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의 "고통과 삶"이라는 논문은 2001년 국제 학술대회, <철학과 정신치료, philosophie et psychiatrie>에서 발표된 것으로, 그의 전집 phénoménologie de la vie , Tome I : De la phénoménologie <삶의 현상학의 1권: 현상학에 대하여>에 실려있다(p. 142-156). 레비나스와 앙리는 둘다 인간의 고통의 현상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고통의 현상은 삶에, 생명에 반대되는 악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에게 삶을 드러내고 삶에 의미를 제시하는 하나의 특권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레비나스의 "쓸데없는 고통"과 이 글을 같이 읽으면, 우리는 현상학의 논쟁의 지점들에서 두 철학자 사이의 같으면서도 서로 갈라지는 미세한 차이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번호는 단락의 내가 붙인 번호이다. 총 29 단락이다.
1. 우리는 삶과 그것에 고유에게 속하는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런데 우선 우리가 제기하는 질문이 생겨난 역사적인 계기를 명시해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생(물)-학(une bio-logie) 안에서 발견되는 그리스적 방식에서가 아니다. 그리스적 언술, 즉 le 생(bios)와 연관된 로고스(logos, logie), 즉 언술, 그것은 세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동물들을 고려하는 언술이었으며, 이 이름 하에서, 감각적인 속성들을 제시하는 그러한 언술이었다 - 왜냐하면 세계 안에서 우리가 동물들에 대해서 아는 것은 감감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삶은 특수한 존재의 한 유(un genre)이며, 원리상, 그것은 다자인 안에서만 접근 가능하다"(SZ, p. 50)라고, 다시 말해, "세계-내-존재" 안에서만, 세계 안에서만 접근 가능하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유지한다.
- 이 쳣 단락에서 밑줄을 그어야 하는 단어가 있다면, 세계이다. 앙리는 삶과 혹은 생명과 이 삶에, 생명에 고유하게 속한 고통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기 위한 한 역사적인 전제로서 그리스적이 아닌 언술을 먼저 강조한다. 그리스 이래로, bio, 삶, 생물학적인 삶은 세계 안에서 관찰되는 것, 감각적인 것이었다.
첫 문장, Nous voulons parler de la vie et de la souffrance qui lui est propre... 우리는 삶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고통은 삶에 고유한 것이다. "propre", 이 말은 propriété 속성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것이 어떤 다른 것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고통은 삶의 고유한 것, 삶의 속하는 것, 삶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이 글의 제목이 souffrance et vie 이듯이 앙리는 이 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 첫 문장에서부터 명시적으로 이 둘의 관계를 제시한다. 우리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왜 고통이 삶에 고유하게 속하는가? 왜 다른 정조가 아닌 고통이 이 삶에 고유하게 본질적으로 속하는가? 고통은 기쁨이나, 불안이나, 슬픔이나, 여타의 다른 기분들 중의 하나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고통이라는 기분이, 혹은 정조가 다른 것보다 특권적인 지위를 가지는가?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고통은 여타의 특수한 정조들, 혹은 기분들과는 다른 것이라면 어떠한가?
- 여기서 앙리는 삶, 생명에 대한 감각적인 그리스적 인식과 달리 수학적 양으로 환원되는 갈리레이 이후의 과학적 인식의 차이를 밝힌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 두 입장의 역사적인 의미에 대해서 말한다. 사실, 갈릴레이 이후 생명은 자연, 우주의 일부로, 자연의 메카니즘으로 환원된다. 프랑스와 자곱은 생물학자, 의사, 철학자로, 이러한 생명의 환원주의에 문제를 제기한다.
3. 위에 대해서 두 가지를 덧붙일 수 있다: 하나는 갈릴레이의 이념들은 즉각적으로 유럽에 퍼졌으며, 물질적 우주에 대한 수학적-기하학적 인식은 전통적인 사회의 얼굴과는 전적으로 다른 얼굴을 가진 근대세계의 구조화의 원리로서 새로운 과학을 규정한다.
