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성과 무한 강독

2. A. 삶으로서 분리

aurorepark 2012. 2. 17. 06:12

<전체성과 무한>의 2부, "내재성과 경제"는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첫 장은 "삶으로서 분리 La séparation comme vie"라는 제목 아래에 6개의 절을 가진다. 111쪽에서 126쪽에 이른다. 1부 "동일자와 타자"의 이론적인 전개와 대조적으로 2부에서 레비나스는 타인과의 만남 이전의 자아의 자기동일화, 개체화의 과정으로서 향유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에 전념한다. 이 장의 제목이 지시하듯이 "분리는 삶"이라고 말해진다. 어떤 삶? 향유로서의 삶, 에고이즘과 행복의 완성으로서의 삶, 그리고 그런 삶, 향유, 행복의 역설, 독립적이면서 의존적인 이 삶의 역설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전에 삶을 설명하던 일련의 범주들과 지평들을 떠난다. 예를 들어 존재와 세계와 결핍의 지평들을 떠난다. 그로부터 어떤 질서들이 전복된다. 예를 들어 삶과 존재, 행복과 존재의 질서가 바뀐다. 우리는 이 장에서 "주체의 주체성의 기원"이 발견되는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1. 지향성과 사회적 관계(111-112)


짧은, 전체 장의 서론격에 속하는 이 절에서 레비나스는 가야할 길의 몇몇 지표들과 가는 길에 주의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서 말한다. 


우선 레비나스는 분리의 형이상학적 관계는 후설에서처럼 지향적인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고, 그리고 형이상학적 관계에서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처럼 다자인의 세계-내-존재의 염려와 행위 안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식의 행위와 구분되는 형이상학적 관계는 "사회적 관계"(111)로 이것은 "탁월한 par excellence 경험"이라고 말해진다 [레비나스가 어떤 단어 다음에 붙이는 par excellence는 - l'expérience par excellence 탁월한 경험, la solitude par excellence 탁월한 고독 등등 - 그 말이 기존이 가지는 의미 이상이거나 이하일 때 사용한다]. "그 관계는 자기를 표현하는 존재자 앞에, 다시 말해 자기 안에 머무는 존재자 앞에 자리하기"(112)때문이며, "자기를 표현하는 s'exprime", "자기 안에 머무는 demeure en soi" 이 존재자(kathauto)에 대한 경험은 쌓여서 지식이 되는 그런 경험이 아니기에, 이 경험은 사실 "경험"되지 않고, 다만 주체의 상처로, 균열로 느껴질 뿐(s'éprouve)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에 무한l'in-fini에 대한, 유한 안에 무한을 간직한 얼굴에 대한 경험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말이다. 객관화하는 행위와 초월적인 행위를 구분하면서, 레비나스는 우리가 가는 길이 "지성주의"에 대한 박박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반대로 "지성이 즉자존재에 대한 욕망이라면, 형이상학은 그것의 보다 엄격한 전개"로 향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두 종류의 초월성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는 엄격한 전개에 의해 무한의 이념이 우리를 타자로 이끄는 초월성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으로 향하는 초월적 활동의 하나로 여전히 동일자로 머무는 그런 초월성이다.


따라서 동일자 안에서 산출되는 분리의 간격에 대한 분석이 - 이 장은 이 분석에 바쳐진다 - 이 요청된다. 왜냐하면 분리 안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두 항 사이의 결합은 분리를, 그 말의 탁월한 의미에서, 유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두 항은 관계 안에서 그 관계로부터 면제(s'absout)되는 "절대"로 머물기 때문이다. 앞서서 레비나스는 이런 나와 타자의 관계를 관계 아닌 관계, 그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탁월한 관계이다. 이 분석 안에서 분리는 "내재적 삶, 혹은 정신적 삶 psychisme"으로 밝혀지고, 내재성은 "거주, 경제를 의미하는 자기집 안에 현전 présence chez soi"(112)으로 나타날 것이다.


자기집chez soi은 레비나스 철학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범주이다. 이것은 다자인의 세계-내- 존재를 대체하는 범주이다.


