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

마지막으로 말할 사람(1)

aurorepark 2023. 4. 1. 07:28

ein ins Stumme entglittenes

Ich

 

un Moi échappé dans le mutisme

 

침묵 속으로 숨어든 나

 

Wieder Begegnungen mit

vereinzelten Worten wie:

Steinschlag, Hartgräse, Zeit

 

A nouveau rencontres avec

des mots isolés comme:

chute de pierre, durs roseaux, temps

 

다시, 고립된 말들:

추락하는 돌, 억새풀, 시간

과의 만남

 

dass bewahrt sei

ein durchs Dunkel

getragenes Zeichen

 

여기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 언어의 극단적 긴장 속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 흩어진 것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 단일성을 만들지 않는 결합 안에 서로를 유지하고 지지할 필요성, 이로부터 연결된, 의미와는 다른 것을 위해 결합된 말들, 다만 어딘가로 향하는 ㅡ.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 대개 아주 짧은 이 시들 속에서 단어들, 문장들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간결한 리듬에 의해 하양/공백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하양/공백blanc, 이 정지, 이 침묵이 강독을 위한 휴지, 간격이 아니라, 긴장을 놓는 것을 전혀 허락하지 않는 엄격함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엄격함은 공허가 결핍이라기보다 넘침인 것처럼, 의미를 가져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닌 비언어적 엄격함, 공허로 가득 찬 공허와 같다. 그리고 어쨌든, 우선적으로 나를 잡고 있는 것은 여기가 아니라, (휠더린의 후기의 시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대개 아주 거친dur 언어다. 그러나 그 거침은 날카로운 어떤 것, 노래가 될 수 없는 아주 높은 고음의 비명과 같은 날카로움도, 폭력적인 말을 생산하는 것도, 타자를 후려치는 것도, 위협적이고 파괴적인 어떤 의도에 의한 것도 아니다. 마치 타인을 보호하거나, 어둠에 의해 실려 온 흔적/기호signe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파괴가 이미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p. 72-73)   

 

ㅡ 블랑쇼의 이 글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은 1986년이지만 그 초판은 폴 셀랑/ 파울 첼란의 죽음(1970) 직후, 1972년 잡지, Revue de Belles-Lettres, n°2-3에 실렸던 것이다.  86년은 프랑스 출판계에서 그에 대한 중요한 세 권의 책이 연속적으로 출간된 해이기도 하다. 블랑쇼의 Le Dernier à parler(마지막으로 말할 사람) 이외에, 데리다의 Schibboleth,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La Poésie comme expérience (경험으로서의 시)

 

위의 번역은 블랑쇼의 마지막으로 말할 사람의 두 페이지다. 한 페이지에는 파울 첼란의 시의 조각들이 제목 없이 옮겨 적혀 있고 아래 블랑쇼 자신의 번역이 적혀있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이 시들에 대한 그의 읽기가 적혀있다. 마지막 시 조각에 대한 번역은 블랑쇼의 읽기의 마지막 줄에 적혀있다. 

 

위에 파울 첼란의 시들의 출처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조각은"Schneefall, dichter und dichter"(눈이 내린다, 점점 더 무겁게, 무겁게)로 시작하는, 55년 쓴 HEIMKEHR(귀향)이라는 제목의 시의 부분이다. 이미 이 시에서 우리는 시인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눈', '하양', 그 이미지들이 주는 '침묵'이 나타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는 시집 SPRACHGITTER/GRILLE DE PAROLE/말의 창살/격자/망에 실린 시로,  하나는 SOMMERBERICHT/RAPPORT D'ÉTÉ/여름의 보고에서, 다른 하나는 SCHLIERE/STRIE, TAIE에서 따온 구절들이다. Schliere는 눈에 하얗게 낀 백반, 혹은 눈에 난 줄무늬 상처를 의미한다. 

 

블랑쇼를 사로잡고 있는 것, 그가 잡고 있는 것은 고립된 말들 ㅡSteinschlag, Hartgräse, Zeit ㅡ속에서 드러나는 거친hard/dur 언어다. 타자를 후려치거나 위협하거나 폭력을 행하는 그런 거침이 아니라, 마치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어둠에 의해 실려 온 흔적/기호signe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파괴가 이미 일어난 그런 거친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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