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성과 무한 강독

1.B. 분리와 담론 (2)

aurorepark 2011. 4. 10. 14:41

1부의 B장의 1절과 2절에 이어 여기서 3절, 담론, 4절, 수사학과 정의 5절, 담론과 윤리, 6절, 형이상학과 인간, 7, 대면, 환원불가능한 관계(pp. 59-80)를 함께 읽는다. 앞의 두 장에서 무한의 이념과 연관해서 분리와 진리의 관계에 대해서 말했다면 오늘 읽은 부분에서 레비나스는 분리된 존재가 타자와 관계맺는 고유한 방식, 즉 언어적 관계인 담론(discours)에 대해서 그리고 얼굴의 표현으로부터 발생하는 언어의 초월성과 진리에 대해서 말한다. 레비나스가 "discours"라고 부르는 것은 주제화(thématisation)로서 이성의 혼잣말(monologue)과 구분되는 대면한 나와 타인의 소통(communication)으로서 그로부터 윤리적 관계가 밝혀진다. 레비나스의 언어에 대한 관심과 접근은 아주 일찍부터 시작된다. 1949년 "말들의 초월성"(La transcendance des mots, in Hors sujet)에서 시작해서 언어의 초월성에 대한 관심은 61년 <전체성과 무한>에서 그 고유한 형태가 발견되며, 63년 "의미작용과 의미", "타자의 흔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접근은 65년"수수께끼와 현상"으로부터 말하기(Dire)-말해진 것(dit)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공식화되어 74년 <존재와 다르게>에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레비나스의 관심은 그 기원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후설이 논리연구에서부터 다루는 의미론에 대한 읽기와 비판으로부터 나온다. 다시 말해, 현상-학(phénoméno-logie)의 현상과 그 현상의 로고스(logos), 언어, 논리를 문제 삼는다.


<전체성과 무한>에서 개진되는 윤리, 다시 말해 "타인에 의해 나를 문제 삼게되고" 그로부터 타인에게 대답해야 하는 주체의 책임의 윤리는 초월성에 대한 질문 가운데서 분리된 두 항 사이의 관계로서 언어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그 의미를 발견한다. 다시 말해 언어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관계, 즉 초월성에의 접근을 규정한다.   


