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nnaître ontologiquement, c’est surprendre dans l’étant affronté, ce par quoi il n’est pas cet étant-ci, cet étranger-ci, mais ce par quoi il se trahit en quelque manière, se livre, se donne à l’horizon où il se perd et apparaît, donne prise, devient concept. » (TI, 34)
"존재론적으로 (무엇인가ㅡ타자, 존재자ㅡ를) 안다는 것은 그 직면한 존재자에서 (그 존재자를) 자의로 파악하는 것/훔치는 것이다. 이러한 파악에 의해서 존재자는 더 이상 이-존재자, 이-낯선 것/(자)이(가) 아니게 되고, 존재자는, 그 방식이 무엇이든지 간의 어떤 방식을 통해서(어쨌든), 드러나면서 배반된다. 다시 말해 존재자는 그가 자신을 잃어버리면서 나타나는, 다시 말해 자신을 내어주면서 사로잡힐 계기를 제공하는 지평에 버려지고(지평으로 인도되고/지평의 지배에 종속되고), 그 지평에서 주어지며, 결국 존재자는 개념이 된다."
레비나스의 문장은 항상 놀랍다. 누가 그의 글이 프랑스어가 아니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그의 글은 그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글의 스타일에서 놀랍다. 위의 문장에서 밑줄친 단어들은 조금의 우연도 없이 선택된, 그 말들의 본래적 의미들을 따라서 정교하게 선택된 단어들이다.
우선 레비나스는 connaître, surprendre의 목적어를 쓰지 않는다. connaître ontologiquement, 존재론적으로 안다는 것/인식한다는 것, 혹은 존재론적 인식/앎은(레비나스가 말하는 서양철학은), 다시 말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직면한, 마치 벽에 부딪치듯이, 넘어서야 어떤 것으로, 즉 장애물로서, 혹은 직면한 '적'처럼 부딪친 존재자, 혹은 타자, 타인 안에서 (그 존재자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surprendre'. 여기서 surprendre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더 나아가 폭력적으로, 누군가를 누군가의 비밀을 훔치는 것, 그래서 이 말은 abuser남용하다, attaquer공격하다, dérober훔치다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파악으로 인해ㅡ이런 이유로 레비나스는 보통 사용하는 prendre라는 단어 대신에 surprendre라는 단어를 선택했다고 나는 생각한다ㅡ존재자, 타인, 타자는 여기-존재자, 무엇과도 교환될 수 없는 유일한unique한 그 자신의 존재성의 독특성, 그의 이방성을 잃어버리고 '개념'이 된다. concept/Begriff, 다시 말해 prendre à la main즉 "손으로 잡다"라는 이 말의 본래적인 폭력적인 의미가, 타자의 동일자로의 환원이 밝혀진다.
또 위에 se trahir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도 레비나스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trahir'라는 말은 우선 (누군가를) '저버리다(livrer ou abandonner)', '배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이 말은 또한 어떤 비밀을 누설하다, 드러내다(livrer ou révéler)의 의미를 가진다. (trahir는 그 말의 어원 'tradire/tradere'는 transmettre, livrer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번역은 배반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뒤에 다시 se perd et apparaître라고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사물은 혹은 존재자는, 타자는 자신을 드러내면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사물은 어디서 드러나면서 동시에 자신을 잃어버리는가? 레비나스는 그곳을 지평이라고 부른다. 이 지평은 아무 지평이 아니라, 현상학적인, 존재론적인 지평에서, (바로 위에 문장에 se palçant dans la clarté, 즉 빛의 지평에서) 다시 말해 '세계' 안에서 사물은 드러나면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세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그곳에서 파악되고, 유린된다.
또 다른 하나, donne prise, 위의 문장에서 se perd et apparître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불어의 donner prise는 파악될être prise 기회occassion를 제공하는 것donner을 말한다. 즉 사물의, 타자의, 타인의 허약함을 표시한다. 나타난다는 것,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s'exposer는 언제나 나네 의해(혹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의 '나'에 의해) 파악될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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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는 같은 페이지, 같은 문장에서 surprendre라는 말을 또 사용한다. 그 문장을 읽으면 다음과 같다: "Que la raison soit en fin de compte la manifestation d'une liberté, neutralisant l'autre et l'englobant, ne peut surprendre, depuis qu'il fut dit que la raison souveraine ne connaît qu'elle même, que rien d'autre ne la limite."
여기서 surprendre는 위에서와 '꼭 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결국 이성은 자유의 현시라는 사실은ㅡ최상의 이성은 자기 자시만을 알고,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해진 이래로ㅡ더 이상 (우리를, 나를) 놀래킬 수 없다."(설명을 하나 붙이자면 이 문장에서 nous 혹은 me가 빠져있다. 이런 글쓰기는 레비나스 글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다만 me nous가 빠진 것이 아니라, 이 단어가 가지는 예전의 본래적인 의미로부터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아주 오랜 표현 중의 하나로 "L'amour nous surprend, nous emporte." 즉 사랑은 우리를 사로잡고(se laisser prendre, être surprise de, 즉 수동적인 의미를 가진다) 우리를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간다/실어간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ne peut surprendre는 앞의 예문에서 본 것과 같은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성이 자유의 현시라는 사실은 우리를 사로잡지도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 없다.)
레비나스의 언어들에서 놀라운 것은ㅡ그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가진 사람이 아니고, 배워서 그의 언어가 된 사람이다. 그가 프랑스보다 불어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사랑했던 언어이기도 하다ㅡ이 단어는 다만 부정적인 의미로(첫번째의 의미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타자, 타인은 항상 나를 "surpredre"하는 자이다. 마치 사랑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 이 문장을 읽게 된 동기는, 한살림님이 던져 준 질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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