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성과 무한』(1961), 이 책은 그의 사상의 전-후기 중간에 놓인 것으로 그가 온 길과 그가 넘어서 갈 길을 지시한다. 그 넘어섬은 하이데거의 그 유명한 "전향"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논리를 따라서 더 과장적으로,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의 출간과 관련해서 하나의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레비나스는 이 책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판하려고 했다. 갈리마르는 이 책의 출판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프랑스의 한 거대한 출판사인 갈리마르는 하이데거의 이름으로 레비나스를 거부한다. (갈리마르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번역 출간된 출판사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하이데거의 저서는 이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된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의 책, 그의 사상은 프랑스 내에서(특히 철학계 내에서) 수용의 측면에서, 아마도 갈리마르와 같은 이유에서, 혹은 또 다른 이유들에서 처음부터 좋은 환대를 받지 못했다. 환대를 넘어서 그의 책은 많은 오해와 불신을 낳았다. 그 오해와 불신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프랑스 철학계에서 말해지고 이해되기까지는 적어도 20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 수용의 과정에서 그 불신은 그의 철학이 가져온 기존 철학적 전통과의 단절을 역으로 잘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처음 읽는 책이 아닌 이 책, 표지와 페이지들이 다 떨어진 이 책을 다시 읽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문고판 책은 제본상의 문제로 책들이 쉽게 부서진다. 많은 그의 책들을 거의 문고판으로 가지고 있는 내 경우의 그의 책들의 상태는 분명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태들이다.)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올해로 이 책이 나온지 50년, 반세기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동안 그의 전기 저작들을 다시 읽고 그에 대해서 썼다. 이제 그 바탕 위에서 『 전체성과 무한』을 다시 읽을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 책이 가져온 단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분명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선 그의 전기 저서들을 상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존재와 다르게』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후자를 불러오기를 가능한 자제할 것이다. 올 것의 관점에서 현재를 읽는 것은 현재의 것의 운명을 미래에 의해 저당 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무수한 주석들이 존재한다. 나는 이 모든 주석들을 한켠으로 밀어 놓았다.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내 안에서 드러나는 대로 느껴지는대로 읽을 것이다. 일단 읽고, 몇몇 중요한 문장을 옮기고 그 아래 덧글을 붙이는 식으로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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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1994년 출간된 문고판)에는 두 개의 서문이 붙어있다. 하나는 독일어 번역이 출간되면서, 1987년 레비나스가 그 책에 붙인 서문이고, 다른 하나는 61년 출간 당시의 이 책의 본래 서문이다. 책의 목차에 따라서 독일어판 서문을 먼저 읽는다. 독일어판 서문은 그의 후기 저서 『존재와 다르게』(1974)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여기서 레비나스는 그 책의 저자의 관점에서 스스로 자신의 사상의 전개 안에 이 책의 자리를 정해준다:
"1961년 출간된 『전체성과 무한』은 1974년 『존재와 다르게』, 그리고 1982년 『이념으로 오는 신』으로 이어지는 한 철학적 담론을 연다. 첫 번째 저서의 어떤 주제들은 뒤의 것들을 다시 취하고 혹은 새롭게 취하고, 혹은 다른 형식을 통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의도들은 여기서 더 명시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25년 전에 처음 열린 이 담론, 이 어떤 하나의 담론을 유지하는 것은 우연적이 아닌 다양성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교육적인 어떤 것에서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짧은 요약적인 서문에서 그것을 다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일단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두 가지만을 지적하자. 『존재와 다르게』는, 『전체성과 무한』이 존재의 코나투스 에센디(conatus eseendi, 존재가 자신을 유지하고 하는 욕구)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행한 일련의 분석들이 경험적 심리주의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의존했던 존재론적인 언어 - 더 정확히 말하면 본질적인 언어 - 를 이미 벗어나 있다. 물론 이 분석들의 필연성은 그것의 본질적인 지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정되어져야 할 것으로 남는다. 다른 한편 『전체성과 무한』에서 나의 권리에 앞선 타인의 권리의 원천으로서 측은지심(miséricode) 혹은 자비(charité)와 정의(justice), 즉 제 삼자의 권리에 앞서 놓이는 타인의 권리는 그것들을 표현하는 용어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에서 아무런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정의라는 일반적인 윤리적 개념은 무차별하게 두 상황에서 불려진다" (I-II, 87년 서문은 로마숫자로 페이지가 붙어있으며 이태리체로 씌어있다. 아래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이 서문의 첫 마디는 우선 현상학의 전통에의 충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상학의 정신이 머물고자 하고 그것이 느껴지는 이 책에서 우리는 후설의 텍스트에 대한 잦은 인용과 하이데거의 텍스트, 특히 그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그치지 않는 주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I)