1. 대면


오늘 우리가 읽은 몇몇 절에서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을 이끄는 윤리적인 관계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형태를 제시한다. 그것은 우선 동등하지 않은 나와 타인의 대면(face-à-face)의 관계이다. 나와 타인의 동동하지 않음(l'inégalité), 이것은 레비나스가 "환원불가능한 관계"라고 말하듯, 그의 윤리와 그의 주체의 주체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타인은  말하자면 나보다 신에 더 가깝거나, 타인은 나보다 높거나 낮다. 다시 말해 나와 타자는 같은 유에 속한  동등한 개인들이 아니다. 그래서 레비나스에게 "모든 다른이들과 같은 나", 혹은 "타자, 그것은 나다" 라는 식의 공식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레비나스에게 대면(face-à-face)은, 앞서서도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관계에서 "끔찍한,  그런데 공포가 아닌" 관계로 어떤 중간 매개 없이 -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신도, 가치도, 본성도 없다"(블랑쇼, <무한한 대담>(L'entretien infini), 84) -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두 사람 사이의 호혜적인 상호관계나, 동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들 사이의 계약 혹은 규범적 관계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가 말하는 윤리 자체이다. 그가 말하는 윤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공동체의 도덕적 규범도 어떤 집단을 이끄는 원리, 혹은 예의 범절도 아니다.  그것은 레비나스에게 대답하는 주체로서의 주체의 주체성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나와 타자 사이의 비대칭성은 어떤 변증법도, 어떤 헤겔적인 경험도, 어떤 종류의 공통된 나눔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경우 윤리적 관계는 어떤 정치적인 것에 앞선다는 말이기도 하다. "듀오에티카"라고 불릴 수 있는 이런 관계 안의  주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거울 앞에 선 반성하는 주체도, 나란히 어깨를 맞댄 하이데거의 공존재도, 또 세계 안의 주체도 -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그는 세계를 발명하는 주체임에는 틀림없다 - , 또 타자와 하나를 꿈구는 사랑의 공동체의 주체도, 부버의 나-너의 상호적인 관계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또한 칸트에서처럼 자기 합목적인 권리(droit)를 가진 인격(personne)으로서의 법적 주체도 아니다. <전체성과 무한>의 독서를 시작하면서 말한 것처럼 레비나스에게 사회의 기원은 홉스적 자연상태의 폭력에서 법적 상태로의 이행에 자리하지 않는다. 칸트가 말하는 영구 평화의 상태도 이러한 국제적인 법적 공동체를 벗어나지 않는다: "순수한 자연 상태의 인간은 이 상태 그 자체로 인해 위협받는다. ...이 때에 선택은 법적인 공동체에 참여하거나, 이웃으로 피신하는 것이다"(.<영구 평화론>, 2부, 첫 페이지 주 1). 한 인간에 대면한 한 인간의 관계는 블랑쇼가 <무한한 대담>에서 말하듯 "죽이거나 말을 하거나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86). 블랑쇼는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대면의 순간에, 오르페우스가 유리디스를 보기 위해 말하기를 그치고 돌아서는 순간, 그의 시선은 죽음을 가져오는 폭력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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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미 읽은 부분에서(A장의 마지막절에서 앞으로 올 "분리와 담론"을 예비하면서) 레비나스는 이미 담론의 지위를 정확히 그리고 아주 간략하게 제시한 바 있다. 다시 한 번 읽는다: "담론 안에서 타인에 접근하는 것, 그것은 사유가 타자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을 매 순간 넘치는 그의 표현을 환대하는 것(accueillir)이다. 그래서 그것은 나의 용량을 넘어서 타인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recevoir) 이다. 이것은 정확히 무한의 이념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과의 관계 혹은 담론은 비-알레르기적 관계, 다시 말해 윤리적 관계이다. 그런데 이 환대된 담론은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산파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오며, 나를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이끈다.  이 비-폭력적인 전이 안에서 얼굴의 현현 그 자체가 산출된다. 지성에 대한 분석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을 통해서만 들어오는 절대적으로 외적인 능동지성을 발견하며, 이것은 그런데 이성의 활동을 저해함이 없이, 이미 산파술을 스승의 전이적인 활동으로 대체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포기됨이 없이 받아들임 그 자체로부터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단락을 다시 읽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읽을 부분은 위의 주장에 대한 첫 번째 전개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의 글쓰기의 방식은 한 토대 위에 견고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반복과 회귀의 나선형의 구조를 가진다.  일단 추상적인 주장을 제시하고 이어서 한번 설명을 제시하고, 이어서 다시 그 주체로 돌아가서 보다 구체적인 전개를 제시한다. 매번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여러번 읽게 된다는 말이다.


2. 담론 - 관계 아닌 관계


- "담론 안에서 타인에 접근하는 것 그것은 사유가 타자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을 매 순간 넘치는 그의 표현을 환대하는 것(accueillir)이다. 그래서 그것은 나의 용량을 넘어서 타인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recevoir) 이다. 이것은 정확히 무한의 이념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인식의 문제로, 어떻게 우리는 타인에 접근하는지, 어떻게 타인을 인식하는가에 대한 방법에 대한 질문이다. 레비나스는 그것은 "담론 안에서"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언어를 통해서, 더 정확히 '말'을 통해서 타인에 접근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이고, 그 이전에 타인에 접근하는 방식과 무엇이 다른지 우리가 현재 읽는 절들 안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자.


이 절들을 읽지 전에, 페이지를 건너뛰어서 <전체성과 무한>의 결론 부분 8절 "주체성"의 한 구절을 일단 읽어보자(결론으로 건너뛰는 조바심을 용서하시길...): "존재는 외재성이며, 이 외재성은  분리된 존재에 대해서 진리 안에서, 즉 주체적인 장 안에서 산출된다. 분리는 긍정적으로 자기와 관계하고, 자기에서 유지되는 한 존재의 내재성으로 완성된다.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향유 혹은 행복으로 구체적으로 구성되고 완성되는 자기에의 참조. 본질적인 충분성, 그것은 자신을 만개하면서 지식 안에서 자신의 기원까지 거머진다. 이 충분성(suffisance)에 대한 비판(자신의 고유한 조건에 대한 재파악)에서 자기의 궁극적인 본질이 밝혀진다. (줄바꿈) 유한자가 무한의 이념을 가지는 - 근본적인 분리와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가 산출되는 -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우리는 지향성의 개념, 즉  "...에 대한 의식"을 보존한다. 그것은 말에 대한 주의(attention) 혹은 얼굴을 받아들임, 즉 주제화(thématisation)가 아닌 환대(hospitalité)이다. 자기 의식은 내가 타자에 대해 가지는 형이상학적 의식에 대한 변증적인 반박이 아니다. 의식의 자기에의 관계는 더더욱 자기에 대한 표상이 아니다. 자기에 대한 모든 시각에 앞서서, 의식은 자기를 유지하면서(se tenant) 완성된다; 의식은 자기 안에 (육)체(corps)처럼  자기 안에 뿌리를 내리고(s'implante en soi) 의식은 자신의 내재성 안에, 자기집 안에서 자신을 유지한다. 의식은 이렇게 자신이 분리되어 나온 존재의 부정에 이름이 없이 긍정적으로 분리를 완성한다. 의식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주체는 주인(hôte)이다."(334)


