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미셸 앙리, 철학의 여정 (대담 2001)

aurorepark 2010. 10. 14. 16:30

이 대담은 그의 강연들과 대담들을 모은 책 Auto-donation, Entretiens et conférences , 자기-증여, 대담과 강연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대담은 이자벨 고데 Isabelle Gaudé가 정리한 것으로 2001년 Le journal des Grandes Ecoles에 실렸던 것이다. "Un parcours philosophique" "철학의 여정"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책의 제목은 Auto-donation이다. 이 제목의 앙리의 사상을 요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donation>이라는 말은 현상학의 고유한 언어이다. donner, se donner, la donnée , la donne 혹은 la donation, le don  형용사로 donné, donatrice 등등 이 모두는 후설의 현상학으로부터 특히 그의 현상학의  "원리들 중의 원리"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왜 현상학에서 이 <줌>이 중요한가? 왜 이 말은 현상학의 중심 개념이 되는가?  후설의 현상학의 "원리들 중의 원리"를 읽어보자.


"toute intuition donatrice originaire est une source de droit pour la connaissance; tout ce qui s'offre à nous dans "intuition" de façon originaire (dans sa réalité corporelle pour ainsi dire) doit être simplement reçu pour ce qu'il se donne, mais sans non plus outrepasser les limites dans les quelles il se donne alors. Il faut bien voir qu'une théorie ne pourrait à son tour tirer sa vérité que des données originaires. Tout énoncé qui se borne à conférer une expression à ces données par le moyen d'une simple explicitation et de significations qui leur soient  exactement ajustées, est donc réellement, comme nous l'avons dit dans les lignes d'introduction de ce chapitre, un commencement absolu appelé au sens propre du mot à servir de fondement, bref un principium. "(Idées, § 24, trad. Paul Ricoeur)


"본래적인 방식으로 부여하는 모든 직관은 인식을 위한 합법적인 근원이다; 본래적인 방식으로(말하자면 자신의 신체적 실재 안에서) "직관"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주는 것을 위해 단순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를 주는 것을 제한하는 한계들을 넘어섬이 없이 행해져야 한다. 따라서 이론은 자신의 진리를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들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이 소여들에 정확히 일치하는 단순한 명시화와 의미작용을 통해서 이것들에 하나의 표현을 부여하는 것에 그 의무가 한정되는 진술은 따라서 실제적으로, 이 장의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시작, 그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토대를 제공하는, 한 마디로 하면 원리이다."(이념들 I,  § 24)


현상학의 원리들 중의 원리는 무엇인가? "l'intuition donatrice originaire, 본래적인 방식으로 부여하는 직관"이다. 이 직관에 붙은 두 형용사가 이 직관의 성격을 결정한다. donatrice/gebende, 주는, 부여하는, 수여하는, 등의 의미이다. 직관에 붙은 이 능동적인 형용사는 이 책의 뒷 부분에서 드러나는 초월론적인 의식의 구성으로의 이행을 지시하는 la donation du sens, 즉 의미의 부여(§ 55)를 예비하기도 한다. 그런데  보기에 관념론적인 경향은 이 책의 § 1에서부터 강조하는 지각의 경험론적인 성격을 가리지 못한다. "각각의 과학은 자신에 고유한 대상의 영역을 가진다. 그리고 과학이 포함하는 모든 인식(정확한 진술, l'énoncé correct)은 합법적인 인식의 기원과 토대로서 어떤 직관들을 가진다: 여기서 생각하는 영역의 대상들은 몸소(en personne) 주어지며, 자신을 주며(se donner) 적어도 본래적인 소여(donnée originaire/ originärer Gegebenheit)의 형식 하에서 주어진다" (§ 1). 후설은 처음에서부터 인식의 모든 합법적인 근원으로서 직관, 즉 보는 것(inturi, 이 라틴어는 "보다"를 의미한다)을 놓는다. 다시 말해 이 봄, 직관은 모든 판단의  기준이다. 내가 보면 참이고, 내가 보지 않으면 거짓이다. 후설이 위에서 certaines intuitions이라고 말하듯이 후설은 이 익숙한 일상적인 직관이란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명시한다: "직관"이 있다면, 대상들은 그 자체로 주어지고, 더 정확히 말하면 본래적으로, 몸소, 살과 피를 가지고 자기를 스스로 준다. originaire라는 형용사는 주체에 주어지는 대상이 나타나는 방식을 지시한다.  그 대상이 감각적인 대상이든, 지적인 대상(논리적 범주,  개념, 수, 상상적 대상 등등)이든 모두 몸소, 어떤 매개도 없이, 그 자체로, 사물의 원본 그 자체로, 그대로, 몸소, 살과 피를 가지고 지각에 주어진다. 이 봄이 직면한 대상의 대상성의 직접성이 모든 인식의 합법성을 보증한다. 다시 말해 "donation originaire"는 나와 내가 경험하는 것과의 관계를 규정한다: 내가 한 대상을 지각하면, 그것은 나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그것의 진리 안에서 신체적으로(신체적 실재의 방식으로), 즉 구체적으로 나에 대해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설이 처음부터 명백히 말하듯이 모든 직관, 지각이 다 "본래적인",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 안에서 드러난다. 물리적인 사물들에 대한 경험은 본래적이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것, 내가 기대하는 것, 공감을 통해 접근하는 타인의 의식은 직접적으로, 몸소, 그 자체로, 본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1) 시간과 타인의 문제에 많은 현상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 지닌 그 한계성 때문이다. 사실 봄, 현상의 학은, 그것이 본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지라고 보여지는 것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은 보여지지 않는 무한의 가능성을 그 자체로 전제한다.  


