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체성과의 단절(p. 24-30)
레비나스, 우리는 그를 "외재성의 철학자", "타자의 철학자" 혹은 "초월성의 철학자"라는 이름들로 자주 소개한다. <전체성와 무한>의 부재가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라는 것도 이러한 이름들을 레비나스에게 부여하는 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레비나스의 이러한 이름들에서 반성 없이 직접적으로 들려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발생하는 그의 철학에 대한 오해를 우선 비켜가야 한다.
칸트와 후설을 읽고, 그들의 철학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초월과 내재의 개념의 심각한 변형을 겪은 후에도 여전히 "외재성",
"초월성"의 문제를 "안과 밖", "내재와 초월", 이편과 저편의 단순한 대립에서 그 중의 한 항의 선택으로 이해하는 무지는
최소한 비켜가야 한다. 그가 사용하는 외재와 초월의 의미는 "전체성"에 대립하는 것이지, 내재에 대립하는 초월, 안에 대립하는
밖, 이편에 대립하는 저편이 아니다. 만일 이 둘이 대립적인 의미로 쓰인다면, 이 경우 내재성은 전체성의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이지, 내재와 초월의 단순한
대립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사실의 인식은 레비나스 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쉽고 명백한 첫걸음을
제시한다.
형이상학적인 용어인 "절대적인 외재성"이라는 개념은 우선 "의식 내적인 놀이의 운동, 즉 의식의 자기에의 현전에 환원
불가능성"(24)을 의미한다. 앞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욕망>에서 말한 것처럼, 형이상학적인 운동은 욕망이나 그
욕망의 대상과의 비정합성으로 인해 항상 초월적인 것으로 남는 것이다. 이 초월성은 필연적으로 그 보이지 않는 것으로 향하는 나, 형이상학자와 그 보이지 않는 것과의 분리를
전제한다. 이 분리는 이 둘 사이의 비정합성, 다가가도 가도 이를 수 없는, 본래적으로 비정합적인 보이지 않는 것과 나,
형이상학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마르지 않는 목마름은 가진 나와 타자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거리, 심연, 절대적인 분리를
의미한다. (이 거리, 그 거리가 촉진하는 욕망, 줄일 수 없는 거리, 그로부터 생겨나는 강박, 트로마티즘은 그의 철학의 중심에
놓여있다. 강박과 트로마티즘은 도착에 이를 수 있다. 이 도착을 피해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레비나스는 "초월성"
아래 <주>를 남긴다. <주>에서 레비나스는 이 말은 장 발의 책 <인간실존과 초월성>의
"초월성의 이념에 대하여"에서 빌려온 것이고 그것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장 발의 한 문장을 읽어보면, "우리는
초월성의 어떤 질서 혹은 심지어 질서들을 생각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아래로 향하는 질서, 로랑스(Lawrence)가 우리에게 우리
아래에, 존재 저 아래에 알려지지 않은, 혹은 어두운 신을 예감하게 했을 때, 그가 의식한 것이 있다. 다만
상향초월(tranascendance)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향초월(trandescendance)도 있다. 초월성이 스스로를
초월할 때, 내재성으로 향하는 초월의 운동이 있다. 아마도 가장 위대한 초월성은 초월성을 초월하는 것, 다시 말해 내재성으로 다시
떨어지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파괴된 초월성 이후에 두 번째의 내재성이 있게 될 것이다. 초월성의 이념, 이것은 자기 자신 만을
아는 사유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기 위해, 사유와 다른 내재성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초월성 안의 내재성의 내재성(immergence*)에 대한 감정을
파악하기 위해 필연적일 것이다"(위의 장 발의 책, 37-38. *immergence, 이 말은 immersion(잠수하다)과
émergence(솟아나다)가 겹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가 초월성 안에 내재하는 한에서만 초월성을 생각할 수 있으며,
우리가 내재성에서 초월하는 한에서만 내재성을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 초월성 안의 내재성의 내재성"(같은 책, 37)을 의미한다). 초월성은 "너머(au-delà)와 이전(en-deça)이 - 높음과 낮음 - 이 서로 교환가능한"(Hors sujet,
102), 장 발이 형이상학적 경험이라고 부른 것으로, 이로부터 레비나스는 자기 안에서 깨어나는 살아있는 자아의 경험으로서
후설의 "내재성 안의 초월성"을 불러낸다(이에 대해서는 레비나스의 "의식에서 깨어남으로"를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장 발에게 바친 글에서 레비나스는 "장 발의 형이상학적 경험, 그것은 여기에 앞선 너머(l'au-delà avant ici)이다. 그런데 여기(ici)에 앞섬과 저기(là-bas)의 더 멈은 또 다른 여기로서 정립된다"(Hors sujet,
103)고 말한다. 장 발은 다른 곳에서 이에 대해서 "초월성, 그것은 넘어섬이 향하는 대상을 동시에 넘어서는 행위이다"(장