2. ...으로 살기(향유). 성취의 관념 (112-117)


"우리는 밥으로, 공기로, 빛으로, 광경으로, 일로, 이념으로, 잠으로...산다. 여기서 우리가 사는 이것들은 표상의 대상들도, 삶의 수단들도, 삶의 목적들도 아니다"(112).


레비나스가 기술하는 "...으로 살기 vivre de..."에서, 우리는 단번에 향유와 그것의 독립성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도구와 궁극적인 목적론finalité의 세계를 떠난다. 우리가 사는 것들은 하이데거가 이해하듯이 도구가 아니라, 그것들은 향유의 대상들로, 말하자면 "이미 어떤 맛/멋(le goût)이 입혀져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벌거벗은 실존과 같은 것이 아니다. 또 하이데거의 도구들이 반송의 구조에 의해 목적론에 종속되는 것과 달리 '...으로 살기'는 독립성 그 자체, 향유와 그것의 행복의 독립성을 표현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자아의 전율 그 자체 frisson même du moi"(116) 라고 레비나스가 표현하듯이, 향유는 자아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존재에 대한 행복의 우선성을 말한다. 다시 말해 존재에 대한 염려에 앞서서 향유, 행복이 있다.


반면 "행복의 이러한 독립성은 내용에 의존한다"(113). 행복이 숨쉬고, 보고, 먹고, 일하고, 읽고, 도구를 사용하는 것 등의 기쁨이거나 고통이듯이 무엇인가에 의존한다. 그런데 이 의존의 관계는 지향적 관계도 원인과 결과의 관계도 아니다. 다시 말해 내용 그 자체가 행복의 원인이 아니다. 내가 사는 이 모든 것이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수단으로서 연료처럼 나의 존재의 기능을 기능하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닌 것처럼말이다. 또 타자의 에너지가 나의 힘으로 전환되는 타자의 동일화는 단순한 타자의 자기화가 아니라, 향유의 본질 안에 속한다. 내가 먹는 밥, 고기, 타자의 에너지는 향유 안에서 나의 힘, 나의 것이 된다[레비나스가 사용하는 타자라는 말을 구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레비나스가 소문자 l'autre는 타인l'Autrui으로서의 타자l'Autre와 구분되는 것으로, 전자는 내 밖에서, 자연 혹은 세계 안에서 내가 취하는 대상적 타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자기화할 수 있는 타자이다. 반면에 타인으로서의 타자는 나의 것으로 자기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향유는 이런 의미에서 보면 양육alimentation이다"(113). 배고품은 욕구이지만, 그것은 탁월한 의미에서 결핍으로,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에 대한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이 내용들은 직접 체험되고,  이것들은 삶을 양육하고, 우리는 자기의 삶을 산다". 다시 말해 우리는 대상들과 관계할 뿐만 아니라 삶을 먹이고 충족시키는 그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한다. "실존하다"라는 동사가 실존철학 이후에 타동사가 된 것처럼, "우리는 다만 고통, 행복이 아니라, 그 고통으로, 그 즐거움으로 존재한다. 이런 방식으로 자기의 활동에 의해 자기를 먹이는 이 활동은 정확히 향유이다.  그래서 "사물들은 항상 직접적인 필요 이상이다. 그것들은 삶의 축복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속을 보증하는 일로 산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충족시키기(기쁘게 혹은 슬프게 하기) 때문에 일로 산다. 첫 번째의 "일로 사는 것"이 돌아가는 곳은 바로 이 두 번째의 것이다. 다만 사물들이 제 자리에 있을 경우에 한에서 말이다."(114). 


