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자와 타자>라는 제목 아래 놓인 네 개의 장, A. 형이상학과 초월성, B. 분리와 담론, C. 진리와 정의, 그리고 D. 분리와 절대가 놓여있다. 이번에 읽을 B. 분리와 담론은(p. 45-80) 7개의 절로 - 1. 무신론 혹은 의지, 2. 진리,
3. 담론, 4. 수사학과 불의, 5. 담론과 윤리, 6. 형이상학과 인간적인 것, 7. 대면, 환원불가능한 관계 - 나눠진다.
7개의 절을 둘로 나눠 읽는다. 1절과 2절을 함께, 그리고 이어서 나머지를 함께 읽는다. 앞 부분은 분리에 대한 것이고 뒷
부분은 담론과 관계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1부 <동일자와 타자>는 <전체성과 무한>을 이끄는 전제들에
대한 추상적인 전개들이다. B 장에서 레비나스는 그의 형이상학과 초월성의 두 원리인 분리와 담론을 다룬다. 분리는 동일자의 자기동일화의 운동으로 지시하며, 이로부터 동일자와 타자의 분리가 완성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담론은
분리된 동일자가 타인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분리된 타자와 관계하는 방식으로 동일자가 타자 안에서 깨어나서 자기동일성을 문제삼는
윤리적 과정을 의미한다. 이 담론은 <존재와 다르게>에서 "회귀"(récurrence, 반복적인 돌아감)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이 두 과정은 결국 자아의 자기동일화의 과정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의 두 번의 태어남이 있다는 말이다. 한 번은 존재 안에서 존재자의 자기를 세움, 즉
자리잡기(hypostase)의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또 다른 존재자,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대답하는 주체로,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단독적 주체로 자기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나의 자기 동일화의 운동이다. 레비나스가 <시간과 타자>에서
말하듯, 자기동일화의 운동은 항상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로 돌아오는 운동을 포함한다. 이로부터 자기에 자기에 대한 하나의
운동, 자기동일화의 운동이 생겨난다. 자기동일화는 말 그대로 데카르트가 묻듯이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데카르트가 또 다시
묻듯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레비나스에게,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구원의 문제이다. 우리는 현재 이 운동에 처음에 자리한다. 처음은 분리로부터 시작한다.
1. 무신론 혹은 의지
첫
문장은 "무한의 이념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한 동일자의 분리를 전제한다"(45)라고 시작한다. 그런데 이 대립은 정립과 반정립의
서로를 밀쳐내면서 서로를 부르는, 결국 종합적인 하나의 시선에 의해서 감싸지는 변증적 대립이 아니다. 이러한 대립은 이미
전체성으로 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을 자신 안에 포함한다. 따라서 분리는 자신의 이념을 넘어서는 그래서 이 탁월한 비정합적인 이념 안에
거주하는 나와 분리된 무한의 이념의 산출에 필연적이라면, 이 분리는 내 안에서(en Moi) 완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관계가 다만 상호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또 다만 논리적인 반박이 아니라면, 나의 타자에 대한 분리는 어떤 긍정적인 운동으로부터 유래해야 한다. 이로부터 레비나스는 "상호관계는 초월성을 위한 충분한 범주가 아니다"
라고 강조한다. 앞서 읽은 글에서도 본 것처럼 레비나스에게는 상호관계는 이차적인 관계이다. 정치가 윤리에 다음에 오듯이 근원적인
관계는 항상 방향성이 정해져 있다. 그에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만지고 만져지는
이상한 얽힘도 그에게는 없다. 방향에는 항상 방향성이 존재하면, 출발에는 출발하는 자의 순서가 정해진다. 레비나스의 책임의
비대칭적 관계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방향성 안에 놓여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에서 발견된다.
