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

재난의 글쓰기(20)

aurorepark 2021. 4. 9. 14:39

수동성과 질문 : 수동성은 아마도 질문의 끝에 놓일 것이다. 그런데 수동성은 여전히 질문에 속하는가? 재난은 질문될 수 있는가? 어디서 대답, 질문, 긍정, 부정이 끼어들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할 수 있는가? 예언이나 금지의 표시와 같은 모든 표시를 회피하는 말하기는 어디에 있는가? 

 

 

 레비나스가 언어를 접촉과 같은 것으로 정의했을 때, 그는 언어를 직접성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심각한 결과를 동반한다: 왜냐하면 직접성은 절대적인 현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흔들고 모든 것을 뒤집는다. 접근, 부재, 심지어 요구 없는 무한. 그런데 신비한 일치의  유괴.  즉각성은 모든 매개와의  간격일 뿐 아니라, 직접성은 더 이상 말해질 수 없는 무한한 현전이다. 왜냐하면 관계 그 자체는ㅡ그것이 윤리적이든 존재론적이든 ㅡ어둠 없는 밤 안에서 단번에 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항들도, 관계도, 저 너머도 없다ㅡ신 그 자체도 여기서는 무화된다. 

 

아니면, 즉각성은 과거로 이해될 수 있다. 해결 불가능한 역설을 만드는 것. 그래서 우리는 재난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잊힌 불행과 직면한 우리 안에 인내가 그 표증, 무의식적인 연장인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과거에서 즉각성을 생각할 수 없는 것 이상으로  즉각성을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인내할 때, 그것은 현재로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는 무한한 불행과의 관계이다. 그런데 우리를 기억 없는 과거와 관계시키면서. 타인의 불행과 불행으로서의 타인.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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