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성과 무한 강독

1961년 서문

aurorepark 2011. 1. 17. 05:33

1961년 서문 (p. 5-16)


『전체성과 무한』을 여는 서문의 첫 마디에서 레비나스는 니체를 불러낸다.


"고양된 자리에서 우리는 도덕의 희생물(la dupe de la morale)이 아닌지를 묻는 것은 중요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쉽사리 동의할 것이다."(5)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의 행위의 준칙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다시 한번 읽는다.


"고양된 자리에서 우리는 도덕의 희생물이 아닌가를 묻는 것은 중요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쉽사리 동의할 것이다."


나는 다시 읽으면서, '쉽사리'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 고딕을 심었다. 이 책을 열면서 이 첫 문장은 내게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쉽사리’, 레비나스는, 우리는 쉽사리, 어렵지 않게, 이 문제 제기에 이 니체의 선언에 동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그 '쉬움'에, 레비나스의 ‘우려’가, 그 쉽지 않음 때문에, 의심이, 불안이 내려 않는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 쉽지 않음에서 그의 반성이 그의 철학이 시작된다: 최상의 알리바이, 변명이 될 위험을 안고 있는 도덕과, 역사와 정치의 이름으로 부인되고 거부되는 도덕, 이 사이에서, 이 의심에서, 이 쉽지 않음에서, 이 극단적인 경계심에서 그는 시작한다. 


도덕, 윤리에 대한 반성은 레비나스에서 '전쟁'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해서 정치에 대한 반성으로, 그리고 그것에 앞선 것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실재의 진리, 모든 존재, 존재 일반의 진리는 레비나스에서 전쟁 안에서 그리고 전쟁에 의해서 그려진다.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은 전쟁 그 자체로서, 레비나스에게 가장 명백한 가장 원천적인 존재의 경험으로 주어진다. 전쟁은 우연적이고 비본질적인  존재의 한 사실이 아니라, 존재의 법칙으로, 존재를 정의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해 진다. 아마도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를 불러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전쟁의 상황은 '전체성'의 개념으로, 전쟁은 어느 누구도 거리를 가지고 바라볼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기술된다. "아무도 아무 것도 이것 밖에서 존재하지 않는다."(6) 


"전쟁은 아무도 거리를 취할 수 없는 어떤 질서를 세운다. 이로부터 아무도, 아무 것도 이것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외재성, 타자로서의 타자를 드러내지 않는다. 반대로 전쟁은 동일자의 동일성을 파괴한다."(6) 왜냐하면 "전쟁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의 모습은 서양 철학을 지배하는 전체성의 개념 안에 고정되지" 때문이다. "전쟁 안에서 개인들은 그들도 모르게 그들을 명령하는 힘으로 환원되고, 개인들은 자신들의 의미를 그 안에서 빌어온다. 매 현재의 유일성은 객관적인 의미를 끌어낸다고 말해지는 미래에서 끝없이 희생된다. 궁극적인 유일한 의미, 최후의 유일한 행위가 존재자들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형성된 시대의 형식들 안에서 드러날 뿐이다."(6)    


아무도 이 전쟁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전쟁을 거부하는 것은 이 전쟁과 전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듯, "내 손의 무기는 항상 그것을 지닌 자에게 되돌아오기"(6)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가 든 칼은 돌아서 내 가슴을 겨냥할 뿐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평화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는 것은 레비나스에게는 최악의 패배를 의미할 뿐이다.


영구 평화를 말하면서 전쟁과 전쟁하는 것이 여전히 전체성의 논리에 속하고 그것에 의존한다면, 그리고 개인들의 잃어버린, 소외된 동일성을 회복하는 데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평화를 세우는 유일한 방법은 "존재와 본래적이고 독창적인 관계(une relation originelle et originale avec l'être)"(6)를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뒤에서 다음의 공식을 얻는다. 