우리는 이 <전체성과 무한>을 읽으면서 이 글을 이끄는 두 인도의 끈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에 했다. 하나는 "주체의 주체성의 방어"(11)이며, 다른 하나는 "객관성과 다른 초월성"( 41)즉 지향성의 초월성과 다른 초월성을 인도의 끈으로 모든 분석을 이끄는 것이었다. 레비나스가 현상학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상학자로 머문다면, 그 이유는 그가 현상학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부터 현상학에 가하는 변형 - 너머, 다르게 - 으로부터일 것이다: "모든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현상학의 근본적인 지향성의 원리는 일련의 변형을 겪으면서 레비나스 안에서 보존된다. 모든 의식은 '말'에 대한, 특히 타자의 말에 대한 주의 - intention 주체의 의도를 attention 주체의 타자에 대한 주의로 -, 그리고 그로부터 '들음'(entendre)으로, 그 들음은 결국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accueillir, recevoir)으로 - 의미증여(Sinngebung)가 아닌 얼굴의 증여(donation) 그 자체의 수용으로 -, 그 안에서 구성을 통한 대상의 주제화, 즉 말해진 것(le dit, l'énooncé, 진술)의 객관화는 주체가 다 자신 안에 담을 수 없는, 주체의 그릇보다 더 큰 것을 자신 안에 간직하게되는 진기한, 레비나스가 트로마티즘적 상황이라고 부르는 - 무한의 이념을 유한 안에 간직하는 - 상황이 발생한다. 이런 주체, 타자의 초월성을 받아들이는, 접대하는, 환대하는 주인이 된다. 주체의 죽음을 말하는 시대에 주체를 보존해야 한다고 레비나스가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환대하는 주인으로서의 주체이다. 집에 손님을 접대해 보다 보면 누구나 이르는 지점은 주인은 어느 순간 손님의 인질이되고 손님은 집에 주인이 되는 상황이 생겨난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레비나스는 "주체는 인질(otage)"(AE, 282)이라고 말한다. 주인에서 인질로의 이행, 격변화는 타인과의 대면의 관계, 언어적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의미에서 생겨난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형성된 언어의 구조 안에서, 다시 말해 세계 안에서 타인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발생의 기원의 순간에, 상상해 보건데, 처음으로 인간이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상황에, 세계 이전에 놓여있다.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관계의 양태로서 "진리의 관계는 거리를 가로지르면서 그 거리를 가로지르지 않는다. 즉 그것은 전체성을 형성하지 않는다. 즉 동일자는 타자와 관계 하면서 타자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언어에 의존한다: 관계 안에서 두 항은 그 관계로부터 벗어나며(s'absolvent), 그 관계 안에서 절대로 머문다. 이런 절대화가 없이는 형이상학의 절대적인 거리는 단지 환상일 것이다"(59) 레비나스는 이런 관계를 "관계 아닌 관계"(relation sans relation)(79)로서 종교적인 관계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공통된 개념에 이르지 않는, 어떤 전체성에도 이르지 않는 여기-아래(ici-bas)의 존재와 초월적(transcendant) 존재 사이의 관계 - 관계 아닌 관계 - 에 종교하는 말을 보존한다"(78-79). 여기서 초월적 존재는, 마치 플라톤에서 존재와의 관계에서 선(le Bien)의 초월성처럼, 나의 생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나의 생각을 항상 넘치는 무한성으로서 타인의 초월성을 말한다.  그런데 전체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아의 무능이 아니라, 바로 이 타인의 초월성, 즉 무한성에서 유래한다. 다른 글에서 한번 인용한 적이 있는 자고 있는 알베르틴을 바라보는 프루스트의 화자가 그녀의 얼굴에서 느끼는 무한성에 대한 기술은 레비나스보다 타인의 무한성을 더 잘 보여준다. 레비나스가 사용하는 종교(religion, religio = relier, 연결하다)는 이런 의미에서 실증종교의 종교와 구분되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레비나스의 초월성 혹은 그가 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의 세속화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초월적인 것(le transcendant)을 이방인, 가난한 자로서 정립하는 것은 인간과 사물들에 대한 무지 안에서 완성되는 신과의 형이상학적 관계를 금지하는 것이다. 신적인 것의 영역은 인간의 얼굴로부터 열린다. 초월적인 것과의 관계는 사회적인 관계"(76)에 의존한다. 레비나스에서 초월성의 양태로서 윤리는 사크레(sacré, heilig, 만질수 없는 것, 신성(numen, divin), 금지, 우상)의 세속화로부터 생각해야 한다. 사크레의 초월성에 반해 성성(sainteté)의 초월성은 분리(saint의 희브리어 kadosh는 어원적으로 분리를 의미한다), 무신론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그로 "향하는 자의 눈을 불사르지 않는다"(75). 반대로 그에게 말을 한다.  


