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성 혹은 주체 없는 의식의 초월론적인 삶
사르트르의 현상학과의 만남은 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9년 후설이 <프랑스의 독일 철학 학회>에 의해 솔본느에 초청되어 왔을 때 사르트르는 후설을 발견할 기회를 놓치고 33년 베를린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레이몽 아롱의 후설을 읽어보라는 충고와 그 당시 후설에 대한 책으로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책이었던 레비나스의 책(『후설 현상학의 직관의 이론』, 1930)을 읽고서야 , 그의 편에서 후설을 찾아 그 해 가을 베를린으로 향한다. 33-34년 베를린에 머물면서 그는 하이데거보다 후설에 전념하면서 후설에 대한 두 개의 글을 썼다고 전한다. 하나는 36년 발표된 “자아의 초월성”이며, 다른 하나는 더 늦게 39년 발표된 “후설 현상학의 근본이념 : 지향성”1)이 다. 우리는 여기서 후자를 먼저 읽는다. 발표 연대와 상관없이 이 논문은 그의 사유의 시작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후설의 지향성의 개념의 발견이 그의 자아의 이론에 앞서듯이 지향성의 이론은 후설 현상학의 입문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글에서 사르트르는 후설을 관념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성벽으로 기술하는 반면에 36년 『자아의 초월성』에서 사르트르는 후설의 관념론적인 자아론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다음의 도발적인 진술로 시작한다.
““그는 그녀를 눈으로 먹었다.” 이 문장과 또 다른 많은 표증들은 실재론과 관념론에 공통된 환상을 드러내는데,
이것에 의하면 아는 것은 먹는 것이다. 아카데미즘으로 백년을 보낸 프랑스 철학은 아직도 이 지점에 머물러 있다. 우리 모두는
브랭쉬비크, 라랑드, 메이어슨을 읽었고, 정신의 거미가 사물들을 자기의 거미줄 안으로 유인한 후 하얀 점액으로 덮어서 그것을
소화하여 자신의 고유한 실체로 환원한다고 믿어왔다.”(une idée, 29)
위의 인용문에서 쉽게 우리가 우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르트르가 “소화철학”(29)이라고 비판하는 “세계의 가시들”(29)을 강력한 소화제로 자기화, 동일화하는 관념론에 대한 혐오이다. 이 관념론에 대한 그의 혐오는 후설의 현상학을 읽으면서도 모든 내적 심리적 내용, 즉 후설의 현상학적인 ‘질료’ 개념에 대한 거부로 드러나며, 나아가 모든 내재성의 철학의 종말과 더불어 앞서 이미 지적한 그에 대한 반대 국부로서 “구체 철학”으로서의 실재론적인 경향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후설의 지향성의 개념을 해석하면서 후설 자신조차도 “그 본질적인 성질을 몰랐다”(EN, 28)고 『존재와 무』에서 그가 주장하는 지향성의 개념의 발견이 지닌 “진정한 의미”(idée, 31)를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프루스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32) “초월성의 철학”(31)이라고 그가 부르는 것이다.
“초월성의 철학은 우리를 저 큰길로 저 위험들로, 저 눈부신 빛 아래로 내 던진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세계-내-존재(ê̂tre-dans-le-monde)라고 말한다. 여기서 “내-존재(ê̂tre dans)”의 “내(dans)”는
운동으로(...으로) 이해해야 한다. 존재, 그것은 세계로의 파열이며, 그것은 갑자기 세계-내-의식으로 파열하기 위해, 세계의
무로부터, 즉 의식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31)
사실 여기서 사르트르가 하이데거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해하는 후설의 지향성의 원리는 칸트가 1772년 마쿠스 헤르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모든 형이상학의 비밀을
여는 열쇠”라고 했던 질문, “우리가 우리 안에서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상과의 관계는 어떤 토대 위에 근거하는가”라는
초월론적인 질문을 처음부터 제거한다.2) 우리는 이미 사물들 곁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안의 표상”이라는 것은 없으며, 의식과 세계는
처음부터 동시에 주어진다. 우리가 신비라고 하는 칸트와 후설의 이 내적 관계는 “고통도 없이 소리도 없이 청산된다”3).『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후설이
노에시스(사유작용)의 상관자인 노에마(의식대상)를 비실재적인 것(irréel)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세운 현상학의 원리와 반대로
나아간다고 비판하면서, 메를로-퐁티와 마찬가지로 -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4) - 현상학의 관념론적인 환원을 쓸데없는 기도라고 말하면서, “의식은 자신이 아닌 것으로 향하면서 그
존재에 의존해서 태어나는”(EN, 28)
초월성으로 즉각적으로 “세계 안으로의 의식의 파열”(une idée, 31)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게 “바람처럼 투명한”(30) 의식은 “그 자신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며, 단지 자기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며, 자기 밖으로 미끄러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의식 안으로 들어간다면 - 이것은 불가능하지만
-, 소용돌이에 의해 우리는 즉각적으로 밖으로, 나무 옆으로, 먼지 속으로 내 던져질 것”이라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왜냐하면
“의식은 “안”이 없고 다만 “밖”일 뿐이기 때문”(30)이다. 이 “절대적인 도망, 실체이고자 하는 것의 거부”(30) 그
자체는 우리가 보게 될 사르트르의 주체 없는 비반성적이고 자발적인 의식의 주체성을 구성한다.
