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미셸 앙리, 물질 현상학, 서문

aurorepark 2010. 10. 19. 05:01

“하이데거에 의해서 부양된 형이상학의 역사에 환원 불가능한, 그것과 다른 철학의 역사를 변별하고, 파헤치고 그리고 생각하라”(장-릭 마리옹)


- 이 글은 『물질 현상학』의 서문 번역이다. 이 책은 현상학과 관련된 문제, 시간의 문제, 방법의 문제, 그리고 타인의 문제에 대한 이미 발표되었던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 이 짧은 서문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는 근본적이다. 근본적이라는 말은 극단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radical,뿌리를 건드리고, 뿌리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는 레비나처럼 후설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놓기를 처음부터 거부한다. 그는 후설의 전제들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는 전복을 말한다. 현상학의 질문 자체의 전복을 꿈꾼다. 그의 글쓰기의 스타일은 레비나스와도, 데리다와도 블랑쇼와도 다르다. 스타일, 그것이 사람인 바, 그것이 다름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서문 - 현상학의 질문


지난 10년 동안 파리의 지적 유행들, 그 중에 특히 철학을 대신하고자 하면서 인문학의 중심에서 가장 피상적인 것이기에 가장 널리 퍼져있었던,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해 다만 외적인 관점만을 제시했던 구조주의가 붕괴되면서, 현상학은 점점 더 우리 시대의 중심적인 사유의 운동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철학의 장에 후설의 복귀는 방법론의 발명, 특히 철학의 본질이 밝혀지는 질문의 발명에서 유지되는 지성의 힘의 복귀이다. 현상학은 독일 관념론이 19세기에 경험론이 18세기에 데카르트주의가 17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가 스콜라 철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전 철학에 속하는 것처럼 20세기에 속할 것이다. 이제 저 찬란하고 지고한 사유들의 화랑에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현상학도 저 위대한 사유의 모델들처럼 과거에 속하지 않는가?


현상학의 질문 전체를 구성하는 전제들이 그 원천들을 모두 고갈하고 그 함축들을 모두 전개했다면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현상학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것으로 보인다. 탁월한 지적능력을 가졌던 메를로-퐁티와 같은 철학자가 후설, 하이데거 혹은 셸러와의 관계에서 진정으로 현상학에 가져온 새로운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 이후로 현상학의 운동은 현상학의 창시자들이 열어 놓고 아직 밝히지 않은 전제들을 다 전개했는가?


현상학의 갱신은 오늘날 하나의 조건에서만, 현상학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질문, 그 철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질문 자체가 갱신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갱신은 확장, 교정, 더 나아가 다른 것을 위해 현상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의존하는 것을 전복해서 모든 것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현상학을 근본화하는 것이다.


현상학의 질문, 이것만이 철학에 고유한 대상을 부여할 수 있으며, 이것만이 철학을 다른 과학이 발견한 것들에 대한 사후작용으로서 반성의 활동이 아니라, 자율적인 원리, 지식의 근본적인 원리로 만들 수 있다. 이 질문은 더 이상 현상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이 주어지는 방식, 즉 그들의 현상성과 관계한다. 다시 말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남 그 자체와 관계한다. 이 후자를 통각하고 그 자체를 분석하는 것은 역사적인 현상학에 대한 진정한 기여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의 주제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제기, 즉 고전적인 의식이나 그리스적 진리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상을 마치 최초의 거리내기, 즉 바깥의 도래로 간주하는 것은 과거의 과학들과 철학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상식적인 환상일 뿐이며, 이 바깥의 빛 아래서 모든 것은 가시적, 현상이 된다. 이런 현상성은, 그것이 표상되는 방식이 잠재적이든 명시적이든 간에, 소박한 것이든 철학적인 것이든 간에, 존재자 너머의 존재에 의해, 그리고 이 존재가 존재자에 대해서 가지는 차이 안에서, 그리고 결국 탈-(Ek-stase)에 의해서 창출된다.