발, <형이상학적 경험>, 232)라고 말한다. 따라서 더 이상 초월성은 운동과 그것의 도달(terme)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만일 초월성-운동이 도달로서의 초월성에 의해 설명된다면, 그 말이 가진 고유한 의미에서, 더 이상 초월성은
없다. 만일 초월성-도달이 초월성-운동에 의해서 설명된다면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운동과 그것의 도달 사이에는 어떤 긴장이
존재한다. 그리고 초월성도 도달도 주어진 것으로 생각되어져서는 안된다. 결국 하나는 다른 것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것
없이는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인간의 실존과 초월성>, 35-36). 따라서 장 발이 항상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 너머에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의식의 지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향성의 초월성은 그것이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인 한에서 항상 그것이 도달해야 하는 것(terme), 운동의 끝을 가진다. 그렇다고 장 발이 "인간은 항상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황홀경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 경험은 "자기에서 스스로 주어지는 것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덧 붙이듯이 이러한 경험, "자기 자신의 너머, 그것은 자신의 유일성, 비교되어질 수
없는 새로운 동일성으로, 개체들과 사물들이 그들의 자리를 발견하는 보편적인 동일성의 질서를 이미 가로지르는 형이상학적인 경험"(Hors sujet, 104)을 지시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 절대적인 다름, 절대적인 타자에의 욕망, 그것으로 넘어서(trans)나아가는(-scendance) 형이상학자의 운동, 초월은 외적 존재의 존재하는 방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때에, "타자의 형식적인 성격, 즉 타자임은 그 외적 존재의 내용 그 자체를 형성한다. 바로 이 형식적인 성격 그 자체로 인해 형이상학자인 <나>와 <타자>는 하나로 전체화되지 않는다. 형이상학자, 나는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다"(24)
나, 형이상학자가 타자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séparation)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 형이상학자와 타자라는 두 항이 무차별적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힐 수 있는, 그리고 하나를 다른 하나에 결합시킬 수 있는 어떤 상호관계, 다시 말해 가역적 관계(la relation réversible)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의 제일원리가 이 가역성에 있다면, 레비나스의 철학의 원리는 비가역성 안에 놓여 있다. 나와 타자 사이에 이 비가역성은 그 말이 의미하듯이 방향의 일방성, 일반통행(sens unique)을 의미한다. 이것은 둘 사이의 무관계, 무차별이 아닌, 어떤 순서, 질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이 두 항이 <평등한>, 즉
서열을 바꿀 수 있는 두 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버나 메를로-퐁티의 <나>와 <너>의 가역적인 둘 사이의
상호성(réciprocité)은 이 두 항이 <같은 장>, 그것이 세계이든, 자연이든 간에 <같은 장>
안에서 놓일 수 있는, 다시 말해, 형이상학자와 타자가 밖으로부터 보이는 한 체계 안에서 서로를 보충하는 평등한 두 항으로 전체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비나스에서 나와 타자는
평등의 이름으로 얽히지 않는다. 이 평등의 이름은 필연적으로 둘이 같이 들어갈 수 있는 하나로서의 전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어떤 종류의 공동체, 그것이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거부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평등한 정치적인 공동체는 그것에
앞선 한 질서, 레비나스가 "윤리"라고 부르는 비가역적인, 불평등한 질서로부터 생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가역적인 평등하지 않은 분리된 두 항의 관계가 레비나스의 철학의 제일의 원리인 것은 그것이 그의 다른 모든 관계들의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일자와 타자의 일반적인 범주로부터 출발해서, <나와 타인>,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의 관계 등등 모든 구체적인 관계는 이 비가역성의 법칙 하에 놓인다. 나의 타인에 대한 책임은 가역적으로 타인의 나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 방향의 일방성은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타자성을 동일자로 환원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 외재성의 철학의 의미이다.