레비나스는 “만일 지향성이 단지 의식의 대상으로의 파열일 뿐이라면, 그로 인해 우리가 즉각적으로 사물들
곁에(au-près-des-choses) 있게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현상학은 없을 것”5)이라고 말한다. 레비나스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후설의 지향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해석은 사물의 ‘가시’에 대한 염려로 인해 후설의 지향성을 전적으로 전복한다. 모든 프랑스
현상학자들이 새로운 해석을 가하기를 그치지 않는, 이미 하이데거에 의해 전적으로 변형된 이 지향성의 개념은 후설의 환원의 방법과
더불어 현상학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후설 자신도 그의 철학의 여정에서 끝없이 그 해석과 적용의 폭을 내적 대상의 직관과의 관계에서,
시간성과의 관계로, 이어서 운동감각과의 관계로 그 해석과 적용의 폭을 확장한 그 자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풍요성을 가진 생산적인
개념이다. 이 생산성은 현상학이 어떤 주장(doctrine)을 체계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후설이
열어 놓은 현상학적 방법의 풍요성일 것이다. 이 다양한 해석과 적용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지향성이 향하는 ‘어떤 것’, 후설이
“사물들 그 자체로의 회귀”(후설, 『논리연구』, t. 2, § 2)를 말할 때, 회귀가 지시하는 것은 “인식의 원천적인 근원”(후
설, 『이념』, § 24)으로 사물을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주체의 ‘직관’으로의 돌아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진정한 사물로의 회귀는 사물들의 직관적인 현전이 밝혀지는 사유작용으로의
회귀(retour aux actes)”(레비나스, 위의 책, p. 115)를 의미한다. 의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 때, 이 ‘무엇인가’는 의식의
내적 소여로서 “의식 안의 지향적 대상 그 자체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단일체로, 다시 말해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상관관계의
다양한 양태로 그것들에 대한 의식을 가진다.”(후설, 『데카르트적 성찰』, § 17) 지향성을 환원
이전의 세계로의 즉각적인 파열로 이해하면서, 그가 획득한 초월성의 이념 아래에서 사르트르는 후설에 대한 명상, 탐구 대신에 그가
『존재와 무』에서 “주체 없는 초월론적인 장”이라고 부른 비반성적이고 자발적인 주체성의 철학을 향해 서둘러서 나아간다. 『자아의
초월성』은 『존재와 무』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의 정초이며, 어떤 의미에서 전자는 후자보다 더 근본적이다. 이 글은 글의 목적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에게, 자아는 의식의 “거주자”이다. 어떤 이들은 체험들의 통합의 공허한 원리로서 자아의 형식적인 현전을 긍정한다. 다른 한편,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심리적인 삶의 매 순간에 행위와 욕망의 중심으로서 자아의 물질적인 현전을 발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자아는 의식 안의 형식적인 현전도, 물질적인 현전도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은 밖에 있으며, 세계 안에 존재하며, 그것은 타자의 자아처럼 세계의 한 존재자이다.”6)
지향성에 대한 후설의 글에서도 명시적으로
표명되었듯이, 그의 관념론의 대한 혐오, 내면성에 대한 혐오 그리고 모든 이중성, 애매성에 대한 혐오, 내 안에 징그러운 동물에
대한 혐오는 그로 하여금 의식의 존재, 의식 안의 “거주자”, 의식의 존재가 가지는 그 가짐의 무게, 그 소유의 무게, 그 존재의
중력을 단번에 저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현상학적인 질료의 제거를 통해, 의식은, 명증한, 순수한 공기처럼 맑고
투명한 의식은 어떤 소유도, 어떤 무게도, 어떤 운명도, 어떤 그림자도, 어떤 장애물도, 어떤 한계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저 밖으로, “세계로 파열하는” 그의 지향성은 그의 말대로 바람처럼 자유롭다. 아니 바람보다 더 자유롭다. 의식은 반복되는
