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마르셀과 장 발에 바쳐진 이 책, <전체성과 무한>의 목차를 잠시 보자. 우선 5개의 부로 나눠있다.1부는 <동일자와 타자>, 2부는 <내재성과 경제>, 3부는 <얼굴과 외재성>, 4부는 <얼굴 너머>, 5부는 <결론>이다. 그리고 1부는 4개의 장으로, A. 형이상학과 초월성, B. 분리와 담론, C. 진리와 정의, 그리고 D. 분리와 절대, 로 나눠져 있다. 그리고 A는 5개의 절로, 1. 보이지 않는 것의 욕망, 2. 전체성과의 단절, 3. 초월성은 부정성이 아니다 4.형이상학은 존재론을 앞선다, 5. 무한의 이념으로서의 초월성, 으로 나눠져 있다.
1 부는 <전체성과 무한>의 형이상학적인 전제들의 전개이다. 이어지는 2, 3, 4부는 이 전제의 구체화들이다. A의 <형이상학과 초월성>에서 다뤄지는 내용들은 레비나스 철학의 근본적인 개념들, 전제들 즉 형이상학과 초월성에 대한 정의와 논의의 전제들에 바쳐진다. 1절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욕망>은 형이상학적 욕망에 대해서 결핍의 만족을 위한 욕망이 아닌 욕망에 대해서 말한다.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에서 그는 결핍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양의 오랜 전통이 이 결핍에 의존한다면, 그로 인해서 형이상학적인 욕망, 초월성은 기껏해야 인간의 유한성의 결핍의 보충으로 무한의 존재와의 일치의 욕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인간의 유한성은 결핍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초월성은 무한과의 일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1. 보이지 않는 것의 욕망 (p. 21-24)
""진정한 삶은 부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세계 안에 존재한다. 형이상학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서 생겨나고 유지된다."(21)
렝보의 시구로 시작되는 1절의 첫 문장에서, 형이상학적 욕망은 삶의 부재와 내가 세계 안에 있음이 라는 이중적인 상황에서 그 정당성(alibi)을 발견한다. 이 간결한 한 문장은 레비나스의 현상학을 요약한다. 현상학이 봄의 기초해서 봄 안에서, 직관 안에서, 원리들 중의 원리인 봄의 직관 안에서 그 정당성, 알리바이를 발견한다면, 레비나스가 형이상학적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재하는 삶과 내가 세계 안에 있다는 이 모순적인 상황 안에서 그 정당성을 발견한다. 삶은 세계 안에 있지 않기에, 그것은 봄에 자리하지 않기에, 여기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욕망이 자리한다.
"그것(형이상학적 욕망)은 "다른 곳", "다르게" 그리고 "타자"에로 향한다."(21) 이러한 욕망는 사유의 역사 안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자기집에서 출발해서, 아직 알려지지 않는, 혹은 감춰진 땅을 향해, 낯선 자기 밖으로, 저-아래(un là-bas)로 향하는 운동으로 그려진다".(21)
다른 곳으로 혹은 타자에로의 이 운동은 내가 매일 먹는 밥과 다른 것을 먹기, 내가 보는 경치와 다른 것을 보기, 나 자신과 다른 또
다른 나를 만나기와는 다른 것으로, 이 운동은 그와 다른 종류의 운동, 다른 종류의 보기, 다른 지향의 운동을 지시한다. 이런 것들은 먹어서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친숙해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들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더욱이 나에게 단순한 결핍으
로 존재하는 것들도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다시 동일성으로 환원되어질 수 있는 또 다른 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은 진정한 타자성이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러한 타자성들은 이어서 내 안으로, 나의 소유로, 나의 동일성으로 흡수되고, 소화되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형이상학적인 타자에 대한 욕망은 어떤 여행도, "어떤 날씨의 변화도, 경치의 변화도 이 욕망이 향하는 것에 대한 만족을 줄 수
없는", "전적으로 다른 것, 절대적으로 다른 것, 절대적인 타자에로 향하는 것"(21)이다.
나에게 결핍된 것을 찾는 필요 혹은 욕구(besoin)는 존재의 완벽함, 그 충만에 비해 나의 존재의 결핍, 부족에 의해 이끌린다.