따라서 "내가 버는 삶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l'il y a(es gibt)처럼 "벌거벗은 실존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나를 기쁘게 혹은 나를 슬프게 하는 구체적인 내용들로, 지식이 아니라 향유, "삶의 에고이즘 그 자체"(115)이다. 여기서 이기주의는 도덕적 판단 이전의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우리가 보겠지만 이 향유의, 이기주의의 자아만이 타자를 만날 수 있고, 그로 인해 그 자아에 금이 갈 수 있다. 삶은 "존재하고자 하는 벌거벗은 의지가 아니라,...삶에 대한 사랑, 다시 말해, 나의 존재가 아닌 것과의 관계, 그런데 나의 것보다 더 귀한 것들 - 생각하고, 먹고, 자고, 일고, 일하고, 태양 볕 아래 몸을 데우는 것 ... - 이다"(115). 바로 이 나의 실체와 다른 이 내용들이 나의 삶을 가치 있게한다. 따라서 존재가 나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 존재를 구성한다. 삶의 실재는 이미 행복의 수준에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 너머에 존재한다. 행복은 존재의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행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 때문이다"(115).


...으로 살기, 향유, 행복은 순수한 존재의 정신적 평정(ataraxie)이 아니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말하듯 "내가 하는 모든 것과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내가 사는 것"인 성취이다. 다시 말해 "향유는 목마름을 기억하는 데에서 이뤄지며, 향유는 바로 이 목마름의 해갈이다. 다시 말해 자기의 잠재태를 기억하는 현실태"이다(116). 따라서 활동은 이 행복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활동의 조건은 익명적인 존재가 아니라, 바로 행복이다. 행복과 더불어 모든 활동은 시작한다. 이렇게 자아는 향유하는 에고이즘의 자아로, "주체성은 자신의 기원을 이 향유의 독립성과 지상권 안에서 취한다"(117).


3. 향유와 독립성(117-119)


우리는 앞서서 "...으로 산다"의 구조가 가진 독립성과 의존성에 대해서 봤다. 이 절에서 레비나스는 우리의 향유, 행복의 이 의존성의 본성은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우리는 밥과 일의 노예인가, 아니면 그것을 향유하는가? 레비나스는 "우리는 우리가 사는 것들의 노예가 아니라, 그것을 향유한다"(118)고 말한다. 욕구 혹은 필요는 플라톤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결핍으로, 칸트의 도덕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수동성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욕구 안에서 행복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무엇으로 살기의 역설"(118)이 존재한다. 인간은 그가 의존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행복한 의존dépendance heireuse". 이것은 지배가 아닌 의존안에 어떤 지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것이 바로 쾌락의 정의일 것이라고 말한다. "...으로 살기, 이것은 의존성이 지상권으로, 에고이스트적인 본질적인 행복으로 화하는 것"(118)이라고 말한다. 이 의존성에 의한 독립성은 바로 레비나스에게 자아의 구조이다. 레비나스에게 결핍은 철학의 처음에 놓이지 않는다. 많은 철학들이 악에서 결핍에서 그것의 충족으로 향한다면, 레비나스에게는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의 인간은 타자의 의존하면서도 자기 안에서 충만하고 만족한 존재이다. 레비나스에게 분리된 존재는 행복한 자아이고 자기 충족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타자"안에 거주하는 것 habtation dans l'"autre""(119)은 자신의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로써 "향유는 무신론적 분리를 성취한다". 여기서 분리는 추상 안에서 분리 아니라, "토착의 자아의 자기 집에서 실존"(119)으로서 삶을 의미한다.    


삶이 의존하는 타자인 먹거리와의 이 관계 안에서 향유는 아주 특이한 독립성, 행복의 독립성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삶인 이 삶은 바로 행복이며, 삶은 그래서 "정감이고 감정이며. 사는 것, 그것은 바로 이 삶을 향유하는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한다. <전체성과 무한>을 시작하면서, 레비나스는 렝보의 싯구를 빌어 "진정한 삶은 부재한다"라고 이 책을 시작한다. 우리가 말하는 이 향유로서의 삶,  이방인이 아닌 토착의 자아, 사막에서 유랑하는 자아가 아닌 자기 집에 머무는 자아, 우리가 지금 머무는 이 자아는 자아의 첫 번째 탄생에 해당된다. 아직 타자와의 만남이 없는 자아, 아직 진정한 삶의 경험과 만나지 않은 아직 자아의 균열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만족한 자아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아, 이 향유의 자아는 바로 진정한 삶의, 주체의 주체성이 그 기원을 취하는 최초의 장소이다. 이 장소는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다. 이 자아의 향유가 없는 곳에서는 타자와의 만남도 일어나지 않는다.


