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미셸 앙리, 고통과 삶(2)

aurorepark 2010. 11. 5. 17:35

10. 우리는 여기서 두 어려움과 부딪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통을 드러내는 것은 고통이라고, 그리고 이 유일한 이유로 인해, 고통을 겪는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런데 우리의 구체적인 실존이 다만 통증과 고통으로만 이뤄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또한 기쁨과 욕망과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말이나 개념이 아니라, 이러한 감정들 위에서 우리를 매번 형성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 감정들을 또한 느낀다. 그리고 이 감정들은, 그것들이 비정합적이든 아니든, 감정 안에서 이러한 감정들에 대한 감정의 본래적인 현상학적인 증여를 덜 가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증여 없이는 어떤 표상도, 어떤 이론화도, 정서적인 실존(l'existence affective)에 대한 어떤 정신적 치료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본래적인 자기증여(l'autodonation)가 또한 기쁨(la joie), 불안 혹은 노력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라면, 고통 안에서 완수되는 고통의 자기계시(l'autorévélation)는 특수한 내용 안에서 고려된 고통의 사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자기증여가 그것의 특수성과 독립적인 감정 안에서 발견된다면, 이 자기증여는 다시 자신의 밖에서, 인상적인 자신의 내용과, 예를 들어 고통의 고통스러움의 성격과 낯선 것이 되지 않는가? 


