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기토

데카르트, 주체성과 영혼의 정념들(1)

aurorepark 2011. 1. 7. 18:14

피에르 게난시아, <데카르트, 길을 내면서 (Descartes, chemin faisant)> 의 6장은 "주체성과 영혼의 정념들(Subjectivité et passions de l'âme)"이다.


Si personne ne conteste que ...만일 누구도 데카르트가 코기토(cogito)를 인식의 제 일 원리로 만들면서, 사유하는 것(res cogitans)을 다른 모든 것들보다 가장 확실한 실존으로 만들면서 근대철학에 길을 낸 사상가라는 사실을 반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면에,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의 철학 안에서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주체라는 용어도, 더더욱 주체성이라는 용어도 그려지지 않을 때, 사람들이 그의 철학에 대해서 적용하는 주체성이라는 용어의 사용의 적절성과 그 합법성에 대해서 물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주체성이란 용어를 가능한한 가장 중성적인 의미에서 영혼(데카르트적 의미에서 mens)에 속한 현상 전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사용할 것이다. 영혼에 속한 현상들은 사유들(cogitations 혹은 cogitata)일 수도 혹은 정념들, 다시 말해 영혼과 결합하는 신체 안에서 산출된 변형에 의해, 영혼 안에서 유발된 정서들(émotions) 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주체성이란 용어의 사용이 인식과 과학에 대한 질문으로 향한 철학의 틀 안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의 틀이 영혼의 현상들에 고유한 특수성과 실재를 제거하고자 하지 않는 그 만큼, 아니 오히려 그 이상으로 우리가 우리 안에서 느끼는 것, 가장 넓은 의미에서 사유와, 영혼이 자신의 밖에 있는 것으로 표상하는 심지어 자신과 독립적인 것으로 실존하는 것으로 표상하는 물질적인 체들과 연관된 현상들과의 차이를 강조할 것이다. 이 차이는 말브랑쉬에서처럼 물체와 정신의 세계, 혹은 가시적 세계와 지적인 세계처럼 두 세계가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또한 파스칼이 말하는 것처럼 대립되는 두 본성으로 나눠지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다만 사유들은 물체도, 물체의 분비물도 아니며, 물체들은 이념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이 아님은 다만 이념의 실재와 다른 유령의 실재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분된 두 세계가 아니라, 후설이 말하는 것처럼, 존재의 다른 영역들(régions différentes de l'être)이다. 따라서, 내가 믿는 것처럼, 주체성이라는 용어가 데카르트 철학에 고유하게 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영혼의 일단의 현상들의 내재성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사실 주체성을 마치 크기, 형태, 운동 등에 의해서 기술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영혼 밖에 놓으려는 시도는 부조리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이 용어를 데카르트 이후의 로크, 버틀리, 흄의 철학들에서 나타나는 주체성의 철학과 같은 것으로 다뤄서는 안될 것이며, 현대 철학, 특히 현재 프랑스 철학자들, 에마뉘엘 레비나스, 미셀 푸코, 그리고 특히 미셸 앙리의 주체성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이어지는 글에서 가능한한 데카르트의 주체성의 개념화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코기토의 발견을 기술하면서 그의 생의 후기, 영혼의 정념론(도덕 일반)으로 데카르트가 끌어낸 반성에는 전적으로 낯선, 무지한 근대의 개념화로부터 떼어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이 반성은, 그것이 육화된 인간에게 의존하든 혹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에 상관적인 현상에 의존하든, 코기토에 대한 탐구의 심화이며 그것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의 주체는 순수한 정신과 육화된 인간 사이의 불가능한 종합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 자신과 관계하면서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의식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든, 혹은 생각하는 사물로서 혹은 정념들을 겪고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것들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든, 항상  실체적으로 개별적으로 실존하는 "같은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