4. 다른 하나는 인간의 세계를 과학의 세계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근대의 천재, 데카르트는 반-전통이라고 불려야 하는 어떤 것을 작동시킨다. 인식의 영역으로부터 순수히 그리고 단순히 감각적인 성질들, 감성, 열정, 감동, 의지, 즉 주관적인 것을 제거하는 대신에, 데카르트는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주관적인 것들은 사물들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존재의 실체를 구성한다. 사물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않으며, 스스로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의 감각, 정서, 열정, 욕망의 고유성은 스스로 자신을 느끼는 s'éprouver elle-mêmes 데에 있다. 데카르트는 그것을 사유작용 cogitations이라고 부른다. 이상한 이름, 정말로 잘못 선택된 이름, 그것은 위대한 데카르트주의자들에 의해 전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코기토로, 이러한 불이해는 무수한 비판들과 더불어 아직도 현대의 문명에서 제거되지 않은 주체의 위기를 낳았다.
- 3과 4에서 앙리는 갈릴레이 이후의 근대의 과학의 정신은 근대세계의 조직화의 원리가 되었으며, 인간을 이 원리로 환원하기에 이른다고 말한다. 물리적 메카니즘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을 환원하는 환원주의의 승리. 그런데 같은 시대의 또 다른 천재, 데카르트는 이러한 근대의 전통에서 반하는 탁월한 전통을 그 안에 새긴다고 말한다. 앙리의 탁월한 데카르트 읽기를 상기해야 한다.
레비나스도 앙리도 모두 그들 철학의 한 기원으로 데카르트를 불러온다. 그들의 데카르트 읽기는 같으면서 다르다. 이것은 그들의 촉발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더 나아가 그들의 칸트 읽기의 차이를, 그리고 후설에 대한 그들의 읽기의 차이를 드러낸다.
5. 인상의 방식으로 스스로 느끼고, 시험하고, 겪는 것, 그것은 삶이며, 초월론적인 현상학적인 삶이며, 이것은 유일하게 실존하는 삶이며, 이 삶은 가장 작은 통증에서부터 우리의 실존의 양태들 각각에 머문다.
- 이 단락에서 삶에 대한 앙리의 간략한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 Ce qui s'éprouve soi-même, à la manière d'une impression, c'est la vie, la vie phénoménologique transcendantale, la seule vie qui existe, celle qui habite chacune des modalités de notre existence, depuis la plus humble douleur.
6. 삶과의 관계에서 통증 혹은 고통에 대한 질문을 명시화하기 하기 위해 우선 현상학적인 기획 위에 그 문제를 놓자. 현상학은 사물들이 아니라, 사물들에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 그것들의 현시(manifesation)와 그것들의 "계시(révélation)"의 "어떻게"을 질문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의 현시가 완성되는 두 근본적인 양태가 있다: 세계의 나타남(l'apparaître)과 삶의 나타남.
- Il y a deux modes fondamentaux selon lesquels s'accomplit la manifestation de tout ce qui se donne à nous: l'apparaître du monde et celui de la vie.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의 현시를 완성하는 두 종류의 나타남은 이종적(hétérogène)이다. 이것은 앙리가 나타남의 이중성(la dualité de l'apparaîtr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진다. 하나는 가시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비가시적 방식이다.
7. 세계의 나타남은 순수한 외적인 환경, "자기 밖 hors de soi" - das Außsich - 에 존재한다. 이것에 대해, 『존재와 시간』의 2부에서 하이데거는 세계의 나타남은 그것의 가시화의 지평을 형성하는 미래, 현재, 과거라는 시간적 탈존과 결합된 열림 안에서 탐구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의 나타남이 우리가 보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자기 밖에 존재하는 한에서, 원리상 세계 안에 나타나는 것과 세계 그 자체의 나타남 - 이 차이로부터 솟아나는 그리고 그 안에서 밝혀지는 - 사이의 하나의 차이가 생겨난다.
- 이 차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이다.