이 분리의 운동은 "내적 삶(la vie intérieure) 즉 정신의 삶(psychisme)에서 산출된다"(46). 이 정신의 삶, 혹은 의식의 삶, 결국 사유는 존재 안에서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며, 이 사유는 다만 존재를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존재하는 방식 (une manière d'être), 전체성에 저항이라고 말해진다. 이 방식은 근본적인 분리의 사실 자체로 전체성에 저항하는 한 존재자의 출현을 전제한다. 레비나스는 데카르트의 제 3 성찰에서 이러한 분리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데카르트의 용어에 의하면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우리가 우리 안에 그에 대해서 가지는 이념을 무한히 넘어서는 존재로 코기토의 명증성을 전제한다. 그 반대가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 "코기토 안에서 발견되는 형이상학적인 관계의 발견은 시간적으로 철학자의 두 번째 절차에서만 구성된다"(46). 다시 말해 나중에 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인 질서와 다른 시간적인 질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절차에는 여러 계기들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중의 분리의 계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은 단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사후적으로(après coup)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시간적으로, 이 존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을 무와 혼돈해서는 안된다. 이 존재는 철학자의 코기토를 자신과의 거리에서 유지한다. 비록 자신의 원인이고, 그 자신보다 더 오래된 것일지라도, 여전히 올 것으로 머문다: "마치 원인이 결과 다음에 오는 것처럼 존재의 원인은 그것의 결과에 의해 사유되거나 알려진다." "마치...인 것처럼"(comme si, als ob), 이 유비, 이 유사성(semblance)은 말 그대로 착각(illusiion) 혹은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착각, 환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부조리한 "앞선 것의 나중 옴(postériorité de l'antérieur)"(47)이라는 "긍정적인 사건"을 산출한다. 이러한 것은 사유에 의해 혹은 기억에 의해서 산출된다. 레비나스는 여기서 "이 "믿을 수 없는" 기억 혹은 사유의 현상은 존재 안에서 혁명으로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진술은 아주 강한 표현이다. "존재 안에서 혁명"이라고 말하는 이 사유의 혁명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주 서둘러서 우리는 이것이 "존재와 다르게 혹은 존재의 본질을 넘어서" 나아가는 사유의 운동, 전체성에 균열을 가져오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이다. 레비나스의 사유의 운동은 이것을 그린다. 우리는 이 운동의 아주 처음에 자리한다. 레비나스는 "이론적인 사유는 - 그런데 이 사유를 지지하는 가장 깊은 어떤 구조, 즉 정신의 삶(psychisme) 덕분에, 내적 삶 덕분에 - 분리를 산출한다"고 말한다. 이 분리는 사유 안에서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유에 의해서 산출된다고 강조한다. "나중 혹은 결과는 사유 안에서 앞섬 혹은 원인을 조건지운다: 앞섬은 나타나고 다만 환대된다."(47) 혁명은 그 말이 지시하듯이 흐름의 역전을 의미한다. "이 정신의 삶, 내적 삶에 의해, 한 장소 안에 존재하는 존재는 이 장소에 대해 자유롭게 머문다; 그가 자리하는 한 장소에 정립된 존재는 다른 곳에서 여기에 온 자이다; 코기토의 현재는 나중에(après coup) 자신을 넘어서는 절대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이러한 의존에도 불구하고, 혼자 자신을 유지한다. 이 분리의 운동은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한 존재자가 익명적인 존재로부터 자신을 정립하는 자기정립(hypostase), 혹은 자리잡기, 혹은 실체화 혹은 강연안이 "홀로서기"라고 옮겨주는 것이다. 이 내적인 정신의 삶이 산출하는 분리, 코기토의 공간, 그것이 비록 한 순간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이 "충만한 젊음의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의식적 존재가 무의식적이고 함축적인 것을 동반할지라도, 사람들이 이 의식의 자유가 모르는 결정론에 이미 얽혀있다고 비난할지라도, 이 무지는 사물들의 자기의 무지와 비교될 수 없는 분리로서 정신의 삶의 내면성 안에 자리한다. 이 무지, 이 착각, 혹은 환상, 이 상상의 힘이 그의 분리를 구성한다. 이 분리와 분리된 존재의 존재 방식인 향유는 이 책의 2부에서 다뤄질 것이다.