후설에게 경험은 주체에게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것과 주체와의 내밀한, 체험된, 느껴지는 관계를 지시한다. 후설이 의식의 경험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체험, Erlebnis(vécu)", 혹은 "체험하다, erleben(vivre)"는  즉 살아낸 것, 겪은 것, 느낀 것, 사는 것,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후설이 이 말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첨가하는  신체 혹은 신체적인이라는 말들, Leib, leibhaft로 리쾨르가 corps, corporel 혹은 vif 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 말은 위에서 우리가 읽은 것처럼 대상이 주어지는 본래적인 방식(originärer Gegebenheit)을 지시한다. 의식의 상관적인 내적 대상으로 칸트적 의미에서 의식이 대면하는 것이다. 이 대면의 성격은 후설에서 지향적인 성격을 예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은 물질의 살아있는, 살적인 측면으로 chair, 혹은 en chair로 옮겨야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위에 § 24에서 본래적인 방식을 설명하면서 후설이 괄호 안에 넣어서 부가적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는 dans sa réalité corporelle은 사물이 자신을 몸소, 본래적으로 ,살아있는 방식으로 주는 줌의 양태를, 그것의 <말하기dire, 그것의 진술하기énonciation>의 방식을 지시한다. 과학, 인식의 진술(l'énoncé) 혹은 말해진 것(le dit), 즉 명제적 진술의 진실성, 그 기준은 "말하기", "진술하기"로부터 그것의 합법성을 가져온다. 바로 이 둘 사이의 일치를 넘어서 하나의 다른 하나에 대한 넘침과 그것에 대한 한계, 다시 말하면 진술과 진술하기, 말해진 것과 말하기 사이의 간격은 그 이후의 현상학자들의 행로를 결정한다. 후설의 입장은 위의 원리들 중의 원리에서 말하듯, 직관은 침묵이나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명시화(explicitation)와 의미작용(signification)에 놓인다: "이 소여들에 정확히 일치하는 단순한(simple) 명시화와 의미작용을 통해서 이것들에 하나의 표현을 부여하는 것에 그 의무가 한정되는 진술(énoncé)은 따라서 실제적으로, 이 장의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시작, 그 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토대를 제공하는, 한 마디로 하면 원리이다." 이 원리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책의 처음에서부터 우리의 일상적 믿음을 깨면서 낯설게 말해지는 "idéation"이다. 


idéation, 정확히 무엇인가? 후설에게 경험은 주체에게 현전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주체의 내밀한 체험적 관계를 의미한다. 후설은 이 관계를 "eidos"라고 부른다. 후설이 희랍어에서 빌려온 이 말은 그의 언어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입는다. 후설이 "eidos"라고 부르는 것은 플라톤의 "본질(essence)" 혹은 이데아와는 달리, 이 말의 희랍어의 일상적인 의미가 지시하듯이 감각적인 개별적인 실재, 즉 시공간적인 사물의 나타나는, 그것이 자신을 주는 측면(aspect), 모습, 이미지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말은 종종 "얼굴(visage/face)"이라고 옮겨지기도 한다. 


이 책의 § 2의 제목이 "le fait. Que le fait et l'essence sont inséparable, 사실. 사실과 본질은 분리되지 않는다"이듯이, "eidos 에이도스"는 사실과 본질의 분리될 수 없음을 지시한다. 사실과 본질은 그 말이 지시하듯이 우연성과 필연성을 지시한다: "개별적인 존재(l'être individuel)는 그것의 모든 형식에서 가장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면 "우연적"이다. 그것은 이러저러하게 하다; 다른 한편 그것은 또한 자신의 본질에 의해서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우연성과 필연성의 상호관계는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매 사실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에 의해서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미 바로 그 의미에 의해서, 모든 우연적인 것은 본질을 정확히 한축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즉 Eidos를 함축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개체의 변화, 혹은 변주(variation) 안에 변화하지 않는 것의 필연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필연성의 기준으로서 우연적인 것의 가능성, 즉 잠재태를 전제한다: "개체는 다만 "여기 있는 것(ceci-là)"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 자체로(en soi-même, kathauto)" 이러저러한 구성을 가진다. ...그것의 영원한 다발의 본질적인 술어들은 그것에 필연적으로 도래한다...따라서 다른 규정들, 이차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은 그것에서 떨어져 나간다."(§2) 본질들의 변주는 감각적인 것들의 변주에 의존한다.


이어서 §3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본질(essence)"라는 말은 한 개체의 가장 내밀한 존재(l'être le plus intime)안에서  마치 자신의 "것(Quid, sein Was)"으로서 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것"은 항상 이념(idée)으로 정립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경험적인 직관 혹은 개체의 본질은 본질의 봄(Wesen-Schauung), 즉  (en idéation)으로 변형될 수 있다." Wesen-Schauung, la vision de l'essence, 본질의 봄은 괄호 안에서 en idéation이라고 표현된다. 여기서 Schauung, 봄은 결정적이다. 이 말은 이 장의 끝에서 évidence, é-vidence, ex-videre, de- videre(voir), "보는 것으로부터"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질은 개체의 가장 내밀한 존재하고 말한다. "intime"은 그 자체 라틴어에서 intérieur, "내적인"의 최상급니다. 여기에 plus가 붙었다. 내밀한 것 중의 내밀이다.   


