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미셸 앙리, 고통과 삶(4)

aurorepark 2010. 11. 8. 14:55

24. 우선 우리의 지금까지의 논의가 획득한 두 가지 - 하나는 명시적이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인 - 사실을 상기하자. 그 하나는, 가능한 모든 삶의 "자기-시험"의 내재적인 현상학의 조건으로서 실재의 자기(Soi réel)의 자기성의 생성(génération)의 이론은 모든 우울증은 누군가의 우울증이라는 - 절대로 익명적인, 비인격적인, 물질적인, 맹목적인, 따라서 무의식적이 아닌 - 아주 진부한 의미(trivialité)만을 근저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진부함은  물질적인 객관주의의 시대에, 철학이, 방송 이데올로기, 영화, 여성 주관지에서 조차 떠드는 "주체의 위기" 혹은 "자기 동일성"의 위기의 시대와 상관적이다. 사실, 절망은 자기동일성의 위기이다. 동일성의 사라짐이 아니라, 그것의 부재로서 위기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는 정반대로 절망, 우울증에는 자아가 그 어느 때보다 그 이상으로 현전한다. 왜냐하면 절망은 삶 안에 자신의 자리를 가지기 때문이며, 그것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절망은 언제나 나의, 자아의 절망이며, 주체 그 자체에서 자아의 절망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듯, "우리는 세자르가 되지 못하는 것에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가 되지 못하는 것에 절망한다." 따라서 분석은 모든 것이 도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모든 것이 도래하는 자기로 보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기인 것은, 실제로, 우리가 절망하는 것은 항상 이 자기(Soi)로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는 정확히 극심한 고통(tourment) 안에서 절망 - 그것의 근저에서 모든 우울증- 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25. 절망과 우울증에 속한 이 극심한 고통은 우리의 논의가 획득한 두 번째 결과, 즉 고통받기와 향유하기의 본래적인 연결을 더 잘 이해하게 한다. 왜냐하면 자기(Soi)는 자기와(soi)의 관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 자기(soi)와의 관계는 외재성에서는 불가능하며, 절대로 외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를 그 자신과 관계시키는 것, 자기를 자기로 만드는 것은 삶의 직접적인 정념이며, 정확히 고통받기와 향유하기의 본래적인 연결이다. 자기(le Soi)가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le Soi)는 그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스스로 고통받기"의 절대적인 수동성에서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다. 이 극복되어질 수 없는 수동성에서, 자기의 무게를 덜어낼 수 없은 그 불가능성에서 - "실존의 운명(fardeau de l'existence)"에서 - 이 운명의 시험(l'épreuve de ce fardeau)과 동일한 그것의 고통이 태어난다. 이 고통, 이 고통의 고통받기의 구조 안에서 어떤 의지가,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자기로부터 그것을 떼어내고자 하는 의지(vouloir)가 탄생한다. 절망하기, 자기로부터 절망하기, 자기에 대해 절망하기는 "자신의 자아를 제거하고자 함,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함을 의미한다"(『절망에 대한 소고』). 자신의 자아를 제거함(se débarasser de son moi), 자아를 자기에 연결하는 그 관계를 잘라내는 것,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그것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자기와 분리되는 것은 자기에게는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기와의 분리, 이 자기의 파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절망이 자아를 파괴한다고 말하는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가장 큰 절망에서 ...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듯 피상적이다.


- 다른 곳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키에르케고르는 "Désespérer au sujet de soi-même; étant désespéré, vouloir se défaire de soi: telle est la formule de tout désespoir, et c'est pourquoi la seconde forme, celle où, étant désespéré, on veut être soi, peut se ramener à la premier, celle où, étant désespéré, on ne veut pas être soi, comme précédemment nous avons ramené la forme du désespéré où ne veut pas être soi, à celle du désespoir où on veut l'être." "자기의 주체에서 절망함; 절망한 존재는 자기를 파괴하고 한다: 이것은 모든 절망의 공식이다. 그래서 절망한 존재가 자기이고자 하는 절망의 두 번째 형태는 절망한 존재가 자기가 아니고자 하는 첫 번째의 형태로 이끌린다. 앞서서 우리가 우리가 자기이고자 하지 않는 절망의 형태를 우리가 자기이고자 하는 절망의 형태로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자기가 아니고자 함, 그것은 자기이고자 함이다. 이 모순, 앙리가 "괴물같은 모순"이라고 말하는, 이 모순은 키에르케고르가 본질적으로 여성적이고 말하는  절망, 삶에 자신을 바치고자 하면서, 삶을 포기하는 모순, 또 자기에 대한 증오의 형식으로 자살에 이르는 절망, 이 모든 형태의 절망은 그에 의해 "절망-허약함 désespoir-faiblesse"으로 특징지어진다. 허약함, 자아를 구성하는 이 절망-허약함은 카프카가 그러했던 것처럼, 키에르케고르에게 자아가 자신을 스스로 구성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스스로 정립하지 않는다면, 자아는 타자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받기 때문이다. 이 허약함, 신 앞에서의 이 허약함,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이 허약함, 그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얻을 수 있지만, 그는 자아가 그 앞에서조차 허약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허약함 없는 자아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하는 존재이고 한다. 신 앞에서 그는 자신을 제거하고자 하지만, 그 근저에서 그는 자기와의 진정한 단절을 할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을 잃어버리면서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누가, 무엇이 이것을 보장하는가? 반대로 그는 타자 없이, 신 없이 고독 안에서 자기이고자 한다 - 그가 절망이라고 부르는 것 -  이것은 타자에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절망은 즉각적으로 자기가 아니고자 함으로 인도된다. 그런데 이것은 불가능성, 자기를 파괴할 수 없는, 자기를 스스로 정립하지 않을 수 없는 불가능성일 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나는 자아에 못박혀 있다고 말한다. 자아는 인간 안에서 인간의 영원한 징표로, 이것은 불살라도 타자 않는 것으로 태울 수 없는 것으로 그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절망은 어떤 것에 불을 지른다, 태울 수도, 타지도 않는 자아에 불을 지른다."


