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is-René des Forêts(1907-2000)
l'esprit doucement s'endort, il n'y a que le cœur qui se souvienne.
정신이 조용히 잠들 때, 심장만이 기억하는 것이 있다.
Sans cesse de là-bas à ici où je n'est plus qu'un
il douloureusement proche, douloureusement
étranger, tantôt surgi d'ailleurs et de nulle part,
tantôt né sur place et comme déchargé par les
mots de tout le poids de la mémoire qui subor-
donne la vérité d'une vie à la vérité des faits
L. R. des Forêts, Ostinato
그치지 않는 저기에서 여기로 <나>는 더 이상
고통스럽게 가깝고, 고통스럽게 먼, 낯선 하나의 <그>가 아니다
다른 곳에서 어디로부터도 아닌 곳으로부터 솟아나거나
혹은 여기 이 자리에서 태어나거나,
마치 말들에 의해서 <한 삶의 진실>을 <사실들의 진실>에 종속시키는
모든 기억의 무게를 덜어버리듯이
루이-르네 데 포레, 오스티나토
자라더의 <네메시스의 인내>의 4장 <말들의 분할 le partage des mots>을 읽었다.
예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말해진다>고 했던 것처럼, 부재에 붙잡힌 시인들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부재에 대해서, 말들의 부재에 대해서, 그리고 이 공허에 대한 경험, 체험에 대해서 말한다. 말들의 부재는 때로는 빛으로 때로는 어둠으로 향한다.
예를 들어 시인, 이브 본푸아 Yves Bonnefoy - 나에게는 햄릿의 탁월한 번역자로 더 잘 알려진 - 그는 현전의 시인이다. 그는 그것에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명명할 수 있는> 능력을 시에서 알아차린다. 이 역설은 자신의 기원을 말과 현전을 결합하는 관계 안에서 발견한다. 현전 - 감각적인 것 그 자체, 그것의 직접성과 그것의 충만 안에서 - 은 모든 말 이전에 자신을 전개한다. 시인은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방식으로, 시에 앞서는 이 침묵하는 벙어리의 세계의 현전을 말한다. 그리고 시는 다시 이 침묵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여기서 문제는 후설의 데카르트 성찰 § 16에서 말하듯, "Le début, c'est expérience pure et, pour ainsi dire, muette encore, qu'il s'agit d'amener à l'expression pure de son propre sens. 처음에 그것은 순수한 경험, 다시 말해 아직 벙어리인 이 경험(코기토의 경험)을 그것의 고유한 의미인 순수한 표현으로 이끄는 것이 문제이다."
"나는 다만 명명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여기에 감각적인 세계가 있다. 말이 필요하다. 이 제 6의 감각, 가장 고양된 감각은 만남에서 기호들의 의미를 풀어낸다."(이브 본푸아, 말해질 수 없는 것 L'improbable, p. 25)
이 만남이 완성되면, 말이 현전을 말할 수 있으면, 시인이 말하듯, <구원>이 있을 것이다. 고전적인 시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도 말과 사물의, 시인의 말함과 시인이 찬양하는 세계 사이의 행복한 만남, 구원의 만남을 말한다. 그런데 그 만남은 일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라고 자라다는 말한다. 하나는 현전에서 유래한다: 아무것도 현전에 고유한 과잉을 줄일 수가 없다. 그 과잉은 모든 말해질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충만의 심연>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다른 하나는 말에서 유래한다: 말은 자신의 기원과 자신의 의미를 감각적인 것과의 단절을 통해서만 유지한다. 시인은 말라르메의 가르침, 이미 헤겔의 것인 가르침을 따른다: 언어는 현전을 지운다는 사실, 말은 사물의 부재를 확인한다는 사실. 언어에 의한 언어 안에서 잘려진 사물의 직접성, 그것을, 언어 안에서 이든 언어 밖에서 이든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환상일 것이다.