8. 삶의 고유한 계시는 세계의 나타남과 전적으로, 그 하나 하나의 특질에서 서로 대립한다. 후자가 "자기 밖"에서 탈은폐되고, 그로부터 탈은폐된 것이 밖에, 타자로, 다르게 존재하는 반면에, 삶의 계시를 결정하는 우선적인 특질은 그 안에서 자기와의 어떤 간격도 차이도 가지지 않으며, 삶은 삶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삶이 자신을 드러내며, 삶은 자기-계시이다. 삶에 고유한, 삶에만 속하는 자기-계시는 두 가지를 지시한다: 하나는, 삶은 맹목적인 무의식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며, 삶이 계시의 본래적인 작업을 완수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계시의 작업에서 계시된 것, 즉 삶에서 완성된 것은 삶 그 자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적인 사유에서 이미 드러나고 현대 현상학 안에서 근본적인 원리로 나타나는 나타나는 것(ce qui apparaît)과 나타남 그 자체(l'apparaître pur) 사이의 대립은 삶의 경우 사라진다. 삶의 고유한 계시와 그것이 계시하는 것은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삶과 다른 계시의 힘으로부터 삶에 이르지 않는다. 우리는 삶 안에서 삶으로부터 삶에 접근한다. 자기 안에 도래하는 것은 삶이다.
- 삶의 나타남과 세계의 나타남은 전적으로 서로 대립한다. 이 둘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론적 차이의 유무에 달려있다. 즉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의 유무이다. 즉 삶이 드러내는 것과 삶 그 자체와 구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현상과 현상성은 구분되지 않는다.
La révélation propre à la vie et ce qu'elle révèle ne fond qu'un. 드러냄, 계시와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하나이다.
앙리에게 révélation, manifiestation, l'apparaître는 이전에 한 번 말한 것처럼 동의어들이다. révélation은 여기서 종교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이 모두는 나타남, 드러남, 특히 감춰진 진실의 혹은 비밀의 폭로라는 의미이다. 특히 révélation을 옮기면서 나는 항상 불안하다. 이 말에 계시라는 말을 주었지만, 영 정이 가지 않는다. 레비나스를 읽으면서도 이 말을 나는 계시로 옮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말이 종교적인 맥락에서 쓰이는 경우, 예를 들어 그가 Révelation이라고 대문자로 시작해서 쓰는 경우, 이 경우는 100프로 계시라고 옮겨야 한다. 이 경우가 아닌 경우, 이 말은 드러냄이나 폭로, 혹은 표현의 의미이다.
9. 삶은 자신을 알기 위해 자기와 다른 인식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 결정적인 상황은 매 삶의 양태에서, 가장 원초적인 인상(l'impression la plus primitive)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통증(douleur)을 다시 교려해 보자. 일상적인 이해에서, 통증은 자주 객관적인 신체의 부분과 관계한다. 마치 통증이 여기에서 자신의 자리를 가지는 듯이 말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듯, 이러한 "잘못된 판단"을 떼어내기 위해서, 통증을 아픈 성질에서만, "아픔 그 자체", 즉 고통을 구성하는 그것의 순수하게 정서적인 요소만을 끌어내기 위해 현상학적인 환원을 수행해 보자. "이 순전한 고통"은 자기 자신을 그 차체로 드러내며, 이것은 고통만이 우리가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고통의 사실인 이 계시에서 계시되는 것은 정확히 고통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우리의 삶의 양태에서 세계라는 "자기 밖"은 부재하며, 이로부터 우리는 어떤 간격도 고통을 고통 자체로부터 분리하지 않으며, 자기에로 몰린, 자기의 고유한 무게에 짖눌린 고통은 자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가 짖누르는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자기에 대해서 어떤 물러섬, 어떤 도피처를 마련할 수 없다. 고통에서 모든 내적인 간격의 부재 안에서, 이러한 도망은 (본래적으로) 배재된 시선을 고통 위로 던질 가능성이다. (그런데) 누구도 자신의 통증, 혹은 자신의 고통을 본적이 없다. 고통은 삶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 douleur, souffrance 두 말은 동의어로 모두 고통을 의미한다. 그 뉴앙스의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고통 일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지시한다면, 전자는 주로 육체적인 고통을 지시하는 경우가 많다. 머리가 아픈 경우, 두통에 통은 douleur이다. 물론 이 통증으로 인해 우리는 고통을 겪는다. 그렇다고 해서 douleur가 정신적인 고통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결국 두 말은 같은 의미의 폭을 가진 것이다.
