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상태에 이르곤 한다. 시인들은 아마도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를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철학자도 아마도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를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에게 이 말은 개념들이다. 무용가는 그의/그녀의 몸으로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한다. 첼리스트는 음으로 그것을 표현할 것이다. 후설은 어느 지점에서 이런 상태에 이른다.
"시간을 구성하는(constitutifs) 현상들은 원리상 시간 안에서 구성된(constituées) 대상성들과 다른 대상성들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들은 개별적인 대상도 과정도 아니며, 부조리를 저지르지 않고는 후자의 술어들을 전자에 적용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후자와 같은 의미에서 이 현상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지금 존재하며, 좀 전에 존재했으며, 그것들이 연속적으로 혹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일련의 나타남의 연속성(시간을 구성하는 흐름의 국면의 연속성)은 지금(이 연속성이 구성하는 지금)에 속하며, 연속성이 이전의 구성요소인 한에서(구성요소이었다가 아니라), 이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말해야 한다. 그런데 흐름은 "연달아(l'un-pour-l'autre)"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현실태적 국면, 그리고 과거지향 안에서 우리가 현실태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과거의 연속성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 흐름은 구성된 것을 따라서 우리가 명명하는 어떤 것이지만, 이것은 시간적으로 전혀 "객관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방법을 모른다. 이것은 절대적인 주체성이다. 그리고 은유적으로 "흐름"이라고 지시해야하는 어떤 것, "지금"에서, 즉 현실태의 지점에서, 본래적인 원천-점에서 솟아나는 어떤 것의 절대적인 속성들을 가진다. 이 현실태의 체험 안에서 우리는 본래적인 원천점을 가지며, 울림의 계기들의 연속성을 가진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의 내적 의식의 현상학을 위한 강의들, § 36).
앙리는 그의 책, <현시의 본질> 마지막 장(§ 70)에서 후설처럼 자신의 이론적 전개가 이른 그 지점에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말을 찾지 못한다.
"정감성(affectivité)은 자신의 전체성 안에서, 그것의 실재 안에서 절대를 계시하기 때문에, 정감성은 절대를 있는 바의 것으로 계시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정감성은 절대를 계시하며, 정감성은 절대를 절대적으로 그 자체로 계시한다. 이 절대의 절대적인 계시 안에서, 정감성 안에서 절대는 솟아나고 자신의 절대상 안에서 스스로 역사를 만든다. 이 절대의 절대적인 계시, 그의 절대성 안에서 절대의 이 절대적인 계시는 정신이다. 그래서 "정신은 그가 원하는대로 분다"고, 또 "정신의 영원성은 바람을 닮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가고 오는 것을 알 수 없다. 바람은 매번 자신의 끝이며, 자신의 시작이며...매번 정신은 자신의 완성이다"라고 말해진다.
이 정신의 충만, 이 부드러움, 이 기쁨의 충만을 표현할 말들이 우리에게는 없다. 이것들을 "확실성", "명증성"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런데 이 개념들은 세계에서 빌려온 것들이고, 이 세계에 의존하는 것들이기에 그 안에서 우리는 길을 잃는다. 아니면, 이 개념들이 서양 사유의 전개 안에서 얻은, 모든 형태의 사유가 그것들에 부여한 내용을 떼어내고, 반대로 이것들을 이것들이 관계하는 것, 즉 존재가 자신과 일치하는 내적인 모음에, 이 모음의 힘에 관계시켜야 한다. 파스칼이 전부인 것에 의해 잠겼을 때, 그렇게 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그것을 "확실성, 감정"이라고 부른다"(860).
후설은 더 이상 그것을 표현할 말이 없을 때, 다만 그저 "보라!"(§ 38)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앙리는 아마도 그가 반복하듯이 그저 "느끼라"라고 할 것이다. 아마도 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 철학자의 말할 수 없는 것의 차이는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미셸 앙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담, 보이지 않는 것과 계시 (0) | 2012.01.22 |
---|---|
자기로부터 도망칠 수 없음 (0) | 2012.01.12 |
자아, 새로운 기반 위에서 (0) | 2011.10.30 |
미셸 앙리, 칸딘스키와 예술 작품의 의미 (0) | 2011.06.11 |
미셀 앙리, 철학과 주체성(5) (0) | 2011.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