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미셸 앙리, 대담

aurorepark 2010. 9. 29. 04:20


미셸 앙리(1922-2002), 그의 많은 사진들을 넽 상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내게는 모두 낯설기 그지 없다. 많은 사진들이 그의 젊어서의 사진들이기 때문이다. 사진들을 찾다가 이 사진을 발견했다. 이 이미지는 내가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얼굴이다. 대학에서 강연이 있었을 때, 그 때 딱 한번 봤던 그의 익은 얼굴이다. 정확히 기억을 할 수는 없지만 2000 년(혹은 2001년) 이었다. 한국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프랑스 철학자들 중의 하나, 더 자세히 말하자면 레비나스와 더불어 프랑스 현상학에 물질적 현상학이라는 고유명을 낳은 현상학자, 그는 "삶의 철학자"라고 불리기를 바란다. 그의 마지막 저서들 중에 하나에서 그는 『육화, 살의 현상학』이 아닌, 『육화, 살의 철학』이라는 제목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상학자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책이 하나도 번역된 것이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이웃 나라인 일본에는 그의 작품 거의가 번역되어 있는  사정과 달리), 그리고 그에 대한 몇몇의 논문들도 그렇게 그를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고 있는 사정에서 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생각처럼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그의 사유를 몇 마디로 요약해서 소개하는 것도 그렇게 그를 아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철학자를 소개하기 위해서 혹은 어려운 한 철학자에 접근하는 좋은 한가지는 방법은 <대담>을 읽는 것이다. 그 중에서 1996년 대담은 그의 전기적  기록이 적혀 있어서 한 철학자의 삶과 철학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1996년 대담은 그의 사후에 그의 대담들을 모아서 낸 대담집(2005)에 실려있는 것으로, 1996년 스리지Cerisy에서 있었던 콜로그에서 있었던 대담으로, 이것은 콜로그의 논문들을 모아서 몇 년 후에 출간된 『미셸 앙리, 삶의 체험, Michel Henry, L'épreuve de la vie』 (Le Cerf, 2000)에 실려있다.

이 대담은 롤랑 바샬드 Roalnd Vaschalde와 이뤄진 것으로, "전기적 지표들 Indications biographiques - 철학자가 자신의 삶을 말한다"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V: 이 대담이 미셸 앙리,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기에, 우선 '시작'으로부터 시작하자. 극동에서 세계에 도래 (역자주, 그는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 이러한 상황은 당신에게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는가?


H: 대담의 문턱에서 우선 철학적인 언급을 하나 하는 것을 허락해 주기 바란다. 나는 일단 '전기'라는 생각 앞에서 내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먼저 말하고 싶다. 진정한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각각의 자기는 세계에 속하지 않으며,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모든 규정에 낯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전기적인 지표들을 통해서 자기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는 논의의 여지를 남긴다. 한 인간의 역사, 그를 둘러싼 환경들은  자신을 속일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면과는 좀 다른 것으로 자기의 얼굴과 일치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사실 자기는 그 근본에서 어떤 얼굴도 가지지 않는다. 당신은 내가 아주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 나라가 인도나 중국보다 더 먼가? 나는 사실 삶에서 태어났다. 아직 그 근원이 어디인지 모르는, 누구도 어떤 대륙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어떤 근원에서 태어났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조건이 아닌가? 나의 어머니가 나중에 나에게 말해주던 그 남자는 오랫동안 중령으로, 그는 코나드나 끌로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을 닮았다. 실제로 나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기서 보낸 어린시절에 대해서 아버지에 대해서 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절대로 떠나지 않는 영원한 현재에 산다. 그 현재 밖에 있는 것은 거대한 심연에 의해 갈라져 있다. 이것은 시간은 절대적인 비실재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에크하르트와 견해를 같이한다: "어제 있었던 일은 나에게 만년 전에 일어난 일 만큰이나 멀다." 오이디푸스는 어떤 환자에 의해서 발명된 이야기(fable)이다. 그것은 그에게 가치가 있다.


