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성과 무한 강독

1.A.5. 무한의 이념으로서의 초월성

aurorepark 2011. 2. 23. 08:07

5. 무한의 이념으로서의 초월성(39-45)


이 절에서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의 제일 원리인 자아의 분리(la séparation du Moi)와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무한의 이념에 대해서 말한다. 이 원리는 모든 탈자적(extatique)*, 즉 자기 밖으로 나아가는 태도와 구분된다. (*extase, 황홀 혹은 종교적 법열이라고 옮겨지는, 그 말의 형용사 extatique는 그리스어 ek-stasis, 즉 자기(soi) 밖으로 나아가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하이데거가 실존existence를 ex-sistence로 읽었을 때, 즉 실존을 시간의 탈자적 운동으로 읽었을 때 다시 발견된다.) 그는 이러한 탈자적   다시 말해 인식하는 자가 인식된 것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모든 태도와 구분된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는 앞서 말한 형이상학이 발견되는 이론의 도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존중할만한 그리스인들부터 온"(39)것으로 데카르트의 자아와 신의 구분에서도 그 형태를 유지한다. 이러한 구분은 나의 존재 그 자체 안에서 산출된다. 이로부터 철학적 초월성은 종교적 초월성, 다시 말해 초월자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종교적 초월성과 구분된다.


이 원리는 레비나스 철학의 제일 원리이다. 이 원리를 잊는 순간 그의 철학에 대한 모든 오해가 시작된다. 다시 말해 그는 여기서 비-탈자적 초월성에 대해서, 하이데거의 탈자적 철학과 구분되는 특히 데카르트의 "무한의 이념"에 의존해서 이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동일자와 타자가 맺는 이 "관계"는 관계라는 말이 함축하는 어떤 연결을 잘라냄이 없이, 그리고 전체 안에 동일자와 타자를 통합함이 없이 일어난다"(40). 이러한 "관계 아닌 관계"는 데카르트가 코기토 안에서 "무한의 이념"과 맺는 관계 안에서 탁월하게 드러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데카르트에서 사물들, 혹은 수학적 개념들, 혹은 도덕적 규범들은 모두 그것들의 대한 이념으로 제시되며, 전자는 후자와 구분된다. 그런데 "무한의 이념"은 여기서 예외적이다. 사물들이 그들의 "객관적인" 실재와 "형식적인" 실재가 일치하는 반면에, "무한의 이념"의 대상(ideatum)은 이 이념을 영원히 초월한다. "이념의 대상과 이념을 분리하는 거리는 이념의 대상의 내용 그 자체를 구성한다."(41) 다시 말해 무한은 초월적인 것으로서 초월적인 것의 존재의 고유성 그 자체를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무한은 절대적인 타자이다. 우리는 이 초월적인 이념의 대상을 우리 안에(en nous) 이념으로서만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이념과 무한히 멀리있으며, 다시 말해 외재적이다."(41) 


따라서 무한을 생각하는 것은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대상적 관계 없이 생각하는 것은 사유 이상의 것, 사유보다 나은 것을 행하는 것이다"(41)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러한 초월성이 가지는 거리는 표상의 활동에서 대상과 정신의 활동을 분리하는 거리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상이 유지되는 이 거리는 대상의 소유, 다시 말해 이 대상의 존재의 일시적인 정지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인 지향성이 유지하는 대상의 초월성은 바로 이런 종류의 초월성이다. 이로부터 <전체성과 무한>의 모든 분석을 이끄는 하나의 일반적인 원리가 제시된다:"객관성과 초월성 사이의 차이는 이 책의 모든 분석을 이끄는 일반적인 지표로 사용될 것이다."(41)  레비나스는 자신이 말하는 초월성이 지향성의 초월성인 지평의 개념으로서 세계의 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과의 차이가 이 책 전체를 이끌 것이라고 말한다. 레비나스가 후설에서 자신의 철학의 많은 기원들을 가져오면서, 그 철학이 후설로 환원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진술은 또한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의 21절 "초월론적인 인도의 끈으로서 지향적 대상"을 정확히 겨냥한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앞서 읽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은 주체성의 방어를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그것은 [...] 무한의 이념에 근거한 것으로 제시된다"(11)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이 지향하는 것과 그것을 이끄는 원리를 획득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레비나스는 현상학적 초월성, 즉 세계의 개념과 구분되는 초월성 안에서  주체의 주체성을 말하고자 한다.