여기서 후설은 개별적인 대상과 "새로운 종류의 대상" 이라고 그가 eidos라고 부르는 것 사이의 "근본적인 공동체(communaté radicale)"를 말한다. 가능성들의 보고인 개별적인 대상과 이 개체의 내밀성인 본질 사이의 공통된 구조은 단순히 외적인 유비가 아니다.  새로운 대상으로서 eidos는 주체의 직관에 의해서 접근가능하며, 그것은 마치 감각적인 지각들이 주어지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이러 저러한 측면들로 주어진다. 본질 직관은 자신의 토대로서 개체에 대한 직관을 전제하고,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idéation을 행함이 없이는 개체의 직관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면서, 우리는 개체의 봄이 한 사례(un exemple)로서 드러내는 그것에 일치하는 본질로 시선을 향한다"고 말한다. 즉 여기에는 개체와 eidos 사이의 순환이 존재한다. 후설이 여기서 "한 사례에 대한 봄"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idéation"을 지시한다. 무수한 책상들의 측면에 대한 나의 감각적 지각들에서 책상의 한 사례를 본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을 말한다. 무수한 빨강의 변형들 한 가운데에서 빨강의 사례를 본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빨강의 본질을 본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빨강과 빨강의 본질은 둘이 아니다. 레비나스가 le rouge rougeoie라고 말하듯, 이 진술은 실재를 이중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술어화 안에서, 빨강의 본질을 이해한다.  그 본질은 그 빨강의 술어, rougeoyer의 울림 안에서 자신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시간화한다. 여기서 내가 바라보는 무수한 변형들은 우연적인 것들이다. 이 우연적인 것들 안에 eidos에 내재하는 변형성이 자리한다. 이러한 과정은 뒤에서 후설이 본질적 환원의 절차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idéation, 이것은 단순히 관념화, 개념화가 아니다. 이것은 후설이 원리들 중의 원리에서 말하는 본래적으로 주는 직관의 절차, 즉 본질의 직관의 과정, "사례화" 혹은 "이념화"를 의미한다.


서론이 길었다. 앙리에서 고전적인(classique) 현상학(앙리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그렇게 부른다)의 언어들은 심각한 변형을 겪는다. 본문을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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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앙리, 당신이 보기에 현상학자의 연구의 대상은 무엇인가?


- 현상학은 특수한 현상들, 예를 들어 생물학적, 역사적, 법률적  등등의 현상들을 연구하지 않는다. 현상학은 매 현상 안에서 그 현상을 현상으로 만드는 것을 찾는다. 따라서 하나의 일반적인 질문이 모든 현상에 제기된다. 그리고 우리는 현상학은 특수한 현상들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일종의 현상의 본질, 즉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것, 혹은 같은 말이지만 그 현상의 순수한 나타남(apparaître), 그것 그 자체로서의 현시(manifestation), 그것의 계시(révélation)를 탐구한다고 말하면서 이 질문을 따로 떼어낼 수 있다.


[앙리는 여기서 en termes équivalants, 즉 등가의,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말들이라고 하면서, apparaître, manifestatiion, révélation을 열거한다. 이 말들은 유사어들이지만 그 뉴앙스가 각각 다르다. 동의어는 다만 말을 하면서 생겨날 수 있는 권태를 피하기 위해서, 혹은 단지 말의 다산성 때문에, 우리의 수다를 풍요롭게하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동의어가 가진 힘 중에 하나는 한 단어로 어떤 의미를 설명하기에 부족할 때 보충적인 역할을 한다. 앙리의 동의어의 나열은 바로 그런 효과를 가진다. 만일 내가 이 세 단어를 모두 <나타남>이라고 옮겼다면 이 문장에서 앙리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내가 세 단어를 다르게 말하는 것보다 덜 할 것이다. 같은 의미의 말들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본질에 조금씩 다가간다. 그것은 읽는 독자에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글쓰는 작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왜 자꾸 새로운 표현, 새로운 단어를 찾는가? 아마도 한 단어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항상 여기에는 부족이 있다. 그 부족을 메꾸는 것은 바로 동의어들의 반복이다. 그것이 가지는 장점은 <현시>라는 말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다 들어나지 않는다면, 몇 줄 뒤에 <나타남>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좀더 가까운 혹은 근접한 이해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 둘도 아니라면 우리는 <계시>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단번에 이해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앙리는 소설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는 말이 가진 결핍과 더불어 이러한 상승가치, 혹은 부가가치를 알았을 것이다. 그 말의 번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시>라는 말의 번역이 가지는 결핍은 다른 말들이 보충할 것이다. 그 유사어들의 반복의 효과로부터 우리는 어떤 하나의 이해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은가? 


위의 세 단어의 뉴앙스에 대해서 말해보자. apparaître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갑자기 보이지 않던 것이, 없었던 것이 보이다, <나타나다>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의미로 새로운 종, 새로운 모드의 출현과 같은 것을 말한다.  즉 <어떤 것이 갑자기 눈 앞에 보이는>것을 의미이다. 추상적인 의미로 <감춰진 혹은 비밀스런 어떤 것, 그것이 의도이든, 그것이 의미이든, 그것이 신성이든 갑자기 정신에 드러나는>것을 의미이다. 불어의 어원인 라틴어는 대중 라틴어와 교회에서 사용하던 라틴어로 갈라지는데, 불어의 많은 단어들은 후자로부터 유래한다. 천년의 기독교의 역사는 그들의 언어에 각인되어 있다. 그 의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속화된다. apparaître의 불어 뜻풀이를 보면 앙리가 이 말과 등가의 것으로 manifestation와 révélation을 말하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devenir visible, 보이다 se manifester, se montrer sous une forme visible 가시적 형태로 드러난다, 자신을 드러내다, venir à l'être 없었던 것이 존재하다, se révéler à l'esprit quelque manifestation 어떤 현시가 정신에 드러나다, 등등이다. manifestation, 이 말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action de rendre manifeste, 여기서 manifeste의 본래의 어언적인 의미는 manifestus로 "pris avec la main", "saisi par la main", "손으로 잡은 혹은 파악된"이라는 의미가 있다.(manifeste는 또 명사로 '선언' 혹은 '포고'라는 뜻도 있다. 공산당 선언이라고 할 때 이 말을 쓴다.)  즉 "어떤 사실에 의해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감각적이 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교회에서 쓰던 용어로 la puissance divine se rend manifeste,  "신적인 권능이 드러나다", 혹은 fait, moyen par lequel Dieu se manifeste, devient sensible, "어떤 사실 혹은 수단에 의해서 신이 자신을 드러내다, 감각적이 되다" 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apparition 출현, éphiphanie 현시 혹은 현현의 의미이다. 레비나스가 <얼굴>을 말하면서 사용하는 단어는 "éphiphanie"이다. 현시 혹은 현현으로 옮겨지는 말이다. manifestation의 세속화 된 현대의 의미로는 정치적인 의도의 드러냄, 시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révélation을 보자. 이 말은 "감춰진 비밀, 숨겨진 사실을 드러내는, 폭로하는 행위"를 지시한다(레비나스는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맥락에 따라서 나는 이 말을 나는 <폭로>라고 옮길 때도 많다. 사실 <전체성과 무한>의 본문이 "진정한 삶은 부재한다la vraie vie est absente"고 말하듯, révélation은 부재하는 내적 비밀의 폭로, 드러냄, 드러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 당신의 사유는 내면성(intériorité)의 사유인가?