레비나스의 무한의 이념은 "마치...인 것처럼"의 유비의 형식으로, 환상의 공식으로 말해진다. 레비나스의 글 중의 출간되지 않은, 몇일 전에 전집 2권에 실려 나온 62년 Collège philosophique에서 행한 한 강연의 제목은 "은유"이다. 데리다와 리쾨르의 은유의 논의들을 예비하는 이 강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 던져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언제 논의가 닿는대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것 이외에도 레비나스가 사용하는 이 논리는 레비나스 철학의 한 핵심적인 요소를 이룬다. 74년 <의식에서 경계심으로>에서 레비나스는 한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치 ...인 것처럼(comme si)"은 "als ob"의 철학들의 불확실성 혹은 단순히 그럴듯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의 것들은 비록 그들의 경험주의적 신중함에도 불구하고 진리-결과, 객관적인 이상적인 동일성에 집착한다. 보다 일반적으로는 현전과 존재의 한 목소리(univocité), 단일성에 집착한다. 우리는 여기서 애매성(équivoque) 혹은 비-현상의, 비-표상의 수수께끼를 이해한다." 이 애매성은 이어지는 진리의 애매성과 연관된다.
이어지는 글에서 레비나스는 일인칭 나와 본질적으로 관계하는 이러한 분리된 존재의 내적인 삶은 보편의 역사와 구분된다고 말한다. 근본적인 분리로 인해 매 존재는 자신의 내면성 안에 자신의 시간을 가지며, 이 각자의 시간은 보편의 역사에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내면성의 영역 덕분에 존재자는 개념에서 파악되지 않으며, 전체화에 저항한다."(51) 무한의 이념에 필수적인 이 거부는 그런데 무한의 이념으로부터 산출되지 않는다. 그것은 분리로부터 나온다. 역사 안에 자리하지 않는 이 내적인 삶은 존재의 이해를 위해서 내면성을 희생하고 역사에 우선성을 인정하는 것과 다른 길을 제시한다: "현재의 우리의 작업은 다른 선택을 제시한다. 실재는 역사적인 객관성 안에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내적 의도로부터 출발해서 역사적인 시간의 연속성을 단절하는 비밀로부터 규정된다"(51). 다른 곳에서 "파르메네데스와와 단절"(TA, 20)이라고 불렀던 다원적인 사회는 바로 이 비밀로부터만 가능하다. "내적 삶은 실재가 다원성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방식이다"(52) 이 방식은 이 책의 2부에서 <향유>의 현상에서 보다 자세히 볼 것이다.
한 단락에서 레비나스는 아주 짧게 이 내적 시간에 대해서 말한다. 그가 <실재와 그림자>에서 "사이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간격, 혹은 <존재와 다르게>의 용어를 따르면 "일단의 시간의 길이(laps du temps)" 혹은 "언제나 toujours"의 시간, 그리고 <전체성과 무한> 여기에서 "죽은 시간(le temps mort)"(51)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순간과 관계하지 않는 순간으로부터 깊이로 열리는 시간의 통시성을 지시한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레비나스의 개념은 데카르트의 시간의 불연속성, 그의 연속적인 창조의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선택은 존재와 무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 시간, 죽음에 대한 새로운 사유로부터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존재에 참여함이 없이 자신의 실존 안에서 홀로 자신을 유지하는 이러한 분리를 레비나스는 무신론이라고 부른다: "무신론에 의해 우리는 부정에 앞선 정립, 신성의 긍정에 앞선 정립, 자아가 자신을 동일자로 자아로서 정립하는 참여와의 단절로 이해한다"(52). 여기서 우리는 신 밖에서, 자기집에 거주한다. 이렇게 자기 원인임이 없이 자신의 원인과의 관계에서 우선하는 방식,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레비나스는 데카르트를 따라서 의지라고 부른다. 이런 내적 삶은 감성(sensibilité)으로서, 향유로서, 에고이즘으로서 자신을 완성한다. 개체화의 원리는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종차에 의한 질료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가, 내적 삶, 감성, 향유에 의해서 이뤄진다: "감성은 자아의 에고이즘 그 자체를 구성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느끼는 것(le sentant)이지 느껴진 것(le senti)이 아니다"(53). 대상화할 수 없는 흐름, 생성 안에 파르메니데스의 일원론(monisme)을 파괴하는 진정한 생성의 다원성이 자리할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한 번조차도 발을 담궈 본 적이 없는 흐름, 그 느낌의 생동 안에서, 살아있는 현재의 그 삶의 생동(vivacité) 안에 감각의 단독성(la singularité de la sensation)에 의해서만 완성된다.이 부분은 진정으로 레비나스적인 철학이 가능해지는 부분을 지시한다. 우리가 "현상의 물질성"