이것은 마치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의식과,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사랑과 일치한다. 본질적으로 존재로 향하는 의식의 운동은 마치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위한, 떠나온 곳으로, 있었던 것으로 돌아가지 위한 '향수'와 다르지 않다. 낭만주의적 탈출이 여전히 이
향수에 머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고향으로 돌아감은 안고가 말하듯 "어른이 할 일이 아닐 것"이다. 사르트르의
결핍으로서의 의식이 존재로 향함은 그 본질에서 이 향수에 의존한다. 그 일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비극적인 의식의 향수,
여기에는 더 이상 환상은 없으나, 여전히 이 결핍으로서의 의식의 이념은 하이데거의 향수와 마찬가지로 이 낭만주의적 향수와 같은
배에 올라 있다.
형이상학적 욕망은 이타크로 돌아오는 율리스처럼 되돌아 옴의 향수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욕망은 우리가 태어나지 않은 나라에 대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22) 우리가 태어나지 않은 나라이기에 우리는 이리로 돌아갈 어떤 향수를 가질 수 없으며, 우리가 태어나지 않은
나라이기에 그것은 나에게 한번도 현재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갈증이라고 부르는 도덕적 혹은 종교적 욕망, 성적
욕망, 사랑도 형이상학적 욕망에 비하면 아직 순수하지 않다고, 충족되어질 수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 그 만족과 실망, 충족과
그에 대한 실패는 그래서 쾌락의 순준에 머문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형이상학적 욕망은 다른 지향(intention)을 가진다. 그것은 단순히 보충될 수 있고, 완성될 수 있는 모든 것 너머를 욕망한다. 그것은 선함(la
bonté)과 같다. 욕망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더 깊이 판다. 갈증이 갈증을 부르듯이, 욕망은 욕망을
부른다. 이 욕망에 의해 키워지고 자라는 관대함, 선함은 이 욕망과의 거리, 분리를 줄이지도 제거하지도 않는다. 이 욕망에 의해
키워지는 관대함과 선함은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마셔도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과 같다. 이 욕망은 우리의 죽음처럼 미리 그려볼 수 있는 어떤 예측도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이다. 이 욕망은, 욕구하는 존재가 유한하고(mortel), 욕구되는 대상이 보이지 않을 때, 절대적이다."(22)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 말이 관계의 부재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주어지지 않은 것", 다시 말해 "그것에 대한 관념 혹은 이념이 없는 것"과의 관계를
함축한다(이어지는 장에서 이 관계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봄(la vision)은 관념과 사물의 일치, 사유와 사물의 일치, 정합성, 다시 말해, 사물을 전부 내
관념 안에 다 끌어 안을 수 있는 이해(compréhension)를 의미한다. 반면에 데카르트는 제 3 성찰에서 무한의 이념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나의 두 팔을 펼쳐서 그 품 안에 다 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정합성은 그렇다고 해서 관념에 대한 단순한 부정 혹은 이 관념의 모호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빛과
어둠의 밖에서, 존재하는 것들을 측정하는 인식의 밖에서, 욕망의 측정할 수 없음 (démesure)"(23)을 말한다.
"욕망은 절대적인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만족시킬 수 있는 배고픔 밖에서, 해소할 수 있는 갈증 밖에서, 진정시킬 수 있는 쾌락을
넘어서, 형이상학은 모든 만족을 넘어서 타자를 욕망한다. (...) 만족 없는 욕망은 그 안에서 멀어짐, 타자성, 타자의 외재성을
듣는다. 이 욕망에 대해, 이 타자성, 이 관념과의 비정합성은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이 타자성은 타인의 타자성으로, 아주 높은
것의 타자성으로 이해된다. 이 높음의 차원은 형이상학적 욕망에 의해 열려있다. 이 높음이 더 이상 저 멀리 있는
<하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그 높음으로의 <고양>, 그 높음의 고결함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죽기 - 여기에 형이상학이 있다."(23)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백치같은 적지 않은 인간들이 여전히 있음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레비나스는 한 논문, "Mourrir pour autrui, 타인을 위해 죽기"는
그의 책임으로서의 윤리의, 인간의 관대함의 최상급적 표현으로서의 윤리에 대한 하나의 <은유>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마치 레비나스에게 <신>이라는 말이 타자에 대한 가장 탁월한 <은유>이듯이 말이다.
