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성과 무한 강독

1.C. 진리와 정의 (2)

aurorepark 2011. 9. 13. 07:14

C장의 3절 "진리는 정의를 전제한다"(pp. 90-104)는 a) 광경의 아나키: 영악한 천재 b)표현은 원리이다 c)코기토와 타인 d)객관성과 주의 f)언어와 정의, 라는 6개의 작은 단락을 포함한다.


레비나스는 여기서 '침묵과 말'에 대해서, 그리고 침묵이 가진 주술적 힘과 말의 탈주술의 기능에 대해서 말한다. 얼마 전에 출간된 그의 전집 2권에 실려 있는 한 강연(1948년 2월 4-5일)의 제목은 "침묵과 말"이다(이 전집의 제목은 이 강연의 제목을 취했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현대 철학과 문학에서 침묵의 고양을 목격한다고 말한다. 말이 없는 세계의 비밀, 신비, 잴 수 없는 깊이는 알 수 없는 마력, 혹은 어떤 매력을 발산한다. 반면 수다, 경솔, 과장 - 말은 이 침묵이 동반하는 그 매력을 사라지게 한다. 우리는 평화와 조화가 자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침묵이 또한 고인물처럼 오래되면 썩는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자는 물 안에는 증오와 음난과 인종과 게으름이 웅크리고 들어 않는다"(전집 2권, 70)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버린다고,  또 우리는 침묵의 짓누르른 힘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와 비인간성을 종종 잊어버린다고 말한다. 파스칼은 무한의 공간을 채우는 이 침묵에 전율한다.  파스칼의 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침묵 앞에서 매혹이 아닌 공포의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매혹과 공포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다만 그것은 의도적으로 잊혀질 뿐이다. 이 공포는 레비나스가 불면의 기술에서 느끼는 익명적 존재에 대한 공포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레비나스는 그의 철학의 초기에서부터 이 공포스런 침묵에서, 이 주술에서, 이 신비에서, 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는다(철학의 세속화). 마치  세르반테스의 동기호테가, 혹은 영악한 천재에 사로잡힌 데카르트가, 그가 걸린 주술에서, 더 정확히 자신이 주술에 걸려 있다는 확실성에서 동기호테가, 데카르트가 어떻게 벗어나는 지를 보여주듯이 말이다.    


이 책에 처음에서부터 레비나스가 문제삼는 자유의 자발성은 여기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 윤곽이 그려진다. 자신의 자유에 대한 정당화에 대한 어떤 염려도 가지지 않는 자아의 자발적인 자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이끈 분리된 존재의 본질에 속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자유의지(libre arbitre)를 생각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에서 분리된 존재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존재자의 실체화(hypostase)에 대응한다. 앞서서 한 번 언급한 신화적 인물 기게스(Gygès, Γύγης, 플라톤의 국가 II, 360)는 자신은 보여지지 않으면서(이 사실을 그는 안다) 그를 봄이 없이 그를 바라보는 자들을 본다. 레비나스에게 기게스는 분리의 상징으로 이러한 "기게스의  지위는 세계 안에 홀로 존재하는 자의 처벌받지 않음"과 같으며, "이런 존재는 세계가 다만 하나의 광경인 그런 존재"(90)이다. 세계가 하나의 광경으로, 하나의 풍경으로 보이는 것이 가능한 것은 존재자가 타자에 연루됨이 없이 홀로 존재할 때이다. 혼자인 존재자가 창출하는 진리와 자유, 이 침묵의 세계, 순수한 광경을 창출하는 이러한 세계는 레비나스가 언급하듯 소위 객관적 진리의 인식, 이론에 의해서 접근가능하다. 그럼 "누가 이런 지식의 자유의 연습을 벌줄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자유의 자발성은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질문하는 데 이르는가?"(90)


레비나스에서 익명적 존재로부터 존재자로의 운동, 실체화의 운동 혹은 분리의 운동, 즉 최초의 자유의 운동은 자아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자기 안에 가둔다. 다시 말해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지배는 역으로 익명적 존재의 존재자에 대한 지배로 역전된다. 이러한 자아의 자리잡기의 역설은 자아의 자기동일성의 운동의 두 번째 운동을 촉진한다. 그 운동은 존재자가 존재에로 돌아감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안에서 타자, 구체적인 타인의 발견을 통해서, 익명적인 존재의 익명적인 타자성을 구체적인 타자성으로 이끄는 데에서 발견된다. 그 안에서 나는 구경하는 관격이 아닌, 상황에 연루된 주체로서,  더 정확히 타인의 말에 대답해야 하는 말하는 주체로서, 윤리적 주체로서 다시 태어난다. 언어는 이제 더 이상 사유의 봉사하는 봉사자가 아니며, 대상을 대신하는 의미, 혹은 기의가 아닌 타자의 표현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는, 더 정확히 나를 가르치는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로 드러난다. 나에게 기쁨과 고통 - 항상 후자가 그 무게를 더 가지는 - 을 주는 타인은 가르치고자 하는 의도도 없이 그는 항상 나를 가르치는 자이다.          