4. 욕구와 신체성(119-121)


그럼 이 향유의 자아, 동일자와 신체의 관계는 무엇인가? 어쩌면 이 질문 자체는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에서 욕구의 자아는 감각적인, 감성적인 자아로 처음부터 신체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에게 감성은 칸트에서처럼 오성과의 결합을 통해 인식에 이르는 인식의 근원이 아니다. 후설에 대해서 말하면서 레비나스는 다른 곳에서 "감성과 감각적인 성질들은 범주적 형식 혹은 이념적 본질로 이뤄진 소재étoffe가 아니라, 주체가 범주적 직관을 완성하기 위해 이미 거기에 놓여있는  자리situation"라고, 그리고 이 자리, 즉 "나의 신체는 다만 지각된 대상이 아니라, 지각하는 주체로, 대지는 사물들이 나타나는 기반이 아니라, 주체가 지각을 위해 요구하는 조건이다"(EDE, 132). 이제 감성은 오랫동안 인식을 담당했던 사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식의 조건으로서 주체가 놓여있는 신체에 속한다. 감성은 말하자면, 의식은, 자아는 이제 신체화 혹은 육화되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의식이, 자아가 처음부터, 본래적으로 육화되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의식은, 자아는, 오랫동안 우리가 믿었던 것처럼 신체에 대해 자유로운 의식이 아니라, 신체에 대해 수동적이라는 것을 말할 것이다. 아직은 이른 이 진술들을 잠시 내버려두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  


신체가 향유 안에서 자신을 먹이고 유지하기 위해 자기 밖에서, 타자에서, 세계 안에서 취하는 것들에 대한 의존은 즉각적이고 순간적이지 않다. 그것은 시간 안에서, 노동과 경제에 의해서 일어난다. 타자에의 의존이 시간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이 의존성을, 이 타자의 타자성을 임시적으로 정지시키고 지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처럼 욕구를 결핍으로 이해하는 것은 "욕구를 시간과 의식이 없는 아직 구조화되지 않은 사회 안에 놓는 것"(120)이다. 그런데 욕구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이와 반대로 인간이 의존하는 세계와  인간 사이를 분리하는 "거리"이다. 이 거리 안에서 인간은 그가 의존하는, 그가 그로부터 자신을 먹이는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이 거리는 시간으로 전향할 수 있으며, 세계를 자유로운, 그런데 의존적인 욕구의, 필요의 존재에 종속시킨다"(120). 바로 여기에 자유로운 존재와 의존적인 존재 사이의 절합 articulation 그 자체인 신체의 애매성이 자리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식물적 의존상태에서 해방된 동물의 욕구가 여전리 투쟁과 두려움과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신체가 해방된 외적 세계는 여전히 그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구는 노동의 시간, 타자의 타자성을 나의 지배로 넘기는 시간이기도 하다"(120). 추위와 배고품은 추위를 피할 피난처를 찾고, 세계에 대한 이 모든 의존성은 욕구가 되고, 세계에 대해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욕구의 만족을 보증하는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 타자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동일자로서"(120)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익명적인 위협으로부터 존재를 떼어낸다. 나의 신체는 다만 그것이 의존하는 것에 노예가 아니라, "소유하고, 일하고, 시간을 가지고, 내가 사는 것의 타자성 그 자체를 극복하는 방식" 그 자체로, "신체는 자기의 소유 그 자체이다(211).


이 욕구들이 물질적인 욕구임이, 다시 말해 만족되어질 수 있는 것임이 알려지자 마자, 자아는 그에게 결핍된 것이 아닌 것으로 향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분하고, 욕망으로 열린다. 여기서 나의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타자l'autre와 달리 동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저 높은 곳의 타자l'hauteur de l'Autre에 대한 욕망이 생겨난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자연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미 이미 인간의 에고이즘은 아래에서 위로 머리를 쳐든 인간의 신체에 의해, 저 높은 곳에 연루된 순수한 본성에 의해 나온다. 그것은 다만 감각의 착각이 아니라 존재론적 산출이며, 지워질 수 없는 증언이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바로 이 높이로부터 나온다"(121). 