- 단락 9에서 앙리는 하이데거의 탈자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그것과 전적으로 대립되는 삶의 원리로서 고통의 예를 들어서 자기촉발을 설명했다. 단락 10에서 앙리는 이러한 고통의 예를 취하는 데에는 두 난제가 제기된다고 말하다. 그것은 우선 우리의 구체적인 실존을 보면,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감정도 고통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순수한 현상학적인 줌으로서 말이나 개념을 통한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우리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앙리가 제기하는 첫 번째 난제는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에서 표현된다.  만일 자기계시가 기쁨이나 여타의 다른 정조에서도 고통과 마찬가지로 일어난다면, 이 자기계시가 완수되는 고통은 이 정조들과 다른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개개의 특수한 내용 안에서 드러나는 고통과 다른 것이라면, 고통 일반과 구체적인 고통을 나누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어지는 단락은 이 첫 번째의 어려움과 연관된 것으로 다양한 정조들과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삶, 본질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11. 다른 하나는 이 다양한 정조들(tanalités) 을 고려하면서 생겨나는 어려움이다. 이 정조들을 통해서 우리의 실존은 여기서 저기로 움직이고, 이것들은 우리의 실존의 망(trame)을 짠다. 그리고 이 정조들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자주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기 때문에, 그것들의 연속은 부조리한 것이 아니라면, 비일관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만일 이 정조들의 원리, 그것들의 존재 이유가 공통의 본질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말한 자기-계시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실존이 전개되는 세계의 현상 안에서 양식(le sens commun)의 방식으로 그 정조들의 "원인" 혹은 "동기"를 찾는 것이 적합하지 않은가? "불행이 도래했다". 이것은 하나의 객관적인 사건이 - 그것이 사고이든, 직업적인 혹은 정서적인 실패이든, 병이든, 애도이든-  고통과 동일화 되어지는 지점에서 고통을 산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건, 그것이 극적이든 아니든, 매번,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특히 이 경우에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존재 안에서만 고통의 감정을 산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위의 질문은 여전히 왜 감정은 다른 정조가 아닌 이 정조의 형식을 입는 지에 대해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 정조들 - 혹은 기분이라고도 말해지는 것 -, 장조일 수도 단조일 수도 있는 정조들, 혹은 가볍게 기분들,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기쁘고, 등등 이러한 정조들은 우리 삶을 엮는 씨실과 날실처럼 우리의 삶이라는 천을 엮는다.  이 정조들은 조울증처럼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며, 부조리하다고 말하기 뭐하다면 비일관적이다. 이러한 비일관성 안에 이 모든 정조들을 엮는 하나의 원리가 없다면, 그러한 원리가 자기-계시 안에 없다면, 우리는 근대의 양식론에서 말하듯이 이 각각의 정조들의 동기나 원인들을 찾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어떤 감정이 도달하는 상태는 우선 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초월론적인 존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겨난다. 여기서 앙리가 제기하는 문제는 그의 철학의 핵심인 촉발, 특히 자기-촉발의 문제이다. 한 "질문과 대답"에서 앙리는 이와 유사한 폴 오디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 당신이 고통(la soffrnace)과 고통을 겪다(le souffrir)을 구분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삶은 일련의 정서적인 양태들(modalités affectives)을 통해서 일어난다. ...지적인 양태들도 이 정서적인 양태들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게다가 맑스가 인정하듯이 사유는 삶의  하나의 양식(un mode)이다. 결국 사유는 정념(pathos)에 의존한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그것이 지적이든, 능동적이든, 모든 양태들은 정서적인 양태들이다. 그리고 이 정서적인 양태들은 무한히 다양하다: 하이데거는 한 강의에서 고통과 권태등을 다룬다. 이 정서적인 양태들은 다양한 색깔 만큼 다양하다.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다(indicible).  고통은 이 기획 위에 자리한다. 당신이 잘 말한 것처럼 고통을 겪다삶의 구조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을 시험한다는 사실(le fait d'éprouver quelque chose)이 일종의 순수한 향유인 한에서, 삶이 자기를 시험하는 것(s'éprouver), 고통의 자기 겪음(se souffrir)이 자기를 소유하는 것이며, 자기를 향유하는 것인 한에서,  스스로 자신을 시험한다는 사실(le fait s'éprouve soi-même)은 고통의 겪음(se souffrir)을 함축한다 - 당신이 언급한 것처럼 수동적이다. 따라서 『현시의 본질』에서 내가 존재론적 정조들(des tonalités ontologiques)이라고 부른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제 나는 다르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현상학적 구조들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삶의 현상학적인 구조가 있으며, 삶의 정념은 매번  구체적인 정념이다. 그리고 모든 자기계시를 구성하는 이 구체적인 정념을 겪고(le souffrir), 향유하는 것(le jouir)은 일종의 고통의 겪음(se souffrir), 자기를 향유하는(jouir de soi) 방식의 양태화이다. 다시 말해 삶이 수치나, 두려움에서 혹은 반대로 기쁨이나 쾌에서 스스로 자기를 느끼기(se sentir elle-même)를 그치지 않는 방식의 양태화이다. 베를렌이 혼돈의 행렬이라고 말했던 오리의 행렬처럼 이것에서 저것으로 이동하는 양태들의 변증법이나, 변증적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경우, 실제로 이 양태들은 모두 구조들에 복종한다; 마치 사유의 선험성이 존재하듯이, 정서(affectivité)의 선험성이 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서로 동의한다. 그리고 이 양태들에서 혼돈의 행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근본적인 정념 안에서 앞서서 그려지며(pré-tracé), 이것은 하나(l'Un)이다; 이행의 가능성이 하나 안에 기입되어 있다면, 그것은 실제적으로 고통이 기쁨이고, 기쁨이 고통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적인 하나 안에, 고통을 모든 종류의 기쁨으로 이끄는 근본적인 가능성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Débat autour de l'oeuvre de Michel Henry, in Phénoménolgie de la vie, Tome, IV, p. 227-228). 

    

12. 어떻게 우리 삶의 모든 양태들은 긍정적인 것 - 쾌와 행복의 인상 - 과 부정적인 것 - 고통과 슬픔의 인상 - 으로 이중적(dichotimie)으로 갈라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실존 전체는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끝없이 불만과 만족, 고통과 기쁨 사이에서 진동하는 정서적 상태 안에서 파악되는 듯이 보인다. 욕구(l'envie) 혹은 무관심(l'indifférence)과 같은 정조들은 최초의 이 진동들의 중성화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중화가 일종의 숨겨진 규칙에 복종해서, 세계의 우연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이 이중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 삶 안에서 그것의 궁극적인 조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한다.