V: 계속 고집스럽게 당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묻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그런데 여기에 당신의 책들을 읽은, 그리고 당신을 직접 보기 위해서 온 이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계속하겠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프랑스로 돌아와서 당신의 가족은 릴 Lille 근방에 정착해서 당신은 예술적인 분위기, 특히 음악을 하는 가족 한 가운데에서 성장했다. 이것은 특히 당신의 미학적인 감성에, 당신의 삶과  사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H: 사실이다. 음악도 세계를 회피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우리에게 항상 도달한다. 나의 어머니는 결혼 전에 유망한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녀는 자주 내게 피아노를 연주해 주었다. 내가 그 때 느낀 감동은 아직도 지나가지 않았다. 이 감동은 바로 나를 나의 어머니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과 연결하는 것이다. 음악을 통해서 그리고 표상의 세계와 독립적으로  그림을 이해하는 칸딘스키의 천재적인 생각이 나의 관심을 자극하는 것도 아마도 나를 떠나지 않는 이 행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V: 공부를 위해 파리로 이사하기로 한 순간, 그리고 당신이 철학을 선택한 내밀한 동기에 대해서, 그리고 스승과 당신에게 영향을 준 텍스트 등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가?


H: 나의 고등학교 철학 선생의 이름은 르네 베트랑이었다. 나는 항상 그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철학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의 결점들은 그의 장점들에 의해 가려졌다. 그의 첫 번째 강의는 아주 추상적이었고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쉼없이 몸을 비비꼬고 앉아서 딴 짓을 하거나 가끔 하는 질문은 아주 얼또당토한 것들이었다. 첫 번째 줄에 앉아서 몸을 꼬면서도 나는 주의 깊게 들었다. 나는 이해했고, 결국 나를 사로 잡는 이념들의 놀라운 세계로 들어갔다. 이 철학의 맛은 고등사범 대학 준비과정을 거치면서 보편적인 관심이 되었다. 그리고 1942-43년 릴에서 모리스 깡디악 아래서, 레지스탕스에 합류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지 전까지, Le Bonheur de Spinoza  『스피노자의 행복』를 썼다.


V: 이 경험(레지스탕스)은 아주 강했을 것 같은데, 우선 그 경험이 당신의 삶의 개념에 미친 영향과 정치-이데올로기 영역에 대한 당신의 이해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가? 


H: 나의 형은 1939년 전쟁이 발단되자마자 전쟁에 참여했다. 프랑스의 대패 이후에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으며 20여명의 "자유 프랑스인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들 중의 3-4명이 돌아왔다. 그의 참여는 물론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둘로 줄어든 우리의 가족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불안에서 살았다. 우리는 반-히틀러리즘을 느끼기 위해 일련의 사건들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우리 어린 고등학생들은 라인강 이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멍청히 보고만 있었다.


레지스탕스와 빨치산 경험은 나의 삶의 개념화에 아주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은밀성은 나에게 일상적으로 그리고 아주 첨예하게 자기 은닉(incognito)이라는 의미를 주었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더 나아가 우리가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감춰야만 했다. 이 지속적인 위선 덕분에, 진정한 삶의 본질은 나에게 드러났다. 다시 말해 삶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최악의 순간에도 세계가 극도로 잔인할 때 조차도, 나는 내 안에서 보호해야 할 비밀처럼 삶을 느꼈으며, 그것은 나를 보호했다. 세계의 현시보다 더 깊고, 더 오래된 현시는 우리 인간의 조건을 규정한다.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정의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나의 정치-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도 이 사건들에 의존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실존, 우리의 배고픔, 우리의 공포, 우리의 삶, 우리의 죽음이 매 순간 역사에 의존하는 한에서, 이 사건들은 역사를 첫 번째 열에 놓는다. 그런데 동시에 사회라는 신화 - 각자가 자신의 존재의 완성에 이르는 그리스의 도시의 신화 - 는 회복 불가능한 말기에 이르렀다. 우리 모두가 함께 존재하는, 우리의 진정한 머뭄을 구성해야 하는, 그리고 우리가 이 상상적인 하늘 아래서 더 이상 도망칠 방법이 없는 이 빛의 공간은 무기와 고발과 암시장과 고문과 잔인한 무수한 죽음과 모두에 대한 공포로 가득찬 폭력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구원은 단지 부부로, 가족으로, 혹은 너무 많은, 항상 여기에는 침투와 배신이 있기에, 비밀 요원들로 축소된 비밀의 공동체에서만 유지되는 듯이 보인다. 이 순간으로부터, 나는 개인의 구원은 세계로부터 그에게 올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전쟁 후에, 여러 고통들로 인해 나는 전쟁 당시의 전우들 대부분과 결별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공산주의와 연대했으며, 남은 이들은 이들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이데올로기 뒤에서 서로 총부리를 들이밀고 대립하는 그들은 새로운 전체주의를 만들고 있었다. 카프카, 이 쁘띠 부루주와는 거대한 역사와 사회의 운동에 참여하는 대신에 자신의 배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프카에 대한 독서는 그 당시 의혹의 대상이었으며, 그것은 나를 의심스럽게 만들었으며("카프카를 불태워야 하는가?"), 카프카는 그 당시 미국의 헤게모니 쟁탈의 위험과 그들의 체계의 위험성이 전혀 나를 피해가지 않았을 때에도, 더욱이 프랑스 내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들의 냉소주의가 권력 주변에서 팽배하고 있었을 때에도, 나를 공산주의의 환상으로부터 보호했다.



