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성과 무한 강독

1. D. 분리와 절대

aurorepark 2011. 9. 19. 05:26

이 장은 1부, <동일자와 타자>의 마지막 부분이다. 다시 말해 이 장은 지금까지의 1부의 논의를 요약 정리하는 부분이다. <분리와 절대>라는 제목이 불러일으키듯이 이 장은 지금까지 다룬 존재자의 절대로부터의 분리와 그 절대와의 관계를 다룬다. 더 정확히 말하면 1부의 제목인 <동일자와 타자>의 다른 이름, 즉 이음동의어인 셈이다. 따라서 이 장은 앞서 말한 것을 다시 말한다.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동일자와 타자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이 관계로부터 면제되며s'absolvent [이 단어는 레비나스의 글들에서 자주 보이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본래적인 의미는 '면죄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의 라틴어 absolvere는 의무obligation나 짐 혹은 책임charge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로부터 앞서서 '자유로워지다'라고 옮겼었다.], 이 둘은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머문다."(104) 이 진술은 1 부의 처음에서부터 레비나스가 반복하는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 아닌 관계"로서 분리의 원리를 말한다. 이 문장은 그대로 외어도 괜찮은 문장이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레비나스의 철학을 제시하는 하나의 공식이고, 이후로도, 마치 헤겔의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라는 공식처럼, 하나의 레비나스 철학의 분리의 공식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그의 철학의 초석이다. 이어지는 문장, "무한의 이념이 이 분리를 요구한다". 다음의 이 문장도 기억이 날 것이다: "분리는 마치 존재의 궁극적인 구조로서 정립되며, 무한의 무한화 그 자체의 산출production로서 정립된다. 그리고 사회는 이 분리를 구체적으로concrètement 실현한다"(104). 이 모든 과정을 레비나스는 무한의 간계(l'intrigue de l'infini)라고 부른다. [아마도 레비나스가 이 단어, l'intrigue를 선택했을 때는 한편으로는 헤겔의 이성의 간계ruse에 대응하는/대체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졌을 것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그의 세익스피어에 대한 찬사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의 철학은 '극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사정이 어찌되었든, 이 단어는 "극의 복잡하고 비밀스런 전개 전체" 혹은 "이야기의 본질적인 것을 형성하는 사건들 전체"를 지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어렵게 '간계'라고 옮긴 이 말은 '무한의 본질적인 이야기를 형성하는 비밀스런 사건들 전체의 전개"를 의미한다. 이 모든 의미를 담은 한 단어를 찾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런 이유로 '간계'라는 말이 가진 함축적인 의미를 저당잡혀 이 단어를 선택한다.] 그런데 사실 존재를 분리의 수준에서 접근하는 것은, 파르메니데스 이후로 스피노자와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존중할만한" 철학적 전통의 눈에서 보면, 다시 말해 존재의 단일성unité을 말하는 철학에 비하면, 존재를 그것의 권위의 실추 안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서 보면, 분리séparation와 내면성intériorité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의 형이상학은 오랫동안 이러한 분리를 제거하고 통일을 지향해왔다. 이러한 형이상학은 레비나스가 자주 아브라함의 여정과 비교하면서 주장하듯이, 항상 돌아옴을 가정하는 "오디세이의 여정과 같으며, 염려, 향수"(105)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분리를 마치 타락으로, 혹은 박탈로 혹은 전체성과의 일시적인 단절로 생각하는 것은 분리를 욕구/필요besoin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에 서문에서부터 주장하듯이 욕망과 구분되는 욕구가 증명하는  존재의 결핍, 공허는 그래서 진정으로 분리된séparé것이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많은 형이상학이 존재의 단일성을 주장한다면, 레비나스가 그의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서문에서부터 강조하듯이, 그와 다른 형이상학은 존재의 본질의 전체성과 분리된 것으로서, "존재 너머의 선"(le Bien au-delà de l'être, épékeina tes ousias, Platon, République, livre VI)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 플라톤의 공식은 자신의 탐구들(선, 시간, 타자, 사회)을 인도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공허한 지시"(<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앞글)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종종 이것을 필요에 비해 "사치(품)un luxe"(106)라고 말한다. "플로티누스가 하나로부터 존재의 본질의 유출을 말하면서 파르메니데스로 돌아간다면, 플라톤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 선을 연역하지 않으며, 초월성을 전체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정립한다. 욕구의 공허를 채우는 만족이나, 고통이나 결핍으로부터 오지 않는 열망aspiration, 또 아무 것도 결핍된 것이 없는 전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가진 자가 가지는 열망 자신의 충만 너머로 가는 무한의 이념을 가진 자가 가지는 이런 열망들을 처음으로 엿본  사람은 바로 플라톤이"(106)라고 주장한다. 자기 밖의 독립적인 한 존재(자)를 인정하는 무한의 역설은 앞서 이미 다룬 것처럼 무로부터 창조되는 창조의 역설이기도 하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말하듯 분리를 무한의 감소로, 그것의 손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분리는 마치 하이데거의 고유하지 않은 일상의 삶이 고유한 삶과 존재의 추락인 것과 같이, 무한의 "추락"이 아니다. 분리를 감소로 생각하는 것은 유한성la finitude을 초월성 안에 놓는 대신에 "추상적 사유"에 의해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선이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질서"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가 문제가 되는 상황으로, 서로를 보충하고 두 항의 연결이 아닌, 다시 말해 상호적이 아닌, 그 자체 자신으로 충분한 항들의 관계가 문제이다. 이 관계는 다름 아닌 욕망으로, 자기를 소유하는 데에 이른 존재자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구체적으로 사유된 무한, 다시 말해, 무한으로 향한 분리된 존재로부터 출발해서 사유된 무한은 자신을 넘어선다se dépasse. 달리 말하면, 무한은 선의 질서로 열린다. 그래서 무한을 구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분리는 사유와 내재성intériorité의 구성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독립적인 관계이다"(107). 분리가 형성하는 내재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2부의 주제로 이어서 읽을 것이다. 