이 책을, 더 나아가 레비나스의 철학을 이끄는 한 기원인 데카르트의 "무한의 이념"은 그것을 생각하는 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외재성을 보존한다. 이 책의 부재가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일 때, 이 외재성은 물리적 공간의 저 밖의 외재성, 혹은 세계 이면의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지시하는 외재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이 외재성은 탈자적 초월성으로 저 밖의 세계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내밀한(intime) - 이 말 자체는 라틴어에서 내적인(intérieur)의 최상급에 해당하는 말이다 -  자기 안의 낯섬, 독일어의 Umheimlich와 같은 외재성을 의미한다.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면 "외적인 존재의 절대적인 외재성은 자신의 현시 안에서 자신을 순수히 단순히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현시되는 관계로부터 "지워진다(s'absout)""고 말한다(42).


이러한 무한의 이념의 형식적인 정의를 넘어서 우리는 어떻게 그 개념이 가진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이러한 구체성은 타인과의 "담론"적 관계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관계 안에서 타인의 얼굴이 주어진다고 말한다. 레비나스가 "얼굴"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자가 내가 내 안에 가진 그(타자)에 대한 이념을 초월하면서 제시되는 방식"(43)을 지시한다. 이 관계 안에서 항상 나의 척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 일치를 초월하는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레비나스는 얼굴은 얼굴이 가진 성질들에 의해서 현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형상 없는 질료의 구분이 지워진 자기 표현으로서 "자기-자신(καθ᾽αύτό)"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표현한다(s'exprime)"(43). 이 표현은 앙리의 "스스로 느끼는(s'éprouver soi-même)" 삶의 자기-촉발과 가장 유사한 표현일 것이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이미 읽은 앞의 절(4절)에서 "존재로부터 출발해서 존재에 접근하는 것, 그것은 존재자를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존의 이 공허, 이 무로부터 - 모든 빛과 인광 - 이성은 존재자를 지배한다. 존재로부터, 존재자가 실루엣을 가지고, 자기의 정면(face, 얼굴)을 잃어버리는 빛의 지평으로부터, 존재자는 이미 지성의 부름이다"(36)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존재론을 넘어설 수 있는 한 길, 즉 이러한 접근에 반해, 타자의 타자성을 보존할 수 있는 한 길이 여기서 제시된다.    


"타인을 담론 안에서 접근하는 것, 그것은 그의 표현을 환대하는 것(accueillir)이다. 그 안에서 타자는 매순간 한 사유가 그에 대해 가지는 이념을 넘어선다. 따라서 그것은 나의 능력을 너머 타인을 받아들이는(recevoir)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정확히 무한의 이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배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타인과의 관계 혹은 담론은 비-알레르그적 관계, 즉 윤리적 관계이다. 그런데 이 환대된 담론은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산파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오며, 나에게 내가 지닌 것 이상을 가져다 준다. 이 비-폭력적인 전이성 안에서 얼굴의 현시가 산출된다. 지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리스의 분석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절대적으로 외적인 능동지성을 발견한다. 그런데 지상의 절대적인 이성의 활동을 손상시킴이 없이, 이것을 구성하는 능동지성은 산파술을 스승의 전이적 활동으로 대체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성을 포기함이 없이, 받아들임 (recevoir)그 자체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43-44)