- 전적으로 그렇다. 현상학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 질문이 문제가 되는 경우, 이 질문은 다만 현상들의 나타남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그것은 이 나타남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 이래로, 모든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물론 예외적인 몇몇 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나타남에 대한 하나의 지배적인 개념화가 우선적인 가치를 가진다. 그것은 게다가 상식(sens commun)적인 나타남이기도 한데, 그것은 바로 세계의 나타남(l'apparaître du monde)이다.


- 다시 말하면, 외재성(extériorité)?


- 그렇다. 왜냐하면 세계, 그것은 아주 정확히 말하면, 외재성이다. 하이데거의 그 위대한 텍스트들에서, 세계는 자기 밖(hors de soi)에 놓인다. 후설에서, 나타남의 순수한 현상성의 정의는 지향성에 의해 이뤄진다. 지향성은 의식이 자신을 자기 밖으로 던지는 운동이며, 의식이 볼 수 있는 것을 보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의식이 자신을 자기 밖으로 던지는 한에서이다.  의식은 그래서 항상, 가시적인 어떤 것의 의미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후설이 한 것 - 물론 그가 한 일은 대단한 것인데 - 감성, 혹은 지각적인 경험의 대상들로 더 이상 (단순히) 환원되지 않는 가시적인 것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었으며,  수학적인, 기하학적인 혹은 논리적인 대상성들과 같은 순수하게 이념적인 대상들 혹은 대상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후설은, 비록 그가 삶 (la vie)의 문제, 즉 그가 "초월론적(transcendantal)"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의 - 다시 말해, 생물학적이 아닌 - 문제에 사로잡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의 고유한 계시(révélation)의 양태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문제를 "익명"에로 던져버렸다.


[위의 한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불어는 다음과 같다: Mais Husserl, bien qu'il ait été obsédé par le problème de la vie qu'il appelle à juste titre "transcendantal", c'est-à-dire non biologique, a été incapable de reconnaître son mode de révélation propre.  불어에서 la vie 라는 말은 우리말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인 '생명'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이 말은 우리가 이와 달리 이해하는 '' 혹은 (정신적인)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가 "나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을 때, 이 vie는 생물학적인 vie 생명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초월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후설의 주체의 삶, 혹은 자아의 초월론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물학적인 vie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한 앙리의 언어들은 vivre, vivant, s'éprouver, présent, présence, transcendantal, invisible 등이다. 한 "주체의 삶"과 연관된 이 모든 단어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보다 쉬운 말은 생명이라는 말보다 삶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한 복음의 한 구절을 "나는 진리요 삶"이라고 읽는다. 이 말이 가진 의미의 폭이 너무 넓기도 하지만, 그 말이 지닌 굴절성에 내기를 건다.]


- 따라서 당신이 관심을 갖는 것은 비가시성(l'invisibilité)인가?


- 그것은 나의 탐구의 본질을 구성한다. 내가 지향적인 의식과 연관된 모든 것들에 대한 현상학자들의 작업의 절대적인 타당성, 다시 말해, 과학적 인식의 타당성 - 그것은 매번 아주 주목할 만한 명시화를 그 대상으로 삼았던 거대한 영역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 을 인정하는 순간, 이것과 다른 영역이 우리에게 보다 가까운 것이 남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까운 것은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탐구하고자 한 것은 바로 항상 가시적인 것 아래에 자리하는 이 영역이다. 그런데 이 영역은 아주 어려운 방법의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일상적으로 작업은 항상 보는 사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만일 보이지 않는 삶이 사유의 파악을 회피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것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사실, 모든 봄을 회피하는 이 실재에 어떻게 우리는 접근할 수 있는가? 나의 대답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 접근하는 것은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본래적으로 자기 안에 도래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가장 우선하는 활동, 내가 정념(pathos)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서 - 사실 이것은 실체로서 우리의 삶의 현상학적인 망(trame)을 구성한다 - 자기 자신을 스스로 느끼면서(s'éprouve) 자신 안에 도래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모든 종류의 우리 삶의 양태들 - 아주 단순한 기쁨과 고통과 같은 인상들로부터 불안, 권태, 만족, 행복, 불행과 같은 보다 깊은 감정에 이르기까지 - 은 정감적인(affectives) 양태들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그것의 고유한 정념의 직접성 안에서 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습관적으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그 말의 논리적인 의미에서 부조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그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고통받는 자가 자신의 고통을 마치 자기 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처럼 부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실 그에게 절대로 외재성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 경우 즉각적으로 타자의 고통, 다시 말해 표상된 고통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고통을 (직접적으로) 겪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 우리에게 가장 본래적인 것은 다른 양태의 계시 - 이것은 직접적인 수여(donation)로부터 들어 올려지는 것(relève)인데 - 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사실, 최초의 것은 나의 인상들, 나의 고통, 나의 욕망, 나의 화의 내적인 느낌이다. 그리고 이 순수한 정감적인 인상들이 바로 나의 살의 결(tissu)을 형성한다.