1장에 이미 읽은 기억이 있는 것처럼  욕구는 레비나스의 표현 그대로 물어 뜯을 수 있는 것이고, 만족에 이를  수 있는 것이며, 나의 것으로 동일화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욕망은 만족에 이를 수도 동일화할 수도 물어뜰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더한 욕망만을 낳는 "내 앞에 어떤 지표도 없는 미래"이다. 말 그대로 모험, 유랑이다. 이 둘 사이에는 시간의 관계가 놓인다. "욕구가 전제하는 시간은 욕망에 의해 나에게 제공된다"(121)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여기에 어떤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시간적 질서에서 나중에 오는 욕망은 본래적, 논리적, 존재적 질서에서 앞선 것으로 드러난다. 욕망이 앞선 것이고 욕구는 이에 의존한다. 레비나스에게 신체는 시간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한다는 것이고, 타자를 동일자로 전향할 수 있다는 것, 즉 노동을 의미한다. 이렇게 향유로서의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이제 타인으로서의 타자l'Autre를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된다. 레비나스에서 감성으로서의 신체성은 그의 전후기를 거쳐서 그의 사상에서 본질적이다. 신체성은 자아가 향유 안에서 그것에 의해서 자신을 구성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욕구가 종속하는 욕망에로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장에서 레비나스가 하는 작업을 타인을 받아들일수 있는, 그를 내집 안에 환대할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작업이다. 


5. 자아의 자기성으로서의 정감성(Affectivité comme ipséité du Moi, 122-124)


이제 우리는 "자아의 유일성unicité"을 설명할 수 있다. 자아의 유일성을 설명한다는 것은 분리를 설명한다는 것이기도 한다. "자아의 유일성은 분리에 대한 다른 말이며, 탁월한 분리는 고독이며, 향유 - 행복과 불행 - 는 고립 그 자체"(122)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철학이라고 말해지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자아의 유일성을 밝히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그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성, 그것이 나의 유일성이며, 나의 개체화이다. 블랑쇼에 의하면 "창조 혹은 탄생과 함께 오는 트로마티즘, 나의 탄생에 앞선 책임, 나의 동의와 나의 자유의 밖에 있는, 타자를 위해 태어난"(재난의 글쓰기, 41) 그런 나의 유일성이다.  진정한 삶은 부재한다고 말했을 때, 레비나스의 작업은 바로 이 유일성, 이 보이지 않는 삶, 비밀을 폭로, 열어 보이는 것, 계시하는révéler 것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런 유일성의 개념에 이르기 위한 예비작업이다. 