26. 자기를 파괴하고자 하는 것의 불능(incapacité), 그 안에서 자아는 발견된다. 자아를 자기에게 주는 것, 그것을 하나의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여기, 절망에서이다. 절망은 하나의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자기와 분리되고자 하는 노력은 절망 안에서 원리로 머물기 때문이며, 절망은 삶이 자기와 절대로 떨어짐이 없이 자기에 밀착하는 이 근본적인 내재성의 영역에서 산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망에 고유한 자기를 파괴하고자 하고자 함은 자신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내적인 일관성(cohérence)에, 삶의 파괴할 수 없는 삶의 본질에 부딪친다. 이것은 바로 괴물스러운 절망의 모순, "절망의 죽음과 같은 모순 (l'atroce contradiction du désespoir)"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자기를 파괴하고자 하면서, 절망한 자는 죽고자 한다. 그런데 이 죽고자 하는, 그런데 죽음에 이르지 못하는, 이 의지(le vouloir)는 자신의 죽음을 죽임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 욕구는 차라리 "자신의 죽음을 사는 것(vivre sa mort)" 혹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듯, "영원히 죽기(éternellement mourir)"이다. 이러한 욕구는 모든 우울증의 근저에 현전하는 절망의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생각되지 않은 모순, 그런데 기도로도 주술로도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정념의 증여(l'inexorable donation du pathos) 안에서 체험되는 모순이다. 우리의 실존을 제한하는 이 정조들에 자리하는 모순은 그것의 절정(paroxysme)에서 나의 고통을 동반하며, 모순은 자신의 본질 그 자체에서, 파괴할 수 없는 어떤 것에서 자신 안에 불을 집힌다. 그리고 이 모순은 영원히 탄다.


27. 자신의 고통의 절정(comble)에서, 절망은 모든 삶이 자기에 이르는 원초적인 고통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삶은 또한 자신 안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자기에 대해 절망하고, 자기를 파괴하고자 하는 절망이 크면 클수록 - 그 안에서 자아는 자신의 자기를 파괴할 수 없는 무능(impuissance)을 측정한다 - 자아의 할 수 있음(le pouvoir)과 독립적으로, 자아의 의지(le vouloir)에도 불구하고, 어떤 힘이 자아를 자신 안으로 던지는 시험 또한 더욱 폭력적이고 더욱 강하다. 이 힘은 고통받기를 통한 삶의 힘이며, 이것은 삶이 완성되는 삶의 자기 안에서의 용출이다. 절망의 근저에는 삶의 생명의 도래(Parousie)와 닮은 그것과 결합된 절대, 삶의 자기계시가 있다. 그래서 어떤 정조도 자신 안에 홀로 갇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조는 삶의 자기에의 도래 안에서만 자기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며, 이 정조가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 역사는 세계의 역사, 세계의 사건들이며, 이 역사는 다른 역사, 즉 절대적인 삶의 역사에 의존할 때에만, 그 안에서 우리의 행위가 기원을 가지는, 우리의 삶이 구성되는 고통받기에서 향유하기로 그치지 않는 이행에 의존할 때에만 이해가능하다.


28. 절망이 우리에게 우리를 삶으로 여는, 우리 안에 사는 이 삶의 꺽을 수 없는 이 성격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역설적인 변증법에 의하면, 절망은 지고의 기쁨(béatitude)으로 넘어간다. 바로 여기에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은 최악의 불행이 아직 이르지 않은 병이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삶의 비밀스런 보고에 감춰진 역설적인 변증법에 의해서, 우리의 신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심각한 병들의 현전에서도 치료는 항상 가능하다. 그리고 이 치료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본능적으로 혹은 아주 자유롭게, 삶이 우리에게 자신을 주면서 자신을 주기를 그치지 않는 쉬지 않는 운동의 토대를 찾을 것이다. 에크하르트에 탁월한 말에 의하면, 그가 신이라고 부르는 삶, 생명은 "나 자신처럼 스스로 생성한다(s'engendre comme moi-même)". 이 끝없는 생성(génération) 안에서 내 안에 갇힌 정서적인 닫힘은 항상 열릴 수 있다.


29. 우리는 의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의학은 다만 과학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인식과 새로운 지식의 획득의 근저에는 객관적인 지식에, 그것이 정교화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에 환원되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이 구체적인 상호주체성의 관계를 가정하는 모든 것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의학의 시선은 초월론적인 시선이다: 과학적인 소여를 거쳐서, 의학적인 시선은 우리가 항상 단독적이고 현상학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향한다. 신체를 다룬다고 말하는 의학의 지평에는 이미 예를 들어 사진을 통한 검사는 고통을 보기 위해 신체를 통과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고통을 덜어내고 이것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신치료의 영역에서는 더 강한 이유로 개인의 삶이 항상 탐구와, 이론과 치료의 주제를 규정한다. 여러 과학들 사이의 관계는 여기서 어떤 일치에 이르는 것도 어떤 종교적인 소망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치료사와 철학자들의 일이고 일상의 빵이다. 하나의 같은 궁극적인 목적이 그들을 결합한다: 병든 삶,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삶을 삶의 힘과 삶의 행복에 돌려주는 것, 카프카가 "그것이 여기에, 적대점에 있다(qu'elle est là, point hostile)"고 말하는 이 삶에 돌려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