"20세기, 인간에 대한 첨예한 경험은 우리에게 인간의 사유는 사회와 역사를 설명하는 필요에 의해 추동되며, 배고픔과 공포는 인간의 모든 저항과 자유의 이유를 제공한다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 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광기가 아니면 다른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이러한 비참에 대해서 - 사물들과 사악함들이 인간에게 가하는 이 전적인 지배에 대해서 - 이 동물성에 대해서 의심하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인감임, 그것은 인간이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자유는 자유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아는 것, 혹은 의식하는 것, 그것은 비인간성의 도래의 순간을 피하고 예비하기 위해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 배반 - 인간과 비-인간(l'homme et le non-homme) 사이의 이 미소한 차이 - 의 시간의 끝없는 연기, 지연으로, 선함의 자기(이익)를 내려놓음 désintéressement 혹은 고결함, 절대적인 타자에 대한 욕망 혹은 이 형이상학의 영역을 전제한다."(23-24)
여기서 레비나스는 표상의 질서와 그것에 앞선 질서에 대해서 말한다: 인식의 질서, 보이는 것은 윤리적 질서, 보이지 않는 것을
전제한다(2부의 B장의 <향유와 표상>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이것은 초월론적인 질서로 하나가 다른 하나의 가능성의
조건임을 말한다. 이것은 전자를 부정함, 의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후자의 질서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 레비나스에게 윤리적
질서는 급박함(urgence)에서, 그것에 대답해야 하는, 반성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그 명령에서 생겨난다.
한 가지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자기를 내려 놓음>, 전쟁으로서의 나를 내려 놓음이 레비나스에서 자기를 <포기함>이 아니라는 것, 마치 하이데거에서 <존재에 대해 자기를 포기함>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레비나스를 이해하는 데, 그를 오해하지 않는 데
아주 중요하다. 전쟁으로서의 자기, 나의 <향유>, 즉, 이 무한에의 망각이 합법적이라는 것을,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이 출발점은 레비나스가 <무신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무한의 기획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5절 <무한으로서의 초월성>에서 다시 볼 것이다). 자기를 내려 놓음은 레비나스에게 새로운 자기의 탄생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존재 대신에 무한과 관계하면서 그 안에서 깨어나고 다시 태어나는 자기의 탄생의 드라마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레비나스의 철학을 <자기동일화identification>의 과정, 운동으로서, 주체의 탄생과 주체의 재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레비나스에게 <자기가 됨 être soi-même>, 자기성(ipséité)은 우선 익명적인 존재로부터 자아, 나의 정립, 나의 자리를 마련함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 자리, 이 볕 좋은 자리를 차지함이, 자기의 존재하고만 관계하는 고독한 존재자라는 사실,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전쟁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진정한 타자인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라는 것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안에서 나는 나의 진정한 자기성을 발결한 기회를 가지게 된다. 나와 존재와의 관계에서 나를 다시 익명적인 존재로 되돌리는 그 존재의 인력의 힘과 그에 저항하는 나 사이의 관계는 벗어날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이 고독을 벗어나게 하는 것은 타인과의 만남 tuché을 통해서 뿐이라는 것이다. 이 존재의 익명성, "il y a"의 괴물성을 "관대함"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은 이 만남, 이 우연성을 통해서 뿐이다. 다시 말해, 타인의 얼굴에 의해, 타인 안에서 깨어나는 내 안의 무한의 선성(Bien)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이것은 나의 자발성을 문제 삼는 것, 즉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자기, 이 다시 태어난 주체는 레비나스가 <존재와 다르게>에서 <아래 놓여 있는 것 subjectum>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근원적인 주체성으로 자기의 예외성(ex-ception) - 손으로 개념으로 인식으로 지식으로 잡을 수 없는 자기 - 으로, 본래적인 자기가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얻은 자기동일성, 나의 자기성은 타인에 대한, 내 앞의 너에 대한 나의 책임의 무한성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나의 유일성, 나의 단독성을 의미한다. 레비나스의 <분리와 향유>를 다루면서 다시 말할 것이다.
'- 전체성과 무한 강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A.3. 초월성은 부정성이 아니다 (0) | 2011.02.01 |
---|---|
1.A.2. 전체성과의 단절 (0) | 2011.02.01 |
1961년 서문 (0) | 2011.01.17 |
1987년 독일어판 서문 (0) | 2011.01.03 |
단절 (0) | 2011.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