또한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부버, 가브리엘 마르셀, 그리고 프렌쯔 로젠쯔바이크의 이름을 불러내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현상학의 또 다른 창시자라고 말해지는 앙리 베르그손의 새로움 - 특히 그의 시간의 지속의 개념 - 과 그에 대한 신뢰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첫 문장에서 우리는 그가 현상학적 정신에 머물고자 했음을, 다시 말해 현상학에 충실하고자 했음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특히 현상학의 초월론적인 방법론으로서의 현상학적 환원임을 61년 서문에서 언급한다. 그런데 그 충실은 후설에서 비충실을 예비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그가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현상학적이지 않은 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하이데거에 대한 "주의"를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주의는 경계심을 표현한다. 이미 47년 저작에서 그는 "하이데거의 철학적인 분위기로부터 떠날 것"을 요구한다. 그 떠남은 이 곳에서 더욱 명백하다. 이미 47년 저작에서 시도한 하이데거에 대한 반박은 이 곳에서 때로는 반복되고 때로는 그 이상의 구체성을 획득한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알듯이 처음으로 프랑스에 현상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이다. 1928-29년 프라이부르그에 머물면서 후설을 공부하러 갔다가, 마치 친구 집에 갔다가 그 집 주인이 아닌 집 주인의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하이데거를 그 곳에서 발견한다. 29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크 대학 (현재 마크 불로흐 대학)에서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이 논문은 30년 Alcan에서 출판된다. 이 책은 그 당시 소문으로만 듣던 후설을 본격적으로 프랑스에 소개한 최초의 연구서였다. 사르트르가 후설을 발견하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이다. 이렇게 시작된 후설과 하이데거와의 만남은 이미 34년 『희틀러주의의 철학에 대한 반성들』과 35년 『탈출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그의 서양 사유의 한계에 대한 지적과 반성, 특히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반박은 시작된다. 그리고 전쟁 중에 그 초고가 이미 씌어졌고 47년 출간된 『존재로부터 존재자로』에서부터 시작된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반박과 현상학의 레비나스적인 읽기와 변형은 61년 이 곳에서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질 수 있는 어떤 형식에 도달한다. 특히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현상학, 더 정확히 (현상학적) 근본적인 존재론을 반박한다. (사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하면서 명시적으로 후설적인 의미에서 현상학이기를 원치 않았다. 순수하게 형식적인 존재론으로 머물렀던 현상학은 하이데거에서 근본적인 존재론으로 환원되며, 이것에 봉사하기에 이른다.)
레비나스는 이 서문에서 『전체성과 무한』 안에서 열린 담론의 일반적인 성격에 대해서 말한다. 그 발언은 갈리마르가 출판을 거절할 만큼 근본적이고 데리다가 말하듯 폭력적이다:
"이 책은 지식의 종합, 초월론적인 자아에 의해서 끌어안어지는 존재의 전체성, 표상에서 파악되는 현전과 개념 그리고 존재의 동사적인 구문론적 형식에 대한 질문 - 이성의 피할 수 없는 이 기지들(stations) - 이 의미있는 철학적 탐구의 궁극적인 심급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이러한 기지들은 세계와 이성, 그것의 최상의 가능성에까지 이른 이성의 현시와의 일치를 보증할 수 있는가? 그것들은 최상의 가능성에까지 이른 이성, 혹은 인간들 사이의 평화를 이끌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른 이성을 끌어낼 수 있는가? [...] 『전체성과 무한』은 평화와 이성의 문제에 다르게 그런데 의심의 여지 없이 아주 오래된 어떤 결합으로부터 접근한다."(II)
이 책은 위에서 레비나스가 말하듯 기존의 모든 철학적인 탐구의 기반 혹은 기지들 - 지식의 종합, 초월론적인 자아에 의한 존재의 전체성, 표상, 현전, 존재론적 질문 - 을 거부한다. 이러한 거부는 세계와 이성의 일치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 질문에서 우리는 레비나스가 이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최상의 가능성에 대해서, 다시 말해 이성이 이끌 수 있는 평화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주제, 더 나아가 레비나스 철학을 촉발시킨 동기는 그가 겪은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경험이다. 이 전쟁으로부터,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평화에 대한 질문은 이성과 평화의 문제로, 그 둘이 엮이던 이전의 논리와 다르게 그것들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런데 아주 오래된 어떤 결합으로부터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의 "존재 너머의 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을 통해서만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능동지성"에 대해서, 그리고 데카르트의 "유한 안의 무한의 이념"에서, 그리고 칸트의 "유한성"의 이름의 결합으로부터 다시 발견할 것이다. "아주 오래된 그런데 여전히 아름다운 이름, 이성은 부인됨이 없이 - 그렇다고 비판됨이 없는 것이 아니라 - 그것의 최상의 가능성으로 이끌면서 그 안에서 이성은 다르게 긍정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볼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레비나스는 이 책의 주제를 드러내는 근본 개념들을, 벌거벗음 즉 얼굴과 나의 유일성(unicité), 그리고 초월성을 언급한다. 이 세 개념은 레비나스의 철학을 구성하는 트리오이다. 마치 베토벤의 완변학 삼중주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나-너-그, 이 삼자가 엮는 이야기가 『전체성과 무한』을 구성한다.