a)광경의 아나키(l'anarchie du spectacle) - 영악한 천재


유명한 데카르트의 영악한 천재의 가설은 나의 의심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나의 최초의 자아의 확실성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익명적인 존재로부터 자아의 자리잡기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다시 되돌아 오는 예전의 견해들, 다시 되돌아 오는 익명적인 존재의 "아주 오래되고, 아주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 나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신을 차지하고 나의 믿음의 주인으로 자리잡는"(데카르트, 두 번째 성찰), 자신을 자기에 낯선 것으로, 타자로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런데 이 타자, 이 타자의 발견, 대담자로서 영악한 천재는 분명 "나에게 어떤 기호(signe)를 건네준다. 그런데 그는 모든 해석을 회피한다"(91)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말이 발산된 기호에 대답하고, 기호에 의한 자신의 고유한 현시에 참여하고, 이 참여에 의해  말의 애매성을 교정하는"(91)데에 있다면, 모든 해석을 거부하는 대담자로서 영악한 천재의 침묵애매성은 "단순한 말의 부재가 아니라, 침묵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과 같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 웃음은 모든 진지한 노력을 비웃는 웃음으로 레비나스는 이것을 "언어의 이면"(91)이라고 부른다. 반박되어지거나 교정되어질 수 있는 거짓말이 아닌 이러한 웃음은 대담으로서의 말을 회피하며, 언어를 파괴하면서, 시작도 끝도 없이 신비 안에 자신을 가둔다. 광경으로서 침묵의 세계가 주술적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로부터 레비나스의 일련의 질문들이 자리한다: "무엇이 이 영악한 천재의 침묵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91) "누가 자신이 주술에 사로잡혀있다는 확실성 안에 갇혀있는 동기호테의 완전포위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기하학적 공간의 밖이 아닌 외재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198)


b) 표현은 원리이다 


아나키(an-archie), 원리도 시작도 없는 절대적인 침묵의 세계, 그 안에서 사유는 실체적인 어떤 것과도 조우하지 않는다. 현상은 최초의 접촉에서부터 풍차로 돌진하는 동기호테처럼 가상으로 드러나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현상은 처음부터 애매성 안에 머문다. 영악한 천재는 사물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현시하는 듯이 보이는 것 뒤에서 가능성으로, 다시 말해 사물들이 이미지나 가상으로 떨어질 가능성 안에 머문다. 바로 이 가능성은 사물들의 나타남을 그 자체 순수한 광경으로, 풍경으로 결정한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이러한 순수한 놀이의 가능성은 다만 홀로 존재하는 내적인 존재 안에서만 가능하다. 사실 이러한 보편적인 의심의 가능성은 데카르트 혼자의 사적인 모험이 아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그것이 감각적 경험이든 수학적 명증성이든 현상학적 나타남 그 자체를 구성한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애매성은 두 개념, 두 실체, 두 속성 사이의 혼동을 말하는 것도 - 이러한 혼동은 이미 나타난 세계 안에서만 산출되는 애매성이다 - 존재와 무 사이의 혼동도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명시한다. "가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며, 존재도 아니다 - 그런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적인 것일 것이다."(91) 이러한 애매성으로부터 오는 의심은 사실 시선의 정확성을 비난하는 것도, 세계의 형상들의 비일관성을 고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나타나는 것의 진지성과 관계한다.    