[삶(la vie)과 그 삶의 물질성matérialité과 연관해서 pathos, pathétique, affectif(ve), affection, auto-affection, affectivité, épreuve, s'éprouver 등을 열거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물질, 원소적인 것(l'élémental)은 인상들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으로 pathos라고 불린다. 이 말이 souffrance 와 passion을 의미한다면, 이 말을 "정념"으로 옮기는 것이 그렇게 나빠보이지 않는다. 이 말을 원어대로 파토스라고 옮길 경우, 형용사 pathétique를 파도스적으로 옮기는 것은 우습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인 이 삶은 그 살로서 파토스,  정념, 혹은 감정을 지니며, 그것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지시하는 말은 그에게 affection, 더 정확히는 auto-affection이다. 이 말은 auto-donation과 같은 의미이다. 다만 그것이 쓰이는 언어의 맥락이 다를 뿐이다. 이 말은 또한 s'éprouver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 모두가 같은 말이다. 동의어이다. 이 말을 <정서>로 옮길 경우 affection이라는 말이 철학사 안에서 가지는  많은 의미가 죽는다. 나는 이 말을 칸트적인 용어로 그대로 옮긴다. 같은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의미의 <폭>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같은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그것의 역사적인 혹은 철학사적인 변주를 밝힐 수 있는 이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촉발이라는 말이 지닌 살아있는, 작동하는 물질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affecter, s'affecter라고도 표현되는 이 말은 순수하게 작동적인 의미로  effort 노력과 연결되기도 하는 것으로 단순한 정서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émotion이라는 말이 정립의 전복을 의미하듯이 affection은 영향을 닿자마자 폭팔하는 것이다. 그것은 앙리가 말하는 파토스이기도 하다. s'éprouver, épreuve는 그 말 자체가 여러 의미를 가지지만 나는 정념과 관계해서 주로 "느끼다", "느낌"으로 옮긴다. 사실, 이 옮김은 이 말이 지닌 의미를 다 살리지 못하는 것을 안다. 사실 이 말은 몸소 겪다, 살아내다, 시련을 겪다, 체험하다 등등의 모든 의미를 가진다. s'éprouver soi-même,현상학의 의식의  자기 체험, 삶이 문제가 되는 경우 레비나스나 앙리에게 이 말은 우리의 '살'과 즉 우리의 감정, 정념, 인상, 물질과 관계한다. 즉 우리의 경험과 관계한다. 특히 고통과 연관될 때 이 말은 고통을 겪다, 시련을 겪다, 직접 겪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 당신의 철학적인 길에서 당신은 당신에게 도움을 준 어떤 사상가를 만난 적이 있는가?


- 있다. 멘느 드 비랑. 내가 주체성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이고, 그 근본에서 살적이고 촉발적[정감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을 때, 나는 진정으로 그로부터 유일한 도움을 얻었다.  멘느 드 비랑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나중에 존재론적 이원론, 다시 말해 나타남의 이중성이라고 부른 것을 예감했다. 나타남은 자기 밖에서 세계 안에서의 나타남이거나,  인상적이고 정념적인 삶의 직접성 안에서의 나타남이다. 이것은 두개의 이종적인 나타남(deux apparîtres hétérogènes)이다. 더욱이 멘느 드 비랑의 육체의 현상을 연구하면서(Michel Henry, Philosophie et phénoménologie du corps. Essai sur l'ontologie biranienne, Paris, Puf, 1965), 나는 어떤 것 - 이것은 진정으로 나의 사유의 여정의 철학적인 계시와 같았던 것인데 - 을 발견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심화하면서, 그는 이 코기토는 "나는 할 수 있다(un je peux)"이며, 이 "나는 할 수 있다"는 바로 나의 주체적인 육체라는 사실을, 그리고 육체-주체는 모든 경험의 기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육체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의 현상이다. 왜냐하면 한 실재가 나에게 전적으로 다른 두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과 증거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육체로부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고유한 육체는 밖으로부터 주어진다. 우리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볼 수가 있으며, 혹은 직접적으로 우리 신체의 일부를 보거나 만질 수 있다. 그런데 육체는 또한 내적으로 나에게 주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행하는 모든 활동의 영역에서 드러나는 노력의 경주에서 그와 같은 것을 발견된다. 이 노력은 절대적으로 주체적이고 고통이나 행복과 같은 정감적인 것이다. 그것이 행복일 수도 있는 것은, 어떤 경험 안에서 우리는 어떤 행복한 노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주체적이고 개인적이고 근본적으로 정념 안에서 주어지는 이 육체(corps)에 대해서 나중에 나는 살(chair)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 당신의 철학의 여정에서 맑스에 대한 반성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맑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대로부터 나오는가?


- 전쟁 후에, 파시스트의 지배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승리가 왔을 때. 프랑스에서는 아주 강한 맑스주의의 바람이 불었다. 이 바람은 몇 십년을 프랑스의 사유를 아주 광범위하게 결정했다. 이 맑스주의는 항상 나를 소름끼치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교리공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들과 우리의 삶에 앞선 객관적인 구조들의 우선성을 진술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항상 개인적인 형식을 꿈구며, 맑스는 우리의 삶을 아주 분명하게 살아있는 개인들의 삶의 형식으로 특징지웠다. 아주 우연히 내가 나의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맑스의 작품들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전적으로 다른 유형의 사상가과 관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 때 맑스와 맑스주의를 범주적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 물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 결론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맑스는 삶의 근본적인 원리가  행위 혹은 그가 실천(praxis)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의한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행위는 맑스에게 항상 개인적이고 주체적이고 살아있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행위의 근본적인 양태들 중의 하나는 바로 노동이다. 따라서 맑스는 개인들의 노동이, 여타의 것들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토대에 자리하는 한에서, 경제론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 점은 맑스주의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에게 경제는 보편적인 대상들 - 돈, 지난 세기에 우리가 사용과 교환의 가치라고 부르는 것 - 을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혁명적이다. 대상들은 객관적이기에 과학적인 유형의 대상들이다. 그런데 이 대상들은 전적으로 그것들이 번역하고자 하는 실재와의 관계에서 전적으로 비정합으로 드러난다. 이 실재는 바로 개인적이고, 비밀스럽고, 양화할 수도 없고, 질화할 수도 없는 삶을 지시한다. 바로 이 점이 맑스에서 탁월한 부분이다. 그의 경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전적인 독창성을 가진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까지 아직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떻게 우리 자신인 이 실재로부터만 우리는 사물들을 교환할 수 있는 등가의 체계를 창출할 수 있으며, 그것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의 원리 그 자체에는, 맑스가 볼 때, 진정한 비자연화, 즉 소외를 구성하는 어떤 대체가 있다.