레 비나스가 사유하는 이 무한, 이 "신"을 어떻게 사회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가? 그가 신학이 아닌 철학이라고 못을 박는(리오타르의 "유대 철학자"라는 별칭에 "더도 덜도 아닌 철학자 philosophe tout court"라고 못을 박듯이), 이 신과 인간이 만드는 이 사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철학의 "세속화"를 말하면서 신을 말하는 이 철학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존재-신학에서 벗어난 신", 다시 말해 존재로부터 신을 해방하는 사유, 그 안에서 "인간적인 가능성"을 열어주는 그의 사유, 그가 "윤리"라고 부르는 그의 철학은 그래서 처음부터 신중함을, 그리고 레비나스의 용어로 말을하면, 드러난 말이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속지말아야 한다(ne pas être dupe)".   


레비나스의 무한에 대한 진술을 일단 읽어보자: " 무한은 전체성을 포기하면서, 분리된 존재에 한 자리를 허락하는 수축contraction 안에서 산출된다. 이렇게 존재 밖으로 길을 내는 관계들이 여기서 그려진다. 자기 자신에 갇히지 않는, 그러면서 분리된 존재에게 한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혹은 양보하기 위해 존재론적인 연장으로부터 물러서는 그런 무한은 신적으로divinement(혹은 신처럼) 실존한다. 그는 전체성 너머 사회를 연다. ...신과 함께하는 사회는 신에 덧붙여지는 추가가 아니며, 신과 피조물을 분리하는 간격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다. 전체화totalisation와 대립해서,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종교(religare=relier, 연결하다)라고 부른다(107)."


인간의 역사만큼 오해된 이 말, 종교하는 말은 그 기원이 어디에 있든 여전히 21세기 초엽에서도 논쟁적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의 연대, 연합을 말하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종교 혹은 무한은  무엇보다도 우선 "선le Bien의 질서를 연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질서는 "형식 논리의 규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규칙들을 초월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왜냐하면 형식 논리 안에서 욕망은 항상 욕구의 형식들 안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욕망의 질서 - 서로를 필요로하지 않는 이방인들 사이의 관계의 질서 - 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이념을 통해 긍정된다"(107).  