이러한 나타남의 애매성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은 레비나스에서 타인의 표현의 수용에서 발견된다. 이제 현상학의 "원리들 중의 원리"(후설의 『이념들 I』 § 24 참조)는 더 이상 "본래적으로 증여하는 직관(intuition donatrice originaire)"이 아니라, 타인, 더 정확히 타인의 표현이다: "타인은 현상의 원리이다"(92). 이 말은 현상이 타인으로부터 연역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가상에서 사물 자체로 거슬로 올라가는 운동과 유비적으로 기호에서 기호를 주는 대담자로 거슬러 올라가서 현상을 발견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연역은 이미 주어진 것, 대상들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담자는 연역되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와 나의 관계는 모든 증명의 전제이기 때문이다."(93) 레비나스에게 말해진 것(le dit), 명제화되고, 주제화된 진술이 문제가 아니라 기호를 발산하는 자의 말하기(le dire)와 - 그것이 어떤 기의를 가지든, 그것이 영원히 해독할 수 없는 것이든 간에 - 그것을 받는 자와 관계가 문제이다. "소여를 수용하는 것, 그것은 이미 소여를 가르침으로, 타인의 표현으로 수용하는 것"(92), 즉 배우는 것이다. 이 관계는 모든 말, 언어, 모든 상징주의의 전제이다. 그 반대가 절대로 아니다.


c) 코기토와 타인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고장난 승강기처럼 스스로 정지할 수 없는 현기증나는 하강의 운동을 감행한다. 매번 더 깊이 내려가는 이 부정의 운동은 레비나스가 다른 곳에서 일이아(il y a), '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 이를 때까지 내려간다. 그런데 모든 참여를 거부하고 의심에 의해 드러나는 부정성 안에 자아는 혼자서는 이 하강을 멈추게 할 수가 없다. 누가? 무엇이? 이 부정의 운동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사실 "의심에 의해 현시되는 부정성 안에서 자아의 코기토는 이 꿈의 여정에 어떤 시작을 제공하지 않는다."(93) 물론 우리가 알듯이 데카르트의 코기코의 운동의 여정 안에는 최초의 확실성, 스스로 정당화되지 않는 임의적 정지가 있다. 의심은 의심의 연습의 명증성을 함축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에서 신의 실존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연습을 부정하는 것은 여전히 이 연습을 긍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코기코 안에서 사유하는 주체는 자신의 명증성을 부정하고 부정의 작업 그 자체의 명증성에 이른다: 영악한 천재가 아무리 나를 속인다고 할지라고, 내가 의심한다는 사실의 명증성에 이른다. 이 긍정은 이어서 다시 의심된다. 두 번째 진리가 긍정되는 것은 이 보다 깊은 다른 수준으로부터 온다.


부정 안의 자아는 참여와의 단절인 의심에 의해 자신을 현시한다. 그런데 코기코는 혼자 정지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 (oui)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타자이다. 그로부터 긍정이 온다."(94) 이 진술은 그의 철학, 그의 윤리 전체를 이끄는 진술이다. 데리다의 공리에 의하면 "적어도 자기와의 연대와 본래적인 (oui)의 긍정의 형식 아래에서, 반복가능성(itérabilité) 없이는 아무 것도 도래하지 않는다"(『믿음과 지식』, Foi et savoir, 38절). 데리다가 말하는 "본래적인 예(oui originaire)"는 레비나스에서 무한의 이념의 소유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는 경험의 처음에 있다.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찾고 이 현기증나는 하강의 운동의 최초의 변경에서 비로소 정지한다. 그것은 사실 그가 무한의 이념을 이미 소유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무한의 이념을 소유하는 것은 이미 타인을 환대하는 것이다"(94). 이 곳에, 이 근원적인 긍정의 자리에 부정의 철학자들이 대립한다.   


d) 객관성과 언어


『전체성과 무한』의 서문에서도 밝히듯이 개인이 전체성에서 그 의미를 빌려오는 모든 철학 - 현상학을 포함해서 - 은 의미를 맥락 안에, 혹은 현상학적인 의미의 지평 안에, 기획 안에, 결국 세계 안에  놓는다. 이러한 세계는 주제화(thématisation) 혹은 대상화로 말해진 것(le dit)이며, 이것은 이 책 안에서 '향유'라고, 표상적 세계라고 불린다. 앞선 글에서(진리와 정의(1)) 말했듯이, 레비나스는 이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주제화(thématisation)와 동일시되는 지식에서 출발해서 이 지식의 진리가 타인과의 관계를 이끄는지를, 다시 말해 표상적 진리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표상적 관계가 아닌 관계로 넘어가는 지를, 레비나스의 용어로 말하면 ex-cendance, 넘어섬의 운동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초과(excès)의 운동은 그의 철학의 과장(hyperbole)의 논리로 말해지기도 한다. 이 지향성의 초과의 의미(Mehr-Meinung)는 레비나스의 후설 읽기(데카르트적 성찰 § 20)의 고유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미 앞서서 그려진 의미의 지평의 초과를 지시한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윤리적 의미라고 말하는 것이 그려진다.