13. 따라서 무엇보다고 앞서서 삶의 현상학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삶이 자기에 이른다고 말한다. 우리가 삶에 이르는 것은 삶 안에서일 뿐이며, 삶이 자기에 이르고, 자기에 반해 짖이겨지고, 삶의 본질을 구성하는 자기의 이 시험(cette épreuve) 안에서 자신을 시험에 놓는(s'éprouve) 본래적이고 절대적인 과정 안에서이다. 그런데 만일 삶이 자신 안에서 자기 자신을 시험에 놓고 자기를 향유하는 것이 삶에서 주어지는 자기성(Ipséité)을 낳지 않는다면, 어떤 시험(l'épreuve)도 자기의 시험으로서 산출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생명(la Vie)의 개념이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실제적인(effective)  실재의 삶(la vie réelle)을 이야기 하는 한에서, 이 실재의 삶이 자기를 시험하면서 자기에 이르는 자기성은 개념으로서의 자기성이 아니라, 그것은 현상학적으로 실제적인(effectif)  실재의 자기(le Soi réel)이며, 그 안에서 실제적으로 자기를 느끼는 삶은 자신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삶이 된다. 따라서 살아있는 것 없이는 생명(Vie)도 없으며, 삶이 스스로를 느끼는 한에서 모든 삶이 자신 안에 지니는 이 살아있는 자기(Soi) 없이는 삶도 없다. 그런데 모든 자기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이 삶이 없이는 자기도 없으며, 이 삶 밖에서는 어떤 자기도 가능하지 않다.


14. 생명의 자기에의 도래가 생명의 완성의 내재적인 조건으로서 정서적인 자기의 자기성을 낳는다는 사실은 본래적인 사실로서 그것의 중요성은 우리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런데 현상학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만일 그것이 모든 것이 대상(objet) 혹은 "정면(en-face)"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그것은 이 시험의 현상성이 그 자체 안에서 알려질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모든 삶과 이 "자기-자신의 시험"이 완성되는 장소인 모든 살아있는 자기에 고유한 "스스로 자기를 시험함"이라는 순수한 현상학적인 물질성은 본래적인 정서(affectivité) 혹은 우리가 이제부터 정념(pathos)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물질성이 세계에, 즉 "자기-밖"에 낯선 것인 한에서, 비우주적(acosmique)이고 비탈자적인(inextatique) 한에서, 우리는 생명은 비가시적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점에서 비가시적인 것이 일종의 사후-세계(arrière-monde)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현상성의 반명제가 아닌 지를 본다. 마치 우리가 비가시적인 것을 객관주의나 실증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어떤 것의 지배로 보내진 우리의 비참한 세계로 생각할 수 있듯이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계시를 그것의 본래적인 본질로 이끌면서, 가장 무겁고 가장 반박불가능한 실재에로, 삶을,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우리 삶의 정념에로 신호를 보낸다.


- Or la matérialité phénoménologique pure du "s'éprouver soi-même"  propre à toute vie et ainsi à toute Soi vivant en lequel ce "s'éprouver soi-même" s'accomplit est une affectivité originaire ou, comme nous le dirons désormais,, un pathos.


앙리의 사상의 핵심은 자기-촉발auto-affection에 있다. 왜냐하면 삶의 본질은 자기-촉발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기-촉발은 자기soi와 삶 혹은 생명vie과의 관계 아닌 관계이다. 관계라는 말은 둘을 전재한다. 그런데 자기와 삶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러한 관계는 그래서 자기-촉발이라고 말해진다. 마치 레비나스가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 혹은 유한과 무한의 관계에서 항상 "관계"라고 말에 따옴표 안에 넣어 표현하듯이 이 관계는 관계이면서 관계가 아니다. 다시, 앙리가 자기와 삶, 혹은 생명과의 관계 아닌 관계가 자기 촉발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는 자기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후설이 말하듯 자기의 탄생은 부모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자기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이 둘 사이의 관계 아닌 관계에는 창조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창조되는 것이 없으면 이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창조하는 자도 없다. 창조는 우리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듯이 최소한의 간격을 가진다. 창조된 것은 창조하는 자와 다르다. 다시 말해 자기와 삶 혹은 생명 사이에는 어떤 간격도, 거리도, 대립도,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자기-촉발은 말 그대로 se sentir, (자기에 의한 자기의) 느낌이다. 자기-촉발은 어떤 경우에도 느껴지는 것(sentie)이 아니다. 자기-촉발은 삶 혹은 생명 안에서 느낌이다. 그런데 자기-촉발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현상학적인 방식으로, 자기계시(autorévélation) 혹은 자기드러냄의 방식으로,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삶 혹은 생명의 자기에의 도래(la venue en soi de la vie)로서 자기계시, 자기드러냄의 방식으로 일어난다. 자기-촉발이 칸트적 의미가 아니라면, 엄격한 의미에서, 자아는 자기-촉발을 감성의 방식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앙리는 s'éprouver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자아는 자기-촉발을 겪는다, 스스로 시험에 놓는다, 따라서 여기에는 시련이, 수난이, 고통이 따른다. 모든 탄생에 고통에 따르듯이 말이다. 모든 탄생이 고통이면서 동시에 향유이듯이, 무엇인가를 시험한다는 것이 고통이면서 향유이듯이 자기를 시험에 놓는 것은 겪음으로서 고통이면서 향유이다. 절대적으로 주체적인 삶 혹은 생명이 자기에 도래하는 이 운동, 자기계시 혹은 자기드러냄은  현상학적으로 자기-촉발의 시험, 겪음, 시련 혹은 수난이다. 위의 앙리의 한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Or la matérialité phénoménologique pure du "s'éprouver soi-même"  propre à toute vie et ainsi à toute Soi vivant en lequel ce "s'éprouver soi-même" s'accomplit est une affectivité originaire ou, comme nous le dirons désormais,, un pathos.