따라서 행복한 말, 행복한 만남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시도 가능하지 않게된다. 존재를 말하도록 떠 맡겨진 시인은 그것을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모든 필연성을 가지고 해야한다. 항상 우리를 앞서는 세계는, 메를로-퐁티에 앞서서, 후설이 말하듯,(메를로-퐁티가 인용하기를 그치지 않는 이 구절) 그것은 "아직 벙어리인 경험"이며, 그것을 "그것의 고유한 의미인 순수한 표현으로 이끌어야"(데카르트 성찰, § 16) 하기 때문이다. 이 "반박할 수 없는 현전", 이 자기에로 던져진 세계, 이 침묵, 이 사막, 이 수수께끼 앞에서의 공포,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봐라! 여기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핀다. Regarde, / ici fleurit le rien"
현전은 그것이 있는 바의 것이기 위해, 구원되기 위해 말들을 필요로 한다. 이브 본푸아는 이 일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존재는 항상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으며, 말은 항상 실패로 끝난다. 말은 본질적인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선고된다. 이렇게 그는 이 <말해질 수 없음>이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는 이 앎을 독측한 정감을 가지고 색칠한다: 그는 모든 말을 감추고 있는 침묵 안에서 현전의 보존을 보며, 그는 말해질 수 없는 것 아래에서 충만을 거두워낸다. 왜냐하면 말해질 수 없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아무 것도 아님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루이-르네 데 포레는 1997년 드디어 Ostinato를 출판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20년의 글쓰기에 대한, 자기에 대한 글에 대한 글에서 실재와 허구 사이의 경계에서, 침묵과 언어의 환상적 힘 사이에서 해소되지 않는 이 두 극 사이의 모순에서 결국 그는 시 쓰기를, 허구를 포기하고 언어가 그에게 주는 것들에 대해서, 언어가 그에게 주기를 거부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가 집요하게 접근하고 혹은 물러섰던 그의 작업에 대해서, 사기꾼이기를 거부하면서 지상권에 머물고자한 영웅적인 투쟁에 대해서 더 잘 설명할 수 있게된다. 이 책은 찬찬히 읽을 책이다.
그에게 언어의 힘은 우선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언어는 그에게 우선 담론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갈되지 않는 이미지의 원천이다. 이미지가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을 돌려주는가? 혹은 말을 우리에게 일치시키는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이 기적적으로 말들에 의해 삶을 취하게한다. 여기서 기억과 가상 사이의 나눔의 선이 지워진다고 자다더는 말한다.
언어 밖에서 사물들과 사건들은 침묵이 아닌 - 우리를 앞선 벙어리의 이 삶이 아닌 - 무로 돌아간다. 데 포레는 본푸와 달리 언어를 그것으로 이끌, 그것에 앞선 현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상관자를 모른다. 이브 본푸아의 시학을 특징지우는 두가지가 있다: 현전은 말의 기다림에서 존재한다. 그런데 말들은 그의 편에서 존재를 말해야 한다. 데 포레는 첫번째를 취하고 나중 것을 포기한다. 사물들은 무를 회피하기 위해서 말들이 필요하다. 반면 말들은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 반대로 말들이 사물들을 결정한다. 여기서 거부되는 것은 하이데거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언어의 매개적인 기능이다. 하이데거에게 말들은 존재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존재가 오도록 내버려둔다laisser être는 의미에서.말은 존재가 도래하도록 내버려둔다.그래서 하이데거에게 존재론적 사건에는 침묵의 위협이 없다. 반면에 데 포레에게 말들의 번쩍임은 존재 안에 자리를 가지지 않는다.그것은 계시의 힘이 없다. 그것은 본래적으로 창조적이다.
