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정원

마를렌 자라더 - 네메시스의 인내

aurorepark 2009. 12. 5. 23:09









 
   


La patience de Némésis
 



La patience de Némésis

『네메시스의 인내』

마를렌 자라더 Marlène Zarader의 새 책을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오랫만에 나온 그녀의 새 책이다. 나는 그녀의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녀의 첫 책은 『하이데거와 기원의 말들』(Heidegger et les paroles de l'origine, 1986)이었다. 이 책의 서문은 레비나스가 썼다. 그리고 그녀는 블량쇼에 대한 책, 『존재와 중성』(L'être et le neutre. À partir de Maurice Blanchot, 2001)을 썼다. 그 중간에 『생각되어지지 않은 것의 빚. 하이데거와 히브리적 유산』 (La Dette impensée Heidegger héritage hébraïque, 1990)을 썼다. 거의 8년의 침묵 뒤에 나온 책이다. 햄릿을 불어로 번역한 영문학자 이브 본푸아(Yves Bonnefoy)가 서문을 썼다. 그녀는 미셀 앙리가 머물던 몽펠리의 발레리 3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항상 꿈꾸던 그 곳을 나는 가지 못했다.


 이 책을 소개하는 표지 글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신 네메시스는 대개 복수와 연결된다. 나는 그녀를 디케, 정의로부터 태어난 것처럼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나눔의 선들 위에 깨어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적 사유이기를 그친 흔적이 있다. 우리는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을 가짐이 없이는 한계를 만날 수 없다. 우리는 금지들과 항상 놀이하며, 불가능성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런데 벌을 부르지 않는 추월은 없다. 네메시스는 이러한 것의 상징적 형상이다.


철학자들은 때때로 그녀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빌려준다. 시인들, 화가들, 소설가들 혹은 시네아티스트들도 그녀를 항상은 아니지만 만난다. 그녀의 감춰진 고집스런 현전은 서로 어떤 공통점도 없는 작품들을 조용히 사로잡는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지나간 흔적들을 남긴다. 우리는 여기서 이 흔적들을 쫓는다. 


헤겔 하이데거 혹은 리쾌르가 나의 시선을 인도한다. 도스토엡스키, 에드가 포우 혹은 드 시리호(De Chirio), 파드리스 세로(Patrice Chéreau) 혹은 다으덴 형제들, 이브 본푸아, 루이-르네 데 포레(Louis-René des Forêt)는 나에게 이 장을 확장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네메시스는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네메시스는 밤의 딸이며, 무한한 인내를 가지고 있으며, 항상 나타나는 것으로 끝을 마친다. >


그녀의 소개의 글을 읽으면 금새 알 수 있듯이, 그녀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녀는 다른 사유를 찾아서 또 여행한다. 하이데거에서 그녀가 읽어내는 그리스적 사유가 아닌 히브리적 사유의 흔적, 다시 헤겔, 그녀가 블량쇼에서 읽어내는 다른 헤겔... 하이데거...나는 그녀를 읽기를 좋아한다. 참으로 반가왔다. 그녀의 책을 서점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그녀의 책이 나왔는지 몰랐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


<우리는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을 가짐이 없이는 한계를 만날 수 없다. 우리는 금지들과 항상 놀이하며, 불가능성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런데 벌을 부르지 않는 추월은 없다.> 그녀의 글은 항상 이 불가능성에 대한 글쓰기이다. 명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글쓰기, 밤, 밖에 대한, 그것에 대한 말이 없는, 자연적인 것이 없는 것에 대한 글쓰기. 한계에서의 그것의 추월에서의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