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와 사르트르
사르트르에게 그리고 레비나스에게 타인은 만나는 것이지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만남은 그것이 <시선>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얼굴>에 의한 것이든, 이 두 철학자에게 꼭 같이 나의
의도가 아닌 타자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 만남은 <절대적인 사건>으로 나를 전적으로 <변형>시킨다.
명령적으로 다가오는 타자의 요구는 나에게서 나의 대자성을 탈취하거나 나의 향유를 박탈한다. 이 타자의 나타나는 방식은 그가
나타나는 주체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주체가 이 타자를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 주체는 사라진다. 다시 말해, 타자는 자신의
나타남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대신에 그는 나의 파악을 끝없이 회피하며, 나를 탈주체화한다. 이 절대적인 사건, 시선 혹은
얼굴에 노출되는 이 절대적인 사건에 앞선 주체의 실존은 그 앞섬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초월론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이 사건에 도래는 주체에 빚지지 않는다. 반대로 이 사건은 주체가 가진 힘, 소유, 향유를 제거한다. 타자인 타인은
그래서 두 철학자들에게, 비록 한 철학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다른 하나는 이 지옥을 선언한다고 할지라고. 지옥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두 철학자가 나눠가지는 이 공통점들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차이를 방해하지 않는다. 사실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많은 페이지들을 상기시킨다. 두 철학자를 같이 읽는 것은 이 두 철학자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하나의 입장이 다른 이의 눈에서 다시 읽힐 때 달리 보여지는 측면들은 한 철학자가 가진 입장을 보다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문구멍 사이로 안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등 뒤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것이 실제이든, 단지 상상적이든 간에, 나는 내 등에 꽂히는 <시선>을, 그 시선이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간에, 경험한다. 이 경험은 내 안에 <수치심>을 유발한다. 나를 바라보는 자에 대한 수치심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을 유발한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기술하는 잘 알려진 <시선의 현상>의 분석이다. 타자 앞에서
내가 느끼는 수치심은 한편으로 타자의 실존을 나에게 단번에 증명할 뿐만 아니라, 나를 단번에 태타존재 l'être-pour
l'autre로 만든다. 이것이 증명하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의식>이 아닌 타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어서 말하면, 나는 더 이상 <대자존재 l'être-pour-soi>가 아니라
<대타존재l'être-pour-autrui>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대자존재와 대타존재는 사르트르에게 의식의
양태들이다. 그에게 이 두 양태는 절대로 동시적일 수
없다. 내가 태타존재인 경우 나는 더 이상 대자존재이기를 그치며, 반대로 내가 대자존재인 경우 나는 대타존재이기를 그친다.
대자존재로 머물고자 하는 대타존재는 사르트르의 용어를 따르면 <기만적 의식 la mauvaise foi>에 따른
행동일 뿐이다. 내가 타자의 실존에 대한 명백한 의식을 가지는 한에서,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나에 대한 의식은 타자의 시선 안에서
사라지고 나는 전적으로 타자의 시선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나는 전적으로 대타존재임을 느낀다.
나에게 타자의 시선의 나타남은 하나의 <절대적인 사건>(존재와 무, 1943, p. 342)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이유는 시선은 나의 세계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선은 이 문 밖에, 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저 밖에 광경들이 나에게 속하는 나의 세계인 반면에 타자의 시선은 나에게 속한 이 광경, 이 나의 세계를 제거한다.
사실 나는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을 보지 못한다. 나는 단지 그에 의해서 보여진다는 것을 느낀다. 내 눈이 그것을 봄이 없이 내가
여기서 체험하는 것은 사르트르가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을
완성한다고 말하는(316) <타인의 탈/전이적 세계적 현전 la présence transmondaine
d'autrui>(328)이다. 타자의 시선은 나의 봄을 중단시키면서, 나의 세계로부터 나를 추방하고 나를 타자의 세계
안에 나를 그의 대상으로 정립한다. 타자의 시선의 의한 나의 존재의 변화는 그것이 인식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의 변화를 간접적 latérale으로 의식한다. 나의 세계가 그칠 수 없는 출혈 안에서(315) 타자에로 달아나는 것을 느낀다.