Qu'en cette modalité de notre vie le "hors de soi" du monde soit absent, on le reconnaît à ceci qu'aucun écart ne sépare la souffrance d'elle-même et que, acculée à soi, accablée sous son propre poids, elle est incapable d'instituer vis-à-vis de soi un recul quelconque, une dimension de fuite à la faveur de laquelle il lui serait possible d'échapper à soi et à ce que son être a d'oppressant. En l'absence de tout écart intérieur à la souffrance, c'est la possibilité de diriger sur elle un regard qui est exclue. Personne n'a jamais vu sa douleur ou sa souffrance. La souffrance est invisible, comme la vie.
잠시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의 한 장, "고통과 죽음"의 한 단락을 읽는다. (우리가 읽고 있는 앙리의 글의 제목은 "고통과 삶"이라는 것을 잠시 상기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특히 신체적인 고통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다: "Il y a dans la souffrance une absence de tout refuge. Elle est le fait d'être directement exposé à l'être. Elle est faite de l'impossibilité de fuir et de reculer. Tout l'acuité de la souffrance est dans cette impossibilité de recul. Elle est le fait d'être acculé à la vie et à l'être. Dans ce sens, la souffrance est l'impossibilité du néant."(TA, 55-56)
"고통 안에는 모든 도피처가 부재한다. 고통은 직접적으로 존재에 노출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도망치거나 물러설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 이뤄져 있다. 고통의 최고의 첨예함은 바로 이 물러섬의 불가능에 있다. 고통은 삶에 존재에 전적으로 몰린 사실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무의 불가능성이다."
"acculer", 라는 말은 막다른 곳에 까지 이르러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따라서 대답할 수도 반응할 수도 없다. 이 지경은 어떤 움직일 수 있는, 움직임을 허락하는 최소한의 공간도 없음을 의미한다. 고통이 삶에, 존재에 전적으로 몰려있다는 것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삶에 못 박혀있듯이, 붙어있다는 것이다. "나의 자기에의 못 박혀있음의 사실(le fair d'être rivé du moi à soi)"이라고 레비나스가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최소한의 간격도, 최소한의 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위의 앙리의 글과 비교해보면, 거의 둘은 같은 단어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레비나스의 글을 읽으면 우리는 한 발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자기에로 몰린, 모든 피난처의 부재에서 어떤 자유의 영역이 열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Mais il y a dans la souffrance, en même temps que l'appel à un néant impossible, la proximité de la mort. Il n'y a pas seulement le sentiment et le savoir que la souffrnace peut aboutir à la mort. La douleur en elle-même comporte comme paroxysme, comme si quelque chose de plus déchirant encore que la souffrance allait se produire, comme si malgré tout absence de dimension de repli qui construite la souffrance, il y avait un terrain libre pour un événement, comme s'il fallait encore s'inquiéter de quelque chose, comme si nous étions à la veille d'un événement au delà de celui qui est jusqu'au bout dévoilé dans la souffrance."(TA, 56)