레비나스 철학 안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이념의 역할은 이미 앞선 글들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말해졌다(그들 중의 하나로 "C. 진리와 정의(1)"를 참조할 수 있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이념은 그의 철학을 이끄는 하나의 이념, 즉 "존재하는 것은 그 자신 안에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 이 말은 다른 방식으로 "구원은 나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 라고도 번역된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철학의 전통, "자기 총족적인 존재"에 대해 정확히 반대편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의 철학의 역설, 혹은 애매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대표적인 예이다: "무에 의해서 분리되고 창조된 존재는 다만 아버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절대적으로 다른 것라는 데에 있다(58)" 무로부터의 창조는 존재자에게 자유를 허락하며, 동시에 타자에의 의존을 말한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두 진술이 다원성의 사회를 가능하게 한다고 레비나스는 주장한다. 전체성의 사유 안에서 자유에 가해진 모든 제한은 결국 존재에 가해진 제한이며, 이런 이유로 다원성은 상호적으로, 각각의 이웃에 의해 서로 제한되는 존재자들의 존재론적인 추락일 뿐이다. 따라서 전체성 안에 통합되지 않은 다원성만이 무로부터의 창조의 이념을 설명한다. 즉 피조물은 존재하는 데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이며 - 존재의 다원성 - 동시에 그는 타자에 의존한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존재자 안에서 존재에 접근하는 것은 존재자를 단일성 안에 가두는 것이며, 파르메니스테스를 그의 후손들이 유혹되었던 모든 부친살해의 시도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시간과 타자>, 36(문예출판사)/22(PUF))라고 말한다. 전체로부터 분리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무로부터의 창조는 존재자를 체계 밖에 놓으며, 그로부터 외재성을 끌어낸다. 창조는 그 말이 본래적으로 가지는 의미에서 피조물에게 의존의 흔적을 남긴다. 나의 탄생이 나의 부모에의 의존을 말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있는 "예외적인" 의존성이라고 레비나스가 부르는 이것은 우선 한 존재자의 내재성intériorité, 전적인 독립성을 완성하며, 이로부터 정확히 이로부터만 무한의 이념에 이른다 혹은 만난다. 다음 장들에서 볼 것이다.


이 절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사유와 자유는 분리와 타인의 고려로부터 우리에게 도래한다 - 이 테제는 정확히 스피노자주의에 정반대이다(108)". "스피노자(들)는 죽지 않는다 Les Spinoza ne meurent pas"("Le cas Spinoza" in Difficile liberté, "스피노자의 경우", <어려운 자유>에서, p. 152)라는 이 표현이 "우리의 한계 안에서 모든 것을 모든 것에 의해서 이해하기"라는 스피노자 철학의 공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레비나스에게 - 또 많은 철학자들에게 - 큰 유혹인 이 공식은 또한 그에게 큰 위험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위험은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같은 글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의 자유, 이것은 아주 정확히, 진리와 내적이 연대를 유지하고자 하는 염려를 드러낸다: 진리 앞에서 자신을 지우기. 그런데 이 지움 안에서 주인(maître)이 느껴지며, 수학자가 명증성으로 향하는 것처럼 최상의 자유를 의식한다. 복종과 명령 그리고 인종과 지상권/주권 사이의 이 놀라운 일치는 낡은 그런데 아름다운 한 이름을 지닌다: 이성." 이것은 스피노자의 이성에 대한 레비나스의 정의이다. 그런데 이 "놀라운 일치" 안에서, 이 유혹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드러나는 모든 비대칭, 비일치, 외재성은 사라지고 평면화된다. 이 책을 시작하면서 레비나스가 "주체의 주체성"을 동시에 "외재성" 혹은 "초월성"을 보호할 것을 주장한 것은 바로 스피노자(들)의 철학의 정반대에 서서 우리에게 던지는 진술들이다.


- 지금까지 1부에서 전개된 추상적인 논의들은 2부에서부터 내재성의 구성과 이어서 세계의 발견, 그리고 그 안에서 향유의 주체가 어떻게 타자를 발견하는지를, 다시 말해 1부에서 전개된 무한의 논의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주체의 향유 안에서 발견되는지, 어떻게 무한의 이념에 이르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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