이 나의 힘으로 저지할 수 없는 출혈 안에서 나는 나의 대자존재가 대타존재 안에서 비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이 공허는 즉각적으로
사르트르가 <나의 용출>(318)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서 보충된다. 이 나 le moi, 자아는 타자에 의해서
구성된 것으로 나는 이 타자 앞에서 책임을 느낀다. 이 자아의 초월성은 대자의 초월성에 낯선 것으로, 대자의 초월성 앞에서 항상
상처받을 수 있으며,(316) 항상 대자의 요구 앞에서 허약하다. 타자의 출현, 예상하지 않았던 타자의 출현은 대자의 삶을
뒤흔든다. 나의 감성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내 내장 안에서 나에게 강요되는 타자의 실존이 촉발하는 이 출혈, 전복의 경험은
대자의 초월성, 그의 자유에 의존하지 않는 전적으로 낯선 초월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자 안에서, 절대적인 내재성 안에서 이
낯선 초월성을 다만 가능적인 것이 아닌 <필연적인 사실성>으로서, 나의
코기토 안에서 내가 아닌 타인 그 자체로서, 주체로서 발견해야 한다.
위에서 기술된
타자의 시선에 의한 주체의 변화는 많은 부분에서 레비나스가 기술하는 타자의 부름에 의한 주체의 자기로의 돌아감, 그리고 자신
안에서 자기를 떼어내는 과정과 많은 점에서 유사점을 보여준다. 더욱이 시선의 나타남과 타자의 얼굴의 계시는 많은 점에서 서로
닮은 점이 많다. 레비나스가 사르트르의 분석을 다시 취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선 시선과 얼굴은 즉각적이며 직접적이다. 두 철학자가 모두 강조하는 것처럼 <타인의 실존>의 증명은 후설이 말하듯 간접적인 <공감 Einfülung>에 의한 증명이 아닌 즉각적이며, 직접적이다. 레비나스에게 얼굴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듯이
사르트르에게 시선은 세계의 대상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내가 나의 시선을 볼 수 없듯이,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향하면,
그 시선은 즉각적으로 사라지며, 나는 그의 눈만을 발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레비나스의 얼굴은 세계 내의 대상들처럼 색깔과
모양을 가진 것들이 아니다. 내가 그의 얼굴이 못 생겼고 그의 코가 낮고 그의 눈이 검은 색이라는 것을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은
사라진다.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사르트르에게 타인의 실존의 명증성은 인식의 명증성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것은 타자의 시선이
나에게 강요하는 수동적인 겪음, 고통으로부터 혹은 수치심으로부터 유래한다. 나를 <세계 내의 한 대상>으로 만드는 타자의
시선에 의한 그의 초월론적인 주체로서의 그의 실존에 대한 나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과 그 시선의 자유가 정말로 나에게
주어지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절대로 나에게 하나의 인식의 대상으로 주어지지 않는 타자의 시선의 나타남은 세계 안의 나타남이
아니다.(328) 나의 세계도 타인의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이 초세계적 현상은,
그 시선의 확실성 (나의 수치심을 통한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파악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따라서 시선의 체험 안에서 나는
간접적으로 나의 <밝혀지지 않은 대상성 l'objectivité non-révélée>(329), 다시 말해 그 대상을 나의 것으로 밝힐 수 없는, 인식할 수 없는 나의 대상성을 느끼면서, 직접적으로 <타인의 붙잡을 수 없는 주체성 l'insaisissable subjectivité
d'autrui>을 체험한다.