"실재는 다만 그것의 역사적인 객관성에서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것은 이 역사적인 시간의 연속성과 단절하는 비밀(le secret)로부터, 내적인 의도들로부터 결정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원주의(pluralisme)는 이 비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51)


"파르메니데스와 단절하는"(시간과 타자, TA, 20), 전체성과 결별하는 사회의 다원주의, 인간들 사이의 관계, 상호주체성은 "헤겔에 의해 웃음거리가 된 주체성의 비밀로부터"(윤리와 무한, EI, 73), "구분되어질 수 없는" 진정한 주체성의 비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가 이 책의 목적을 "주체성의 방어" (11)라고 말했을 때, <전체성과 무한>은 바로 인간의, 인간 주체의 이 비밀의 탐구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1982년 대담에서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의 기획에 대해서 말하면서 전체의, 합산의 사회와는 다른 사회성을 밝히고자 했다고 말한다: "나는 이성적인 사회의  필수불가결함을 내가 기술한 상호주체적인 관계의 요구들 그 자체로부터 끌어내고자 했다. 여기서 일상적 의미에서 사회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homme est un loup pour l'homme)라는 원리의 한계의 결과인지, 아니면 반대로 사회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 존재하는(homme est pour l'homme) 원리의 한계의 결과인지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사회, 그것의 제도들, 형식들, 법들은 인간들 사이의 전쟁의 결과로서 우리가 제한 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가? 아니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윤리적 관계 안에서 열리는 무한과의 관계로 우리가 제한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가?"(74-75)


사회를 홉스의 동물적 원리로부터 끌어내는지, 아니면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인간적 원리로부터 끌어내는지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레비나스에게 인간은 인간에 대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전자는 전쟁의 원리가, 후자는 윤리적 관계로서 무한의 원리가 지배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홉스의 사상이 움직이는 장과 근본적으로 다른 장을 열 준비를 한다. 전쟁과 계약,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가 대립하는 장, 그 양자택일의 지평, 그러한 세계와 결별한다. 레비나스에게 인간, 그에게 항상 두 측면에서 "놀라운" 인간은 코나투스의 원리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에 앞선, 그것 이전의 상태에서 시작한다: "처음에 전쟁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전쟁 전에, 재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Langue et la proximité", EDE, p. 234, Vrin, 1968).


인간과 다른 인간의 관계는 "항상 전체성 밖에 있는 그 이상의 것"(7)과의 즉 무한과의 관계 안에 를 놓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계시적 종말론이 우리에게 전해준, 가르쳐준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것의(계시적 종말론)의 중요성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전체성 안에 목적론적인 체계를 도입하거나 역사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너머가 아니라, 전체성과 역사 너머의 존재와 관계 맺는다. 그것은 더욱이 전체성을 둘러싸고 있는 공허 - 그로 인해, 그 안에서 우리가 자의적으로 바람처럼 자유로운 주체성의 권리를 증진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유의 체계를 말할 수 있다고 믿는 그 공허) - 과 관계 맺는 것이 아니다.것은 항상 전체성 밖에 있는 그 이상의 것과의 관계이다."(7)


바로 여기에 존재의 언어를 말하고, 존재에 대한 인식인 진리를 말하는 철학자들의, 도덕과 정치를 대립시키는 철학자들의 불신이 자리한다.  이제 우리는, 그의 철학의 방법에 절차에서 드러나는 긴장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 긴장은 우선, 내가, 존재하는 나의 존재가, 나의 자리가 전쟁인 사실에 있다. 전쟁으로서의 존재인 나는 존재의 언어에, 이 존재에 붙어 있다. 다른 한편 이 내가, 존재하는 내가 이 존재로부터의 탈출을 말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존재에서, 이 철학에서, 이 전쟁에서 시작해서, 이 존재로부터의 탈출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의 지난한 법칙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길은, 존재 밖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존재의 심장으로부터, 이 존재의 한 가운데에서, 이 존재의 무한으로부터가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존재는 전체성으로 묶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의식은 정합성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 존재는 그 자체에 자기 파열의 가능성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안에 레비나스 철학의 방법의 긴장이 자리한다. 그것은 "넘어섬(ex-cendance), 행복은 필연적으로 존재에 발을 딪어야 하기"(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문) 때문이다. 존재에 발을 딪고, 존재로부터 출발해서 이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한 방식을 레비나스는 나중에 존재와 다르게(autrement qu'être)라고 부른다.