데리다가 Adieu à Emmanuel Lévinas에서 긴 분석을 할애하고 있기도 한 위의 단락에서 레비나스는 이성을 포기함이 없이 가능한 이성의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말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받아들임(recevoir)이라는 말을 두 번 강조한다. "받아들임 그 자체로부터 발견되는" 이성의 가능성은 '담론(discours)', 오래전부터 로고스의 번역어인 이 말의 의미의 변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위의 문장에서 우리는 <전체성과 무한>의 주제를 가장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그리고 가장 자주 나오는 한 단어를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첫 줄에서 발견되는 "환대(accueil)"이다. 이 환대가 없이는 "얼굴"도 없다. 얼굴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것과 더불어 열리는 모든 것, 이것과 더불어 변경되는 모든 것을, 요약하면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 혹은 형이상학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 환대의 가능성을 먼저 생각해야한다. 이 환대는 우선 위의 문장에서 "받아들임"을 결정한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능력을, 나의 척도를 넘어서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여기에 타자와의 관계의 비-대칭성과 거주의 불편함, 작은 것, 유한한 것 안에 무한히 큰 것을 가지는 이 이상한 거주로 인해, 트로마티즘이 자리하게 된다. 그런데 받아들임(recevoir)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전통철학에서 수용성(réceptivité), 수동성이라고 부르는 것, 보통 감성(sensibilité)에  해당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철학의 전통에 의하면 이성과 대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바로 이 받아들임 그 자체로부터, 감성으로부터 이성이 발견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여기서 <전체성과 무한>이 철학사 안에 가져오는 하나의 단절과 만나다.  위에 문장에서 환대=받아들임=이성은 동의어들로 쓰인다: 환대로서의 이성, 환대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이성. 그런데 다시 한 번 타인의 표현을 받아들이는 환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빈 손으로 타자에 접근할 수 없는 불능"(42)으로서 타자에 대한 대답이 아닌가? 결국 환대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이성은 타자에 대답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이성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얼굴의 개념은 나의(존재자의) 열림을 전제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것은 정확히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앞섬(antériorité)"(44)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나의 의미부여에 앞선, 나의 의도에 앞선 얼굴의 외재성은 "힘에 소유에 호소하지도, 플라톤처럼 기억의 내재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것은 그것을 환대하는 나를 보존하기"(44)때문이다.이 보존은 레비나스에게 직접성의 철학을 의미한다. "직접성의 철학은 버클리의 관념론에서 실현되지도, 현대의 존재론에서도 실현되지 않는다. 존재자는 존재의 열림 안에서 자신을 탈은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절대로 존재자 그 자체와 함께 직접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직접성은 부름, 명령이다."(44) 그렇다고 해서 직접성이 접촉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접촉은 이미 주제화(thématisation 혹은 대상화)이며, 지평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직접성, 그것은 대면(face-à-face)"(44)이다. 이 세상에서 항상 회피하고 싶은 하나의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이 "대면"이 아닐런지... 그래서 우리는 항상 중간의 매개자를 중재하지 않는가? 이런 가장 힘든 상황을 레비나스는 철학의 정의로운 상태로 놓는다. 레비나스 철학의 어려움은, 그의 철학을 쫓는 것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얼굴은 무한의 흔적으로, 물론 유한자 안에 거주하는 무한의 흔적으로  언제나 타인의 얼굴이다. 레비나스는 이 얼굴, 항상 보여진 것을 초월하는 이 얼굴은  그런 의미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parler, le Dire)을 한다고 말한다. 얼굴은 자신의 고유한 가시성을 비가시화하고 자신의 형식을 비형식화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얼굴은 "내용이 될 수 없는 것이며, 담을 수 없는 것"(<윤리와 무한>, 81)이다. 이로 인해 얼굴은 "우리를 너머로 이끈다"(같은 곳)고 말한다. 이 "너머(au-del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레비나스의 무한의 윤리의 내기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어지는 <B.분리와 담론>은 데카르트의 무한의 이념을 길게 본격적으로 다룬다. B를 읽으면서 우리는 다시 무한에 대해서 질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