위에서 사르트르는 나에게 <주체>로서 타자가
나에게 파악되어질 수 없듯이, 타자의 시선의 <대상>으로서의 나 또한 나에 대해서 파악되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사르트르와 레비나스에게 이 둘은 모두 <인식>의 일이 아니다. 타자의 시선의 대상으로서의 나의 인식불가능성과 시선의
주체로서의 타자의 인식 불가능성은 대칭적이다. 그런데 이"타자의 현전은 상호적이지 않다". (329) 사르트르에게 타자에 이어서
나의 시선에 의한 타자의 대상화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되돌려 줌의 행위는 이미 보는 주체로서의 타자를
전제한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의 타자성은 그의 시선에 의한 나의 타자성의 발견에 앞선다. 이렇게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사르트르에서 최초의 이방인은 타자이며, 이 타자의 시선은 나를 나 자신에게 이방인으로 만든다. 사르트르와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나타남은
후설에서처럼 세계적 신체, 다시 말해 그 표현성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타자는 나의 상처입은 감성 안에서 드러난다. 나의 가장 깊은 내밀성 안에서 타자는 전적으로 낯선 그리고 외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러한 두 철학자의 공통점은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차이점을 방해하지 않는다.
레비나스의 얼굴의 현시에서 드러나는 타자는 그 본성성 허약한 존재로, 벌거벗은 주체인 반면에 사르트르에게 시선은 자신의 사실성, 우연성의 무게를 거두어내는 자유로서 강한
주체로 나를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부정의 힘을 가진 절대적인 자유의 주체이다. 한 존재가
<자유>와 <사실성>으로 이뤄져 있다고 할 때, 한 철학자는 자유만을, 다른 하나는 사실성만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다른 두 힘, 하나는 허약한, 다른 하나는 강한 이 두 힘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를 전적으로 변형시키는
같은 효과를 가진다. 구체적으로 레비나스의 타자의
허약함, 그의 벌거벗음, 그의 비참은 나에게 죄의식을 유발하면서 나의 지상권과 나의 향유를 박탈하는 명령적인 힘으로 나를 타자의
인질로 만든다. 레비나스는 이 명령적인 힘은 비록 나의 상처받을 수 있음, 더 멀리는 나의 향유할 수 있음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나에게서 연유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명령은 절대적인 타자의 흔적으로 말해진다. 반면에 사르트르에게 이 타자의 힘은 타자 그 자체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록 그의 자유의 힘이 나를
대상으로 나에게 수치심을 불러 일으킨다고 할지라고 그 타자의 힘은 객관적인 어떤 것이 아닌 다만 나의 수치심의 경험 안에서만
느껴질 뿐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수치심이 나에게 타자에 대한 나의 죄의식과 나의 허약함, 나의 상처받을 수 있음을
유발함은 레비나스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이 둘이 같은 효과를 가진다고 해서 같은 결과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타자의
나를 변형하는 힘의 기원의 차이는 그 이후의 두 철학자의 행보를 다른 길로 이끈다. 사르트르에게 나의 수치심에서 유발되는 나의
죄의식은 타자에 대한 책임이 아닌 나에 대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킨다. 반면에 절대 타자, 혹은 데리다의 용어를 빌리면 법의 흔적으로부터 유래하는 힘은 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을
유발한다. 이것은 나의 행위에 대한 나의 책임을 넘어서 내가 저지르지 않은 타자의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을 말한다.
