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nselm Kiefer pour Paul Celan
블랑쇼는 <마지막으로 말할 사람 Le dernier à parler>에서 파울 첼란의 시들을 읽는다. (이 글은 <<다른 곳에서 오는 목소리>> 안에 실려있다.)
<<플라톤은 죽음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파울 첼란은 그 증인을 증언해 줄 자가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리는 동반자를 선택한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우리 밖에 무언가를 위해서.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없는 선을 건너기 위해서 우리의 결핍을 요구한다. 앞서 잃어버린 동반자, 상실 그 자체는 이제 우리의 자리에 있다.
어디에서 그를 위해 증언해 줄 증인을 찾을까?>> (다른 곳에서 오는 목소리, p. 71)
....qui a besoin que nous manquions à nous-même pour passe la ligne que nous n'atteindrons pas.
도달과 기다림 사이, 도달함이 없는 기다림, 도달의 순간에도 여전한 기다림, 이 죽음의 불가능성, 블랑쇼 사유의 주요 모티브.
이 자기에서의 결핍, nous manquions à nous-mêmes, 세계의 결핍처럼, "le monde manquait" 모든 것의 결핍, 그리움, 우리는 세계 없이 존재한다. 블랑쇼는 <나를 동반하지 않는 자Celui qui ne m'accompagnait pas>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 결핍, 쇠퇴를 모르는 이 결핍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죽는 모든 것은, 심지어 대낮에, 인간에게 접근해서 인간에게 죽어감의 비밀에 대해 묻는다.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나는 더 이상 나의 동반자를 부를 권리가 없다는 것을 멀리서 느낀다. 그가 내 목소리를 여전히 들을까? 현재 그는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아주 가까이? 어쩌면 내 손 아래? 내 손이 천천히 밀어내고 다시 한 번 뿌리치는 게 그인가? 그를 뿌리치지 마. 그를 밀어내지 마. 반대로 그를 잡아댕겨. 네 쪽으로 인도해. 그에게 길을 내줘 그를 불러. 천천히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불러. 그의 이름을? 그러나 나는 그럴 권리가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할 수 없다고? 지금 이 순간에? 그러나 유일한 순간이다. 급박하게 필요하다. 너는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았다. 본질적인 결핍. 보충해야 한다. “그것은 해야 한다!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잊었는가? 왜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는가? 왜 타자가 이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가?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몰약을 마신게 나인가? 그였던가? 모두였던가?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어떤 오해가 있었다. 끝장을 내야 했다. 대낮의 모든 힘이 이 끝을 향해 움직이고 끝에 이르러야 했다. 어쩌면 곧 이어서 그가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이 도달했을 때, 잠시의 흩어짐 후에, 모든 것이 이미 사라졌다. 낮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p. 173-174)
<기다림, 망각>에서 블랑쇼는 불가능한 죽음에 대해 말한다.
<<그는 기다림을 견뎠다. 기다림은 그를 영원으로 만들었다. 지금 그는 다만 영원히 기다리는 것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기다림은 기다린다. 기다림을 거쳐서 기다리는 자는 기다리면서 죽는다. 그는 죽음 안으로 기다림을 운반한다. 죽음을 기다림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은 누군가 죽었을 때 여전히 기다려져야 하는 것의 기다림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 기다린 사건처럼 간주되는 죽음은 기다림을 끝낼 수 없다. 기다림은 죽어감의 사실을 기다림을 그치기 위해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만든다. 기다림은 죽음은 기다려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한다.
기다림 안에 사는 자는 그에게 삶이 기다림의 공허로 오는 것을 본다. 기다림이 삶 너머의 공허처럼 오는 것을 본다. 이 두 운동의 불안전한 구분할 수 없음은 이제부터 영원히 항상 기다림의 공간이 된다. 매 발자국, 우리는 여기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머에 있다. 그러나 죽음에 의해 그 너머에 도달함이 없이 우리가 이 너머에 도착하듯이,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고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본질적인 성질이 기다림 안에서만 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앎이 없이.
기다림이 있을 때, 어떤 기다림도 없다. 기다림의 운동 안에 죽음은 기다려질 수 있기를 그친다. 내밀한 조용함 그 한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기다림에 의해 돌아서고, 기다림은 죽음이 도달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치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기다림은 죽음을 중단 속에서, 해소 속에서 유지한다. 그리고 기다림의 공허한 등가에 의해 초월된 모든 순간에
기다림과 죽음의 이상한 대립. 기다림은 죽음과 무관한 기다림 안에서 죽음을 기다린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기다림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죽음은 기다림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la mort ne se laisse pas attendre.)
죽음들이 죽어가면서 되살아나고 있다. >>(p. 55-56)
“Niemand zeugt für den Zeugen.” (in Aschenglorie)
“누구도 증인을 위해 증언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에 철학의 처음에 파르메니데스는 "어떤 길도 없는 비-존재의 길을 가지 말라"고, 2000년이 흘러 비트켄슈타인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리고 피울 첼란은 "누구도 증인을 위해 증언하지 않는다Niemand zeugt für den Zeugen.” (in Aschenglorie)고 말한다. 블랑쇼는 <그렇다. 글쓰기에는 침묵이 필요하다>라는 글에서 "비트겐슈타인에 반해서 나는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것이다. 정확히 바로 여기에서 글씨기의 필연성의 자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블랑쇼의 모든 글쓰기는 바로 이 넘어가는/넘어갈 수 없는 발걸음에 바쳐진다. 그리고 <저 너머로의 발걸음>에서 블랑쇼는 "산자들과 죽은자들을 넘어서 아직도 말해야 할 말, 증명의 부재를 증언한다. Parole encore à dire au-delà des vivants et des mots, témognant pour l'absense d'attestation."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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