여기서 자기-시험, 자기-겪음, 즉 삶이 혹은 생명이 자기에 도래하는 방식은 matérialité 즉 물질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물질성은 affectivité originaire 즉 본래적인 정서(정조)라고, 그리고 이것은 파토스, 정념이라고 말해진다. 결국 s'éprouver soi-même = matérialité = affectivité = pathos가 동의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affectivité의 우리말로의 옮김이다. 위에서 나는 일단 "정서"라고 옮겨봤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듯하다. 위에서 앙리가 물질성이라고 말하는 것, 자기-시험은 현상학적인 삶의 자기에의 도래의 운동의 방식, 어떻게를 지시한다. 삶, 생명, 혹은 원인상 혹은 인상이 삶 혹은 생명의 물질이라면, 물질성은 자기-겪음, 자기-시험이라는 방식으로 물질성이라고 불린다. 즉 자기-촉발의 시험, 겪음, 즉 자기-촉발의 촉발성(affectivité), 방식, 어떻게이다. 이 촉발성은 파토스, 정념이다. 이 말은 희랍어에서 온 것으로 고통 혹은 수난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말은 "비감"이라고 옮겨지기도 한다. 이 말은 동사적인 의미에서 앙리가 말하듯이 souffrir, "고통을 겪다", 겪음이다. affectivité는 정서도 정조도 아니다. matériel 물질과 matérialité 그것의 어떻게, 즉 물질성 affecter, 촉발하다로부터 그것의 결과 혹은 상태인 affect, 정서 혹은 정조가 그리고 삶의 자기-촉발의 성질로부터 나오는, 그러한 성질을 가지는 affectif, 촉발의, 혹은 촉발적인,  상태를 지시하는 경우 정서의, 정서적인 그리고 affection 촉발과, affectivité 그것의 어떻게, 즉 촉발성이 생겨난다. 위의 단락 10에서 정서적인 실존(l'existence affective)이라고 옮기면서 나는 촉발의 혹은 "촉발적인 실존"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했다. 느낄수 있는, 고통이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그로 인해서 후려쳐지듯이 상처입을 수 있는 수난의, 시련의, 시험에 빠진 실존, 즉 촉발적인 실존이 아닌가? 그런 실존만이 아프지 않은가? 이런 실존만이 고통받을 수 있지 않는가? 물론 이런 실존은 정서적인 혹은 정조적인 실존이다. 그런데 정서나 정조는 상태를 지시하는 쪽에 그 강조가 놓여있다. 생명의 자기에의 도래가 문제인 경우, 그 운동, 그 현상학적인 운동이 문제가 되는 경우, affectif는 상태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물질성, 촉발의 촉발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앙리가 l'existence affective라고 말하는 것은 le matériel affectif, 즉 matéralité, 즉 살아있는 초월론적인 자아를 지시한다. 이 물질성, 혹은 촉발성은 앙리의 다른 동의어로 말하면, 현상의 현상성(phénoménalité)이다. 즉 앙리에게 현상의 현상성, 물질의 물질성, 감정의 자기-촉발의 촉발성, 자기-겪음, 혹은 자기-시험은 모두 동의어이다.   

