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레비나스의 사유는
내 마음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사이에서
오간다.
하나는 공허로 다른 하나는 충만으로
하나는 비움의 비움으로 더 큰 공허를 다른 하나는 충만에의 접힘으로 충만 안에 무수한 주름을 만들다.
하나는 그 비움으로 인해 나비처럼 가벼운 자유를 다른 하나는 그 접힘으로 인해 그 강철 같은 무개로 인해 속으로 속으로 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하나는 비상을 다른 하나는 추락을 선택한 듯이
이 둘은 서로 등을 맞대고 서로 다른 곳을 지향한다.
레비나스는 사르트르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사르트르의 『말』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만일 내가 불가능한 구원을 장신구를 파는 가게에 진열한다면, 무엇이 남는가? 한 인간의 모든 것은 모든 인간으로 이뤄지고, 한 인간은 모든 이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며, 한 인간의 모든 것은 그가 누구든지 간에 그와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
레비나스 필립 네모와의 대담(윤리와 무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임, 그것은 우리가 존재들 사이의 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다."
『상황 III』에서 사르트르는 "영혼 안에서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존재와 다르게』에서 레비나스는 "영혼은 나 안에 타자이다. '하나를 위한 다른 하나'의 심령론은 무엇인가에 의한 사로잡힘이며, 정신분열일 수 있다. 영혼은 이미 광기의 씨앗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둘을 비교하는 무수한 문장들을 계속 열거할 수 있다. 사르트르의 한줄 한줄을 레비나스의 다른 글들과 비교해서 나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둘의 근본적인 사유의 방향을 결정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같은 시대에 살면서 이처럼 다른 사유의 양태를 갖게 했을까?
그것은 그들의 자아에 대한 '나'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인 태도에서 연유한다. 사르트르의 의식 안에는 자아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은 없다. 자아는 저 밖에 의식 밖에 이미 내 던진지 오래이다. 그의 의식은 투명하다. 레비나스에게 의식은 이러한 투명성이 없다. 사르트르처럼 쉽사리 내 의식 밖으로 내 던질 수 없는 이 자아, 나의 육체성, 나의 욕망, 나의 향유, 나의 소유, 나의 욕심, 나의 식욕을 가진 이 자아를 사르트르처럼 저 밖으로 내던질 수도, 완전히 환원할 수도, 완전히 순화할 수도, 완전히 지울수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의식에 한 가운데에 남아있다. 이로써 레비나스는 데카르트를 모방해서, 나는 향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레비나스의 코기토. 매번 무화의 과정일 뿐인 사르트르의 의식은 만족을 모르는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항상 결핍인 의식은 항상 다시 채워야 하는 욕망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몰랐던 것은 무화의 과정이 청소하듯이 그렇게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김없이 그렇게 완벽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네의 정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자, 사르트르와 레비나스 (0) | 2010.01.13 |
---|---|
네메시스의 인내(2) - 루이-르네 데 포레, 오스티나토 (0) | 2009.12.21 |
되돌아 옴이 없는 시간 (0) | 2009.12.12 |
자라더 - 네메시스의 인내(1) (0) | 2009.12.08 |
마를렌 자라더 - 네메시스의 인내 (0) | 2009.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