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년 헤겔의 <정신 현상학>이 출간되었을 때, 아무도 그것을 읽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 책을 주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셀링 아래에서 셀링과 더불어 어떤 의미에서 그를 위해(셀링이 그에게 베푼 호의를 갑기 위해서 - 사적인 그들의 관계를 잠시 언급하면, 셀링, 헤겔, 휠더린은 튜빙켄의 신교 신부들을 양성하는 신학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이 셋은 함께 프랑스 혁명을 기리는 자유의 나무를 심었다고도 전한다. 졸업 후 셀링은 그의 나의 22살에 예나의 교수로 이미 그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면, 헤겔은 여기 저기 강사직으로 전전하다 셀링에게 편지를 한다. 그의 생활고와 그의 미래에 대해서, 이에 셀링은 즉각적으로 헤겔을 예나로 불러 전임강사로 취직 시켜주었다고 한다.) 글을 쓰던 때와 달리, 셀링이 교수직을 그만두고 떠난 후 드디어 그의 세상이 될 것 같았는데, 그의 첫 저작(셀링이 떠난 후 첫 저작)은 큰 실패였다. 왜 그랬을까? 마케 교수에 의하면(그의 <정신현상학 강의>) 아마도 이 책의 난이성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헤겔 책에서 가장 어려운 책, 셀링이 떠난 후 드디어 그의 세상이 될 것 같은, 그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는 한 문장 문장이 찬란하기를, 천재적이기를 바랬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한 책에 그가 하고 싶었던 말, 셀링 아래에서 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한 번에 그 안에 다 집어 넣으려고 하다보니 책은 무거워지고 책은 읽기가 더더욱 힘들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실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재미있는 표현에 의하면 <정신 현상학>은 물이 섞이지 않은 100도짜리 술과 같다고 한다. 이런 술은 마실 수가 없다. 그것을 마셨다가는 목구멍이 그 자리에서 타 버릴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일 것이다. 말년에 헤겔은 이 <정신 현상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쓸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1831년 이 책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그의 <정신 현상학>은 바하의 무반주 첼로가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연주될 수 있었던 것처럼,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독일에서 하이데거와 더불어서(그는 헤겔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코제브의 <헤겔 강독 입문>을 출발로 비로소 읽히고 해독이 시작된다. 그의 강의에는 메를로-퐁티, 라캉, 레이몽 끄노 등등 그 당시의 빛나는 석학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레이몽 끄노는 나중에 이 강의를 모아서 책으로 출간한다. 그러고 보면 헤겔을 우리가 읽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다. 그의 책은 19세 초엽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왜 20세기에 와서야 그의 책이 드디어 주목을 받게 되었을까? 마케 교수에 의하면 그 책이 가진 실존적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정신 현상학>은 신, 영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이것들이 우리에게, 이것들을 경험하는 유한한 의식에게, 죽음의 존재인 우리에게 현전하는가를 기술하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의 현상학은 후설의 현상학이 아니다. 이것들이 의식에 현전하는 것은 "지식" 안에서,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하고, 논리를 따라서, 즉 언어 안에서 지식이 변형되는 것을 보는 그런 의식에게 이것들이 어떻게 현전되는가를 기술하는 것이다. 헤겔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 지식 안에 던져져 있다고 말한다. 모든 철학적 작업은 사후적인 것으로 철학은 이 안으로부터 그것의 궁극적인 형성을 이끌어내는 것, 전개하는 것이다. 헤겔은 그 길은 험난하기 그지 없다고 말한다. 가는 길에 우리는 어딘가에 빠져서 길을 잃고 절망에 빠질 수도, 가는 길에 의심에 차서 길을 포기할 수도 있다. <정신 현상학>의 실존적 성격에 대해서는 코제브만큼 잘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
헤겔의 철학은 전체적이고 변증적인 한 존재자로서의 이해되는 인간에 대한 기술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헤겔이 인간을
변증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유한한 자, 죽음의 존재(mortel)로 "나타난다(apparaître)"는 것을
의미한다(현상학적 기획). 혹은 같은 말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연적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너머가 존재하지
않는, 즉 신을 위한 자리가 없는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형이상학적 기획). 혹은 같은 말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 안에서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진리 안에서 행위일 수 있다(존재론적 기획).(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Hegel, 헤겔 강독 서문, tel Gallimard, p. 527).