 

15. 그런데 계시가 삶이 "스스로 자신을 시험하는 것, 자신을 시험에 놓는 것(s'éprouver soi-même)"  혹은 "자기-격음"안에서 이 삶의 현상학적인 실재를 구성하는 한에서, 촉발성(l'affectivité)은 전혀 비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스스로 자신을 시험하기, 시험에 놓기" 혹은 "자기-겪음"이 필연적으로 촉발성 안에서 자기(le Soi)를 지니는 한에서, 그것은 본래적으로 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정(서)적인 정조(tonalité affective)는 환원불가능한 단독적인 정조, 즉 이런 저런 자기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런 저런 것으로 자신을 제시한다(se propose). 그런데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특수한 정(서)적인 내용들 안에서 이 본래적으로 자기화된 정조는 고유하게 정(서)적인 규정을 받는다. 이 규정은 모든 삶에 고유한 "자기-자신의 시험"의 현상학적인 실재로서 촉발성(affectivité)으로부터 이 특수한 정조(tonalité)에 이른다. 다음에서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 지를 볼 것이다. (Mais il y a plus en effet: c'est dans son contenu affectif particulier que cette tonalité originairement ipséisée reçoit une détermination proprement affective qui lui vient de l'Affectivité comme réalité phénoménologique du "s'éprouver soi-même" propre à toute vie."


16. 정념적인 직접성 안에서 "스스로 자기을 시험에 놓기(s'éprouver soi-même)"는 스스로 자기를 감내하는 것(se subir soi-même), 스스로 자기를 견디는 것(se supporter soi-même), 스스로 자기의 고통을 겪는 것(se souffrir soi-même) - 순수하게 "고통을 겪음"(un pur "souffrir) - 이다. 이 고통의 겪음(souffrir)은 극복되어질 수 없는 수동성에 의해 정념의 드러남을 유지하는 모든 것, 모든 감정, 삶의 모든 형태를 표시한다.  모든 삶은 수난이다. la vie est une passion. 모든 정조는 자기에 대한 이 근본적인 수동성 안에서 시험되며, 정조는 자신의 고유한 무게를 짊어진 자기인 바의 것이기 위해 자기에로 되돌릴 수 없이(치료불가능하게, irrémidiablement) 보내진 것으로서 자기에 대한 경험이다. 이런 경험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de se changer soi-même), 감정에 대해 작용을 가할 수 없는(d'agir sur le sentiment) - 그것이 자기에 주어지는 방식이 자유보다 더 강한 근본적인 수동성에 의해 지배되는 한에서 - 근본적인 불능(impuissance), 근본적인 불가능성의 경험이다.  이렇게 촉발성은 그것을 단순한 개념으로 만들어버리는 비규정성(l'indétermination)으로부터 벗어난다: 삶의 자기-시험이 완성되는 원초적인 고통의 겪음 안에서, 자기-시험을 가능하게 하는 촉발성은 본래적인 고통의 특징(le trait)을 획득한다. 본래적인 고통은  밖으로부터 폭력적으로 우리를 후려치는 외적 사건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 내 존재자에 의한 혹은 세계에 의한 촉발인 타자-촉발(hétéro-affection, 혹은 이종적-촉발)이 아니다. 고통은 삶 자체의 가장 내적인 가능성이며, 고통은 그것의 근본적인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 "자기-겪음(se souffrir soi-même)"으로서 원초적인 이 고통의 겪음 안에서 모든 "자기-시험(s'éprouver soi-même)"이 현상학적으로 완성되는 그런 근본적인 의미에서, 삶이, 생명이 자기에 도래하는 소송(procès)에 속한다. 고통을 겪음은 삶의 본래적인 현상학적인 정조이다. 이 원초적인 혹은 원시의 고통겪음(souffrir primitif) 안에서 모든 특수한 고통들(souffrance)이 가능해진다. 모든 고통들, 매 순간 우리의 실존에서 솟아나는, 예시된 혹은 예시되지 않고, 즉 이해할 수 없이 닥치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우연적인 사실성으로서 심리학에서 매번 다뤄지는 모든 이 "고통의 체험들"은 그것들의 감춰진 기원에서 보면 그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 원초적인 고통겪기의 다양한 격변화(déclinaison)이다. 이 다양한 고통들은 필연적으로 삶의 비가시성 안에 묻혀있는 하나의 선험성(un a priori enfoui dans l'invisible de la vie)으로 원초적인 고통겪기와 관계한다. 다양한 고통들이 하나의 원초적인 고통겪기로부터 유래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자는 후자 안에서만 도래한다는 것이며, 전자는 후자 안에서만 자신에 도래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모범의 이름으로(à titre d'exemple), 모든 통증, 아픔 안에서 우리는 그것이 포함하는 요소(l'élément)로서 순수한 고통을 만났으며, 우리는 정념의 근본적인 수동성을 알아차렸다. 이 자를 수 없는 연관을 끊는 것의 불가능성, 이 연관은, 그것이 정조의 촉발성과 동시에 그것의 자기성을 구성하는 한에서 모든 촉발적인 정조를 자기-자신에 연결한다.