현상학의 질문을 근본화하는 것은 다만 순수한 현상성을 지향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상성이 자신을 본래적으로 현상화하는 방식과 그것이 일어나는 바탕인 실체, 소재, 현상학적인 물질, 즉 순수한 현상학적인 물질성을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물질 현상학의 과제들이다. 이러한 과제들로부터 우리는, 모든 것이 자기 밖에 놓이고 그로부터 모든 실재가 선험적으로 자신으로부터 비워지고 탈소유화 되어서 결국 자신의 반대인 원리적 비실재로서 자신을 재발견하는 바깥-에의-존재 - 죽음이라고 불리는 것 - 이전에, 그리고 자신의 원리를 따라 스스로 존재하는 실재의 포기와 파괴 이전에,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스스로 자신을 형성하는 어떤 현상성의 지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계에의 사유가 절대로 이해할 수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바깥, 어떤 간격, 어떤 탈-자도 이 본래적인 현시(manifestation)의 내적 구조에 속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본래적인 현시의 현상학적 실체성은 가시성이 아니며, 그리스 이래로 철학이 사용하는 어떤 범주도 그것에 적합하지 않다.


물질 현상학은 이 비가시적인 현상학의 실체를 지시할 수 있다. 이 실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어떤 정감(un affect), 더 잘 말하면 모든 정감을 가능하게 하는 것, 궁극적으로 모든 촉발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물질 현상학의 관점에서 현상학적인 실체는 삶이 자기를 느끼는 정념적인(pathétique) 직접성이다. 이런 삶은 정념적인 밀착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이런 방식으로 삶은 본래적인 현상화의 어떻게에 의한 현상성 그 자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삶은 따라서 생물학의 대상과 같은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원리로, 삶이 순수한 현상성의 본질과, 현상과 같은 외연을 가지고 현상 위에 토대를 가지는 존재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현상학적 삶이다. 만일 그렇다면, 나타나지 않는 어떤 존재에 대해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삶이 존재의 중심에서 본래적인 현상화이며,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 그 자체가 존재해야한다는 이유로, 살아있는 것을 다만 존재의 한 영역, 즉 영역적인 존재론에 한정하면서 삶을 존재에 종속시키는 전통적인 위계질서는 이제 전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삶을 종속시켰던 존재는 그리스적 존재, 즉 세계적 존재자의 존재로, 그로부터 사유되고 잉태된 존재이다. 따라서 존재의 순수한 현상성이 전개되는 탈-자가 이미 삶의 정념의 직접성 안에서 촉발되지 않는다면 이런 존재는 다만 죽은 존재 혹은 비-존재와 같을 것이다. 그래서 삶은 항상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것에 근거를 제공한다. 절대로 그 반대가 아니다.


이 책에 실린 연구들은 현상학의 질문들을 따라서 구성되었으며, 각각의 연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제기한다. 첫 번째 연구는 시간과 연관해서 어떻게 물질 현상학이 고전 현상학과 다른 가를 밝힌다. 여기서 현상학의 질문은 일종의 원시의 빛(une lumière crue) 아래서 밝혀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시간에 대한 질문은 후설에게 어떻게 의식 자체가 자기를 현시하는가에 대한, 다시 말해 의식의 현상성을 생각하는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대답을 후설이 지향성에서 찾았다는 것, 즉 절대적인 주체성의 자기-계시를 처음부터 자기-구성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현상학이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할 수 없는 무능을 여실히 드러낸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구성하는 자는 현상학 안에서 자신의 본래의 지위를 상실하고 익명으로 사라진다. 더 나아가 현상학의 역사적 운명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결국 시대”(하이데거가 밝히는 그것의 양태들은 한정된 표현들일 뿐이며, 더 자주는 웃음거리일 뿐이다)에 대한 존재론적 비관주의에 이르는 현상학의 해석학적 가지치기는 현상학의 잃어버린 기원을 지시할 뿐이다.


만일 탈-자의 방식과 전적으로 다른 삶이 원리적으로 모든 가시화를 회피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이론으로, 다시 말해 어떤 시각에서 드러내고, 그것에 대해서 최소한 말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학이란 말은 그 자체 모순이 아닌가? 또 자기-촉발로서 그리고 근본적으로 내재적인 삶의 자기에의 도래에서 정념의 물질성을 자신의 현상학적 물질성으로 가지는 단독적인 자기(un Soi)가 태어난다면, 비우주적인 주체성으로서 자신 속에 갇혀 있는 이러한 자기는 유아론으로 떨어지지 않는가? 한편으로 순수한 정감성의 철학을 구성할 가능성 그 자체와 다른 한편 정념적이고 비우주적인 어떤 자기성이 같은 유형의 타자와 관계 맺을 가능성, 즉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상호주체성 속에 자신을 기입할 가능성에 대한 문제는현시의 본질이 출간되자마자 반복적으로 제기된 두 반박이었다.