비가역성 안에 레비나스가 말하는 초월성의 의미가 있다는 것은 초월성은 전체로 흡수되지 않는, 전체의 한 구성원이 아닌 관계 아래에서만 타자의 타자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 "비가역성이 동일자는 타자에로만 향하고, 타자는 동일자에로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24) 이 경우 이 둘은 말 그대로 "무차별적인", 무관심적인 두 항으로, 이 둘은 관계를
고려할 수 없는 상태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la séparation radicale entre le Même et l'Autre)는, 따라서 이 가고 오는 이 관계 혹은 비-관계, 대답 혹은 대답 없음의 관계를 기입하기 위해서, 동일자와 타자는 이 둘 사이의 관계 밖에 놓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둘은 어떤 (제 3의) 공통의 시선 아래에서 함께 모이게 되거나, 아니면 그 둘을 분리하는 절대적인 거리는 완성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24)
동일자와 타자가 이 둘 사이의 관계 밖에 놓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 절대적인 이질성은 타자가 어떤 한 항과의 관계에 의해 타자인 경우에만 가능하다"(25)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 항, 그것의 본질이 관계의 출발점이며,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로 들어가게 하는 데 있는,
그리고 상관적, 상대적으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같은 자, 즉 동일자인 이 한 항과의 관계에 의해서 타자가 타자인 경우에만. 즉 나로부터, 나와의 관계로부터, 타자가 타자인 경우에만 타자의 타자성은 의미를 가지며, 타자일 수 있다.
어떤 한 항이 절대적일 수 있는 것은 다만, 단지 유일하게 <나>로부터 출발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데카르트, 칸트,
후설로 이어지는 철학적 전통에서, 이 절대적인 철학의 출발점으로부터만, 절대적인 타자의 타자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절대적인
타자의 타자성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은, 상호주체성은 주체의 절대적인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해서 가능하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체가 이미 자신 안에 타자를 포함하는 상호주체적인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진정한 상호주체성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자아는 한 참조 체계로부터 우리가 유지할 수 있는 개인성 혹은 개별성(individualité)을 넘어서 내용으로서 동일성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항상 같음으로 머무는 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한 존재의 존재함은 자신을 동일화하는(s'identifier) 데에, 그에게 일어나는, 그에게 이르는 모든 것을 거쳐서 자신의 동일성을 재발견하는 데에 있다, 자아는 탁월한 동일자로, 자기동일화의 본래적인 작업(l'oeuvre originelle de l'identification)이다." (25)
자기의 변형들에서조차 동일한 자아의 탁월한 자기동일화의 운동의 한 예를 우리는 헤겔에서 발견한다. 마치 "
자기 앞(devant soi)"을 걷는 것처럼, 자신의 사유의 앞에 선 자아는 그 사유가 마치 자기에 낯선 것처럼, 타자처럼 그
사유를 듣는다. 때로는 이 사유에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칸트의 사유 앞에서 생각하는 사유, 즉 초월론적인 사유의 발견은 헤겔의
눈에는 오성의 "소박한 사유"의 발견으로 보인다. 이제 자아는 이 타자성 앞에서 여전히 동일자이며, 자아는 이 자기와 혼동된다. 이것은 헤겔의 <정신 현상학>에서 "자기에 자기에 대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사유된 대상들의 타자성 안에서 자기화하는 동일자의 보편성을 표현한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구분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에게 있어 구분되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즉각적이다. 나, 동음 이의어, 나는 나 자신을 밀쳐낸다. 그런데 구분되었던 것, 다른 것으로 정립되었던 것은, 즉각적으로 구분되었던 한에 있어서, 나에 대해서 어떤 차이도 구성하지 않는다." (Hegel, Phénoménologie de l'Esprit, trad. fr. Hyppolite, pp. 139-140).