"철학을 종말론으로 대체함이 없이, 또 종말론적 진리를 철학적으로 증명함이 없이 - 우리는 전체성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안에서 전체성이 깨지는 하나의 상황으로, 사실 전체성 그 자체를 조건짓는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타인의 얼굴 안에서 발견하는 외재성 혹은 초월성의 파편이다. 엄격하게 전개된 초월성의 개념은 무한의 용어에 의해 표현된다. 이 무한의 드러남은 우리를 어떤 독단적인 내용의 수용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이 무한의 철학적인 이성성을 무한의 이념의 초월론적인 진리의 이름으로 지지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 안에서 초월론적인 관념론의 기술적인 과정까지 다 이해함이 없이, 우리가 앞서 기술한 것에서 보듯이, 객관적인 확실성 이전에 머물면서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내려)가는 방식이 우리가 보통 초월론적인 방법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해보이기 때문이다."(10)


여기서 레비나스는 자신의 방식이 초월론적인 방법과 유사하다고 해서 이 무한의 철학적인 이성성을 전자와 혼동하지 않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알듯이 후설의 환원은 의미의 구성을 위해, 우선 실재를 자발적인 의식 안으로 이끄는 데에 있다. 이 안에서 의식은 후설이 사용하는 빛줄기 rayon의 시각적 메타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의식은 대상으로 향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사유작용과 사유대상의 정합성이 감추고 있는 비정합적인 의식의 경험, 무한의 경험으로 향한다. 이 의식의 봄의 변경은 그에게 윤리적인 봄의 방식을 형성한다.


"대상과의 정합성으로 머무는 지향성은 의식을 그것의 근본적인 수준에서 규정하지 않는다. 지향성으로서의 보든 지식은 이미 무한의 이념, 탁월한 비정합성을 가정한다."(12)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증명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 비정합성의 경험이 문제이다. 전체성이 깨지는 지점, 그 상황은 바로 이 전체성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체의 가능성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전체가 정치적인 것이라면, 이 정치적인 것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후설의 초월론적인 환원이다.(레비 나스의 후설의 비정합성과 환원에 대한 이해는 그의 글 "철학과 각성"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는 이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이 조건, 무한을 더 이상 해체할 수 없는, 해체의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조건으로서 '정의'라고 부른다.


"물론 무한과의 관계는 경험이라는 용어에 의해서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무한은 그것을 생각하는 사유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 넘침 안에서 정확히 무한의 무한화(infinition) 자체가 산출된다. 따라서 무한과의 관계를 객관적인 경험과는 다른 용어로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경험이 정확히 절대적인 타자와의 관계를 의미한다면 - 다시 말해 항상 사유를 넘치는 것과의 관계를 의미한다면 - 무한과의 관계는 탁월한(par excellence) 경험을 완성한다."(10)