코제브의 헤겔 읽기는 이미 하이데거의 영향 아래에서 그를 읽는 것이었다. 마케 교수는 그래서 코제브의 <헤겔 강독 입문>은 '입문'이 아니라 '해석'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헤겔과 하이데거의 혼동은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프랑스 지성계의 그의 헤겔 해석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르트르에서 라캉에서 또 레비-스트로스에서, 또 메를로-퐁티에서 코제브의 헤겔/하이데거를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60년에서 70년대의 지성계의 분위를 레비나스는 한마디로 "전체성"이라고 표현한다. 앙리는 "가장 피상적이기에 가장 널리 퍼져있었던 구조주의가 철학을 대신해서 인문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에 대한 외적 관점만을 제시"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와 앙리의 철학적 기획은 어쨌든 그 당시 코제브가 위에서 간력히 제시하는 존재론적 기획 안에서 전개되는 진리, 즉 죽음, 세계, 시간 안에서 전개되는 철학의 방향을 전향하는 것이다.]
<정신 현상학>의 제목에 대해서 말하자면, "현상학"이란 말은 잘 알려져 있듯이 1764년 람베르트에 의해 처음 말해진 것이다. 그는 현상학을 현상의 과학, 그가 "초월론적인 관점"이라고 부르는 가상들의 과학으로, 그것의 목적은 어떻게 진리를 가상과 구분할 수 있는가였다. 결국 현상학은 그 시작에서 의식의 환각, 즉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수정이 필요한 그런 환각의 과학이었다. 그의 친구들 중의 하나였던 칸트가 1770년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칸트는 이 용어에 관심을 보인다. 이 편지에서 칸트는 "순수 이성의 대상들에 대한 판단을 감성과 오성에 대한 대상들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감성의 원리들과 오성의 범주들을 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순수이성비판의 기획의 일부이다. 여기서 칸트는 현상학을 형이상학을 앞서는 것으로 말했을 때, 이 앞섬은 선험성이 아니라, "예비학"의 의미에서 앞섬을 의미한다. 물론 이 당시 칸트는 아직 형이상학이 "불가능한 학"이라는 결론에 이르기 전이다. 따라서 그 당시 현상학의 역할과 지위는(후설과 무관하게) 순수히 부정적인 지위를 가졌다. 헤겔은 칸트의 이 편지를 알지못한 상태에서 칸트와 거의 같은 생각으로 현상학을 바라본다. 현상학은 헤겔에게 과학의 체계, 나중에 그의 엔치크로페디에서 자세히 밝혀지는 그의 지식의 체계를 위한 "예비학"의 지위를 가진다. <정신 현상학>은 결국 그의 "지식의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진리를 드러내는 체계 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체계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의 도입을 위해 필요한 '가상의 학'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체계를 형성하는 논리, 자연, 도덕은 마치 우리 신체의 상대적으로 의존적인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서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처럼 유기체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체계라는 이념은 처음에 의학의 유기체의 개념으로부터 빌려온 말이다. 이 세 분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특히 스콜라 철학 시대에 유럽의 학제를 형성해온 것이기도 하다. 헤겔에게 특이한 것은 이 체계가 새로운 이념의 제시가 아니라, 철학이라는 말과 혼동되면서 고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서 모든 철학이 이 체계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체계의 이념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와 유사한 생각을 조금 멀리는 스피노자에서 가까이는 칸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스피노자에게 체계적이라는 것은 유기적이 아닌 연역의 체계이고 칸트에게서 드러나는 삼원성(이론, 실천, 판단)은 헤겔적 의미의 체계도, 그것을 연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몰라도, 체계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가 관심을 가졌던 것, 그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지식, 그것이 주체와 맺는 관계였으며, 도덕 법칙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와 가지는 관계였으며, 예술과 삶이 아니라 그것들이 미적으로 그리고 자연의 합목적성을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판단하는 우리의 존재 방식이었다. 이것은 칸트에서 초월론적인 방법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드러난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을 질문하는 것이다. 칸트를 현상학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미셸 앙리의 칸트 읽기는 그의 데카르트 읽기와 달리, 하이데거의 칸트 읽기를 그대로 따른다. 