자기 의식에서, 반성적 의식에서 드러나는 두개의 나, 발음이 같으나 의미가 다른 이 두개의 나, 즉 사유하는 나와 이 오성의 대상,
나아가 칸트적인 용어로, 대상 일반, 다시 말해 사유하는 초월론적인 주체에 상관자인 대상
일반, 타자('Autre)가 결국 어떤 차이도 구분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타자에 대한 의식은
어떻게 필연적으로 자기 안에서 반성된 자기-의식인가?
위의 인용문은 헤겔의 <정신 현상학>의 <힘과 오성>의 장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헤겔은 여기서 자기 의식, 즉 "구분되지 않는 것의 구분"을 기술한다. 오성이 감성적인 직접적인 지각들의 확실성을 넘어, 자신과 다른 것으로, 자신에 대해 있는 것으로(pour-soi),
<대상>으로 정립하면서, 오성은 이것을 사유하는 주체와 다른 것으로, <차이>로 즉각적으로 자신으로부터
구분하며(아주 순진한 사유라고 헤겔이 발견한 것), 나로부터 밀어낸다. 그런데 이 거부하는 힘은 동시에 잡아당기는 힘과 다르지
않다는 것(헤겔이 보다 고양된 사유라고 발견한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 대상이, 이 구분되었던 것이, 이 무한성이 나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나 자신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레비나스의 관심은 이로부터 이어지는 일반적인 자기 의식으로서의 이성으로까지의 의식의 운동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다. 레
비나스는 칸트에서 헤겔로의 이 이행 지점에서 멈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이행을 지연시키고, 방해하고 불가능 하게하는 것을
발견하고자 한다. 철학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헤겔의 타자의 발견에 대해 레비나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함이 없이 그가 발견한 이 두 개의 나 사이의 운동, 자기에 자기에 대한 운동을 어떻게 다르게 운동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구분되지 않는 것의 구분"이라는 자기 의식에 대한 헤겔의 정의가 가지는 함축은 무엇인가? 헤겔이 철학사의 흐름에서 그 흐름을
돌리고자 한 것은 무엇이고, 레비나스가 이것을 다시 되돌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새로운 자기동일화의 운동 안에 레비나스의
철학이 자리한다. 익명적인 존재로부터 나온 존재자가 자기로 돌아가 그 안에서, 이 자기의 타자성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이
동일화의 운동, 재탄생의 운동은 책임의 주체로서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자로 나의 동일성을 발견한다. 이 자기동일화의
운동을 지배하는 논리는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분리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우리가 말하지 않은 자기로의 돌아감의 운동이다.
"자기(soi)를 밀쳐내는, 거부하는 나, 구역질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이 체험, 내가 자기에 못박혀 있다는 이 불편함의 체험은 모두 자기 의식의 양태들로 나와 자기의 떼어낼 수 없는 동일성에 의존한다. 나의 타자성, 즉 자기를 타자로 간주하는 것은 물론 시인*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타자성은
동일자의 놀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기에 의한 나의 부정은- 정확히 말하면, 나의 동일화의 양태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26).
*Gerges
Izambard 에게 보내진 랭보의 편지(1871, 5월 13일) 안에서 발견되는 <나는 타자다>("Je pense:
on devrait dire : on me pense, ... Je est un autre."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게 한다....나는 타자다.>
자기동일화의 운동은 "나는 나다"라는 식의 단조로운 동어반복의 형식논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로 돌아오는 운동, 즉 자기동일화의 작업"(TA, 31)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것은 또한 자기의 자기에 의한
표상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추상적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라, "나와 세계와의 구체적인 관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26).