이라고 부르는 그의 촉발(affection) 혹은 정감의 현상학의 전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의 주체가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면, 우리가 말하듯이 윤리적 주체라면, 그것은 우선 감성적 주체로 언제나 촉발될 수 있는 그런 주체이다. <존재로부터
존재자로>에서 자리잡기가 일 이 아의 익명적인 물질성으로부터 최초의 물질적 정립(분리)으로 "여기"로서의 나의 신체의
정립이라면, 이제 <전체성과 무한>에서 향유하는 주체로 다시 나타난다. 스스로 촉발될 수 없는 존재는 타자에 의해,
타인에 의해 촉발될 수가 없을 것이다.
2. 진리
이 절에 소묘되는 진리는 이어서 <1.C. 진리와 정의>에서 보다 길게 자세히 논의 될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진리의 문제는 우선 분리로부터만 가능하며, 그리고 이 분리된 존재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더 정확히 무한의 이념과의 관계에서 진리는 드러난다. 그리고 이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앞 선 절(<1.A.2. 전체성과의 단절>, p. 28)에서도 이미 언급한 것처럼 언어 안에서 완성된다. 왜냐하면 언어는 서로 인접하지 않는 두 항이 관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의 관계가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며, 하나는 다른 하나에 초월적이며, 하나의 다른 하나의 관계는 필요의 관계가 아닌 욕망의 관계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다시 욕망과 필요의 구분을 재발견한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분리와 내면성, 그리고 진리와 언어는 무한의 이념 혹은 형이상학의 범주들을 구성한다"(56-57)고 말한다. 여기서 제시하는 진리는 앞선 장의 4절 <형이상학은 존재론에 앞선다>에서 이미 행해진 후설과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의 비판에 이어서 제시되는 진리의 개념이다.
지향된 것과 주어진 것의 일치로서의 직관에서 주어지는 명증성 안에서의 진리도 존재의 사건으로서의 진리도 아닌,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진리는 빛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빛이 동반하는, 아니 빛이 드러나는 조건인 어둠과 관계한다. 말하자면 현상학의 비-현상학적인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적인 - 진리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그 빛은 어둠의 조건 없이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레비나스의 초기의 한 탁월한 논문 <실재와 그림자>를 기억한다면, 진리에 대한 레비나스의 질문은 "존재의 비-진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였다. 존재의 사건과 독립적인 이 어둠은 - 즉 단순히 빛의 이면으로서의 어둠이 아닌,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아닌 - 인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우선 분리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 - 즉 무한의 이념 - 는 분리된 존재의 독립성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리된 존재가 가지는 무한의 이념은 이 분리를 제거하지 않으며, 반대로 분리는 초월성 안에서 인증된다. "왜냐하면 동일자는 안전하게 타자에 의존하는 대신에 진리의 탐구의 불확실성과 위험 안에서만 타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분리 없이는 진리는 없을 것이고 다만 존재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54). 