- 당신은 또한 용기있는, 혹은 사람들이 예언적(visionaire)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에세이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저서는 맑스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당신은 여기서 그에게 비판과 더불어 찬사를 동시에 그에게 전달한다. 이 에세이는 『야만』이다.


- 그렇다. 우리 시대에 야만은 삶의 제거에 있다. 아니 차라리, 인류의 집단적인 자살에 이르지 않고서는 그것을 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한 듯이, 삶을 두 번째의 서열에 놓는 것이다. 삶은 지금까지 항상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구성해왔다. 그리고 생산은 바로 이 사회의 필요에 따라서 행해졌다. 다른 한편 기술을 규정하는 도구적인 장치는 신체의 주체적인 힘들로부터 만들어졌다: 망치나 철퇴는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힘의 정도에 따라서 그것들의 형태와 무게가 결정되었다. 또한 맑스는 도구는 신체의 연장이라고 19세기 중간에 말했다.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17세기 초반에 갈릴레이와 데카르트에 의해서 발명된 기하학적-수학적 인식으로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에 의존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기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우주를 다루는 지식이다. 그 지식은 살아있는 주체적인 개인을 모른다. 그것은 근대의 지도 원리가 된 이 지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온다. 나의 주장은 과학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인간의 세계를 그들의 깊은 실재의 추상화를 통해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삶을 가린다면, 우리는 삶의 근본적인 가능성의 표현과 실현일 뿐인 문화의 토대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예술은 삶의 감각의, 윤리는 삶의 행위의, 종교는 삶의 정신적인 전념의 완성이다. 근대에서 삶과 거리를 취하는 것은 야만이 고발하는 다음의 역설 앞에 우리를 놓는다: 물질적인 전념에서 지식과 기술의 과장적 발전은 모든 형태 하에서 문화의 퇴행과 붕괴와 짝한다.


[sujet, objet, subjectif, objectif, subjectivité, objectivité, 이 용어들은 칸트철학의 번역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관, 객관, 주관적인, 객관적인, 주관성, 객관성으로 번역되고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번역어이다. 나는 칸트를 읽으면서, 그리고 그 이후의 철학들, 특히 현상학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특히 objet를 객관으로 옮겨야 하는지 질문했다. 칸트에서 불어의 objet에 해당하는 것은 Gegenstand이다. ."..앞에 놓인 것", 의식이, 주체가 대면하고 있는 내적 대상을 의미한다. 이것을 객관으로 옮길 경우 후설의 새로운 대상, 즉 초월론적 대상의 인도를 따라서 현상학을 이끄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그 이후의 앙리나 레비나스가 이 대상적인 관계, 즉 지향적 관계를 비판할 때 그 의미가 살아나지 않는다. 객관과 주관은 그 한자의 의미 그대로 주인의 관점과 객의 관점을 의미한다. 그 안에는 상관적인 의미로서의 지향적인 대상(objet)의 의미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자는 주체이다. 현상학에서 대상에 대한 질문은 초월론적인 주체를 드러낸다. 대상이 obstance이듯이 주체는 substance(hypokeimenon, subjectum)이다. stance는 "체", 아래에(sub) "놓여있는 것(stance)"을 의미한다. 현상학이 문제가 되는 경우 주체와 대상이라는 상관개념이 주관과 객관을 대신해야 할 것이다. 이와 연관된 objectif; subjectif는 자연스럽게 대상적(인), 주체적(인)으로 옮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맥에 따라서, 예를 들어 "객관적인 과학의 입장에서"와 같은 경우, 나는 객관적인으로 옮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 현상학의 고유한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말하는 경우 나는 대상, 대상적인, 대상성이라고 옮긴다. subjectf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경우에 따라서 주체적 혹은 주관적으로 옮긴다.]


- 당신은 기독교적 사상가라고 불러도 되는가? 


-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지난 세기 말 중간에 기독주의가 아닌 현상학에서 나의 철학을 시작했다. 그 시대에 사람들이 나에게 가르쳐준 고전 철학은  - 일종의 신칸트주의는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와 같은 사상가와 더불어 - 그들 뒤에는 보다 근본적으로는 후설, 하이데거, 셀러, 한마디로 위대한 독일의 현상학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  힘차게 시작한 현상학에 자리를 양보했다. 그들은 나에게 현상이 아닌 현상의 수여가 일어나는 어떻게에 대해서, 즉 현상들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이 세계에 나타남에서만 유지되는 이 현상학에 삶에 가장 본래적이고 고유한 계시의 양태를 첨가했다. 그리고 나중에, 나는 이 삶의 현상학을 기독주의에 적용했다. 나는 상호주체성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쳤다. 나는 왜 "자기 밖"의 전제들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정념의 전제들을 가지고 우리는 모든 진지한 철학들이 실패한 이 영역 안으로 - 이 상호주체성은 사회학과 모든 상호작용의 이론들, 상호작용의 이성성의 토대로 사용되는 것인데 -  나아갈 수 없는가라고 질문했다. 왜냐하면 어디에서나 전제되는 이 현상은 바로 이 상호주체성인데, 그것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신비적인 육체에 대한 바울의 텍스트들을 기억한다. 나는 이어서 신약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나는 전혀 기독주의를 철학으로 환원하려는 의도 없이, 기독주의는 그 근본에서 철학적인 전제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더 나아가 철학적인 이론들도 삶의 현상학의 이론들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따라서 나는 현상학으로부터 기독주의에 대한 철학적인 독서를 감행했다. 그런데 그 독서는 밖의 관점에서 그것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종의 진리를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독주의 안에는, 특히 요한복음의 첫 장은 명시적인 방식으로 "신은 삶"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책의 제목을 『나는 진리다』라고 정했다. 이 그리스도의 말은 혁명적이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에게 진리는 비인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진리는 과학자들의 진리를 흔드는 것이 있게된다. 이어서 "살"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나는 요한복음의 서문을 다시 읽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취했다. 여기서 육화는 "말이 살이된다"라는 문장과 더불어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나의 삶의 이론들로부터 이 육화의 현상들을 해석했다.