사르트르의 공리에 의하면 “그것인 바의 것이 아닌 것(ne pas être ce qu'elle est)이며 동시에 그것이 아닌
바의 것(être ce qu'elle n'est pas)”(EN, 33)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rien)으로 세계 안에 부정을
가져오는 부정성 그 자체로서의 그것은 자유라
고 불린다. 의식의 존재는
의식 안에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저 밖으로 자신이 아닌 것으로 향하는 존재, 초월성, 향함, 충동, 욕망 등의
운동 자체이다. 그의 초월성으로서의 의식 안에는 고집스럽게 지속되는 초월론적인 가상의 위험도 고갈되지 않는, 자기 밖으로 내몰 수
없는, 정화되어질 수 없는, 환원되어질 수 없는 존재의 허약함도, 어떤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거주자로서의 존재자도, 어떤
그림자도 잔여도 없다. 내적 자아에 대한 그의 혐오는 이미 그의 젊어서의 철학적인 에세이(1924)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는 나의 자아를 찾았다: 나는 나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내 안에서 집단적인 영혼, 그룹의 영혼, 대지의
영혼, 책의 영혼을 발견했다. 그런데 진정으로 나의 자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사람들과 사물들 밖에, 조건 지워지지 않은 나의
진정한 자아, 나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7)
이러한
그의 최초의 철학적 직관은 『자아의 초월성』에서 의식과 주체의 관계로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는 순수한 물을 마시지 않는다. 이
물은 소비될 수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의식은, 들뢰즈가 “숨쉬기 힘든 공기”8)와 같다고 말하듯이 어떤 의미에서 마실 수 없는 순수한 물과 같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적 탐구의
근본적인 정향이 자연적 혹은 본성적인 어떤 것에 믿음에서 출발한다면, 사르트르는 그와 정반대로 의식에 어떤 자연적 본성도 어떤 종류의 사물의 양태도 의식에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 이
불가능성은 초월론적인 의식의 “비인격적인 자발성”(TE, 79)으로, 더 정확히 “개체화된 비인격적인 자발성(une
spontanéité individué et impersonnelle)”(78)으로 표현된다. 이 표현이 말하듯이 이 자발적인
의식은 집단적인 무의식이 아니라, 개체화된 하나의 개인의 의식을 말한다. 개인과 인격이 그 쌍을 이루는 개념의 상식을 벗어나는 이
이상한 조합은 이러 저러한 인격의 통합의 원리로서 의식 내의 자아의 부정으로부터 유래한다. 다시 말해 사르트르가 말하는
개체적이라는 말은 수적인 하나이지, 이러 저러한 심리적 통합체로서의 인격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은 『존재와 무』에서
하이데거의 개념을 취해 인격적 자아성과 구분되는 “자기성(ipséité)”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식은 색깔 없는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선택으로서의 자유의 개념과 이러한 자유에서 출발하는 타인과의 관계를 결정한다. 이런 사르트르의
자발적인 의식으로서의 주체성 안에는 자기(soi)는 있으나 자아(moi)는 없다. 이러한 초월성으로서의 의식은 자아로부터 혹은
자아와 자기와의 관계로부터 끌어올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어떤 심리적인 상태, 어떤 자아론으로부터도 연역되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의식의 정의로부터 사르트르는 “자아에 대한
의식만이 있는” 의식의 “주체 없는 초월론적인 장(le champ transcendantal sans sujet)”(EN,
291, TE, 74, 77) 이라고 부르는 것을 끌어낸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자아론적인 주체는 나(je)도 어떤 내용물도
없는 이 익명적인 초월론적인 의식이 구성하는 ‘대상’일 뿐(TE, 77)이며, 이러한 초월론적인 자아의 전제는 “의식의
죽음”(TE, 23)이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자아는 불안의
근원인 자발적인 의식을 감추고자하는 반성이 만드는 환상의 결과로 의식을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말한다.