자아가 유일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아는 에펠탑이나 자콩드처럼 유일한 것이 아니다. 자아의 유일성은 유일한 사례를 발견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를 가짐이 없이, 개념에 의해 개체화함 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아의 자기성은 개체와 일반의 구분 밖에 남아있는 것이다"(122). 이전의 모든 철학적인 개념을 뒤집는 레비나스의 작업 한 가운데 이 번에는 개체화의 원리가 그 대상이다. 우리가 잘 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체화의 원리와 달리 여기서 자아의 자기성은 유의 한 예로서, 종차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개념의 "거부"는 자아는 내재성이라는  것을, 자아는 자기집에 머문다는 것을, 자아는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아는 전체성과의 단절을 완수할 수 있는 한 존재 방식이라는 것을 말한다. 앞서 이미 읽은 기억이 있는 것처럼, "탁월한 고독", 비밀은 전체성과의 단절을 보증한다. 더 나아가 이것은 타인의 환대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그 환대를 보증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득 이 유일성의 구조는 "논리적으로 부조리"하다. 다시 말해 형식 논리에 속하지 않는다. 유에 참여하지 않는 유일성은 "행복의 에고이즘 그 자체"(122)이다. 욕구는 채워서 제거해야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으로 그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에 있다. 이 충족성, 이 순간의 충족성은 순간과 영원의 대립으로는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지지 않는다. "충족성은 자아의 수축contraction 그 자체, ... 자기 안으로 물러섬retrait en soi, 자기 안으로 감김involution", 자기 안으로의 도망, 접힘, 후퇴이기 때문이며, 충족성은 "대자적 pour soi 실존으로, 처음부터 자기의 실존을 목적으로 하는 en vue de 것이 아닌, 자기에 자기에 대한 표상이 아닌, 우리가 "각자 자기를 위한 chacun pour soi"라는 표현이 잘 나타내듯이, "배고픈 배는 귀가 없다"라는 금언이 잘 표현하듯이, 한조각의 빵을 위해 살인을 할 수 있는 그런 대자"(123)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감적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단조의 우울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깨어나는 떨리는 흥분"이다. 자아는 이렇게 향유의 지반이 아니라, 감정의 수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서 자아는 변명론이라고 말한 것의 의미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자아가 변명하는 것은 바로 이 자기의 에고이즘을 구성하는 바로 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인의 비판적인 현전이 이 에고이즘을 문제삼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에고이즘의 고독을 파괴할 수 없다". 만일 타인의 자아의 고독을 파괴한다면, 타자는 절대로 전체성의 단절을 가져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성과의 단절을 가져오는 것이 아 자아의 내재성, 이 자아의 비밀, 그 향유, 행복의 비밀인 한에서 말이다. 전체성의 잠정적인 단절은 그래서 언제나 다시 일어난다. 자아의 내재성, 비밀은 역사의 보편성, 시간의 연속성의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향유로부터 개체화되는 자아의 실체성은 이제 동사 존재하다의 주어가 아니라 행복 안에 연루된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존재론에서가 아니라 가치론으로부터 설명된다. 존재자는 "존재의 이해"로부터 정당화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의 주체가 되는 것은 존재를 감당하면서가 아니라, 존재에 참여하면서가 아니라, 행복을 향유하면서 그것을 내재화하면서이다. 이런 존재자는 존재와의 관계에서 "자율적"이다. 자율적 인간만이 자신을 내려 놓을 수가 있다.


6. 향유의 자아는 생물학적인 것도 사회학적인 것도 아니다(124-126)


행복을 통한 개체화는 생물학적인 삶과 인종의 철학을 만드는 익명적이고 중성적인 인격의 개념과 구분된다. 그리고 이런 행복을 통한 개인만이, "비밀"의 개념만이 전체성에 이르지 않고 다원주의에 이를 수 있다. 전기에 레비나스가 "파르메니스와의 단절"을 시도한다고 말한 <시간과 타자>의 다원주의의 기획은 여기서 다시 확인된다. 다원주의는 주체의 비밀로부터만 가능하다.


"다원주의는 개인들의 각자의 비밀을 보존하는 한에서만, 다원주의 안에 모이는 개인들의 관계가 밖에서 보이지 않는 한에서, 그런데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쉬지 않고 가는 한에서만 산출될 수 있다. 만약에 그 관계가 밖에서부터 보일 때, ...다원성은 전체성을 형성할 것이다"(125).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자아에서 타자(Autre)로 가는 이 운동이 제 3자에게 가시적인 관계의 망 안에, 즉 전체성 안에 포함되지 않기 위해서는 타자, 타인으로서의 타자는 자아의 또 다른 하나의 예로, 동등한 개인들의 한 사례로, 동일한 개념에 포함되는 두 사례로 환원해서는 안된다. 다원주는 "단순히 나와의 관계에 의해서 생각하는 것conçois이 아니라, 나의 에고이즘으로부터 내가 직면하는affronte 근본적인 타자성을 전제한다"(126). 이런 타자성은 나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부터 스스로 나타나지만, 내가 그것에 접근하는 것은 나와 타자의 비교에서가 아니라, 나로부터이며, 더 정확히 내가 타자와 관계를 유지하는 사회로부터이다. 다시 말해 탁월한 경험인 사회적 관계로부터이다. 그 구체적인 경험들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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