사르트르에게 나의 행위에 대한 나의 책임은 타자가 나에게 유발하는 나의 대상성, 나의 사실성에 대한 책임을 의미한다. 타자의
시선 아래에서 구성되는 <나 moi>, 내가 아닌 이 낯선 나에 대한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이 내가 아닌 타자에
의해 구성된 이 낯선 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나>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레비나스의 경우, 타자의 비참함
앞에서, 그의 얼굴 앞에서 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이 두 책임이 다른 것인가? 결국 두 책임은
모두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을, 나에게 나타나는 타자에 대해 - 그것이 시선에 의해서든, 얼굴에 의해서든 - 대답해야 하는 나의
책임을 말하지 않는가? 또 그들이 말하는 타자 앞에서의 나의 죄의식은 레비나스가 향유라고 말하는 대자존재 le
pour-soi에 대한 죄의식이 아닌가? 좀더 자세히 말하면, 레비나스가 이해하는 <각자 알아서, 자기에 대해서 존재함
chacun pour soi> 으로서의 향유로서의 <대자 pour-soi>에 대한 죄의식을 말하지 않는가? 사실
사르트르의 대자는 레비나스가 이해하는 <각자 자기에 대해서 존재함>으로서의 향유, 이기주의, 자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자가 자기 밖에 존재에 대해서 행하는 자유의 행위는 자기 밖의 것을 자기화하는 행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렇다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가? 그들의 같음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레비나스에게 타자 앞에서 나에 대한, 나의
에고이즘에 대한 책임보다 더한, 그것 이상의, 그것 이전에 타자를 위한,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은 사르트르의 자아의 에고이즘에
대한 책임과는 구분되어져야 하지 않는가? 레비나스의 눈에 이기주의에 대한 자기 책임은 무책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게 그리고 레비나스에게 타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대답해야 하는 이 의무, 이 책임은 타자의 나타남으로부터 - 그것이 시선이든, 얼굴이든 간에 - 직접적으로 유래한다. 나의 대답의 요구는 - 내가 대답을 하든 안 하든 - 이 상호적인 아닌 이 타자의 원초적인 현전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이 요구는 타자로부터 직접적으로 유래하는 것이지 세계의 매개를 통해서, 혹은 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사정이 이러한 경우, 나의 대답은 직접적으로 타자에게 건네져야 하는 것이지, 헤겔에서 처럼 난관적으로 어떤 제삼의 매개를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제삼자를 위한 자리가 없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두 철학자에게 정면 face-à-face의 관계이지, 측면적인 혹은 매개적인 혹은 간접적인 관계가 아니다. 이런 두 철학자의 하나의 다른 하나의 관계는 그렇다고 해서 본질적인 두 철학자의 차이를 감추지 않는다.
두 철학자의 근본적인 차이는 타자가 요구하는 대답에 대한 두 철학자의 대답하는 방식에서 발견된다. 우선 사르트르에게서, 타자의 시선이 나에게 건네는 요구 혹은 질문은 대자로서의 부정하고 무화하는 나의 초월성, 다시 말해 나의 자유와 나의 자율성을 문제 삼는다. 이 경우, 이 질문에 대한 사르트르의 궁극적인 대답의 방식의 방어적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원리에 근거해서, 타자가 제거한 나의 자유와 나의 자율성, 나의 초월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받은 것을 그대로 타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나의 빼앗긴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이어서 내편에서 타자에로 나의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어서 그는 나에게 대타존재이기를 멈추고 그는 세계 내의 사물들 중의 하나의 사물로서 나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타자의 초월성, 타자의 자유를 초월함으로써, 그가 나에게 부여한 나의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나는 나의 대자성, 자기성을 회복한다. 이 동시적인 아닌 상호적인 부정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나와 타자와의 화해할 수 없는 본질적인 <갈등> 혹은 <투쟁>의 관계를 결정한다. 사르트르의 존재론 안에는 두 자유가 동시에 존재할 자리가 없다. 하나가 주인인 경우, 다른 하나는 노예이며, 하나가 노예인 경우 다른 하나는 주인이다. 절대로 그 둘은 동시적으로 함께 주인이거나 노예일 수 없다.