이 장에서 레비나스는 "대상의 객관성과 그것의 의미는 언어로부터 유래한다"(97)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대상의 객관성은 대상이 주제로서, "담론(discours) 안에서,  다시 말해 세계를 제안하는(propose) 대-담(entre-tien) 안에서 정립되는 것(se pose)"을 말한다. 그래서 "제안(proposition, 명제)은 체계, 우주, 전체성을 구성하지 않는 두 개의 항 사이에서 유지된다"(97). 이미 우리가 앞서서 읽은 것처럼 언어는 경계를 접하지 않는 (독립된) 두 항이 관계하는 - 타자가 동일자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동일자에 초월적으로 머무는 - 유일한 방식이다(28). 이런 방식으로 대상이 주제로서 정립되는 것은 의미작용을 함축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미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유자를 그 대상의 기의로 보내는 기호의 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표, 즉 기호의  표출자(émetteur), 절대적인 타자성을 현시하는 것"(97)을 말한다. "타인, 기표는 물론 자기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만, ... 우선, 자기에 대해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세계를 주제화라면서 말 안에서 자신을 현시한다."(98)


세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즉 주제화를 통해서 타인이 그 말 안에서 현시한다는 것은 세계를 정립하고 세계를 제시하는 진술은 공중에서 부유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타인은 이 진술을 수용하는 자에게, 그리고 그 안에서 질문을 발견한 자에게 대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그 유명한 "놀라움에 의해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전달되는(s'adresse*) 자의 현전에 의해서 설명된다".(98) 진술은 레비나스에 의하면 질문과 대답의 장에서 유지된다. 철학이 질문과 대답의 장에서 유지된다는 것은 사실 그렇게 새로운 진술이 아니다. 이 진술의 새로움은 다른 곳에 놓인다. 하나의 진술이 이미 해석된 기호라면, 그리고 이 기호를 해석할 열쇠를 그 자신 안에 동반한다면, 이 열쇠의 현전은 정확히 진술 안에 타자의 현전, 즉 자신의 담론을 구조하는 자(porter secours à son discours ), 즉 자신의 담론에 참여하는 자의 현전이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모든 말이 지닌 가르침의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읽을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을 고른다면 바로 위에 "porter secours à son discours"(96)일 것이다.이 진술은 이 글 안에서 레비나스는 여러 번 다른 방식으로 반복한다. "porter secours à son discours", 이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porter secours는 누군가 도움을 청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해 달려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담론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그 담론 안에 마치 도움을 주는 자(assistant)처럼 그 진술 안에 참여(assiter)한다는 것은 질문과 대답의 장 안에서 자신의 거짓말을 혹은 자신의 실수를 교정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가르침의 본질적인 성격"을 지시하며, "언어의 유일한 본질"(99)을 형성한다[*불어의 재귀동사로 사용되는 's'adresser', 데리다가 자주 사용하는 이 말이 내가 주어인 경우 'm'adresser'이다. 이것은 내가 말을 건네면서 이 말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의미signification, 혹은 현상의 알려질수 있음(intelligibilité)은 자기 안에 머무는 동일자의 동일성에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자에게 호소하는 타자의 얼굴에서 유지된다"(98). 다시 말해 하나의 의미는 동일자가 필요로하기 때문에, 혹은 무엇인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부족을 채울 수 있기에, 그로부터 의미를 취할 수 있기에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의미는 결핍의 원리에서가 아니라, "의미는 타자를 욕망하는 동일자와의 관계에서 타자의 절대적인 잉여가치 surplus"(98), 넘치는 가치(나의 유한 안의 무한,  작은 용기에 이 용기를 넘치는 무한의 소유, 그 안의 레비나스 철학의 트로마티즘이 자리한다)의 이념 안에 존재한다.