V: 전쟁 후에도 이런 인간의 실존의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될 때, 당신은 안정적인 교편에 머무는 대신에 『현시의 본질』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교편을 떠나 철학적인 탐구에 헌신했다. 우리가 상상하건데 힘들기도 했겠지만 아주 흥분되던 그 시절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가?


H: 1945년 교수자격시험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다. 나는 나의 삶이 대중적인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의 삶의 의미를 찾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며, 실존의 상황은 전적으로 변했다. 죽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나는 카사블랑카의 교수 자리를 수락했다. 내가 맡은 반의 학생들은 나처럼 전쟁에서 돌아온 60여명의 학생들 중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여기서 나는 멘느 드 비랑의 신체에 대한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행복했던 시절 이후에 물질적인 어려움이 왔다. 교편을 버리고 10년 동안 외부와 단절하고 『현시의 본질』을 썼다 (그런데 릴케가 글을 쓰는 사람에게 10년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당신이 맞다: 고독과 가난의 경험 - 그런데 글쓰기와 그것에 의해서 동기지워진 경험 - 은 힘들고,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배재와 같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 아주 흥분되는, 왜냐하면 이 때 우리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V: 이런 취향, 본질적인 것에 헌신하기 위해 세계와 단절하는 거의 수도승과 같은 이런 취향은 파리의 그 유명한 대학에서 당신을 불렀을 때, 당신이 몽펠리에의 폴-발레리 대학으로 간 것에서도 지속된다. 이 지형적인 거리둠 말고, 더 나아가 대학을 주도하던 현대 사상의 주요한 흐름들 (맑시즘, 구조주의, 정신분석) 밖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반해서 전개된 당신의 사상적 전개를 여기에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간격, 고독이 그 당시 당신에게 꼭 필요했었는가? 그리고 오늘날 생각하기에 그러한 태도가 당신의 작품들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가?   


H: 몽펠리에에서 사정은 또 변했다. 여기서 나의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현시의 본질』, 그 힘들던 작업을 드디어 마쳤다. 그 때 하나 아주 놀라운 것은, 심사위원들, 장 이폴리트, 그리고 다른 심사위원들이 내게 보여준 호의였다. 이 순간부터 당신이 말한 것처럼, 대학에서의 나의 지위는 아주 쉬워졌다. 나는 자유롭게 대학을 선택할 수 있었고 나는 파리와 먼 몽펠리에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모든 박사 논문들은 솔본느을를거쳤으며,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가 나에게 말해준 것처럼 일년의 반은 이 논문들을 심사하는 데에 바쳐야 했다. 나는 이런 조건에서는 나의 개인적인 연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당시의 학문적인 유행과 거리를 취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지중해 해변에서 나는 조용히 그 유행이 사라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V: 오랫동안 당신은 개인적인 탐구와 강의를 겸해왔다. 당신의 오래된 제가이기도 한 나는 당신이 가르치고 배우는 이 관계에 대해서 말해주기를 바란다. 당신처럼 높은 수준에서 탐구에 전념하는 철학자에게는 강의가 종종 실망스럽거나 당신의 연구를 방해하지는 않았는가?