분리 없이는 진리가 없을 것이라는 진리는 전통적인 철학의 진리의 조건으로서 존재에의 참여의 거부로부터 진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표현에 의하면, "접선보다 더 최소한의 접촉(contact moindre que la tangence)"(54)이라고 부르는 진리의 탐구는 무지, 환상 혹은 실수의 위험 안에서도 아는 자와 알려진 자의 거리를 줄이지 않으며, 전체성에 이르지 않으며, 존재 안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며, 더더욱 진리가 동일자의 타자로의 운동일 때, 동일자는 타자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취하지 않는다. 이러한 진리 개념은 오랜 철학의 전통인 존재에의 향수, 존재 안에 뿌리내림, 존재에의 참여의 개념과의 단절을 지시한다: "참여는 타자와 관계하는 방식이다: 타자와의 접촉을 잃어버림이 없이, 그 접촉의 한 점도 잃어버림이 없이 그의 존재를 유지하고 전개하는 것이다. 반면 참여와의 단절은 물론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 접촉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끌어내지 않는다. 마치 보여지지 않으면서 보는 지제스(Gygès)처럼말이다"(55). <전체성과 무한>에서 자주 거론되게 될 이 신화적인 인물은 "자아와 내재성의 신화 그 자체"(55)로 플라톤의 <공화국>(2, 359-360)에 나오는 이 인물로 우연히 발견한 마법의 반지 덕분에 자신은 보여지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보는 자로 "처벌받지 않은 모든 범죄"(55)의 가능성 그 자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런데 이 가능성은 내재성, 분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타자 안에서, 그런데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자에 의해서 찾아진다. 우리는 여기서 필요와 욕망의 구분을 재발견한다: "욕망을 촉진하는 것은 욕구하고 싶은 것(le Désirable)으로, 욕망은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태어난다. 그것은 계시(révélation)이다. 반면에 필요는 영혼의 공허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그것은 주체로부터 출발한다"(56). 레비나스는 위의 인용문에서 "대상"을 따옴표 안에 넣었다. 그 이유는 "무한은 인식의 "대상",, 즉 명상하는 시선의 척도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촉진하는 "욕구하고 싶은 것"이며, 매순간 사유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생각하는 사유에 의해 다가갈 수 있는 것"(56)이기 때문이다. 무한은 이렇게 어떤 거대한, 셀수 없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의 무한성을 측정하는 욕망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측정의 불가능성의 척도이기 때문이다"(56).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진리와 그것의 내적 조건으로서 분리의 필연성을 언급하는 것을 글을 마치자. 자아가 자신을 동일화하는 행복,
에고이즘, 향유의 내적인 삶에 의해 산출되는 분리 안에서 자아는 타인을 모른다. 이 모름 혹은 무시는 바로 자아의 행복을 보증한다.
"그런데 이 행복 아래에 타자의 욕망은, 비록 분리가 타자에 의해 분석적으로 혹은 변증적으로 연역된 것이 아닐지라도, 이 행복, 이
세계 안에서 감성적인 것의 자발성을 요구한다"(57). 혹은 "진리는 분리 안에서 자율적인 존재를 전제한다 . 다시 말해 진리는
필요를 제거하지 않는다"(55). 왜냐하면 "자기에 만족하는 에고이즘 없이는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에, 그리고 "....향유는 ...감성과 타인에의 노출로서 감성의
상처받을 수 있음의 타자를 위한 조건"이기에, 더 나아가 "타인에의 노출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타자를
돌보고, 그의 불행과 잘못을 돌보는 것, 즉 주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그런데 "이 줌은 자기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떼어내는 것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존재와 다르게, 118-119) 때문이다. 자기에도 불구하고,
이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내려 놓을 수 있을 때에만, 진정으로 줌은 의미를 가진다. 이 "자기에도 불구하고"는 레비나스가
"그럼 인간은 무엇인가?"라고 데카르트가 다시 물었을 때, 레비나스가 인간의 인간성 혹은 인간다움이라고 답한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은 바로 이러한 발견의 긴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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