반면에 진리를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가 아닌 대상적 관계로서 실재에 접근하는 것은  이런 초월적 관계를 보증하지 않는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예를 들어, "진리를 탈은폐로 인정하는 것은 그것을 탈은폐하는 자의 지평에서 진리를 관계시키는 것이다."(59) 탈은폐된 존재는 언제나 우리와의 관계, 즉, 세계의 지평 하에서거나, 어떤 기획(projet)과의 관계에서이지, 자기 자신에 의해서(kath'auto, par soi-même)가 아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인식, 즉 타자 존재에 대한 순수한 경험을 위해서는 그 자체로서의 타자 존재를 유지해야 한다"(60).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하이데거의 진리에 개념에 대한 반박은 그를  포함해서, 현대 철학 일반에 대한 반박으로 다른 곳에서 레비나스는 "현대 철학의 반플라톤주의적 경향"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말해지지 않은 것(non-dit)의 부재 혹은 신비로부터 밝혀진다. 시인이나 철학자는 이 말해지지 않은 것을 다 말함이 없이 말로 이끄는 자이다. 역사 안에서 존재가 받아들였던 혹은 받아들이는 모든 표현은 참일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존재의 역사적인 표현과 분리되지 않으며, 이러한 표현 없이는 사유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헤겔적 기원을 가지든, 베르그손적 기원을 가지든, 혹은 현상학적인 기원을 가지든 현대 철학은 한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플라톤에 대립된다: 알려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제시하는 생성 밖에서 생각되어질 수 없다.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의미 그 자체(la signifiacation en soi) 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작용과 의미에 대하여" in <다른 인간의 인간주의>, p. 30-31). 다시 말해, 의미는 그것에 접근과 분리되지 않는다. 즉 접근은 의미 그 자체의 부분을 형성한다. 우리는 절대로 오르기 위해 사용한 발판을 제거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서 지성과 알려질 수 있는 것의 세계 내의 공속성은 진리와 그 접근인 방법이 분리되지 않는 후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대상에의 접근은 대상의 존재의 부분을 이룬다"(EDE, 115). 현상의 증여(donation)와 그것을 지향하는 행위 사이에 동등성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아무 것도 이것 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이것을 회피하지 않으며,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심지어 그것이 실수이든, 환상이든, 모두가 증여의 방식으로 접근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현상학의 증여와 지향성에 대한 질문이면서 더 나아가 알려질 수 있는 것의 가능성의 조건, 즉 지성체(l'intelligibilité), 혹은 현상의 현상성, quomodo, "어떻게"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대상이 인식하는 자의 기획이나 일과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객관적인 인식은 항상 해석해야 할 존재와의 관계에 놓인다는 것을 말한다. 레비나스가 철학의 해석학적 전통과의 단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확히 말해진다. 이러한 전통에서 어떤 것의 의미는 항상 "저것"으로서(en tant que)의 "이것"에 의해 접근하는 것이다. 세계의 결핍으로서의 동물과 인간을 탁월하게 구분하는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이해하는 이러한 방식은 그의 <존재와 시간>의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에 의해서만, 존재자의 세계의 지평에서만 이해되는 해석학적 존재론을 지시한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안다는 것은 역사적인 것(l'historique, le Geschick de l'être)을 의미한다. 어떤 사실은 이미 일어난 것이고 이미 초월된 것이다. 역사적인 것은 과거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과 과거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주제(thème)로서 규정된다. 이것들이 주제화, 즉 대상화된다는 것은 정확히 그것들이 [스스로]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것은 영원히 자신의 현전의 부재로서 드러나며, 다시 말해, 자신의 현시 뒤로 사라진다. 그래서 역사적인 것의 나타남은 항상 애매하고, 그것의 기원과 그것의 원리는 다른 곳에 머문다. 이것은 우리가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 - "실재 없는 실재" - 이다"(60).  