모든 철학사의 해석을 반해서 데카르트를 읽던 그가 왜 칸트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그것은 나에게 알 수 없는 일이다.] 칸트에서 대상에 대한 질문은 대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각각의 영역에서 주체의 반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끌린다면, 이런 종류의 주체의 반성의 철학과 단절하면서 이 삼원성이 하나의 체계로 형성되는 것은 우선 헤겔의 선구자인 셀링에서였다. 셀링과 구분되는 헤겔의 학의 체계의 고유성,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는가? 주체와 대상의 동일성을 예술 작품(미적 대상) 안에서 혹은 창조자(주체) 안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언어 안에서 찾은 것이었다. 우리가 보통 언어로의 전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라캉을 반하게 했던 헤겔이기도 하다. 헤겔에게 언어는 주체와 대상이 동일화되는 고유한 장소였다. 언어는 주체의 외재화이면서, 대상의 내재화이다. 따라서 헤겔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주체를 객관화하는 것이고, 대상을 주체화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대상들은 시간과 공간에 놓인 대상들이 아니라ㅡ다시 말해 칸트에서처럼 주체의 주관적인 조건에 놓인 것이 아니라ㅡ본질의 영역으로 승격하고, 더불어 주체, 정신, 역사에 대한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동일성의 철학"이 탄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동일성의 철학은 헤겔에게 "언어의 철학", 즉 논리학(logique)이 된다(logos는 그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말, 담론, 논리이다. 이것은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요한의 진술에 대한 헤겔의 한 해석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헤겔에게 철학은 이런 방식으로 처음부터 동일성의 철학이 된다. 철학은 언어가 스스로 말을 할 때, 즉 언어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을 시작할 때 생겨난다. [여기에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며, 우리의 언어도 아니다. 우리와 상관없이 말해지는 이 언어는 하이데거에서 '존재'라고 불린다. 여기서 말하는 '나', 혹은 '다자인'의 지위는 무엇인가?] 그런데 논리는 언어의 언어, 즉 언어에 대한 언어이다. 즉 언어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진술들 각각에서 발견되는 자신의 구조와 자신의 근본적인 범주들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에게 논리학은, 다른 학들이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서 말할 때, "절대적인 학"이 된다. 칸트로부터 시작해서(판단론), 셀링에서 "예술 철학"의 자리에 놓았던 것이 이제 헤겔에서는 "논리학"이 된다. 이 논리학은 그 당시의 학제, 즉 의학, 법학, 신학이라는 삼원성에서 신학을 대체한다. 그리고 정신철학은 법학을, 자연철학은 의학을 대체한다. 헤겔이 말하듯 논리학은 세계, 피조물과 상관없이 즉자대자적인 신, 절대와 다른 것이 아니며,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말하는 것, 즉 언어가 된다. 헤겔을 읽기 시작한 철학자들이 이 언어의 자율성,이 언어의 절대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순수한 우연이 아니다. 호젠쯔바이크의 "살아있는 말parole vivante"에 대한 강조는 그 당시 처음으로 헤겔의 체계에 대한 반박이었다는 것에서 그 의미가 있다. 그는 처음 헤겔의 영향 아래에서 그의 법철학을 가지고 그의 철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그의 박사논문은 <헤겔과 국가>(1912)이다). 1차 대전 중에 써진 그의 <구원의 별>은 처음으로 헤겔의 그늘을 벗어나서 그의 글을 쓰기 시작한 책(보통 유대주의로의 복귀라고 말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 언어는 말하는 주체, 의식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이것은 우리의 주된 관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어떠어떠하다고 말한다고 하자. 나는 이런 저런 주어(sujet, S)에 대해서 이런 저런 술어(P)를 진술한다. 구체적으로 내가 "이 종이는 하얗다"라고 말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여기에는 "그것이 하얗다"라고 할 때, 그것(S)과 하양다(P)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주체(s)", 화자가 있다[나(s)는 그것(S)이 하얗다(P)고 생각한다(p)]. 상식적인 의식 일반의 진술 안에서 말하는 주체가, 즉 사유하는 내가 문장 안에 드러나지 않지만 이 모든 것의 "주인"처럼 나타난다. 이것은 보통 근대의 '주체/주어'의 발견이라고 말해지는 코기토의 발견이다. 그 이전까지의 진술(혹은 명제)은 진술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나는 무엇이 무엇이라고 생각한다"에서 "나는 생각한다"를 보지 못했다면, 근대의 주체성의 철학은 이 진술의 진정한 '주인'을 발견한 것이다.