[Chritianisme, 이 말을 기독교 혹은 기독주의 혹은 기독정신으로 옮길 수 있다. 아주 일반적인 용어는 기독교이다. 나는 이 말을 기독주의로 옮기고 싶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정신에 기초한 이념이라는 의미에서이다. 더 생각해 볼 것이다.]    


- 당신의 가장 최근의 저작, 『육화』는 살의 철학이라는 부재를 가진다. 이 살의 개념은 정확히 무엇인가?


- 이 살의 개념에서 나는 멘느 드 비랑의 도움으로 썼던 개인적으로는 나의 최초의 책을 여기서 다시 취했다 (이 책은 Philosophie et phénoménologie du corps. Essai sur l'ontologie biranienne을 말한다. 이 책은 1946년 시작해서 1949년에 마친 것으로 출판은 『현시의 본질』 다음 해인 1965년에 이뤄진다. 이 책은 공식적으로는 그의 두 번째 책이지만, 앙리 개인적으로는 최초의 책이다). 다시 말해, 신체의 구체적인 주체성의 개념을 이 안에 도입했다. 그런데 이러한 신체의 도입은 이 말의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이론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신체를 대상으로 환원하는 전통적인 개념화를 근본적으로 내재적인 주체적인 신체의 이론으로 갱신하는 데에서만 가능하다. 데카르트와 근대의 철학자들이 사유 안에서 부딪친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기원은 바로 이 육체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화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혼은 어떻게 신체에 작용하는가? 그런데 멘느 드 비랑은  "나는 할 수 있다"(le "je peux")는 외적인 신체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체험된 "기관적 신체(le corps organique)" 그 자체를 전개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이 기관적 신체는 "나는 할 수 있다"의 노력에 양보하는 것으로서, 이 노력에 저항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노력 안에서 내적으로 항상 체험되는 이 저항이 더 이상 이 노력에 양보하지 않는 순간이 도래한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이 때, 자신의 밤의 비가시성 안에서, 우주의 실재하는, 그 자체 보이지 않는 신체를 느낀다. 나타남의 이중성으로 인해, 이 모든 과정 전체는  노력이 완수되는 우리의 보이지 않는 살에서 체험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안에서 외적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감각적 신체의 측면에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우주의 실재의 신체에서만 진실이 아니다. 살의 주체적인 "나는 할 수 있다"는 또한 다른 외적인 신체들 가운데 하나로, 마치 다른 것들을 만질 수 있고, 자기 자신을 만질 수 잇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이 신체의 대상적인 능력 그 자체에 의해서 특징지워지는 이 신체와 동일시되는 "경험적인 개체"로서 자신에게 드러날 수 있다. 이 경우 본래적인 "나는 할 수 있다"의 주체적이고 정념적인 운동은 순수하게 대상적인 현상을 위해 감춰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잃어버리고, 가시적인 것의 지배가 전 영역으로 연장되며, 그 지배는 가시적인 것 안에서 모든 것을 다시 취한다.


- 당신의 근본적인 구분들 중의 하나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다. 당신은 이 고전적인 구분에 어떤 새로운 것을 부여하는가?


-  보이지 않는 것, 내가 그것에 부여한 새로운 의미에 의하면, 특히 기독주의와 기독주의에 근접한 사상가들에서, 예를 들면, 메트르 에크하르트에서처럼 비 가시적인 것이 새로이 취한 의미는 절대로 가시적인 아닌 삶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삶의 외적인 현시들은 나타남의 이중성의 법칙에 의해서 세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삶은 그 자체 안에서 항상 보이지 않는다. 이 비가시성은 형이상학적인 전제가 아니다. 정념은 다른 무엇보다고 더 강하게 스스로를 인증한기 때문이며, 슬픔은 반박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정념론』에서 데카르트는 만일 세계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의심과 꿈의 가설의 의미에서, 그리고 만일 꿈에서 내가 어떤 슬픔을 느낀다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슬픔은 그것이 느껴지는 대로 그러한 방식으로 거기에 실존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 부분은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것을 진술하는 것이 나의 진술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나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참조이다. 바로 나의 삶이 삶에 대한 진술의 진리를 증명한다. 삶은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이 최초의 수여로부터 주어지며, 삶은 스스로 그것을 표상할 수 있다.


- 이것에 앞선 다른 것은 없는가?


- 삶의 자기-수여(auto-donation)는 모든 것에 선행한다. 하나의 우선적인 것, 하나의 예비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자기-수여이며, 이것은 자기-인증이며, 이것은 내가 나에 대해서 말하는 두 번째의 진리를 근거짓는다. 그리고 지향성 그 자체가 자기 밖에서 보여 주기 전에 비가시적 것 안에서 자신에게 스스로 주어지는 한에서그것은 또한 세계에 대한 나의 모든 언술의 진실성을 근거짓는다. 


- 육화된 주체가 느끼는 것과 철학이 전통적으로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신은 삶이라고 부른다. 당신에게 이렇게 여러 요소들에 의해서 규정된 이 용어의 의미는 정확히 무엇인가?