사르트르에게 자유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신의 모든 사실성을 제거하고 <신>처럼 자신을 스스로 근거지우는 것이라면, 나의 자유의 긍정은 나를 세계의 한 사물, 대상으로 만드는 타자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타자가 그의 시선으로 나를 부정함으로써 시작된 이 갈등은 주체로서의 타자의 시선, 그의 자유를 파괴함으로써 나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 결국 타자의 시선에 대답하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하나의 대상성으로 고정함으로써 주체로서의 타자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 부정의 부정은 그렇다고 사르트르가 말하듯 헤겔에서처럼 전체성을 형성하지 않는다. 각각이 다른 하나를 부정하면서 구성되는 이 부정적인 관계는 상호적인 부정성 안에는 헤겔적인 의미의 전체를 관조하는 중성적인 절대적인 외적 관찰자(신과 같은)를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자에게 전체성이 항상 이 전체성을 탈전체화하는 부정성을 피할 수 없듯이 항상 결핍된 전체성, 탈전체화된 전체성 totalité détotamisée으로 머문다. 이 탈전체화된 전체성 안에서 레비나스의 무한의 개념을 엿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어떤 방식으로도 전체화되어질 수 없는 무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레비나스의 무한과 사르트르의 탈전체화된 전체성이 같은 역할과 같은 의미의 폭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두 철학자가 모두 헤겔의 전체성을 비판하면서 도달한 이 두 개념은 결국 이 두 철학자를 서로 아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레비나스는 이 전체화 할 수 없는 타자의 단독성을 사르트르와 달리 그의 자유를 부정하는 대신 인정하고 그 자유에 대한 나의 책임을 말 할 수 있게 되는가? 그것은 타자의 전체화할 수 없는 단독성이 나의 부정성에서 유래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타자의 단독성이 <나의> 부정에 의해서 탈전체화되는 전체성이 아니라, 타자 그 자체가 무한을 증언하는 한에서만, 타자 그 자체가 이 무한을 드러내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레비나스에게 타자가 전체화되지 않는 것은 내가 아니라, 타자의 거부에 의해서이다. 타자가 타자임, 내가 아닌 타자임은 사르트르에서 처럼 나의 부정이 아닌 타자에 의해서이다. 레비나스가 강조하듯이 전체성 안에서 거부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타자이다. 사르트르에게 대자가 즉자존재와 혹은 대타존재와 관계 맺는 궁극적인 목적이 자기원인이고자 하는 나를 신으로 만들고자 하는 쓸데없는 시도라면,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나에게 신의 신성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자유에 대해서, 쉽지 않은, 레비나스가 <어려운 자유>라고 말하는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르트르에게 자유는 자율성autonomie과 동의어이다. 타자의 자율성에 대한 나의 대답은 사르트르에게 대답해야 하는 나의 타율성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타자에게 대답함은 타자의 자율성의 부정을 통해서 나의 자율성, 나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자율성 안에서 드러남, 그것이 그의 벌거벗음, 그의 가난, 비참함으로 드러날 경우, 그러한 나타남은 나의 자기충족, 레비나스가 향유라고 부르는 것을 문제삼는다. 이 타자 앞에서 나는 대답을 강요당한다. 이 자기의 타율성, 타자로부터 강요되어지는 대답의 요구는 그렇다고 해서 대답하는 자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는다. 나는 그 요구에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그 요구에, <자아에도 불구하고 malgré moi>, 나의 에고이즘, 나의 향유, 나의 행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름에 <나 여기 있다 me voici>고 대답할 수도 있다. 타자로부터 오는 의무에 대한 나의 이러한 자유로운 책임은 부정하는 초월적인 사르트르적인 의식으로부터가 아닌, 자기를 내리는, 자기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내어주는 관대함으로부터만 올 수 있는 것이다. 신이 되고자 하는 오만한 편안한 부정의 의식이 모르는 그런 감성, 타자 안에서 신을 보지 못하는 차가운 메두사의 시선은 나임에도 불구하고의 <불구하고>의 불편한 자유를 알지 못한다.
<지옥, 그것은 타자들이다.> 사르트르가 외치지 않더라도 타자는 지옥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지옥은 한 철학자에게는 갈등과 투쟁의 대상으로 다른 한 철학자에게는 책임과 사랑의 대상이 된다. 부정으로서의 사르트르의 순수한 자유의 의식이 알지 못하는 긍정으로서의 타인을 환대하는 의식은 인간의 의식이 지닌 <자기임에도 불구하고>가 지닌사르트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인간의 가능성, 윤리의 가능성일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윤리의 영역의 부재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의 너무 추상적인, 더 나아가 너무 순수한 의식 그 자체의 정의로부터 유래한다. 그가 <자유의 길>이라고 부르는 인간 의식의 삶의 가능성은 그가 『존재와 무』를 마감하면서 고백하듯이 신이 되고자하는 쓸데없는 수난일 것이다. 이 <헛된 고통>에 대해 레비나스는 "인간은 자아의 동일성 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한 자기로 돌아감 안에서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으로 무한히 다시 태어나는 수난"(AE, p.179)이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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