루이-르네 데 포레는 그의 주인공들처럼 언어를 기다린다.. 그런데 모든 것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실제로 받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의 추락이다. "비상에서 추락으로", 약속은 절망으로, 이 놓여나지 않는 운동에 시인은 붙들려있다. 오스트나토. 어찌하랴! 시인은 언기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하고 언어를 강요하지 때문이다. 말은 우리에게 존재를 준다고 약속하면서 거짓말한다. 여기에 침묵이 자리한다. 그런데 침묵은 비-존재로 열린다. 그리고 여기로부터 말의 필연성이 열린다. 이 두 극단에서 진동하는 데포레의 주인공들은 이 간격에 이 긴장의 반복에 놓여날 수 없이 잡혀있다. 어떻게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가? 오시티나토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제시한다: 언어를 보존하기 혹은 언어를 그것의 속임, 그것의 거짓을 잘라내면서 언어를 부르기; 말들을 사용하기. 그런데 그것들에서 존재를 주는 힘을 거부하면서.
시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거짓말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동시에 그는 침묵하기를 원치 않기에, 그는 이 무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남는다. 그것을 존재로 전향하기를 희망하면서 희망하지 않으면서, 거기에 머문다.
모리스 블랑쇼, 이브 본푸아, 루이-르네 데 포레, 이들은 모두 공허, 부재에 대해서 말한다. 데포레는 앞의 둘의 이 <공허>에 대해서 질문한다. 두 종류의 읽기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이 공허에 도달하면서 <현전 그 자체를 잃어버리거나>. 여기서 "지금 현재 그가 빈곤한 땅으로 한발 한발 반수상태에서 걸어간다는 것을" 그는 안다. 그것이 아닌 경우, 도달함, 그것은 가능한한 가까이 <중성적인 것>에 이르는 것, 그런데 항상 <이상의 것un mot trop>인, 그럼에도 그것이 언어의 진리인, 항상 우리를 앞서는 기원임을 아는 것이다. 되돌릴 수 없이 존재를 잃어버림, 이 잃어버림 안에서 밖에 거의 도달하기, 이것은 오스티나토의 딜레마이다.
언어를 순수한 기원으로 만들면서, 언어의 존재에로 회귀를 거부하면서 데 포레는 처음부터 본푸아가 현전이라고 부르는 것과 단절한다. 이것은 블랑쇼가 "헛된 말"에서 "거의 무한에 가까운 허무주의"를 말하면서 간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데포레는 블랑쇼처럼 "재난의 참을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하는가? 데 포레의 단독성은 이 선택을 거부하는 것이다. 공허 그 자체도 속임수라는 것, 잃어버림이 구원이 아니라는 것, 침묵을 얻음이 없이 말의 잃어버림으로 향하기, 이러한 데포레의 행보는 블랑쇼와 달리 모든 공허, 그것의 무의미한 중성성을 거부하는 데에서, 그리고 이 잃어버림에서조차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 있다.
자라더는 시인은 우리에게 <중성적인 것>과 <존재> 사이의 나눔, 분할의 선을 긋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공허, 그런데 다른 공허, 같은 부재의 다른 정서, 본질적인 물러섬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어떤 의미를 길어내기,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을 길어내는 것 그것은 그녀의 하이데거적인 읽기가 아닌 <내 편>에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소음은 무엇인가? 이 끊이지않는 소음, "정신이 조용히 잠들 때, 심장만이 기억하는" <기억의 무게>, 이 고통스럽게 가깝고 고통스럽게 먼, 낯선 <그>, 내 안의 그를 증언하는 것, 내 안의 이방인을 증언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자신의 이방인의 조건, 비조건" 그것에 대한 "기억" 안에서 "자신을 찾는 데"(레비나스, 다른 인간의 인간주의, p.108) 있을지도 모른다.
<Les hommes se cherchent dans leur incondition d'étrangers. Personne n'est chez soi. Le souvenir de cette servitude rassemble l'humanité.>
<인간은 자신의 이방인의 비조건 안에서 자신을 찾는다. 누구도 자기집에 머물지 않는다. 이 노예의 기억은 인간을 함께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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