- ...cette impossibilité de rompre le lien infrangible qui lie toute tonalité affective à elle-même pour autant qu'il est constituif à la fois de son affectivité et de son ipséité. 위의 단락의 마지막 문구를 보면, "이 불가능성, 즉 앞서 말한 개개의 특수한 고통과 고통겪기와의 끊을 수 없는 관계, 연결, 즉 하나의 선험성과 다수의 정조들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은 모든 정조를 자기-자신에 연결한다. 그런데 이 연결이 정조의 촉발성과 그것의 자기성을 동시에 구성하는 한에서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affectivité를 정조나 정서로 바꿔서 옮겨보면, 그 연결이 "정조의 정조와 정조의 자기성을 구성하는 한에서", 혹은 "정서의 정조와 정서의 자기성을 구성하는 한에서"가 된다. 이렇게affectivité를 tonalité로 옮길 경우 우리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사실 앙리는 이 선험적인 혹은 초월론적인 연관은 모든 현상을 그 현상들의 현상성과 연관시키듯이, 즉 모든 정조들을 그 정조들의 정조성과, 모든 정서의 정서성과, 다시 말해 무수한 고통들(souffrances)과 고통겪기(le souffrir) 혹은 자기-시험(s'éprouver soi-même)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연관은 현상의 어떻게와 현상의 자기성을 구성하는 한에서 모든 개별적인 정조들은 자기-자신과 관계한다. 즉 자기-촉발이 발생한다.


위의 단락의 첫 문장 - "스스로 자기를 시험에 놓기(s'éprouver soi-même)"는 스스로 자기를 감내하는 것(se subir soi-même), 스스로 자기를 견디는 것(se supporter soi-même), 스스로 고통을 겪는 것(se souffrir soi-même) - 순수하게 "고통을 겪음"(un pur "souffrir) - 이다" - 을 보면, 불어에서 이 단어들이 모두 동의어들이듯이, s'éprouver soi-même - se subir soi-même - se supporter soi-même - se souffrir soi-même는 모두 동의어이다. 이 모두는  se sentir soi-même, 즉 스스로 자기를 느끼는 것, 느낌이다. 특히 여기 선택된 단어들은 모두 자기-촉발의 수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선택된 것들이다. 불어에서 재귀동사는 수동적인 의미를 가진다. 동시에 이 동사 안에는 자기에 자기에 대한 관계를 가진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이 재귀동사의 "se"가 함축하는 수동성의 철학이다. 앙리에서도 마찬가지로 se는 수동적인 의미를 특화한다.


중간의 한 단락, "삶의 비가시성 안에 묻혀있는 하나의 선험성(un a priori enfoui dans l'invisible de la vie)"은 révélation, autorévélation의 의미를 특징적으로 드러낸다. 자기계시, 자기폭로, 자기밝힘이다. 삶은 근본적으로 은밀하다. 은밀성, 앙리의 삶의 현상학을 이끈 근본적인 동기였던, 이 은밀성은 주체의, 절대적으로 주체적인 주체의 은밀성(clandestinité)을 말한다. 앙리가 마저 다 쓰지 못하고, 다만 기획으로 남겨두고 떠난 작업의 제목은 "은밀성의 주체성(la clandéstinité de la subjectivité)"이다. 사실, 이 제목은 나에게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다. 나는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본질적으로 은밀성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지시하듯이 앙리는, 레비나스는,  는, 은밀한 주체는 즉 주체의 삶은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에 존재하지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페스포드가 없다. 마치 불입국자(clandestin)가 이 세계에 존재하면서 이름이 있데 이름이 없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