반면에 자기 자신에 의한(kath'auto, par soi-même) 존재의 현시는 해석의 주제로서 그것을 파악하는 시선에서 탈은폐되거나 발견되는 존재와 관계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의한 존재의 현시(manifestation)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취하는 모든 입장과 독립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지(se dire)고, 표현되는(s'exprimer) 데에 있으며, 모든 가시적인 대상들의 조건들과 달리 여기서 존재는 다른 존재의 빛 안에 놓이지 않으며, 현시 안에서 나타난다(se présenter)"(61). 그래서 이러한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경험은 탈은폐(dévoilement)가 아니라, 계시(révélation)"(61)라고 말해진다. 표현된 것과 표현하는 것의 일치인 이런 현시는 빛인 형상 너머의 얼굴의 현시이며, 표현으로서의 "얼굴은 말을 한다".  그래서 이런 얼굴의 현시는 이미 누군가에게 말을 건내는 담론이며, 특히 부름, 호소이며, 이런 방식으로 타자로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동일자에 정합한 형식을 파괴하는 이런 방식을 레비나스는 "의미를 가진다"(61)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얼굴의 표현은 현상학의 "원리들 중의 원리"(<이념들 I >, § 24)인 모든 직관적인 증여와 구분된다. 왜냐하면 의미는 [의식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의미는 이념적 본질도, 지적 직관에 주어진 관계도 아니며, 그것은 더더욱 눈에 제시된 감각과의 유비도 아니라, 탁월한 외재성의 현전,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론은 단지 직관이나 사유의 변형이 아니라, 외적 존재와의 본래적인 관계로, 의미는 이념적인 본질로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현전에 의해서 말해지고 가르쳐진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3. 배움으로서의 윤리 - 놀라움에서 트로마티즘으로


- "그런데 이것은 또한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과의 관계 혹은 담론은 비-알레르기적 관계, 다시 말해 윤리적 관계이다. 그런데 이 환대된 담론은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산파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오며, 나를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이끈다."


배움이란 말은 이후의 그의 철학에서 그 의미를 변형함이 없이 "깨어남" 혹은 "각성"이라는 개념으로 변한다. 가르침과 배움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식으로서의 철학 그 자체의 활동을 의미하며, 철학의 기원에 대한 질문과 떨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철학개론 시간의 서양 철학의 기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무지에 대한 자각으로서, 재인으로서의 "사물들이 있는 바의 것이라는 사실의 발견에 대한 놀라움"(형이상학, A, 982 a 13)의 감정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식(sophie)에 대한 사랑(philo)으로서 철학에 대한 정의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철학의 기원은 인간들 사이의 해결하기 힘든, 이르지 못하는 갈등을 다루는 필요가 아니라, 지식 그 자체에 놓인다. 그리고 여기에 서양 이성의 기원이 놓인다.    