다시, "그것이 하얗다"라고 말할 때, 술어는 여기서 의미가 발생하는 장소로 나타난다. 즉 술어는 이 주어가 의미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보편(le signifié)"이라고 불리던 것이다. 여기서 주어(le signifiant)는 다만 '그것'이라고 말해진다. 그것에 자리에는 무수한 것들이 들어갈 수 있다. 의자가 하얗다. 얼굴이 하얗다 등등(S1, S2, S3 등등).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타날 때마다 항상 단독적이면서, 비규정적인 것으로, 말하자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라고 말해진다. 그런데 이 의식일반의 진술의 역설은 의미, 보편이 실질적으로 발견되는 항, 즉 주어는 이것을 "말하는 주체(s)"에 의해 그 지위가 격하된다는 것이다. "그것"(S)은 항상 개별적이고 비규정적인, 그것에 대해서 이러이러하다고 술어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나", 말하는 주체에 의해 마치 무의미한 것으로 떨어진다. 다시 말해 의미의 담지자(S)는 마치 무의미한 것으로 사라진다. 이로부터 S와 P의 관계는 독립적인 것처럼 나타나며, 그것의 관계를 연결하는 s, 화자, 주인, 자기에 대해서 반성하는 말하는 주체에 의해 우연적인 관계로 떨어진다. 이제 나는 "이 종이가 하얗다"고 말하는 대신에 "이 종이가 네모라고", "이 종이가 두껍다"라고 등등(P1, P2, P3...)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무수한 그것의 성질들 중에서 그것을 언어의 수준에서 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나" 개인이다. 즉 나는 진술의 주인으로 나타난다. 자기에 대해서 반성하는 이 주인은 그 출발에서 사물을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해서 그것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것을 버린다. 결국 그 선택은 나에게 달려있다. 사물은 어떤 의미에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S와 P를 연결하고 결정하는 것은 말하는 주체이다.
이것은 근대의 주체의 주체성에 대한 잘 알려진 비판ㅡ하이데거의 것이기도 한 비판ㅡ이다. 이로부터 헤겔에게는 이런 유형의 술어적 진술로부터 떠나서 그가 사변적 진술이라고 부르는 사변 논리로의 이행이 "철학"의 과제로 부과된다. 헤겔은 그래서 <정신 현상학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적으로 주어(주체S)가 우선 객관적이고 고정된 자기(le Soi objectif et fixe)로서 토대로 정립된다. 그리고 이어서 무수하게 다양한 규정들, 혹은 술어들이 정해지는 운동이 일어난다. 이 순간에, 이 주어(주체S)를 대신해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나, 자아가 끼어든다. 그는 술어들의 연결(le lien)이고 그것들을 지지하고 주체(s)이다. 최초의 주어(S)가 규정들 자체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의 영혼이 될 때, 두 번째 주체(s) , 인식하는 나(자아s)는 이 술어 안에서 최초의 주어(S)와 긴 경쟁의 관계를 끝내고서 그를 넘어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 주체는 그 안에서 그 최초의 주어를 다시 발견한다. 이제 술어화의 운동 안에서 작동자가 되는 대신에, 다시 말해 어떤 술어가 첫 번째 주어에 적절한가를 따지고(추론하고) 결정하는 대신에 자아는 내용으로서의 자기와 관계한다. 자아는 더 이상 대자일 수가 없으며, 내용 그 자체와 하나가 된다."(<정신 현상학>, tr. Hyppolite, Aubier, 53)
나의 진술에 대해, 술어적 진술(명제)에서 수동적으로 보이던 주어(S)는 이제 나의 간섭 없이, 술어 안에서 주어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사변적인 진술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것은 우리가 주체의 전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헤겔이 예로 들듯이 "신은 존재이다 Dieu est l'être"라는 진술에서 술어 존재(l'être)는 그 안에서 주어가 근거지어지는 실체적인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여기서 존재는 술어가 아니라 본질이어야 한다. 이로써 신은 고정된 주어의 자리에 의해서 존재하기를 그친다. 여기서 사유(주체s)는 주어에서 술어로 그것들을 연결하기 위해 이행하는 대신에, 술어 안에서 주어가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는 주어의 상실을 느낀다. 이 때에 사유는 즉각적으로 이 술어 안에서 주어를 다시 발견한다. 사유는 추론의 자유로운 주체의 자리 대신에 이 내용 안에 자신이 박혀있음을 발견한다. 결국 나, 자아, 사유, 주체는 이런 저런 주어에 술어를 부여하면서 내가 말을 할 때, 나는 사변적 진술 안에 거주한다. 다시 말해 내가 말하는 주어 그 자체가 스스로 술어로서 자신을 정립한다. 