- 실제로 이 "삶"이라는 말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인들은 "bios"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이 삶은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존재자들(현존재,être-là)의 범주에 속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용어를 다시 취한다. 존재자들 중에서, 어떤 것은 타성적인 것이고, 어떤 것은 벌처럼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나처럼 살아있는 것이 있고 그것은 현존재(Dasein,)로 세계-내-존재이다.  이 말의 전통적인 의미에서, 삶은 일종의 존재자로서 간주되었으며, 생물학이 이 살아있는 것을 연구했다. 타성적인 것은 세계를 가지지 않으며, 동물은 세계의 결핍이며, 나, 인간인 나는 세계 안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나는 왜재성의 빛에 의해 밝혀진다. 나는 이 삶에 절대적으로 새롭고 다른 의미를 주었다. 이 삶은 더 이상 세계 안에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타남 그 자체와 관계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더 이상 현상의 기획 위에 존재하지 않으며, 순수한 현상성의 기획 위에 존재한다. 순수한 나타남의 영역에서 - 이것은 현상학의 고유한 주제인데 - 현상학은 세계의 나타남과 다른 나타남을 지시한다. 즉 이 나타남의 자기-나타남, 자기-계시, 그리고 그것의 물질은 바로 정념이며, 그것은 그것의 양태들 각각에서 느껴진다. 예를 들어 고통은 나에게 무엇을 주는가? 고통이다. 그것은 어떻게 나에게 주는가? 그것의 촉발성[정감성](affectivité)에 의해서이다.


- 당신의 가장 최근의 책, 『육화』는 기독교의 진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신학적인 전향"(도미미크 자니코의 팜플렛, Le tournant théologique de la phénoménologie française를 지시한다)이라고 부르는 것에 참여한다. 이 증언은 말로(Malraux)가 말하는 "종교적인 회귀"를 의미하는가?


- 내 작품의 지위가 현재의 한 사유의 지배적인 흐름과 같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것은, 내가 믿는 바이기도 한데, 삶을 배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만일 종교가 삶과 관계한다면, 이 때 우리는 종교 없는 세계는 불가능한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왜 종교는 삶과 연결되는가? 여기서 유한한 삶과 무한하고 절대적인 삶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전자를 특징지우는 것은 유한한 삶은 자신의 고유한 삶에서 자신을 이끌 힘이 없다는 것이다. 즉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삶을 줄 힘이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이 삶에 속한 나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유한한 나이다. 이 때에 나는 나 자신이며, 나는 모든 다른 것과 다른 이 나인 나이다. 그런데 나의 것인 이 내 안에 나를 가져온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절대로 이 내가 여기 있도록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절대로 나를 나 자신에 게 주는 힘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나는 나 자신에게 삶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영원히 자기 자신을 생성하는 이 놀라운 힘을 가진 이 절대적인 삶 자기-수여 안에서만 나 자신에서 주어진다. 


- 이 절대적인 삶은 신의 삶인가?


- 그렇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삶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삶은 모든 살아있는것들에게 삶을 주기 때문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삶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삶을 줄수 없는 어떤 삶 안에서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삶에서 종교로 이끄는 길이 생겨난다. 유한성은 대상적인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삶에 대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가지는 수동성이 겪는 내적이고 정념적인 느낌이다. 이 삶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각각을 관통하고, 그의 힘과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안에 퍼진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어떤 해석을 부여하든 간에 이 삶에 대해서 내가 겪는 나의 고유한 삶의 수동성은 반복의 여지가 없다. 


- 당신은 다만 철학자가 아니라 『젊은 장교』, 르노도 문학상을 받기도 한 『사랑, 감은 눈』,  『왕의 아들』 등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업은 철학의 여백인가, 아니면 당신의 사유의 전개에 결국 통합되는 또 다른 방식인가? 


- 그것은 여백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탐구의 과정에서 만난 어려움, 그것의 기술적인 문제로 고통을 겪었을 때, 어떤 필연성으로 느껴졌던 것으로 나에게는 나의 사유를 표현하는 하나의 다른 방식이다. 모든 탐구의 영역에서 그리고 그것이 전개됨에 따라서 그것은 방법론적이고 그것에 속한 개념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 탐구는 대중으로부터 분리된다. 오늘날 지식은 아주 세분화되었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의 것인 이 삶과 연관해서 내가 가진 믿음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했다. 내 소설들에서, 나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 심오한 실재가 - 고전 철학이 한편으로 재쳐놓은 것 - 개념의 기획에서가 아니라 상상의 기획에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때 처음부터 어려움은 이중적이었다: 만일 우리가 작가인 경우, 그는 우리가 철학자이기를 배우는 것처럼, 상상적인 것을 쓰는 것을 배운다. 하나의 삶은 두 과제를 다 잘 이끄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몇몇 실제적인 이유들 때문에 이 둘을 모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주 젊어서 CNRS(le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에 들어갔을 때 의식했다. 이 때 나는 이미 『젊은 장교』를 썼을 때이다. 선택을 해야했다. 나는 철학을 선택했다. 나중에 나는 억압된 열정처럼 소설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을 때ㅡ 나는 사랑, 감은 눈을 썼다. 이 소설의 배경은 과거의 한 문명의 전개가 부딪친 아포리에 던져진 한 시선이었다. 성장의 한 시대를 거친 후 - 그 기간 동안 그것이 물질적인 자산의 산출이든, 미학적 윤리적 종교적인 정신의 창출이든지 간에 삶은 모든 영역에서 항상 보다 지고한 힘에 이른다 - 그런데 어떻게 이 삶은 기움과 죽음을 알게 되는가?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이 자기-파괴의 현상이다. 우리가 소설에서 과거의 이러한 현상들로 시선을 던지는 한에서 그 현상들은 우리의 눈아래 실제로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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