H: 순수한 젊은 정신들, 자신의 삶의 나머지를 이 문화에 바치고자 노력하는 젊은이들과 관계는 항상 나에게 우선적이고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종종 어려운 문제들 (예를 들어 잘못된 길로 들어선 학생을 인도하는 것)이 있었다고 할지라고 말이다. 대학 교육은,  그 교육이 지향하는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탐구의 결과물이 있어야만 한다. 1968년까지 대학의 조건들은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일주일에 3번 한 시간짜리 강의, 일년에 6개월 강의. 그런데 대학에 정치와 선전이 개입하면서, 이 조건들은 열악해 졌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적인 지적인 연구와 더불어 강의를 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했다. 오늘날 내가 지내온 시간을 회고해 보면 그 때가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V: 이제 당신의 철학적인 작품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해보자. 언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당신은 새로운 개념들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고 결정하게 되었는가? 


H: 철학과 접한 2-3년 후에, 물론 고전적인 철학들이지만, 나는 그들의 사상에 경탄하면서도 즉각적으로 나의 의식은 뭔가 채워지지 않은 불만족으로 가득했었다. 그것은 거의 전쟁이었다. 『존재와 무』, 나는 이 책을 아주 자세히 읽었다. 이 책은 헤겔과 후설과 하이데거의 이름을 파리의 거리로 옮겨 놓았다. 나는 즉각적으로 이들로 향했다. 비록 그들이 열어논 지평이 거대하다고 할지라고, 나는 이 곳에서도 만족을 찾을 수 없었다. 나의 그들에 대한 독서는 거의 비판적이었다.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을 읽으면서, 그것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고, 나는 여기서 내가 찾는 것을 발견했다고 믿었던 적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잘못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 탁월한 저서의 주제인 초월론적인 삶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거기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순간부터, 나는 내가 탐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내 눈에 정확히 보였다. 


V: 『현시의 본질』에 대해서 말해보자. 우리는 철학자의 경력이 우리가 기꺼이 상상하듯이 한 철학자의 탐구의 전 삶의 결과를 한데 모은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오늘날 당신은 『현시의 본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앞으로 올 계획들이 그 안에 있는가?



M:
『현시의 본질』은 시작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탐구의 결과이다. 이 책은 4년 간의 고등사범학교 시절과, 『철학과 신체의 현상학』에 이어서, 이 글은 현시의 본질의 한 장을 차지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10년에서 12년에 걸친 오랜 탐구의 결과이다. 이 책의 두께는 앞서서 내가 말한 불만족을 표현한다. 후설은 나의 연구의 현상학적인 틀을 규정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내가 그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것 - 초월론적인 삶의 원천적인 현상학적인 영역의 인식]* - 을 나는 헛되이 오랫동안 서양 전통 철학에서 찾으려고 했었다. 전통적인 철학에서 나에게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분석들을 따로 떼어내서, 나는 매번 그것들이 동일한 하나의 현상학적인 전제로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내가 존재론적 일원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현상학적인 일원론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 본질적인 것을 감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책의 절반 이상이, 아주 많은 분량이 여기에 바쳐졌다. 



V: 이 책을 쓰는 데 당신의 사유에 영감을 주었거나고, 그것을 앞서서 보여준 철학자, 물론 그런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 우리가 알듯이 당신은 메트르 에크하르트, "내가 보는 것을 내가 본다(Videre videor)"의 데카르트, 멘느 드 비랑,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맑스, 이어서 후설까지,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에 반해서 사유했다. 내가 나열한 이 이름들이 적절한지, 아니면 좀 과장된 것인지?


H: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현시의 본질』은 어떤 선구자도 어떤 영감자도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책을 쓰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힘든 작업이었다. 내가 명제에 반한 반명제를 세울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체계적인 개념화도, 용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 내가 시선을 뒤로 돌려서 나의 전 작품을 바라보면, 두 측면으로 보여질 수 있다. 하나는 나타남의 이중성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현상학적인 전제들의 정교화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전제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면서 그것들을 다양한 문제들에서 혹은 다양한 철학들에서 적용하는 단계이다: 신체에(멘느 드 비랑), 경제에 (맑스), 무의식에 (정신분석), 예술에 (칸딘스키), 문화의 문제에 (『야만, Barbarie』), 그리고 후설의 현상학에 (『물질 현상학』), 그리고 끝으로 기독주의에. 전제들의 정교화는 물론 이 적용들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첫 번째 책에서 동시적이다. 이 점에서 멘느 드 비랑만이* 나를 도와 주었다. 나의 다른 작품들은 이 전제들을 풍성하게 검토하는 것들이다. 가장 최근의 저서인 기독주의에 대한 책은 예외적이다. 그것은 『현시의 본질』이 이뤄야 할 것을 쫓는다. 최고의 지성의 자를 놓으면서 - 내가 근원적-지성(Archi-intelligible)이라고 부르는 수준에서 - 기독주의는 내가 앞서서 행한 탐구들을 다시 문제 삼게 한다. 그런데 아직 이 문제들은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정착하지 못했다: 삶과 그것이 근본적인 자기성 주변에서 조직되는 살아있는 것들과 관계, 절대적인 삶과 유한한 삶의 분리와 동시에 그것들의 내재성과 상호성 등등.