결국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말이 혼자 모든 것을 말하는 것처럼 일어난다. 나는 다만 수동적으로 그 내용의 무게 아래에서 그것이 말하는 것을 말할(해석할) 뿐이다. 말하는 주체가 주어의 내용에 떨어지자마자, 말하는 주체는 포기되고 이제 내용으로서의 자기, 주어가 말을 시작한다. 헤겔은 앞서서 이것을 말하는 주체의 헛됨(vanité)이라고, 버려야할 자유라고도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자인, 거기에 존재하는 존재는 의미의 산출과 정신의 운동을 위해 요청된다. 이제 상황은 전적으로 전복된다. 앞서 주어(S)가 주체의 도약을 위한 발판, 뜀틀이었다면, 이제 주체는 반대로 주어의 현시를 위한 운반자의 역할ㅡ양치기로서의, 존재를 지키는 양치기로서의 하이데거의 다자인을 생각하라ㅡ을 수행할 뿐이다. 이러한 주체의 전복은 이미 칸트의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사물로서 주체에 대한 비판에서 이미 예비된 것이기도 하다.
이미 이러한 운동은 근대의 칸트로부터 시작해서 하이데거, 더 나아가 라캉에 이르는 주체성의 비판의 흐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주체가 이 본질의 흐름, 존재의 자기 운동, 개념의 자기운동에 "간섭"하는 것이 금지된다면, 헤겔적 표현을 빌리면 "삼가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면, 이 주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절대의 담론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나는 거기에 일종의 증인으로서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이다. [마치 신의 존재가 나의 증언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다-자인, être-là의 '거기'는 이 증언, "철학하는 나"의 기능을 지시하는 것으로, 헤겔은 오성Verstand이라고 불린다. 이 오성은 매 순간 신적 삶, 혹은 개념의 원환의 운동 안에 "끼어든다". 그런데 이 삼가하는 태도에서 끼어드는 이 간섭은 존재의 자기 운동에 간섭하는 것이 금지될 때 그 간섭과 어떻게 다른가? 주어(S)의 내용 안에 포함되어 버린 이 생각하는 주체(s), 철학자, 혹은 형이상학자가 하는 일, 그 간섭은 무엇인가? 주체의 소멸을 말하고 그럼에도 요청되는 이 주체는 무엇인가? 마치 레비나스에서 주체의 주권을 박탈하고 그럼에도 그 주체를 간직해야 한다고 말할 때처럼, 또 형이상학에서 형이상학자를 생각하는 것처럼, 이 보존되는 주체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보존되는 주체의 역할은 그 둘에서 같은가? 이 질문은 물어져야 한다. 레비나스가 <존재와 다르게>에서 누가 질문하냐?라고 물으면서 묻듯이 말이다.[레비나스에서 하이데거와 헤겔은 그의 글들 안에서 거의 혼동된다. 다시 말해 그 둘은 같은 논리를 가지고 같은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할 뿐이다. 레비나스가 <존재와 다르게>에서 하이데거의 질문으로 시작해서 헤겔의 질문으로 끝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논리학 첫 몇 페이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듯이 존재는 무(né-ant존재자가 아님)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존재와 무는 생성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생성은 자신을 다-자인으로 드러낸다. 모든 논리적 범주들은 이렇게 연속적으로 앞서 우리가 말한 주어(S)의 내용의 운동, 즉 주체(S)의 자기 전개에 의해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운동은 헤겔에 의하면 순간적 운동이다. 이 운동 안에서 그럼 자아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는 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이 운동의 속도를 줄여, 그 곳에 점을 찍고, 쉼표를 찍는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의 표현에 의하면 "ponctuation 점찍기", 즉 휴지, 고정, 휠더린의 표현으로는 "분리"이다. 분리에 의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쉬지 않고 미끄러지는 존재의 운동의 리듬에 대한 반-리듬이 생성된다. [레비나스가 음악의 리듬의 주술적인 성격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이 주술 안에서는 나와 타자가 구분이 안되는 지경에서 나는 그 리듬에 저항없이 실려간다. 이런 상태를 휠더린은 오이디스푸스를 번역하고 뒤에 몇자 적은 후기에서 괴물적인 짝짓기라고 말한다. ] 헤겔은 여기서 오성의 이런 성격(갑작스런 정지, 휴지, 분리)을 죽음과 비교한다. 죽음은 운동의 갑작스런 정지이다. 