서양의 사유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회의주의에 대한 지난한 투쟁이었다면, 서양의 주된 철학적 전통 안에서 느끼는 자아는 이성을 근거짓지 못한다. 반대로 이 자아는 이성에 의해서 규정된다. 일인칭 <나>의 이성이 말을 건네는 상대는 타자가 아니라, 독백 안에 갇혀있다. 하나의 인격은 칸트에서처럼 보편적이 됨으로써만 진정한 인격이 되며, 분리된 생각하는 자는 헤겔에서처럼 그들 각각의 단독적이고 개별적인 행위가 하나이며 보편적인 담론의 계기인 한에서만 이성적일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하는 자를 사유의 한 계기로 만드는 것은 개념의 일치 안에서 언어의 계시적인 기능을 제한하지 않는가? 이 경우 언어의 기능은 이러한 일치를 방해하는 "타자"를 제거하는데 이르지 않는가? 우리는 이로부터 "아주 이상한 결말에 이른다: "언어는 동일자와의 일치를 놓으면서 타자를 제거하는 데 있다!"(70) 그런데 표현으로서의 언어의 기능은 정확히 언어가 말을 건네는 타자를, 언어가 부르거나(interpelle) 간청하는(invoque) 타자를 유지"하는 데 있지 않은가? 여기서 "불려진 타자는 물론 표상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일반화를 위해 준비 중인 개별자도 아니다. 언어는 보편성과 일반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는 대담자들, 다수(pluralité)를 전제한다. "그들의 교환(commerce)", 주제화가 아닌 소통comunication)은 "하나에 의한 다른 것의 표상도, 언어라는 공통의 지평에서 보편성의 참여도 아니다. 그들의 교환은 윤리이다"(70). 레비나스가 불러내는 플라톤은 진리의 객관적인 질서와 살아있는 존재 안의(dans) 이성을 구분할 줄 알았다. 그에 의하면 "살아있는 담론"은 "자기 자신을 방어할 줄 알며, ... 그가 말을 건네야 하는 자와 그가 침묵해야 할 것을 아는 담론"(Phèdre, 276 a)으로, 이미 마련된 내적 논리의 전개가 아니라, 생각하는 자들의 자유로운 투쟁 안에서 진리를 구성하는 데에 있다. 이렇게 "언어의 관계는 초월성과 근본적인 분리와 담화자들의 이방성, 나에 대한 타자의 계시(révélation)를 전제"(70)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서로 말을 하는 상황은 관계의 항들 사이의 공동의 것의 결핍을, 공통의 것은 구성되어져야 할 것으로 남는다. 언어는 이렇게 초월성 안에 자리하며, 담론은 절대적인 낯선 것에 대한 경험이며, 이것을 "인식"이라고, 이것을 "경험"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오랜 철학의 전통에서 "있는 바의 것임"을 깨닫는 "철학적 놀라움이 아닌 트로마티즘"(71)이다.


사실 진정으로 배운다는 것은 내 안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나를 이끄는데 있지 않은가? "절대적으로 낯선 것만이 나를 가르칠 수 있다. ... 타인의 이방성, 그의 자유 그 자체! 이며, 자유로운 존재만이 서로에 대해 이방인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공통된" 이 자유만이 그들을 분리시킨다"(71) 여기서 언어는 한 존재와의 관계 안에 자리한다. 그런데 이 존재는 나와 상관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상관해서 나와 관계 맺는다. "나와 상관해서"(par rapport à moi) , 다시 말해 나의 세계와 나의 기준과 나의 측정의 자에 의해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와 상관해서"(par rapport à soi), 다시 말해 자기에 의해(kath'aoyto, par soi), 존재자들 사이의 공통된 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속성 너머에 존재한다. 이런 존재는 은유적으로 완전히 벌거벗었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다. 장식, 즉 빛에 의한 형상의 옷을 벗은 벌거벗은 존재는 그래서 한 존재의 (합)목적성(finalité) 이상이거나 이하이다. 그 벌거벗음 그것은 그 자체에 의해 비참이다. 과학이나 예술에 의해 미가 벌거벗은 세계 안에 사물의 합목적성을 도입하고, 어떤 내적 합목적성을 탈은패한다고 할 때, 그것은 지각을 초월해서 의미의 옷을 입히는 것이다. 반면에 언어의 작업은 이와는 다르다: 그것은 모든 형상을 벗어버린 벌거벗음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빛을 받아 의미를 획득하기 이전에 스스로 의미를 가지는 것과 관계하는 것이다. 나의 힘, 나의 눈, 빛, 나의 지평 아래의 나의 지각에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체계와 상관없이, 자기에 의해 존재하며, 나에게로 향한다. 그래서 "형상에 의해 밝혀진 사물의 탈은폐와 나로 향하는 얼굴의 벌거벗음 사이의 차이는 단지 "인식"의 양태의 차이가 아니다. 인식의 대상이 아닌 얼굴의 초월성은 그것이 들어가는 이 세계의 부재이며, 그의 이방성, 그의 벌거벗음, 그의 프롤레타리아의 조건이다"(73).    