V: 당신의 저작 중에서 두 저작은, 보기에, 당신에게 고유하게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즉 『현시의 본질』과 『철학과 신체의 현상학』 이후에 출간된 『맑스』, 그리고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재난의 이론』에 이어 나온 『내가 진리다』. 이 두 저작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의 사유의 발전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가?



H: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가 교수자격시험의 구두 시험 주제였을 때 그 때 싹튼 것이다. 그 때 나는 이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해 강의 노트를 준비했다. 그리고 학생들 중에 시험에서 질문을 받은 한 여학생은, 그녀가 내가 얘기해 준 것인데, 시험관들을 아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험에 합격했다. 이 강의 이후에, 나는 10년 동안 맑스를 읽었다. 그런데 이 관심은 만일 우리가 『철학과 신체의 현상학』의 결론을 상기한다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책은 주관적인 신체의 이론의 빛 아래서 맑스와 "유물론"에 대한 이해를 미래의 의무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체는 "살아있는 개인들"의 "실천", 명시적으로 주관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실천의 장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1845년(역자주, 이 해는 독일이데올로기가 나온 해이다), 이러한 주체의 출현은 잠정적으로 그 때까지의 서양 사유의 기초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맑스의 실천의 이론의 새로움은 왜 맑스 자신이 이 개념을 명시화하는 데에서 그토록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경제에 대한 분석이 이 개념을 실어나른다. 이 분석은 초월론적인 의식 혹은 어떤 주체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삶, 단독적이고, 구체적이고, 신체적인, 객관화할 수 없으며, 계산할 수 없는 삶과 관계하는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산출한다. 이것 밖에서는 객관적이고,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현상 전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오랬동안 이해되지 않은 이 작품에 오랜 노력과 시간과 관심을 바쳤다.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 책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공산주의 붕괴의 근원적인 이유에 대해서 대중을 향해서 쓴 글이다. 동시에 나는 우리들 눈 앞에서 세계를 잠식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고발했다. 반면에 『나는 진리다』는 나의 명상의 연속선 상에서 다시 나온 것으로 나는 여기서  나의 사유의 출발점, 1945년 스피노자에 대한 나의 석사논문으로 돌아갔다. 아주 최근에 자드 아탐(Jad Hatem, 역자주, 레바논의 철학자이며, 시인. 그는 베이루트의 대학의 미셸 앙리 연구소의 소장이기도 하다.)이 이 텍스트를 출간했을 때, 나는 놀라움을 가지고 스피노자의 내재적인 인과론에 대한 이념, 특히 이 경우에 각각의 유한한 양태에 고유한 실체의 내재성은 『나는 진리다』 의 중심적인 주제를 예비한다: 각각의 살아있는 것 안에서 절대적인 삶의 내재성.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즉 사변적인 철학에서 현상학으로의 이행이 있다. 그런데 이 이행에 하나의 직관과 더불어서 일어난다: 살아 있는 것과 삶의 상호적인 내재성 안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자기성의 생성. 이 사유는 진정한 초월론적인 자기의 고고학적인 흔적을 찾는 것을 지향한다. 그것은 나와 자아의 뒤에 위치하는 것으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며, 아직 『현시에 본질』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V: 왜 당신은 당신 사유의 단독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물질적 현상학이라는 제목을 취했는가?