벌거벗음, 얼굴에 대한 레비나스의 질문은 세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세계가 하나의 옷, 하나의 지평이라면, 벌거벗음은 이 세계, 지평의 밖, 그 밖 보다 더 외재적인 것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벌거벗음에 대한 질문은 현상학의 근본적인 원리인 지향성의 초월성의 원리에 대한 반박, 불충실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 초월성의 대표적인 이름은 현상학에서 지평으로서의 세계라는 개념이다. 레비나스는 이 책을 주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 책의 초반부에 그는 이 책은 현상학적인 객관성, 즉 세계로서의 초월성의 개념과는 다른 초월성의 개념의 탐구에 바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겠지만 레비나스의 초월성의 개념은 저 높은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 아래로, 저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는, 탁월한 장 발의 표현을 빌린, 하향초월(transdescendance)을 의미한다.
"탈은패된 즉자와 대자 너머, 여기에 인간의 벌거벗음이, 세계의 바깥보다 - 풍경, 사물, 제도 - 더 외적인 것이 있다. 벌거벗음은 세계에의 낯섬, 그것의 고독, 그것의 존재 안에 가려진 죽음을 외친다. 그것은 나타남 안에서 자신의 감춰진 비참의 수치를 외친다. 그것은 존재하는 나를 부르고, 그것은 어떤 보호도 어떤 방어도 없는 자신의 허약함으로, 온전한 벗음으로 나를 명령한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아주 이상한 권위로, 인간의 얼굴에 새겨진 신, 동사의 명령 그런데 전적으로 무장해제된 말로 나에게 명령한다. 얼굴, 단어들 이전에 이미 언어, 고유명들, 어떤 타이틀, 어떤 세계의 유 아래 그것이 주는 혹은 그것이 견디는 모든 내용으로부터 벗겨진 인간의 원초적인 언어, 이 원초적인 언어는 이미 요구이며, 이미 비참이며, 이미 구걸이며, 그런데 그것은 이미 죽음의 존재로부터, 나의 이웃으로부터 오는, 나의 고유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답을 요구하는 명령이기도 하다. 이 언어는 가치와 선의 기원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 안에 인간적 명령의 이념이다. 들리지 않는 언어, 탁월한 언어, 말해지지 않은 언어. 성경(Ecriture)!" (II-III)
레비나스는 얼굴의 원초적인 언어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친다(crier). 그것은 신음일 수도, 비명일 수도, 요구일 수도, 구절일 수도 있는 그런 소리, 외침, 비명이다. 그런 외침은 아무 것으로도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벌거벗음의 허약성으로부터 오는 명령이다.