물론 오성의 이런 기능을 죽음과 연결시키는 데에는 그 당시, 질풍노도 시대에 낭만주의자들에게 오성은 상상의 자유로운 운동을 석화라고 그 운동을 갑작스럽게 정지시키는 것으로 죽음으로 이해되어온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오성의 죽음의 성격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좋은 것이 있다고 헤겔은 말한다. "가장 두렵고, 가장 우리를 떨게하는 이 사유, 순수한 자아의 힘인 부정적인 힘은 그 보다 더 강한 힘을 요구한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 뒤로 물러서는 미가 아니라, 죽음을 간직하고, 죽음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삶, 정신의 삶을 요구한다"(Hypollite, 29). 정신이 진리를 획득하는 것은 그래서 "정신이 절대적인 찢겨짐, 분리 안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헤겔에 진술에서 <정신 현상학>의 비극적 성질을 드러낸다. 비극에는 휠더린이 말하듯 인간과 신의 한계 없는 융합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에 의한 한계 없는 순화도 있다. 헤겔은 여기서 주체, 사유하는 주체가 어떤 내용에 의해, 이 내용의 주어(S)에 의해 소유되는 어떤 경험을 다룬다. 여기서 주체는 그 기원을 자신 안에 가지지 않는 어떤 힘에 종속된다. 그런데 이 내용 안에서 사유가 그 리듬에 접근하는 것은 다만 반-리듬적인 정지, 이 정지에 의해서 분리될 때 뿐이다. 헤겔적인 용어로 오성의 간섭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칸트에서 일어나는 이성과 오성의 구분의 헤겔이 제시하는 이 구분은 어떻게 다른가? 칸트에게 우리가 잘 알듯이 이성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한 능력으로 조건지워지지 않는 것, 절대 - 영혼, 세계, 신 - 와 관계한다. 이성의 능력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회피하는 대상으로 우리를 던진다. 그래서 이 이성에 욕망이라는 이름이 붙을 것이다. 이 대상들은 인간에게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에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떼어낸다. 이 능력은 사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신적인 어떤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칸트에서 오성은 인식을 근거짓는 고정의 능력이라면 반대로 이성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서 떼어내는 능력이다. 반면 헤겔에서 오성의 고정의 능력은 한 단계일 뿐이다. 오성은 자신의 개념을 그것이 그것 아닌 것으로 변할 때까지 간직할 수 있다. 오성은 이것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다. 여기에 인간의 유한성, 죽음이 개입한다. 그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행한다. 같은 방식으로 이성은 오성에서, 오성이 획득한 것을 빼앗고 다른 것으로 더 멀리 나아간다. 이것은 헤겔에게 죽음, 부정의 역할이다. 오성이 지닌 이 유한성, 이 제한은 논리, 언어, 이성을 전진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헤겔에서 철학은 뒤집힌 세계라고 말해진다. 주체와 언어와의 관계에서 나는 더 이상 언어의 주인이 아니고 반대로 언어가 나를 지배한다. 여기서 주체는 다만 그 역사의 운동의 속도를 잠시 늦추는 것 이상을 하지 않는다. 즉 도래할 역사의 최종 국면이 조금 늦춰질 뿐이다. 에피소드라는 말이, 하이데거적으로 말한면 시대의 개념이 여기서 발생한다.
이러한 운동은 헤겔에게도 하이데거에게도 역사라고 불린다. 이 운동은 <정신 현상학>에 제한해서 말하면 영혼에서, 즉 직접적인 자연적 의식에서 어떤 충동에 의해 밀려 정신으로까지의 순화의 길, 과정으로 말해진다. 영혼은 가는 길에서 여러 정거장들을 거쳐서 결국 진정한 학(지식)에 이른다. 헤겔이 정거장(69)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앞서 오성의 점찍기, 일시적인 정지에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서 헤겔의 경험의 개념이 출현한다. 영혼이 겪는 이 길은 의식의 경험과 다른 것이 아니다. 헤겔은 이 길은 의심과 절망의 길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 의심의 데카르트의 의심도 키에르케고르의 절망도 아니다. 영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전 경험을 거쳐서, 자기에 대한 모든 형성의 전 과정을 통과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이를 때 정신에서 자신을 순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점점 커지고 성숙하고 늘어나는 경험을 통해서, 의심과 불안을 거쳐서 -부정을 거쳐서 - 어딘가에, 더 큰 긍정에 도달한다.