H: 이 질문은 디디에 프랑크가 나와 후설의 입장을 비교하는 글을 준비하면서 나에게 질문했던 것이다. "질료적 현상학과 물질적 현상학(phénoménologie hylétique et la phénoménologie matérielle)", 이 글은 처음 잡지 『철학』(Phillosophie)에 실었던 것으로, 나중에 이 글은 나의 책 『물질적 현상학』에 실렸다. 내가 보기에 이 제목은 나에게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현상학에 부여된 새로운 과제를 지시한다: 나타남 안에서 나타남을 하나의 나타남으로 만드는 것, 다시 말해 현상학적인 질료, 이 물질이 하는 일, 우리 삶의 정서적인 살과 다른 것이 아닌 이것을 명시화하는 것. 이것은 다만 현상학의 형식적인 개념에 그리고 또한 현상학적 일원론에 의한 환원에 대립하는 나의 현상학의 완성된 내용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과제, 즉 이 살의 분석, 결국 삶의 분석을 그 가능성의 최고로까지 진척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위의 책에 지적되어 있다. 



V: 철학적인 저서 이외에 당신은 4권의 소설을 썼다. 그 중의 하나는 추리소설의 분위기를 가진 것도 있다. 이것은 두 철학 저서 사이의 철학적인 반성의 시간을 위한 잠시의 휴식을 위한 단순한 여가적 행위인 오락인가?, 아니면 보다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것에 접근하고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다른 방식의 탐구인가?


M: 철학은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가진다. 그것은 엄청난 참조들을 가진 작업으로 피할 수 없이 부분적인 인식에 머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선택된 한 반성의 영역에서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제한된 전체를 가진 절대적으로 엄격한 것이기도 하다. 소설적인 글쓰기는 이러한 작업을 줄인다. 나는 여기서 일종의 해방감을 맛본다. 이 자유의 감정은 각각의 문화의 근본적인 활동들에 의해서 요구되는 접근의 양태들 안에서 드러나는 차이에서 유지된다: 한편으로 자유로운 공상과 상상, 다른 한편 개념적인 분석. 문학적인 글쓰기는 나에게 한 번도 오락이었던 적도 휴식이었던 적도 없다. 실제로 다른 양태의 삶, 어쩌면 좀더 가벼운 삶의 양태가 문제가 된다. 나는 사실 소설에 바칠 많은 시간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항상 안타까웠다. 


V: 철학적인 내용과 독립적으로, 스리지 콜로그는 당신과 안 앙리(Anne Henry)를 둘러싸고 모두 아주 정감적인 분위기 였다. 그것은 일종의 사유의 공동체, 동시에 상호주체성의 공동체의 구체적인 표현이 아닌가? 그것은 또한 국제적인 만남이기도 했는데, 점점 늘어나는 당신 저작의 번역은 놀랄만할 정도로 범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H: 스리지 콜로그는 나에게 나의 최근의 글들에서 비로소 그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한 상호주관성의 개념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신이 알듯이, 상호주관성은 나에게 이성의 보편성이 아니라, 삶에 의존한다. 인간적인 공동체가 가능한 것은 다만 삶이 진정으로 그리고 절대적인 보편성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교회의 신부들과 더불어 "개인들(personnes)"이라고도 부르는 다양한 살아있는 자들로 이뤄진 절대적인 단독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것이 유지하는 삶의 특징들, 즉 초월론적인 자기들의 차이와 파도스를 가지고 유지되기에, 모든 세계적 제한을 넘어선다. 예를 들어, 어떤 작가는 그가 전혀 본적이 없는,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할 사람들과 아주 밀접한, 본질적인 관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한다. 만일 그가 그들을 보게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외적이고 아주 감동적인 만남이 될 것이다. 바로 그러한 만남이 스리지에서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아주 큰 행복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짧았다.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이 만남은 헤어짐의 피할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한다. 점점 많은 나라들에서 그리고 먼 나라들에서 내 책을 번역하는 번역자들의 작업 - 그들 중의 몇몇은 스리지 콜로그에 참여했었다 - 은 나에게 위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작업은 지각의 공동체보다 더 광대한 공동체, 즉 보이지 않는 것 안에서 세워지는 공동체의 가능성과 그것의 필요성이 전제하는 것을 구성한다.


V: 현재 당신의 계획은 무엇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H: 현재 나는 당신에게 이미 말한 것처럼 살의 분석을 심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삶의 기원과 토대를 찾는 것이다. 이 살의 고고학은 『내가 진리다』의 후속편 (역자주, 2000년(Seuil) 나온 그의 『육화: 살의 철학, Incarnation, Philosophie de la chair』) 이 될 것이다. 만일 나에게 두 번째 삶이 허락된다면, 나는 여전히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고, 또 다른 소설도 쓰고 싶고, 친구들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