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는 레비나스의 비대칭적인 나와 타인의 대면의 관계를 말하면서, 나를 향해 돌아서는 타인은 외재성으로서, 나로부터 무한히 되돌아서는 것처럼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 "되돌아서는 현전은 "말 안에서 말하는 것"(L'entretien infini, p. 89), "우회의 말 la parole du détour"(40)이라고 불린다. 이 운동, 이 우회, 이 방식은 레비나스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본질적이다.
소통의 이 공간은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인 "공간""(TI, 238)으로, 여기에는 소통의 항들 사이의 상호성을 방해하는 일종의 "공간의 구부러짐"(TI, 323)과 같은 것이 있다. 말하자면 나와 타인은 같은 '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레비나스가 위에서 "공간"이라는 말을 따옴포 안에(괄호 안에) 놓았을 때, 그것은 이 말이 우리가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외적 공간이 아니라, 유비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이 "구부러짐(곡률)의 비규칙성은 (블랑쇼에 의하면) 비연속성에까지 이른다"(l'entretiren infini, 104). 이러한 구부러짐, 더 나아가 '단절'을 만드는 '균열'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공간은 레비나스에서 주체성의 영역으로 "다만 존재를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의 한 방식une manière d'être으로 전체성에 대한 저항"(TI, 46)인 동일자의 '내적 삶', "코기토의 공간"(TI, 47)안에서 산출된다는 것을 우선 기억하자.
존재의 외재성의 진리는, 측면적인 봄에서, 측면적 관계로부터 내재성에 대한 대립 안에서 지각되는 외재성 안에서가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전적으로 봄의 관계가 아닌, 이 봄보다 더 나아가는 대면 안에서" 산출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때 대면은 항상 외재성과 근본적으로 분리된, 스스로 자기를 유지하는 한 점인 '자아'로부터만 세워진다는 것을 주목하자. 따라서 이 분리된 점, 이 임의적인 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주체적인 영역을 망각할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 경우, 존재의 진리는 이 영역과, 주체의 (존재의) 방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진리는 존재의 이미지, 그 본성의 이념이 아니라, 봄을 변형하는 주체적인(주관적인) 장 안에 놓인 존재이다. 그런데 이 존재는 다만 봄의 변형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외재성이 나에게 명령으로, 권위로, 즉 우위로 나타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상호주관적인 공간의 이 구부러짐은 거리를 위로 굴절시킨다. 이것은 존재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의 진리를 가능하게 한다."(TI, 323)
존재의 이미지, 이념, 봄은 모두 플라톤의 eidos, 더 나아가 후설의 eidos로 읽어도 무관할 것이다. 이 eidos는 불어에서 '얼굴visage'로 옮겨지는 것이기도 하다. 레비나스의 '얼굴'은 이 eidos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봄, 이 직관적인 봄, 오래전부터 그 안에서 진리가 드러나던 그 봄의 변형, 주관적인 장 안에서 이 굴절은 레비나스가 이 책(<전체성과 무한>)의 주제는 "주체의 주체성을 구해내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또 "윤리는 관점optique"이라고 했을 때, 그 안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굴절은 우리가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 그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도, 그것을 미리 예측하고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외재성이 자신의 진리 안에서 실행되는 방식 그 자체"(TI, 323), 유한 안에 무한이 실행되는 방식 그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전적인 반성의 불가능성"은 그렇다고 해서, 레비나스가 지적하듯이, 주체성의 결함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위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주관적인 공간의 구부러짐 밖에 존재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레비나스가 말하듯, 외재성이 실행되는 상호주관적인 이 공간의 구부러짐과 대상들에 대해서 우리가 임의적으로 취하는 관점들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놀라운 것은 이 진리가 산출되는 방식이다.
"공간의 구부러짐은 인간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밖으로부터, 분리된ㅡ혹은 성스런saint[이 말은 희브리어의 kadosh 즉 '분리'를 의미한다고 한다]ㅡ얼굴로부터 우리에게 도래하는 그의 외재성, 다시 말해 나에 대한 부름은 그의 진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우연으로서 그의 '객관성'의 핵에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진리를 산출한다. '상호주관적인 공간의 구부러짐'이라는 은유에 의해 우리가 제시하는 존재와 그것의 이념의 진리의 잉여surplus는 모든 진리의 신적 의도를 의미한다. 이 '공간의 구부러짐'은 아마도 신의 현전일 것이다."(324)
이 잉여, 이 넘침, "모든 지향 그 자체 안에 이 지향의 초월ce dépassement de l'intention dans l'intention elle-même"(Méditations cartésiennes, 86)", 이 후설의 "Mehrmeinung"은 모든 의식의 본질적인 계기로서 모든 의식에 내재하는 것이다. 잠든 의식의 깨움으로서의 이 환원("le plus dans le moins" 작은 것 안에 큰 것, 최소 안에 최고, 이하 안에 이상)은 그 환원의 궁극적인 단계로서 상호주관적인 환원 안에서, 타인과의 만남 안에서만 "하나를 위한 다른 하나(l'un pour l'autre)"로서, '잉여가치'로서 산출된다.
이 비공간적인 외재성은 타자성을 동일자로 이끄는 운동, 작업에 반해서 레비나스가 "동일자에서 타자로 가는 운동"(Humanisme de l'autre homme, 44)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 되돌아 옴이 없는 이 동일자에서 다른 인간에로 향하는 운동을 레비나스는 이제 인간의 고유한 기능(oeuvre/ergon/energie/energeia), 고유한 실천, 고유한 일, 고유한 작업, 작품이라고 부른다.
이 다른 인간으로 향하는 운동, 비-존재-신학적인 초월성은 그 실천에 있어서 가장 낮은 것, 가장 비천한 것, 인간의 배고품의 비천함, 즉 인간의 신체성에서 시작하고, 그 안에서 그려진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동물적 경험은 존재의 역사의 파열로서, 틈, 균열, 가시적인 신들과 다른 어떤 신이 자리하는 너머로 가는 통로를 여는 파열로서 생각해야 한다."(Dieu, la mort et le temps, 198) 철학의 세속화와 다른 의미에서, "배고픔의 제거에 의한 세계의 세속화"는 역설적이게도 레비나스에서 어떤 신un Dieu, "비-공간적인 밖", 타자, 초월성에 대한 질문으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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