경험, ex-périence/Er-fahrung은 그 말이 지시하듯이 어떤 지점, 종점에 이르기 위해 길을 발견하고 그것을 거쳐가는 것(peirein=traverser)이다. 경험이 거기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는 것은 가능하다. 반면에 이 경험은 A-poria, 말 그대로 길이 없음에 이를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포리아의 경험은 가능한가? 데리다의 질문이 자리하는 곳은 여기이다. 데리다는 정의(justice)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경험이 없이는, 즉 아포리, 길 없음의 경험 없이는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정의는 이 불가능성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경험의 정의(définition)를 통해서 보면 정의는 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것을 정의하고 부르지 않지만 그의 얼굴에 대한 경험에서 이와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사실 그의 얼굴에 대한 경험은 이 정의에 대한 경험과 다르지 않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대상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으로 거쳐서 어딘 가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경험의 학"이라고 말해지는 정신 현상학의 경험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을 잃어버리면서 얻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레비나스가 드는 배고품의 경험, 혹은 고통의 경험은 돌아올 수도, 회복될 수도 없이 상실되는, 심지어 "무용한" 그런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을 거쳐서, 통과해서 이르는 길, 이 과정을 헤겔은 역사의 과정, 역사의 실현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헤겔의 짊문이 그 아래 깔려있다. 동물과 다른 인간의 능력은 무엇인가? 헤겔의 그 유명한 "단독적 보편"으로서의 개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은 헤겔이 말하듯 성적sexuel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인간이 아닌 것처럼, 개인이면서 개인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발생적인 본질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한 세대로 끝나는 개인이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발생하는 개인이다. 레비나스가 자신의 철학을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질문하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또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더 정확히 레비나스의 용어로 인간의 인간적인 것, l'humain dans l'homme에서 l'humain, 인간적인 것은 바로 이런 본질로 종합되어질 수 없는 것, 전체성 안에서, 인류의 개념 아래에서 이해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무한이라고 부른다면, 그 무한은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것도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헤겔의 역사와 진리에 대한 생각은 결국 '폭력'의 개념을 불러낸다. 말하는 화자인 나, 주체가 이 진리를 거부할 때 내 안의 이 진리는 나에게 프로이트 용어로 증상으로 나타난다. 내가 그 진리, 그 내용을 거부하는 거기에서, 주체는 내가 존재한다는 단순한 확실성으로 머문다[예를 들어, 데카르트의"At certe videre videor 내가 보는 것같다"는 이 확실성]. 헤겔에게는 우리가 알듯이 확실성, 의식 주체가 가지는 확실성, 그것이 감각적 확실성이든, 오성적 확실성이든, 주체(s)의 자기의 현전인 확실성은 항상 주어(S)의 내용과 관계하는 진리와 구분된다. 이런 확실성은 항상 빈 것이고 공허한 것으로 말해진다. 이로부터 하나의 과제, 자기의 확실성에서 진리로의 이행이 부과된다.