다른 한편 레비나스는 존재자들의 의미는 목적론(finalité)의 전망에서가 언어의 전망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하이데거에 존재자, 특히 사물들의 도구성의 이해에 대한 하나의 반박으로 사물들이 "...위한(en vue de)"의 전체론적이고 목적론의 전망은 이 전체화에 저항하는 항들 사이의 관계에서, 언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한 항의 다른 항에 대한 저항은 소위 타자성의 어둡고 적의에 찬 냉담한 잔여에서 유지되지 않는다. 반대로 항상 가르치는 나를 동반하는 말의 고갈되지 않는 최상의 주의(surplus d'attention) 안에 유지된다"(99). 왜냐하면 "말은 항상 단순히 던져진 기호를 다시 취하고, 항상 말 안에 어두웠던 것을 밝히는 갱신을 약속하기 때문이다"(같은 곳). 현상학의 지향성의 지향(l'intention)을 대신하는, 혹은 그것을 강화, 추월하는 주의(l'attention)은 레비나스의 타자의(주체의) 현상학의 고유성을 형성한다[항상 레비나스에게 타자를 말함은 주체를 말함이다. 왜냐하면 주체의 타자의 말에 대한 주의 없이는 타자에 대한 철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un sens), 어떤 삶의 방향을 가진다는 것은 절대와의 관계 안에 자리하며, 더 정확히 타자에 대한 지각(perception) 안으로 흡수되지 않는 타자성으로부터 온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러한 타자성은 말이 가지고 있는 교정과 다시 말할 수 있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 [<존재와 다르게>에서 전개되는 '말하기-부인하기-다시 말하기dire-dédire-redire', 그리고 달리 말해서(autrement dire), 자세히 말해서(précisément), 다시 말해서(c'est-à-dure) 등등은 바로 그의 이러한 언어에 대한 그의 입장을 드러낸다. 변증법도 연역도 아닌 이러한 글쓰기, 말하기의 방식은 그가 과장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안에 자리한다. 그의 글쓰기의 방식을 그대로 느끼기 위해서 레비나스의 글을 그대로 읽어보면: "이러한 타자성은 언어의 고유한 현시를 밝히기 위해 언어의 항상 다시 시작하는 노력 안에서 솟아나는 고갈되지 않는 최상의 주의, 기적같은 풍요로써만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의 의미, 삶의 방향을 가진다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거나 배우는 것, 말하거나 말해질 수 있음이다(Une telle altérité n'est possible que comme une abondance miraculeuse, surplus inépuisable d'attention surgissant dans l'effort toujours recommencé du langage en vue d'éclairer sa propre manifestation. Avoir un sens, c'est enseigner ou être enseigné, parler ou pouvoir être dit)".(99)


사정이 이러한 경우, 사물들의 나타남, 즉 현상들과의 관계에서 언어는 아주 예외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현상이 나타나면서 자기를 감추는데 있다면, 자신의 현시에 참여하는(assite) 언어/말은 갱신과 교정, 다시 말함 안에서 모든 나타남의 피할 수 없는 감춤을 극복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현상의 의미 - 방향이 주어지는 것은 언어의 반복가능성(itérabilité)에서이지, 기원에의 관계, 즉 그 대자가 관계하는 끝/목적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다. 


끝이 그러하다면, 모든 지식의 시작 그 자체도 주어진, 혹은 가정된 기원과 관계하지 않는다: "지식 그 자체의 시작은 모든 나타남이 가능한 감춤인 그런 세계의 주술과 지속하는 애매성과의 단절에서만 가능하다"(100). 왜냐하면 "말은 이 무원리(anarchie)에 하나의 원리를 도입"하고 세계를 탈주술화하기 때문이다. 말이 세계에 원리를 제공하고 탈주술화할 수 있는 것은 앞서서 이미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 다시 한 번, 그가 반복하듯이 -  "말하는 자는 그 말 안에서는 자신의 나타남을 보증하고, 자신의 고유한 현시에 조력하고 참여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말과의 관계에서 세계는 비로소 방향을 잡으며, 의미를 가진다. 말과의 관계에서 세계는 시작한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다음의 공식, "세계가 말에 이른다"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말은 모든 의미의 기원, 모든 인간의 작업, 모든 현상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이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가 이르는 반송의 체계(특히 하이데거의 도구론의 반송의 체계)는 그 기능의 원리를 이 말로부터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은, 우리가 믿듯이, 상징주의, 본질의 양태가 아니라, 반대로 모든 상징주의는 이미 이 언어, 살아있는 말과 관계한다".(100) 


e) 언어와 주의 


주의(attention)은 의도(intention) 혹은 지향처럼 "...으로 정신을 향하는 것"이다.  다만 후설에게 지향성이 대상으로 향하는 의식이라면, 레비나스에게 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주의인 한에서이다:"주의는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주의이기 때문에 무엇인가에 대한 주의이다"(102). 그런데 이 주의, 내 안의 이 주의는 [누군가의]부름 혹은 호소에 대답하는 것이다. 이 누군가, 타인, 외재성은 모든 주의, 모든 언어에 출발에 놓인다. 레비나스가 스승(Maître)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타인일 수도, 절대적인 타자일 수도, 그것은 내 안의 무한일 수도 있다. 레비나스는 이 외재성과의 관계를 "연합(assocoation)"이라고 부른다. (101) 그리고 나의 자유를 문제 삼는 이 외재성과의 도덕적인 관계, 혹은 정의는 진리를 근거짓는다. 그래서 레비나스에게 사유의 활동은 항상 "둘"을 전제한다:"진리의 기원에 말을 놓는 것, 그것은 봄의 고독을 전제하는 탈은폐를 포기하는 것이다"(102).