"내 밖에 이 낯설고 적대적인 세계는 나를 변화시킨다. 그런데 진정한 본래적인 그들 간의 관계는 세계 안에 거주라는 형태로 산출된다. 세계라는 타자에 대한 나의 존재 방식은 그 안에 거주함이라는 양태로 자기집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동일화하는 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계 안에서 우선 낯선 타자인 세계 안에서 태어난 나는 이 낯섬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서 태어난 자(autochtone)이다. <나>는 이 변형을 거쳐서 나로 되돌아 옴이다. 자아는 세계 안에서 장소와 집을 발견한다. 거주는 자신을 유지하는(se tenir) 한 방식이다. 그런데 뱀이 자기의 꼬리를 물고 자기를 유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신체가 이 땅 위에서 자기에 외적인 것에서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다."자기집(chez soi)"은 내용을 담는 용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한 장소로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je peux)이고, 그 안에서 다른 실재에 의해서, 그것에의 나의 의존에도 불구하고, 그것 덕분에 내가 자유로운 것이다."(26)
<
장소>, <집>, <세계>안에서 모든 것은 나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놓여 있으며, 단지 손을 내미는
것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걸어가면서 필요한 것을 손으로 잡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장소>,
<세계>는 우리에게 수단을 제공한다. 모든 것은 여기 있으며, 모든 것은 나에게 속하며, 모든 것이 이미 이 장소에 다 포함되어 있다. 나에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 가능성들>을 실제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세계 안에서 나는 나의 집(chez moi)에 머문다. 왜냐하면 세계는 자기를 내어주고 소유 안에 자신을 재 발견한다. 그런데 "진정한 타자는 소유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보다는 이 소유를 반박하지 않는가?"(27)
세계의 타자성을 자기의 동일화로 다시 보내는 이 운동, "이 동일화의 계기들 - 신체, 집, 일, 소유, 경제 - 경험적인
우연적인 소여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동일자의 구조를 형성하는 근본적이고 형식적인 뼈대들"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동일자의
자기동일화는 공허한 동어반복도, 타자와의 변증적인 대립도 아니다. 그것은 에고이즘(égoisme)의 구체성이다"(27). 이 에고이즘의 구체성은 레비나스에서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연다. 이 에고이즘의 전제는 이 책에 2부 <내재성과 경제> 안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진다.
만일 동일자가, 헤겔의 변증법에서처럼, 타자와의 대립 안에서 동일화 된다면, 동일자와 타자를 모두 포함하는 전체의
부분이 될 것이다. 이 경우 <전체성과 무한>을 시작하면서 말한 절대적 타자에의 욕망으로서의 형이상학적 욕망은
처음부터 부정될 것이다. 나의 에고이즘과 나의 형이상학적 욕구는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아니다. 나는 에고이즘으로 자신을
동일화하면서만 그 안에서만 형이상학적인 욕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 반대가 아니다. 어떻게? 이제 레비나스와 더불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
어떻게 동일자는 자신을 에고이즘으로서 산출하면서, 한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 타자의 타자성에서 타자를 제거함이 없이 그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가?"(27) 이 질문과 유사한 질문을 우리는 <시간과 타자>에서 이미 본 적이 있다: "한
존재자는 타자에 의해 자기 자신이 으깨짐이 없이 타자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TA, 65) 이제 30년 전의 이
질문은 그 구체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관계는 어떤 본성을 가지는가? 여기서 레비나스는 타자의 개념의 하나의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의 인식의 빛으로부터 내 안으로 들어온 것들은,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나로부터 나온 것으로 그것은 나의 것이다. 이 빛의 동일화의 운동에 정지를 가져오는 오는 것은 내가 세계에서 만나는 타자성은 형식적인 타자성이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다.