확실성과 진리의 구분은 오랜 진리의 정의, 오랜 스콜라 철학의 사물과 사유의 일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에 한 균열을 가져온다. 나의 사유가 존재와 일치하는 거기에 진리가 있다. 헤겔이 생각한 것은 이 일치에서 의식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의식이 의식이기 위해서는 사유와 존재는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는 간격이 있어야 한다. 주체와 대상, 사유와 존재 사이의 간격이 있어야 한다. 자아가 있으려면 그것의 반한 자아가 아닌 것이 있어야 한다. 자아 앞에 장애가 없으면 자아는 잠이 든다. 헤겔의 이런 생각은 그의 전쟁의 필연성과 그대로 이어진다. 이미 데카르트에서, 그리고 보다 명시적으로 칸트에서 드러난 주체와 대상과의 간격, 후설에서 지향성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주체와 대상의 간격은 진리가 있기 위해 필연적인 조건으로 말해진다. 이제 진리가 있기 위해서는 이 둘 사이의 일치가 아닌 긴장이 있어야 한다.그래서 헤겔은 그의 <정신 현상학>의 서언에서부터 자아와 그의 대상적 실체 사이의 비동등성이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들의 차이, 즉 부정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이 간격,이 결함은 그 자체 그들의 영혼이고, 그들을 운동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빈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진리는 이 간격으로부터, 이 공허로부터 이 부재로부터 빛난다. 만일 이 공허가 부동의 것이라면 여기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공허는 의식의 운동을 촉진하는 촉진자로서의 공허로 동적인 공허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에서 무가 부동의 무가 아니가 생성하는 동적인 무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움직이는 공허, 무, 이 모터는 헤겔에서 우리가 잘 알듯이 부정성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의식은 진리가 있는 거기와 다른 곳에 존재한다. 내가 있는 거기에 그것은 없으며, 그것이 있는 거기에 나는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존재하는 확실성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진리 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그렇다고 칸트처럼 넘어설 수 없는 간격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듯이 이 간극의 궁극적인 목적은 확실성과 진리 사이의 일치이다. 그것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가? 확실성 중에 가장 나에게 친밀한, 내밀한, 가장 확실한 것이 내가 나에 대해서 가지는 확실성이라면, 그리고 이것은 주어의 내용으로서의 진리로부터 가장 멀리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나에 대한 확실성은 진리에 이를 수 있는가?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2 더하기 2는 4라는 영원한 진리,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가 죽어도 살아도 전혀 변하지 않는 이런 진리가 아니다. 그에게 진리는 나에 나의 확실성의 경험, 느낌에서처럼 나에게 느껴지는 것, 헤겔의 용어로 경험되는 진리이다. 헤겔의 현상학의 확실성에서 진리에 이르는 이 여정은 나의 유한한 경험 안에서, 인식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사적인, 구체적인 경험의 의미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시나리오에 의하면, 헤르만 헤세의 성장 소설처럼, 처음의 주관적인 확실성은 다만 환상일 뿐이다. 삶의 여정, 진리에, 절대 정신에 이르는 험난한 이 오름길은 끝없이 자기파괴의 과정, 즉 자기 성장, 자기 형성, 헤겔적 용어로 Bildung이다. 이 역사는 절대 지식에서 완성될 것이다. 여기서 나의 확실성과 진리는 동등해질 것이다. 이것은 사실 헤겔에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과정을 열어 놓으면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이다. 처음에 의식이 자기에 대해서 가지는 확실성, 단순한 대자로서의 의식은 매 단계마다 그것을 진리라고 믿지만, 느끼지만 그것은 환상으로 다음 단계에서 극복된다. 실재적인 것이 국가라고, 종교라고 믿지만 매 단계마다 의식은 실수하고 이것은 극복된다. 의식이 가지는 이 유사-진리들은 단지 주관적인 확실성일 뿐이다. 이 경험은 나도 모르게 축적되고, 이 축적된 경험은 자아도 모르게 의식의 뒤에서 그가 가는 길을 인도할 것이다. 그것은 헤겔이 생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생성에 대한 의식은 나의 의식에는 모호하지만 철학자의 의식에서는 명백하다. 절대지식에서 일반 의식과 철학자의 의식은 하나가 된다. 일반의식이 철학자의 의식, 철학적 의식에 도달할 때 절대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 헤겔은 처음으로 철학에서 작가의 개념을 도입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물론 이 철학자의 의식은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동굴에서 진리로의 이행에서 산파처럼 있던 철학자에서 이미 말해진 것이기도 하다.
이 과정, 이 걸음(pas), 불어의 pas는 우리가 옮기는 '걸음'이면서 부정의 pas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pas는 이 발이 딪고 있는 절대적인 '여기', 헤겔적인 방식으로는 절대로 극복될 수 없는dépassable, 혹은 지양될 수 없는 Pas이기도 하다. 여기에 모든 것이 도달하는, 모든 사건이 도달하는 그런 여기, 그런 pas이기도 하다. 블랑쇼의 헤겔 읽기가 자리하는 곳, 레비나스의 헤겔 읽기가 지양 앞에서 주저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앙리의 전 철학이 자리하는 '여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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