사르트르에게 나와 자아는 실제로 구분이 없으면서도 그 기능적인 측면에서 구분한다면, “나(Je)는 자아(Moi)의 활동적인
측면이며”(19)이고, “자아는 이 행위들이 떨어져 나오는 토대이다”(44). 그렇다면 자아는 의식의 체험들을 종합하는 형식적인
통합자도, 심리적인 삶의 기원도 아니다. 자아는 의식 밖에 “세계 안에”, 우리의 세계적 삶 가운데, 저 나무와 같은 방식으로
대상으로 존재한다. 반면에 세계 안의 존재자들과 어떤 공통의 척도를 가지지 않은 의식은 “세계 너머에”(EN, 94)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식의 순수한 초월론적인 장을 밝히기 위해서 사르트르가 후설로부터 취하는 방법은 무전제의 학의 이념에 근거한
기술의 학(TE, 17)으로서의 현상학이다. 그리고 의식 밖의 대상, 즉 자연세계를 괄호치고 순수 절대 의식에 도달한 후설처럼,
의식 내의 모든 것을 밖으로 내쫓는 역방향의 괄호치기는 어떤 의미에서 후설보다 더 근본적이다: “모든 초월성은 판단중지에 떨어져야
한다”(34). 그리고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의 결과인 초월론적인 주체(le je transcendantal)는 칸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구성하는 이 형식적인 순수 자아는 “쓸데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해로운 것”(23)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종류의
“초월적 자아는 현상학적 환원 하에 떨어져야 한다”(37)고 말한다. 여기서 사실 사르트르는 후설의 자아론을 비판하면서
『논리연구』에서의 처음의 후설이 브렌타노와 공유하는 자아를 요청함이 없는 스스로를 구성하는 의식의 자발적인 단일성으로 돌아간다.9) 이 자아 없는 초기의 후설의 의식의 가능성을
극단화하면서 사르트르는 비인격적인 초월론적인 장에 이른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세계 안에 홀로 떠 있는 섬과 같은 그런 자아는
존재하지 않기에 이제 유아론은 반박된다고 말한다.(84) 이제 의식은 초월론적인 의미에서 의식의 순수한 내재성 안에서
지향성으로서의 순수한 초월성으로 남게 된다. 이렇게 그의 의식은 한편으로 순수한 익명적인 내재성(..에 대한 의식이 있다 il y a conscience...)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순수한 초월성(나는 ...대한 의식을 가진다)으로 말해진다. 겉보기에
모순적인 이 표현은 바로 사르트르의 다음의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이 의자에 대한 의식을 가진다.
반면에 이 의자에 대한 의식이 있다.”(TE,
37)
(J'ai conscience de cette chaise mais il y a conscience de cette chaise.)
사르트르는
이러한 의식의 철저한 비-실체성, 자발성은 그치지 않는 “불안”의 근원이 된다(83)고 말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토대의 부재에
대한 불안이면서 세계에 대한 전적인 책임에 대한 불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초월론적인 의식은 어떤 내적 내용도 가지지 않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다만 전적으로 세계로 자신을 던지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이 끊임없이 자아로, 사물로 도피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또한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은 기적도 지적인 지식인의 작업도 아닌 이 불안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라고
말한다(84).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기만적인 의식(la mauvaise foi)”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의식의
자발성의 불안으로부터의 도피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초월론적인 익명적인 삶은 우리가 구역질에서 이미 만난 “홀로
자유로움”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자유는 세계로 전적으로 자신을 기투하는 구체적인 의식으로 이 자유의 길은 “세계의 길”10)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현상학에 대한
태도의 극단성 - 엄격성이 아닌 - 은 전적으로 후설의 의식의 삶 안에서 내적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처음부터 배재하면서 현상학의
복잡성을 단번에 단순화한다. 후설의 의식의 삶 안의 내적 주체의 분열을 초월론적인 익명적인 의식과 초월적인 자아로 구분하면서
사르트르는 현상학의 고유한 영역을 벗어난다. 현상학이 의식과 이것에 주어지는 것과의 관계의 학이라면, 그리고 이 소여에 대한
질문이라면, 사르트르에게 이 현상학적 소여, 다시 말해 후설이 지향적 체험이라고 부른 것, 더 근원적으로는 칸트의 초월론적인 질문인 “표상의 대상”에 대한
질문은 그의 모든 내재성에 대한 혐오와 그의 실재론적 철학의 경향으로 처음부터 그의 철학의 영역에서 제외된다. 이제 레비나스와
함께 이 소여에 대해서 질문해 보자.
주.