   

f) 언어와 정의


긴 이 장의 마지막 절은 지금까지의 전개의 아주 자연스런 결론으로 "언어와 정의"라는 제목을 가진다. 앞 장의 연장 선상에서 레비나스는 우선 어떻게 가르치는 자가 어떻게 외재성일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어떻게 그가 자신이 가르치는 의식 밖에 놓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사실 사유된 것의 외재성은 그것이 생각하는 사유에 의해 보증되는 한에서 의식을 초월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이 의식을 초과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판사가 사유의 자유 자체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102). 반면에 현상들에 어떤 의미를 제공하고 그것들을 주제화하는 것을 허락하는 스승의 현전은 객관적인 지식에서 자신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현전은 나와 함께하는 사회 안에서(en société avec moi)만 존재한다. "주술의 세계의 매혹을 부수고, 내가 홀로 불가능한 "그렇다(oui)"를 말하는 현상 안의 존재자의 현전은 타인의 탁월한 긍정성이며, 말 그대로 연-합(as-sociation)이다"(103). 바로 탁월한 한 존재자의 경험으로서  얼굴의 경험인 연합 안에서 모든 지식이 향유되는 고독한 확실성의 의식이 사라진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확실성은 나의 자유에,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의 고독에 의존한다.  반면에 연합, 즉 스승의 환대는 이것의 정반대편에 놓이다:"그 안에서 나의 자유의 연습은 문제 안에 놓여진다. 우리가 도덕적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러한 상황을 지시한다면, 연합 혹은 타인의 환대는 바로 도덕적 의식이다"(103). 이로부터 우리는 어쩌면 아주 명백한, 눈에 보듯이 하나의 명백한 사실 - 그런데 종종 그 명백함이 너무 명백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 - 을 확인한다: "나의 자유는 최후의 말이 아니며, 나는 혼자가 아니다"(103). 그리고 이때에 우리는 레비나스를 따라서 비로소 도덕적 의식만이 의식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 의식은 의식의 여러 양태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것들을 조건지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기설의 내재성이 아닌 가르침의 전이성transitivité에 의해 존재는 현시한다. 이렇게 "사회는 레비나스에 의하면 진리의 장소이며, 나를 판단하는 스승과의 도덕적 관계는 내가 진리와 맺는 연대의 자유를 근거짓는다. 그리고 언어가 시작한다"(104). 이 말 안에서, 나에게 말을 건네는 자의 말들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판단하는 타인의 근본적인 이방성을 발견하고 보존한다. 이 우리의 관계는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절대적인 관계성은 타인을 나의 지식 밖에, 그 자체로 정립하며, 이 절대와의 관계에서 주어진 것들은 말을 시작한다, 다시 말해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언어에 대한 사유에 의하면, 이념들의 "소통(communication)" 혹은 대화의 상호성(réciprocité)을 말하는 현대의 이론들은 이미 언어의 깊은 본질을 가린다. 언어의 본질은 그에게 "나와 타자의 역전불가능(irréversibilité)" 안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담자가 담론의 시작일 때에만, 대담자가 체계 너머에 머물 때에만, 대담자가 나와 같은 지평에 놓여있지 않을 때에만 말은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비나스가 자주 말하듯, 대담자는 너(tu)가 아니라, 당신(vous)으로,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그는 나의 주인처럼, 나의 영주처럼 자리한다고 말한다. 이방인이 주인이 되는 - 역으로 주인(hôte)이 인질(otage)이 되는 - 이 역설 안에서, "나의 자유는 이렇게 스승/주인(Maître)에 의해 - 이방인에 의해 -  고발되고 그는 나의 자유를 부여한다. 이 때 비로소 자유의 지고한 연습인 진리가 가능해진다"(104).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정의가 실현된다고 레비나스는 말할 것이다.  


- 다음에 이어질 <D. 분리와 절대>는 1부(동일자와 타자)의 마지막 장으로 4페이지 밖에 안되기 때문에 읽기가 덜 피곤할 것이다. 그리고 <2부 내재성과 경제(Intériorité et économie)>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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