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레비나스, 비-지향적 의식(2)

aurorepark 2010. 12. 29. 00:59

3. La  mauvaise conscience et l'inexorable


l'inexorable, 이 말은 "기도에도 저항하는, 굽힐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la mauvaise conscience, 이 말은 서양 철학의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고 하는 건전한, 긍정적인, 능동적인 la bonne conscience에 반한 것으로,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의심이 많은 불행한 의식을 말한다. 3장은 작은 3개의 단락으로 구성된다. 1)에서는 의식의 활동의 이면인 비-반성적인 후설의 의식을, 2) 나쁜 의식에 대해서, 3)은 "기도에도 저항하는, 굽힐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1)"세계로, 대상으로 향하는 의식, 지향성으로 구성된 의식은 또한 간접적으로 그리고 과장처럼 comme de surcroît,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은 세계와 대상을 표상하는 작동하는 자아의 의식으로 자신의 표상의 활동 그 자체에 대한 의식, 정신적 활동의 의식이다. 그런데 간접적인 의식은 즉각적인, 그런데 지향적인 지향 없이 일어나는 함축적인 순수한 동반이다. 비지향적인 의식은 내적 지각과 구분되며, 전자는 후자로 전향되어질 수 있다. 내적지각, 즉 반성적 의식은 대상들로서 자아, 그것의 상태의 그것의 정신적 활동을 취한다. 세계로 향하는 반성적 의식은 비-비지향적인 것의 간접적인 체험과 그것의 지평들을 잊어버린, 의식을 동반하는 자를 잊어버린 직선적인 자신의 지향의 순진성에 반해 도움을 청한다."


후설의 위대한 발견은 심리학의 무의식의 발견에 대응하는 것으로 드러난 사유의 이면의 발견이다. 활동하는 작동하는 현실태적인 의식의 이면의 밝혀지지 않은, 마치 그림자처럼 거대한 함축적인 무한의 지평을 발견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 지점에서 오래머물면서 이 곳에서 자신의 철학의 길을 발견한다.


"너무 서둘러서 철학에서 사람들은 이 체험, 이 간접적이고 비-지향적인 체험을 아직 명시적인 아닌 지식으로 혹은 아직 혼동된 표상으로 이어서 반성이 충만한 빛 안으로 이끌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말하듯 "비-지향적 의식, 지향적인 것의 반대 급부인 이 체험이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보존하고 있는지 묻는 것은 금지되어있지 않다".


" 우리가 보통 전-반성적이라고 말하는, 그리고 반성 안에서, 마치 사유하는 자아가 세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에 속한 것처럼, 지향적으로 자기-자신을 지향하는 지향적인 의식을 함축적으로 동반하는 이 비-반성적인 의식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 본래적인 감춤에서, 이로헌 표현되어질 수 없는 방식에서, 이 비명시적인 것의 자기에의 모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 혼동, 이 함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N'y a-t-il pas lieu de distinguer entre l'enveloppement du particulier dans un concept, le sous-entendement du présupposé dans une notion, la potentialité du possible dans un l'horizon d'une part et l'intimité du non-intentionnalité dans la conscience pré-réflexive? 바로 이 곳은 한편으로 특수한 것을 한 개념 안에 포함하는 것과 한 관념 안에서 전제된 것의 암묵적 이해와 지형에서 가능한 것의 잠재성과 다른 한편으로 전-반성적인 의식 안에 비-지향적인 것의 내밀성을 구분해야 할 자리가 아닌가?"


마지막 문장에서 레비나스가 제안하는 구분은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후설의 현실태적인 코 기토와 잠재적인 코기코를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전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비-반성적인 혹은 전-반성적인 의식의 진정한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느느 것은 이러한 의식을 intimité, 의식의 내밀성, 이 말은 intérieur의 최상급으로 가장 깊은 내면, 미밀스런 자기의 가장 깊이 감춰진 안을 의미한다.


2) "자기의 전-반성적인 의식의 "지식"은 고유하게 말해서 아는가? 모든 의도에 앞선 혼돈된 의식, 함축적 - 혹은 모든 의도로부터 되돌아오는 것 -  이런 의식은 행위acte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수동성이다. 선택함이 없는 자기의 존재에 의해서, 혹은 모든 감당 이전에 이미 실현된 가능한 것의 놓인, 추락에 의해, 마치 하이데거의 던져진 존재처럼. "의식"은 자기의 지식을 의미하기보다, 현전의 지움 혹은 삼가이다. Mauvaise conscience: sans intention, sans visées, sans le masque protecteur du personnage se contemplant dans le miroir du monde, rassuré et se posant. Sans nom, sans situation, sans titres.나쁜 의식:의도도 없이, 지향도 없이, 세계의 거울에서 자신을 명상하는 인물을 보호하는, 안심시키는 스스로 정립하는 가면도 없이. 이름도 상황도 제목도 없이.  


Présence qui redoute la présence, nue de tous attributs. Nudité qui n'est pas celle du dévoilement ou de la mise à découvert de la vérité. Dans sa non-intentionnalité, en deçà de tout vouloir, avant tout faute, dans son identification non-intentionnelle, l'identité recule devant son affirmation, devant ce que le retour à soi de l'identification peut comporter d'insistance. 현전을 두려워하는 현전, 모든 속성을 벗어버린. 진리의 탈음폐가 아닌 벌거벗음. 비-지향적 의식 안에서, 모든 의지의 이면에서, 모든 잘못 이전에, 자신의 비-지향적인 동일화 안에서, 자신의 긍정 이전으로 물러선 동일성, 동일화의 자기에의 회귀가 고집하는 것 앞에서.   