" 이 타자성들은 내가 거주하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나의 능력들pouvoirs 가능성들)로 떨어질 것이다. 형이상학적 타자는 형식적인 아닌 타자성의 타자, 나의 동일성의 단순한 이면이 아닌 타자성의 타자, 동일자의 저항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타자성의 타자이다. 그것은 모든 나의 의도에 앞선, 동일자의 전제에 앞선 타자성의 타자이다. 이 타자성의 타자는 자신의 내용 그 자체를 구성한다. 이 타자성의 타자는 동일자를 한정하지 않는다. 동일자를 한계지우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타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동일자를 한계지우면서 타자는 이 동일자와 경계를 같이 점유하면서, 타자는 체계의 안에, 다시 말해 동일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28)
그래서 이제, "절대적인 타자, 그것은 타인이다"(28). 그것은 나의 대상들이 될 수 있는 세계 안의 존재자들이 아니라, 내 이웃일 수도, 나의 적일 수도 있는 이 타인, 이 이름, 이 보통명사는 이제 레비나스와 더불어 보통명사이기를 그친다. 타인은 나에게 고유명이, 나에 의해 불려지는 고유명이 된다. "이 타인은 나와 같이 셀 수 있는 것도, <우리>라는 나들의 복수에 속한 하나의 다른 <나>일 수도 없다. <나> <너>는 여기서 공통 개념의 개체들도, 셀 수 있는 단위도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통된 나라의 부재, 그 둘이 함께 할 공통의 자리의 부재, 그것이 타자를 타자로 만든다. 낯선이, 이방인. 자기 집의 고요를 방해하는 이방인. 이방인은 또한 그가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그에 대해 어떤 힘도 행사할 수 없다. 그는 나의 파악을 피해간다. 나는 동일자이고 그는 타자이다. 여기서 연결사 <고>는 나와 너의 더함이 아니다.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언어이다. 언어는 경계를 접하고 있지 않은 두 항을 연결하는 유일한 관계방식이다. 이 언어적인 관계에서 타자는 동일자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동일자에게 초월적으로 머문다."(28-29)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 - 형이상학 - 는 본질적으로 담론(discours)의 질서 안에서 이뤄진다. 여기서 비로소 동일자는 헤겔에서 포기되지 않았던 자기 집으로부터 나온다. 이 질서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B장, "분리와 담론"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두 항의 관계가 전체를 형성하지 않는 그런 관계는 존재의 일반 경제 안에서만 나에서 타자에로 가는 것으로, 대면(face à face)으로서, 오성이 종합하는 활동이 다양한 항들 사이에 세우는 거리에 환원되지 않는 심연에서 그려지는 거리를 그리는 것으로서 산출되어질 수 있다.... 자아는 동일자와 타자가 한 사유 안에서 서
로를 반사할 수 있는 우연적인 형성물이 아니다. 한 존재자 안에서 타자성이 산출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유"가, 하나의 내가
있어야 한다. 관계의 불가가역성은 그 관계의 한 항에 의해 그 관계가 완성된 이후에만, 그리고 이 거리를 다 설렵한 이후에만 산출될 수 있다."(29)
"다 설렵한 이후에만(après le parcours de cette distance)", 다시 말해 우리가 직접 다 껶고난 이후에만 형이상학적인 관계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타자성은 나(moi)로부터만 가능하다"(29)는 것을 의미한다. 사후작용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무한과 유한"의 관계에서 보다 자세히 볼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전개될 나와 타자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담론, 또 전체성을 구성하는 것을 방해하는 나와 타인의 근본적인 분리는 "나의 이기주의를 포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담화 안에서 이 나의 이기주의에 대한 타인의 권리(droit)를 인정하는 데에 있다"(29)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를 정당화하는 데 있다: "나는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 이것은 "언어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초월적인 것 앞에서 자기가 긍정되고 동시에 그것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변명론(l'apologie)에 있다는 것"(29)을 말한다. 레비나스의 윤리는 이 변명론에 의존한다.
담론의 질서 안에서 전체성과의 단절을 보는 것은 전체성과의 단절이 항들 사이의 단순한 구분에서 오는 논리적 조작으로서의 사유의 작동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사유는, 마치 대상처럼 타자와 함께 전체를 구성하는 대신에, 말을 하는 데에서 유지된다"(30)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에 레비나스는 아주 낡은 언어를 불러온다. 종교(religare). Lucrère로부터 유래하는 "relier, 연결하다"로부터 오는(Cicéron을 따르는 어원에 비해 자주 의심되는 종교하는 말의 기원) 종교는 "전체성을 구성함이 없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관계(lien)",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지시한다. 담론의 질서 안에서만 도입되어질 수 있는 절대적인 타자에 대한 주장은 결국 역사는 동일자와 타자를 전체화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운명, 존재의 역사, 그것의 운명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절대적인 타자는 이 역사 안에서, 즉 동일자의 동일화의 운동인 역사 혹은 체계 안에 자신의 초월성을 보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동일자의 동일화의 운동인 "역사 안에서 거부되는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생각한 것처럼 내가 아니라, 그것은 타자"(30)라고 말한다. 이것은 서문에서(61년 서문) 레비나스가 이 책이 주체의 주체성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무한의 이념에 근거한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체의 비밀에 의해서 깨지는 역사와 그 비밀 안에 간직한 타자의 타자성에 대해서 이어서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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