4. 관대  - 타인의 인정


- "이 비-폭력적인 전이 안에서 얼굴의 현현 그 자체가 산출된다. 지성에 대한 분석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을 통해서만 들어오는 절대적으로 외적인 능동지성을 발견하며, 이것은 그런데 이성의 활동을 저해함이 없이, 이미 산파술을 스승의 전이적인 활동으로 대체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포기됨이 없이 받아들임 그 자체로부터 발견되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을 하면서 한가지를 배운다. 그것은 내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만나는 경험이다. 그것은 사르트르의 삼켜버릴 듯한 시선이 관대함으로 변하는 진기한 경험으로, 이 세상에서 만나는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이다. 세상에는 사르트르의 시선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이 박탈된 자의 애원하고 간청하고 요구하는 박해자 앞의 시선도 우리는 안다. 이런 시선은 얼굴의 벌거벗음으로, 이 "벌거벗음은 궁핍"(73)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래서 "타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배고픔을 인정하는 것이며, 타자를 인정하는것 - 그것은 주는것"(73)이다. 그런데 이 줌은 우리가 "분(vous)"이라고 부르는 높은 곳에 있는 자로, 노예가 아닌 "주인에게, 영주에게 주는 것"(73)이다. 개념의 일반성(généralité)에서 관대함(générocité)으로의 이행은 얼굴의 대면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얼굴의 현전은 나의 향유를 문제 안에 놓는다. 레비나스가 자신의 철학의 문제가 주체의 문제라고 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 전이 안에서 발생하는 주체의 문제이다. "모든 일반화의 문제는 보통 객관화 혹은 대상화의 문제로 정립된다. 그런데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즉 분리된 이념의 문제는 구성된 것으로서 객관성 혹은 대상성을 전제할 수 없다: 대상 일반(objet général)은 감각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일반성과 이념성의 의도 안에서 사유된 것이다"(74). 이 때에 레비나스는 이 이념성과 일반성의 의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우리는 여기서 이념성의 의도를 고독한 주체가 지각된 대상을 개념으로 이행시키면서 같음 안에서 자신을 동일화하고 이념들의 초월적 세계로 향하는 주제화로서가 아니라,  타인으로 향해 가는 주체의 관대함과 상관적인 것으로 말해야 한다. 이기적이고 고독한 향유를 너머 이 자아가 이룬 세계의 자산의 공동체를 파열시키는 데있다. 따라서 타인의 인정한다는 것은 자아의 소유와 표상의 세계를 거쳐서 인정에 이르며, 줌(le don)에 의해 공동체와 보편성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언어가 개인에서 일반으로의 이행이라면, 언어가 나의 것들을 타인에게 제공하는 것이라면, 이 언어는 보편적이다. 말하기 - 본질적으로 무엇에 대해서 말함과 누구에게 말함을 지시하는 말하기 - 는 세계를 공통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공통된 장소를 창조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자주 사용하는 하나의 관용구로 "빈손으로 타인에게 접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일종의 말하는 방식으로 누군가가 나의 집의 문을 두드리고 무엇인가를 말할 때, 요구할 때, 비스듬히 열린 문턱에 선 나는 그 빈손을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담론은 사물들과 타자들이 부재한 두 존재 사이의 정념적인 대립이 아니며, 담론은 그래서 사랑이 아니다"(74)라고 말한다. 이방인, 과부, 고아의 시선을 나는 나의 것을 주면서 혹은 주기를 거부하면서 그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반드시 사물들을 통해서만 - 우선 먹을 것을 - 주거나 거부한다. 거부도, "나의 집 창문에서 타인을 목조르는 나의 거부"(루소)도 여전히 내가 대답해야하는 부름의 앞섬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물들은 하이데거가 생각하듯이 "장소들의 토대, 지상에서의 현전을 구성하는(사방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관계들의 정수가 아니다. 나의 타자의 환대 안에서 사물들은 우리가 건립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는 것으로 도래한다" (75).


레비나스의 환대로서의 윤리는 서양 철학과의 하나의 단절을 가져온다. 산파로서의 스승의 간계는 <전체성과 무한> 안에서 아무 것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 동일한 것만을 드러낸다. 그가 말하는 환대는 나 이상의 것, 다른 것을 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향성은 말에 대한 주의 혹은 얼굴의 받아들임, 즉 주제화가 아닌 환대이다". 이렇게 언어 안에서 타인에 정면으로 접근하는 것, 그것을 레비나스는 "정의"라고, "나의 자유를 문제 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C 장 "진리와 정의"에서 우리는 정의와 자유의 문제를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