"그런데 고통 안에는, 불가능한 무에 대한 부름과 동시에, 죽음의 근접성이 있다. 고통이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느낌과 지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통증 그 자체 안에는, 마치 고통보다 더 찟는듯한 어떤 것이 산출되는 듯이, 마치 고통 그 자체인 모든 후퇴의 영역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건을 위한 자유로운 영역이 존재하는 것처럼, 마치 염려애햐 할 어떤 것을 여전히 존재하는 듯이, 마치 우리가 고통의 막바지에서 드러나는 것 너머 어떤 사건의 전야에 있는 듯이, 그 고통의 절정과 같은 것을 동반한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레비나스의 과장의 논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것의 극단에서는 어떤 변화가 생겨난다. 그것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긴장이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다 보면 어느 순간 파열한다. 병에도 그 고통의 리듬에서 그 절정(paroxysme)이라는 것이 있다. 고통이 그것의 강도의 최악의 절정에 이른 경우, 죽음이 아니라 - 물론 우리는 이것 후에는 죽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안다 - 그 아직 오지 않은 죽음과 지금의 그 고통 사이에 무엇인가가 일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영역이 열린다. 만일 고통이 자기에 전적으로 몰려있다면, 그 안에서는 무엇인가가 일어날 수 있기 위한 조금의 공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하다. 죽음이 아닌 어떤 사건은 그 고통의 절정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La structure de la douleur qui consite dans son attachement même à la douleur, se plonge encore, mais jusqu'à un inconnu qu'il est impossible de traduire en termes de lumière, c'est-à-dire qui est réfractaire à cette intimité de soi à moi à laquelle retournent toutes nos expériences. (...) l'inconnu de la mort signifie que la relation même avec la mort ne peut se faire dans la lumière; que le sujet est en relation avec ce qui ne vient pas de lui. Nous pourrions dire qu'il est en relation avec le mystère."(TA, 56)
"자기에 못박혀 있는 통증의 구조는 다시, 자신으로 가라앉는다, 그런데 더 이상 빛에 의해서 번역되어질 수 없는 알려지지 않는 것에까지 가라앉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경험이 되돌아가는 나와 자기의 이 친밀성에 저항하는 것에까지 이른다. (...) 죽음의 알려질 수 없음은 죽음과의 관계는 빛 안에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체는 자신으로부터 도래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런 주체는 신비와의 관계 안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의 신체적 고통의 논의는 죽음의 불가능성으로, 그 죽음의 불가능성은 죽음의 알려질 수 없음으로, 이 알려질 수 없음은 결국 나와 자기의 떼어낼 수 없음의 관계를 깨는 데에 이른다. 이것은 레비나스의 철학이 출발한 고독의 상황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탈출』의 주제를 상기한다면, 여기서 탈출의 동기는 바로 이 나의 자기에의 못박혀 있음, 자기에의 나의 현전의 절망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 것도 해볼 것이 없는 한계 상황으로부터 시작했다.
알려질 수 없음, 죽음의 알려질 수 없음은 우리가 죽음과 맺는 관계는 빛 안에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이란 무엇인가? 현상학의 빛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것이 자연의 빛이든, 지성의 빛이든 현상학적으로 현상의 조건이다. 다시 말해 의미의 조건이다. "밖으로부터 온 것은 빛을 받으면, 이해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로부터 온다. 바로 이 빛에 의해서 대상들은 세계가 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속한다. 이 속함, 이 속성(la propriété)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빛에 의해, 세계는 주어지고 세계는 통각된다. 우리의 모든 감각의 바닥에 놓여있는 이 통각은 세계 안에서 이 속성의 기원이다. 그런데 이 속성은 짊어짐(charge)이 아니다. "나의 십자가"와 같은 표현들이 가지는 소유(le possessif)와 어떤 공통점도 없는 그런 소유(propriété)이다. (...) 따라서 빛은 안에 의해 외적인 것을 감싸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바로 코기토와 의미의 구조이다. 사유는 언제나 밝음 혹은 밝음의 새벽이다. 빛의 기적은 빛의 본질이다: 빛에 의해서 밖으로부터 온 대상은 그것을 앞서는 지평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속한다; 밖으로부터 온 것은 이미 통각되고 마치 우리로부터 온 것처럼 우리의 자유에 의해서 명령된 것처럼 존재한다."(존재에서 존재자로, EE, Vrin, 76-77) 빛은 나 아닌 것이 마치 나로부터 온 것처럼 이해되는 지평이다. 빛과 관계하지 않는 알려질 수 없는 것과 관계하는 주체는 그래서 자기로부터 도래하는 것과 관계하지 않는다. 