두 번째 연구는 현상학의 방법을 다룬다. 이 연구에서 우리는 고전적인 현상학은 절대적인 주체성의 이론적 인식을 산출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드러내며, 이로부터 우리는 초월론적인 삶은 모든 지향적 접근, 봄으로부터-나오는 것(é-vidence) , 명증성과 현상학적 환원의 순수한 시각을 회피한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후설이 난제를 극복하고자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열어 놓은 놀라운 길은 삶의 비-탈자적인 지위에 대한 탁월한 증명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위는, 대체의 방법으로서 현상학의 본질적인 방법이 알지 못하는 본래적인 증여의 억제할 수 없는 넘침과 확산에 의존할 때에만 진실일 수 있다.


세 번째 연구는 타인에 대한 경험의 문제와 연관된 두 텍스트를 한데 모은 것이다. 첫 번째 텍스트는 지향성이 획득하고자 했던 지반 그 자체에서 지향성의 실패의 근원을 밝힌다. 세계의 타자성에로의 열림은 모든 타자들과의 구체적인 관계의 토대를 제공하는가? 다시 말해, 세계--존재는 상상 가능한 모든 공-존재의 토대를 제공하는가? 이러한 주장의 실패는 눈에 보듯이 명백하며 심각한 결과들을 우리 앞에 가져온다. 이 실패는 서양 사유의 일단의 명백성들의 포기만이, 특히 지각의 명백성의 포기만이 오늘날 본질적인 것에 이르는 길을 개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자기 속에서 자기하고만 관계하는 삶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상호주체성을 완성할 수 있는 환경(le milieu)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역설은, 삶이 자기에 이르고 자기의 고유한 존재를 획득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내재적인 주체성의 시련(l'épreuve)에서라는 것을 이해하면, 생각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이 시련으로부터 자기는 자기이고, 이런 방식으로 자기는 자기로부터 불어나고 성장한다. 이것은 - 이 장의 두 번째 텍스트에서 다뤄지는 것으로 - 특히 타자의 존재를 촉발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자기 속에서 본래적으로 도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아와 타아는 공통의 탄생, 즉 같은 본질을 가진다. 이 탄생에 의해서, 그리고 살아있는 한에서 그들은 소통한다”. 삶이 초월론적인 정감성이라면, 또 그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끌어낸다면, 그로부터 결국 모든 상호주체성이 피할 수 없이 정념적인 공동체의 형식을 가진다면 무엇이 놀라운가?


이 세 연구가 각각 실렸던 잡지들을 열거하자면, 첫 번째 것은 나의 철학을 특집으로 다뤘던 잡지 철학(1987년 여름 15)에 실렸던 것으로, “당신의 물질 현상학의 기획은 후설의 질료 현상학과 어떻게 구별되는가?”에 대한 디디에 프랑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식으로 작성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아주 오래 전에 썼던 것으로 이 책에서 처음으로 발표된 것이다. 이것은 비가시적인 주체성의 인식 가능성의 토대를 형성한다. 세 번째 연구의 첫 번째 논문은 고등사범대학에서 있었던 강연으로 1988423일 장-프랑스와 꾸띤느(Jean-François Courtine)의 세미나에서 발표된 것이다. 그리고 이 논문은 루벵에서 후설의 50주년 서거를 기리는 심포지엄에서 다시 한 번 발표되었다. 이 심포지엄은 나중에 악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두 번째 논문은 국제 철학 학교의 연례 프로그람의 하나로 공동체의 문제에 바쳐진 것으로 1987127일 있었던 공개 강의이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다양한 분석들을 연결하는 목차는 19893월 시에틀의 워싱톤 대학에서 6주의 강의를 제안 받았을 때 미켈 보쉬-야곱슨(Mikkel Borch-Jacobsen)의 강의의 한 프로그람으로 작성된 것이다.