이러한 상황, 전체가 깨지는 상황은 타인의 얼굴 안에서, 타인과의 대면 안에서만 일어난다.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무한의 실재가 아니라, 외재성 혹은 초월성의 파편이다. 이 파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존재, 그 전체가 파열하면서 던지는 한 조각으로서의 존재의 파편이다. 무한은 어떤 내용으로 그려질 수 있는 것도, 주제화, 명제화, 실체화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타인을 통해서,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타인의 말을 통해서, 타인의 몸짓을 통해서, 경험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윤리는 일종의 '봄', '보는 방식(une optique)'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미지 없이 보는 방식(une vision sans image)이라고 말한다. 이 모순적 진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종의 보는 방식이다. 그것은 빛이 없는 어둠에서 보는 방식이다. 형상의 이면에서, 더 정확히 말하면, "정면이 없는 이면"에서 보는 방식이다. 눈은 보는 것에 귀는 듣는 것에 결정되어 있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얼굴은 말을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나는 얼굴을 보면서 얼굴의 말을 듣는다. 나의 눈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눈>이 된다. 바로 여기에 레비나스가 '일종의 봄의 방식'이 존재한다.  혹은 일종의 '광학'이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광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면, 광학이 빛과 눈과 보여지는 것과의 관계를 다루는 학이라면, 윤리는 분명 보는 방식의 하나이기는 한데, 빛 없이, 지평 없이, 세계 밖에서 보여지지 않는 것을 보는 하나의 방식으로서의 "광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무한과 관계하는 종말론적인 관점, 봄(le vision)은 우선 전체와의 단절의 가능성에, 그리고 맥락 없는 의미의 가능성에 이른다. 도덕적 경험은 이러한 '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봄을 소진한다. 윤리는 이러한 봄의 한 방식이다. 그런데 봄을 전체화하고 종합하는 객관화의 덕목이 결핍된 "이미지 없는 봄"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또 다른 유형의 관계 혹은 지향성이다.( 8)


다른 유형의 관계 혹은 지향성은 나중에 "비-지향적 의식"이라고 불린다. 레비나스가 윤리를 일종의 봄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선 현상학의 의식의 지향성이 하나의 봄의 방식일 때, 이 방식의 변형이라는 의미에서이며, 의식작용과 의식대상의 정합성으로서의 의미의 구성은 이 의식을, 이것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그 근본적인 수준에까지 다 소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 소진은 레비나스가 윤리라고 부르는 것 안에서 소진된다. 


"우리는 타인의 현전에 의해 나의 자발성을 문제 삼는 것, 이것을 윤리라고 부른다."( 33)


이 진술은 우선 전체성과의 단절은 개념적인 논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구체적인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의 얼굴과의 만남, 얼굴과의 대면(face-à-face)에 의해서만, 그것을 통해서만 전체와의, 지난한 존재와의 단절을 말할 수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무한'은 이 만남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 진술은 전체성과의 단절은 로부터, 전쟁인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전쟁을 문제 삼는 것은, 나 자신, 나의 의지, 나의 자유, 나의 이기심, 나의 존재하고자 하는 힘을 문제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레비나스가 윤리라고 하는 것은 무한과의 관계에서 타인의 얼굴에 의해 나를 문제삼는, 나의 타인을 살해할 수 있는 지경, 한계까지 갈 수 있는 나의 힘을 문제삼는 것이다. 여기서 타인의 얼굴로부터 오는 명령,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보다 더 구체적인 것은 없다. 레비나스의 윤리 안에는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지 말하는 유형의 윤리적인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타인의 얼굴의 경험은 구체적인 사건이며, 경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타인의 얼굴의 경험은 나를 내려 놓는, 나의 존재의 존재하고자 하는 힘 그 자체를 내려 놓는 경험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윤리에 구체적인 내용이 부재한다고 해서 그의 윤리가 추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윤리적인 경험,  겪음, 그 시련의 구체성을 깨닫지 못한 것에서 유래할 것이다. 이 자기를 내려 놓는 경험보다 더 구체적인 윤리적인 경험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남의 우연적인 요소는 레비나스에서 우선 단독자로서의 '나', 나의 경험을 전제하며, 이 나의 경험을 촉발하는 타인의 현전을 전제한다. 이어서 이 우연성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의 무한 운동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는 윤리는 하나의 명령도, 규칙도 아니다. 그것은 항상 다시 말해지고, 반박되고, 또 다시 말해지고, 또 반박되는 끝없는 무한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나를, 나를 유지하고자 하는, 좋은 볕 아래 자신을 놓고자 하는 나의 의식의 자발성, 나의 이기심을 문제 삼는 끝없는 과정, 반복, 회귀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 