1) J.-P. Sartre, “Une idée fondamentale de la
phénoménologie de Husserl : L'intentionnalité, La nouvelle revue française, 1939, reprise in Situation I, 1947, Folio essais. (une
idée)
2) 칸트, “마쿠스 헤르쯔에게 보낸 편지”, in Oeuvres philososphiques de Kant, La Pléiade, t. I, p. 690. 아직까지 제기되지 않고 감쳐져 있었던 것이라고 했던 이 질문은 주체와 대상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존재와 사유의 일치의 고전적인 질문이 아니라, 지극히 현상학적인 질문으로 ‘우리에게’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다시 말해 소여라는 것이 어떻게 주어지는 가에 대한 질문으로, 의식에 주어지는 것, 나타나는 것의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대상의 대상성, 다시 말해 후설적인 의미의 초월성, 타자에 대한 질문으로 초월론적인 질문이었다. 후설이 브렌타노로부터 지향성의 이념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그가 비판하는 심리주의와 다른 한편 신칸트학파의 논리주의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고 믿었을 때, 그것은 사르트르가 믿듯이 저 밖의 세계로의 즉각적인 파열로 우리 안의 표상이라는 것은 없고 우리는 이미 즉각적으로 사물들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후설이 『논리연구 V』§§ 10-11에서 “지향적 체험” 혹은 “지향적 비실제적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어떻게 안에서의 대상”(후설, 『시간의 내적 의식』, Paris, Puf, 157)으로 이 대상에 대한 탐구는 동시에 이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문제 삼는다. 여기에 후설의 고유한 현상학적 환원의 요구가 들어온다. 이 대상은 저 밖의 일반적인 대상이 아니라, 지향하는 주체와의 상관관계에서만 파악되는 내적 대상으로, 벵상 데콩브가 “우리에게 대상” (V Decombre, “La phénoménologie “pour nous”” in Critique de la raison phénoménologique, Cerf, 1991, p. 20)이라고 부른 것이다.
3) 사르트르, 『상황 I』,Situations
I, Folio essais, p. 223.
4) 우선 분리의 과정으로서의 본질적인 환원에 반대해서, 메를로-퐁티는 하이데거,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사물과 사물의 의식이 동시에 주어진다는 것, 더 나아가 그들이 사르트르와는 달리 서로 얽혀있음을 보여주장한다.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을 말하면서 메를로-퐁티는 세계의 본래성, 구성 이전에, 환원 이전의 세계의 앞섬과 그것의 지속성을 주장한다. 마치 후설의 순수한 의식의 영역으로의 돌아감의 운동의 방향을 역전해서 세계로의 돌아감을 통해 과학의 이전, 명증성 이전을 탐구한다. 이러한 메를로-퐁티의 환원의 입장은 더 이상 순수한 본래적이고 원보적인 의식은 없으며, 본질적 환원이 드러내지 못하는 세계의 일 이 아(il y a)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 세계의 존재의 줌은 하이데거의 “es gibt”, 존재의 줌을 상기시킨다.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관대한 존재의 있음의 줌(수여, donation)은 레비나스와 사르트르의 익명성에 대한 공포와는 다르다.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는 이 철학자들에게 주체의 자리를 다르게 결정하며, 주체와 세계의 관계를 다르게 결정한다.
5) E. Lévinas, “Le ruine de la représentation”
in En dé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Paris, Vrin, 1994, p. 127.
6) 사르트르,
『자아의 초월성』, La transcendance de l'ego,
(1936, Rcherches philosophiques, n°6),
Vrin, 1965, p. 13. 이 단행본에는 실비 르 봉(Sylvie Le Bon)의 서문과 주가 달려있다. 이 글은 아주
최근의 V. de Coorebyter에 의해 다시 긴 서문과 긴 주가 달려서 새로 Vrin(2003)에서 출간되었다. 위의
인용문은 페이지는 65년 판에 의존한다. (TE)
7) 사르트르, Ecrits de jenesse (1922-1927), Paris, Gallimard, 1990,
pp. 471-472.
8) 들뢰즈,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 in L'île
déserte, Paris, Ed. de Minuit, 2002, p. 113.
9) 후설, 『논리연구 V』, § 4에서 의식 내의 체험의 통일성을 말하기 위해서 자아의 원리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르트르의 후설에의 의존은 전적으로 후설의 『논리연구』와 같은 시기에 써진 『내적 시간의 의식』에 의존한다. 반대로 『이념 I』 이후의 후설의 행보에 대해서는 후설을 빌어 후설을 비판한다.
10) 사르트르, 『도덕을 위한 노트』, Cahiers pour une moral, Paris, Gallimard, 1983, p.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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