자기로부터 도래하지 않는 것, 빛에 의해서 도래하지 않는 것, 빛에 의해서 밝혀지지 않는 것, 그것은 수수께끼, 혹은 신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모든 빛의 밖에서, 고통 안에서 자신을 알려오는 이러한 방식은 지금까지 능동적이던 주체의 수동성의 경험이다. (...) 나는 수동성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다만 말하는 방식, 왜냐하면 경험은 항상 인식과 빛과 의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또한 대상의 주체에로 돌아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비로서 이해된 죽음은 이렇게 이해된 경험과 구분된다. 지식에서, 빛의 매개에 의한, 모든 수동성은 능동성이다. 내가 만나는 대상은 이해되고, 모두 나에 의해서 구성된다. 반면에 죽음은 주체가 더 이상 주인이 아닌 어떤 사건, 주체가 더 이상 주체가 아닌 어떤 사건을 알려온다."(TA, 57)
우리가 잘 아는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향한 존재", 하이데거에게 유일하게 다자인에게 속한, 그의 고유성, 그의 진정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최상의 밝음 안에, 사르트르처럼 최상의 자기 명증성 안에, 남성다움(virilité) 안에 존재한다. 그에게 다자인의 최후의 가능성인 죽음은 모든 가능성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다자인이 자유를 획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이 자유의 사건이라면, 고통에서 주체는 가능성의 한계에 이른다."(TA, 57-58)
고통 안에서 죽음의 접근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가능성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주체가 더 이상 자기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순간 우리가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는, 더 이상 나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책임질 수 없는 어떤 사건이 도래한다.
"이 죽음의 접근은 우리가 절대적인 타자와, 잠정적인 규정으로서가 아닌, 향유로도 자기화할 수 없는, 그것의 실존 그 자체가 타자성으로 이뤄진 그런 타자성을 담지하는 어떤 것과 관계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따라서 나의 고독은 죽음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의해서 단절된다."(TA, 63)
나의 고독은 하이데거에서처럼 죽음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에 의해 단절된다. 다시 말해, 나의 고독, 내가 자기가 아닐 수 없는, 존재자와 그의 존재함의 작업 사이의 떼어낼 수 없는 단일성, 존재의 고독 안에 다원성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이 다원성은 존재자들의 다원성이 아니다. 실존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균열이 생겨난다.
"존재자의 존재 안에, 지금까지 주체 혼자서 시새움하듯 감당했던, 그리고 고통 안에서 현시되었던 존재의 존재 안에, 다원성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죽음 안에서 존재자의 존재는 변화된다. 여기서 자기를 알려오는 타자는 이 존재를 주체가 소유하듯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소유하지 않는다. 그것의 나의 존재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은 신비적이다;알려지지 않은 것(inconnue)이어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것(inconnaissable), 즉 빛에 저항하는 것이기에 신비적이다."(TA, 63)
나의 홀로 존재함에 미끄러져 들어온 타자(l'Autre)가 빛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타인과의 새로운 관계를 예시한다. 타자(l'autre)는 공통의 실존, 다시 말해 하이데거의 공존재와 같은 것에 나와 같이 참여하는 또 다른 나(l'autre moi)가 아니라는 것을, 이 타인과의 관계는 조화로운 일치의 화합도, 우리와 유사한 자를 만나는 공감도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신비와의 관계이다. 그것은 타자의 외재성(extériorité), 아니, 타자의 타자성과의 관계이다."(TA, 63) 외재성이란 표현 보다 차라리 타자의 타자성이라고 레비나스가 말하는 것은 외재성이라는 말은 주체가 자신의 모든 존재를 빛에 의해 자기 자신에 이르는 공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종종 비공간적인, 혹은 기하학적인 왜재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외재성 혹은 레비나스가 초월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탈자적인 외재성, 초월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단 여기서 마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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