나를 세움이 내 밖의 것을 내 안에, 나의 것으로 잡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내 안에 나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그런 상황이라면, 이것을 존재론이라고 부른다면,  이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 conatus essence를 문제 삼는, 이 존재의 노력을 문제 삼는 나의 태도는 레비나스가 윤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후설의 이론적인 파악으로서의 지향성을 타인에로의 타자에로의 열림, 향함으로서의 지향성으로 전향한다. 바로 이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윤리는 일종의 봄의 방식, 지향성의 한 방식이라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이 방식을 일종의 현상학적인 연역의 방식이라고 부른다. 


"전체의 이념에 대한 반대, ...이것을 위해 제시되고 전개된 개념들은 현상학적인 방법에 빚지고 있다. 지향적인 분석은 구체적인 것에 대한 탐구이다. 이 개념은 ...지평들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이 지평들은 사유에 하나의 의미를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후설이 본질적인 가르침이다. 후설 현상학에서, 이것을 씌어진 그대로 따른다면, 이 의심되지 않는 지평들이 대상들을 지향하는 사유들로 해석되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후설의 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사유의 잊혀진 경험에 의해 객관적인 사유가 그 한계가 넘어선다는 (그의) 이념이다. 사유의 형식적인 구조 - 사유작용의 사유대상의 구조 - 가 감추고 있는, 그러나 사유의 구체적인 의미에서 그 사유를 간직하고 드러내고 회복하는 사건들 안에서  이 구조의 파열은 필연적이나, 분석적이 아닌 일종의 연역을 구성한다. 이 연역은 이 책에 "다시 말해", "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저것을 완성한다" 혹은 "이것으로 저것처럼 산출된다"라는 방식으로 표현된다."(14)


여기서  레비나스가 일종의 연역이라고 부르는, 혹은 초월론적인 방법이라고 부른 것, 즉 다시 말해, 주어진 것, 소여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주어진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다른 표현을 빌리면, 이 과정은 어떤 연극의 한 장면을 그 장scène의 <연출의 상황>으로까지, 그 조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혹은 거슬러 내려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근본적인 외재성으로 향함과 바로 이런 이유로 형이상학이라고 불리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존재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 이 형이상학적인 외재성에 대한 존중은 진리를 구성한다. 이 정향은 이 책의 작업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며, 이성의 지성주의에 대한 존중을 증명한다. 그러나 객관성의 이념에 의해 인도되는 이론적인 사유는 이러한 정향을 다 소진하지 못한다. 이론적인 사유는 이러한 염원 아래 머문다. 만일 윤리적인 관계가  - 이 책에서 이어서 볼 것이지만 - 초월성을 그 끝까지 인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윤리에서 본질적인 것은 초월적인 지향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며, 모든 초월적인 지향은 사유대상과 사유작용의 구조를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리,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부터 하나의 "봄의 방식 optique"이다.  ...전통적인 이론과 실천의 대립은 절대적인 타자와의 관계가 세워지는 형이상학적인 초월성으로부터 지워질 것이다. ...우리는 이 둘이 혼동되는 지점으로까지 밀고 갈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윤리로부터 형이상학적인 외재성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15)


이러한 이행은 "전체성에 대항한 순수하게 에고이스트적인 주체의 저항의 수준에서도, 죽음 앞에서의 주체의 불안에서도 아니다." 그것은 "무한의 이념에 근거한 주체성의 방어"(11)에서만 가능하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 진술이 확인하듯이, 그가 찾는 전체성으로부터의 탈출은 키에르케고르적인 해결도, 하이데거적인 방법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레비나스의 주체성의 방어가 어떻게 현대의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열어보여준 이 두 철학자들과 구분되는지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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