끝으로 이 탐구들에서 사용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그 방법의 명상의 자료로서 사용되는 후설의 몇몇 텍스트들에 의해서 분명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후설의 작업도 그와의 대화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 그의 최초의 현상학적 파악과 전제들을 반성하면서 - 이 경우 1905-1907년 강의들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 그 안에서 막 태동하고 있는 그 현상학적 주장의 역동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것의 본질적인 공백, 즉 초월론적인 삶의 현상학적 부재를 측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재는 사실 모든 현상학의 설립의 토대로서 사용되는 것이다.


다른 텍스트들을 생각할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후설이 헤라클레이토스적 흐름속에서 절대적인 주체성의 최초의-계시(Arche-révération)를 알아채지 못한 채 그것을 시간의 최초의-탈자성의 체험들의 나타남으로 대체하자마자, 그에 의해서 이해되지 못하고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절대적인 주체성은 파열되고, 파괴되고, 분산된다. 이러한 경향은 1907년의 강의들에서, 데카르트적 성찰(§20)에서, 그리고 위기(§52)유언안에서 거의 동일한 용어들로 반복되고 다시 확인된다. 그의 유고들이 문제가 되는 경우 - 그의 출간된 저작들과 대립하지 않는 그의 작업 노트들 - 그것들에 대한 체계적인 독서는 그 유고들이 다시 부딪치는 문제가 살아있는 현재의 문제로서 시간적으로 사유된 최초의-증여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낼 뿐이다. 그의 저작의 어두운 측면 - 이것은 그의 지향적 경향에 의해 가려지는 것인데 - , 물질 현상학만이 아마도 그 저작의 초월론적인 동기를 알아차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일 것이다.


사물들은 그것들이 그 자체로 절대로 보이지 않는 삶의 정념 속에 놓이는가, 아니면 반대로 하나의 시선 앞에 놓이는가에 따라서 전적으로 달라진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같은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첫 번째 범주에 충동, , 정감, 즉 우리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것들, 가장 중요한 것들이 속한다. 이것들이 내재적인 것은 거기에 우연히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시선, 즉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봄, 그리고 결국 인식, 과학 자체에서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삶으로 기울고, 삶 속에 존재하며, 모든 것은 살아 있다.

물질 현상학의 과제는 거대하다. 그것은 실재를 사유하는 것이 문제인 경우, 지금까지 무시된 현상들의 질서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실재의 각각의 영역은 새로운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분석은 실재 속에서 그것의 비가시적인 영역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또한 결국 살아있는 우주로 우리가 물질적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연관된다.


이런 방식으로, 철학적인 질문 전체를 전적으로 다시 다룰 것을 함축하는 물질 현상학은 현상학의 미래와 철학 그 자체의 미래를 제시한다. 이러한 미래는 동시에 새로운 과거를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을 반성하는 것도, 철학의 시초에서부터 철학을 인도했던 전제들의 빛에서만 이해되는 철학의 고유한 역사 안에 자신을 기입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의 역사는 더 이상 철학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그것은 다만 철학의 마지막 국면을 구성할 뿐이다. 여기서 장-릭 마리옹(Jean-Luc Marion)의 요구를 다시 불러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이데거에 의해서 부양된 형이상학의 역사에 환원 불가능한, 그리고 그것과 다른 철학의 역사를 변별하고, 파헤치고, 생각하라.


이 거대한 과제는 실재에 대한 이해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이 이해에 대한 자기-이해의 과제이기도 한다. 이러한 과제는 다른 책들에서, 말하자면 현시의 문제, 신체의 문제, 경제적 실재의 문제, “무의식의 문제 그리고 근대 세계와 대립적인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미학적 삶의 문제들을 다루면서 이미 부분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 거대한 과제는 우리가 현재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이 개략적인 연구들에서는 다 드러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것은 물질 현상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것을 비가시적인 현상학으로서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에 대한 그리고 끝으로 상호주체성의 영역만큼이나 어렵고, 또한 물질 현상학의 전제들로 환원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영역, 즉 공동체의 영역에 대한 물질 현상학의 갱신의 능력을 시험할 뿐이다. 상호주체성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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