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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자로서 후설의 <이념 I>읽기, 1부

aurorepark 2010. 10. 5. 05:42

나탈리 드프라즈의 책, <현상학자로서 후설 읽기>에 대해서, 그녀가 하는 실천으로서의 현상학 읽기의 내기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그녀가 읽는 <이념들 I>은 개인적으로 오래 전에 레비나스 읽기를 시작하면서 후설의 책 중에서 제일 먼저 읽은 책이기도 하다. 컽표지가 이제 나달나달한 이 책을 다시 읽고 있다.  참 느낌이 다르다. 후설의 이 책(1913)은 <논리연구>(1900-1905) 이후에 긴 침묵 후에 나온 책으로, 이 책에 출간과 더불어 많은 오해들을 불러 일으켰다. <논리연구>의 익명적 주체의 관점, 즉 초월론적인 의식의 비-자아론적인 관점은 "자아론적인 관념론"으로 이행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후설의 <논리연구> 전반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에서 실랄하게 비판되기도 한다. 특히 언어의 문제에 있어서 <논리연구>의 중립적인(혹은 익명적인) 주체의 입장은 <이념>에 오면 개인으로서의 자아로 옮겨간다. 이러한 전향은  그 당시 즉각적으로 수많은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하이데거가 이 책에 가하는 비판은 이미 그의 근본적인 존재론으로의 이행을 예비한다. 이 책, <이념들>은 현재에도 맑스가 아직도 다시 읽히고 다시 말해지듯이, 다시 읽히고 다시 말해진다.  레비나스가 이 책을 읽었듯이(그의 박사학위논문 <후설의 현상학에서 직관의 이론>은 이 책을 중심으로 다룬다. 또 그 이후에 후설에 대한 논문들에서 그리고 그의 저작들에서 이 책은 인용되고 비판되고, 칭찬되기를 그치지 않는다), 또 미셸 앙리는 그의 <물질 현상학>에서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정반대되는 방향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후설을 비판한다.


사실 후설의 주체의 삶의 지향성에 대한 이론은 그 이후의 현상학자들이 각자의 관심에 따라서, 각자의 현상학적인 방법 안에서 그것에 대립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길어내거나 간에 그들이 모이는 집결점이다. 그런데 그들이 후설에 가하는 비판은 사실 후설 자신 안에서 <논리연구>에서 <이념들>로의 이행, 즉 표상적인 객관주의에서 자아론적인 주관주의로의 이행 안에서 후설 자신이 지지했다가 포기한  혹은 반박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의 후설에 대한 자아론적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은 후설 자신이 <논리연구>에서 행한 것이고, 앙리의 표상적인 객관주의에 대한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은 후설 자신이 <이념들>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자가 주체 없는 대상을 말한다면, 후자는 대상없는 주체를 주장한다. 그런데 사실 후설은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에 머물고자 하지 않는다. 그에게 대상 없는 지향성도, 반성하는 주체 없는 지행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둘은 - 노에시스와 노에마 - 항상 피할 수 없는 상관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은 후설의 이행이 단순히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의 이행이 아니라, 새로운 객관주의, 새로운 주관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후설로 하여금 비-자아론적인 지향적인 의식을 포기하도록 이끌었는지? 또 어떤 동기에서 후설은 점진적으로 외적 지각이론과 내적 감정의 연대를 시도했는지, 다시 말해 객관적인 표상과 감정의 차이의 해소를 시도했는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앙리를 예로 드는 것은 그들은 프랑스의 현상학자들 중에 근본주의의 입장에서 가장 극단적인 두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메를로-퐁티와 레비나스의 이름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