학을 절대적인 주체성의 순수한 가능성들의 선험적인 과학으로 만든다. 그러데 이 본질주의가 결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주체성의 실재의 본질이다.
24. 주체성의 대상적인 파악이 그것의 실재성을 사라지게 하고 그것의 이념적 본질의 형식 하에 비실재적인 표상만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본래적으로 자기에 드러나는 양식을 생각하는 것, 즉 주체성 그 자체를 생각하는 것은 환원 안에서 대상적으로 파악한 주체성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양식은, 결국 직관과 명증성에 근거한 양식은 주체성이 아니다. 본질주의로서 명증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주체성의 본래적인 줌의 양식과 그것을 그것의 본래성에서 인정하고자 하는 주장, 이것은 후설 현상학의 주요한 전제로 지류에서 출발해서 지류와 더불어 출발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두 번째 입장, 즉 내재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주장되는 초월론적인 경험의 역설적이고 파괴적인 환원으로, 본질적으로 초월적이며, 이런 종류의 모든 경험이 지닌 변천에 복종하는 지향적 경험으로 이끌린다. 이러한 환원은 주체성의 경험과 세계의 경험을 혼동하는 것 이상을 포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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