"그 명령은 존재의 질서를 따라서 그가 속한 유에 아직도 갇혀있는, 여전히 유적 연장의 논리적 공동체 안에서 상호교환 가능한 존재자의 개인성 안에 머무는 나를 뒤흔든다. 그런데 나는 이 안에서 이미 교환불가능한 유일성에서 깨어난, 유일성 안에서, 모나드처럼 논리적으로 구분되어질 수 없는(indiscernable), 반박되어질 수 없는 책임 안에서 선택된 유일성으로 정해진다. 이 책임은 세상적 욕망 밖에서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 다시 말해 "세상에 유일한 자"에게 연결된 사랑이다."(III)
라이프니찌의 불가구분자의 원리를 불러온다. 나의 유일성은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유일성 안에서, 그러도록 정해진 선택된 그 유일성 안에서 유지된다. 레비나스에게 모든 개인은 라이프니찌의 불가구분자처럼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유일성으로 존재한다.이 유일성에서 유일성으로의 운동 de l'unicité à l'unicité 혹은 이방인에서 이방인으로의 운동 de l'étranger à l'étranger, 그것을 레비나스는 초월성이라고 부른다.
"이 유일성에서 유일성으로 - 초월성; 모든 명상 밖에서 - 생성적인 모든 공동체 안에서 고갈될 수 있는 모든 동기 밖에서 - 모든 예비적인 유사성과 모든 선험적인 종합 밖에서 - 이방인에서 이방인으로 향하는 사랑, 형재애 가운데에서 그것보다 나은 것. 존재 안에서 자신을 돌보고, 자신을 유지하고자 함과 단절하는 타자의 초월성의 무상성. 이것은 존재-론과의 절대적인 단절이다. 그런데 성성(sainteté), 근접성, 사회성, 평화의 "다른 하나를-위한-하나"(l'un-pour-l'autre) 안에서 유지된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이 윤리를 감지했던 이 유토피아적 사회성은 우리 안의 모든 인간성을 명령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유토피아적 사회성은 새로운 주체의 공간론 topologie, 즉 새로운 초월성를 지시한다. 이 책의 부재, Essai sur l'extériorité, <외재성에 대한 논의>에서 이 "외재성"은 어떻게 공간적이 아닌 바깥(un dehors non spatial)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답한다.
"『전체성과 무한』의 탐구는 현상학의 대상의 문제, 현전의 문제. 사유와 사유 대상의 일치의 문제, 지향성의 문제를 질문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체성과 무한』의 담론은 데카르트가 그의 세 번째『제일 철학의 성찰』에서 만난 사유(une pensée, une noèse), 자신의 사유 대상(noème, cogitatum)의 척도가 아닌 사유를 발견했던 기념비적인 사실을 잊지 않는다. 어떤 이념은 철학자에게 직관의 명증성에 머무는 대신에 눈을 부시게(éblouissements)한다. 진리를 생각하는 사유 이상을 생각하는 사유 - 혹은 더 잘(mieux) 사유하는 사유. 사유가 생각하는 무한에 경의(avec adoration)를 표하면서 대답하는 사유"(IV)
레비나스가 데카르트에서 발견하는 것, 그에게 바치는 경의는 데카르트의 제자라고 공언하는 후설의 노에시스-노에마의 평행론, 사유작용과 사유대상의 일치가 깨지는 체험 안에서 생겨난다. 사유는 대상의 척도로 말해진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무한의 사유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더 이상 이 대상의 척도가 아닌 그런 사유이다. 반대로 그 앞에서 눈이 부시는 그런 사유, 일치로서의 진리를 말하는 것 이상, 더 잘 사유하는 사유를 발견한다. "Pensée pensant plus - ou mieux - qu'elle ne pensait selon vérité."
독일어판 서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따라서 그(『전체성과 무한』의 저자)는 대상에 투자하는 지식의 확실성 혹은 지식에 대한 반성보다 더 중요한 확실성은 "지혜에-대한-사랑"의 사랑에서, 그리스로부터 온 철학의 사랑에서만 가치가 있지 않은지, 혹은 사랑받고 기다려지는 철학자들의 이 지혜는 인식의 지혜를 너머 사랑의 지혜가 아닌지 혹은 사랑에 의한 지혜가 아닌지 자문한다. 사랑의 사랑으로서 철학. 다른 인간의 얼굴이 가르쳐주는 지혜 ! 이러한 지혜는 본질 너머의 선에서, 플라톤의 『공화국』의 6권의 이념들 너머에 의해 알려지지 않았는가? 선, 이것과의 관계에 의해 존재 그 자체는 나타난다. 선, 그것으로부터 존재는 현시의 양지와 그것의 존재론적 힘을 유지한다. 선, 이것을 위해, 이것에 의해, "모든 영혼은 자신이 하는 것을 행한다."(『공화국』, 505e)"
1987년 1월 18일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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