Mauvaise conscience ou timidité: sans culpabilité accusée et reponsable de sa présence même. Réserve du non-inversti, du non -justifié, de "étranger sur la terre" selon l'expression du pasalmiste, du sans patrie ou du sans-domicile qui n'ose pas entrer. 나쁜 의식 혹은 주저함: 고발된 죄 없이, 자신의 현전에 대해 책임이 있는. 투자되지 않은 것, 정당화되지 않은 것, 시편의 표현을 빌리면 "이 땅의 이방인:의,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국가도 집도 없이.  


L'intériorité du mental, c'est, peut-être, originellement cela. Non pas au monde, mais en qustion. Par référence à quoi, en "souvenir" de quoi, le moi qui déjà se pose et s'affirme - ou s'affermit - dans le monde dans l'être, reste assez ambigu - ou assez énigmatique - pour se reconnaître, selon le mot de Pascal; haïssable dans la manifestaiton même de son identité emphatique de l'ipséité dans le langage, dans le dire-je. 정신의 내재성, 그것은 아마도 본래적으로 이것일 것이다. 세계에서가 아닌 질문 안에 존재하기. 무엇에의 참조에 의해, 무엇의 기억 안에서, 자아는 세계 안에서 존재 안에서 이미 자신을 정립하고 자신을 긍정하며 - 혹은 자신을 견고하게 한다. 자아는, 파스칼의 말을 따라서, 언어 안에서, 나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자기성의 과장적 동일성의 현시 안에서 증오스럽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에는 아직도 너무 애매하고 너무 수수께끼로 머문다."


" 전-반성적인, 비-지향적인 의식은 이 수동성에 대한 의식의 파악으로 기술될 수 없다. 마치 의식 안에 이미 반성이 주체와 구분되듯이, 자신을 "nominatif indéclinable 격변화 되지 않는 주격"으로 정립하면서, 자신의 존재의 권리를 확인하면서 그리고 마치 극복되어져야 할것으로 아이와 같은 정신 혹은 허약함의 접근이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 의식의 삶에 이르듯이 비-지향적인 것의 주저함을 지배하면서 말이다. 비-지향적인 것은 처음부터 수동적이며, l'accusatif 여격은 말하자면 그에게 "이른 최초의 것cas"이다.


" 나쁜 의식은 불안l'angoisse 안에서 의미되는 실존의 유한성이 아니다. 나의 죽음, 항상 이미 앞서서 오는 이 죽음은 존재 안에서 자기를 유지하는 존재에 하나의 실패를 표시한다. 그런데 이 추문으느 존재하는 좋은 의식을 흔들지 못한다. 코나투스의 소외되어질 수 없는 권리 위에 근거한 도덕도 아니다. 비-지향적인 것의 수동성 안에서, 지향적인 사유, 지식, 전적인 파악과 더불어 자기를 긍정하는 존재의 정립의 정의 그 자체가 문제로 제기된다: 나쁜 의식으로 존재한다는 것, 질문 안에 질문에서 존재하는 것, 대답해야 하는 것 - 여기에 언어의 탄생이, 말해야 하는, 나라고 말해야 하는, 일인칭이어야 하는, 정확히 나이어야 하는, 그런데 나의 존재의 긍정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권리에 대해서 대답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파스칼의 말, "le moi est haïssable, 자아는 증오스럽다"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3) "Avoir à répondre de son droit d'être, 자신의 존재의 권리에 대답해야 하는 것", 이것은 레비나스 철학, 그의 철학 이상plus,그것에 앞선avant 윤리가 주장하는 마지막이며 처음인 발언이다. 그의 철학은 바로 이 주장을 하기 위한 긴 변명이다. 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이것이다. 이 불행한, 나쁜, 부정적인, 의식이 이르는 마지막 결론이다. 살아있는 자가,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persévérance, conatus, 자신의 존재의 권리를 주장하는 2000년의 철학사 안에서 이 질문은 제대로 물어진 적이 없다. 아낙시만드로스, 그는 2000년 전에 존재함의 정의에 대해서, 존재함의 부정의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그 존재함 자체의 부정의로 인해 소멸에 이르는 정의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파스칼은 한 낮의 빛 잘드는 벤치에 앉아 한 낮의 호사를 느끼는 나의 호사가 이미 타인에 대한 그의 자리에 대한 나의 탈취가 아닌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먹이사슬의 연쇄 안에서 큰 것이 작은 것을 자기화하는 자연스러운 자연의 질서 안에서 이 질서를 문제삼는 것, 자연과 세계의 질서를 그 근본에서 문제삼는 것, 그러한 의식은 우리가 농담삼아서 "어디가 아픈게 아니냐"라고 묻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상태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에 이를 수 있는가? 어떻게 이것이 철학의 질문이 될 수 있는가? 나의 레비나스와의 인연은 바로 이 질문과 관계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 황당함 앞에서, 이 충격 앞에서 나는 대답해야 했다. 어떻게 인간은 본래적으로 타자를 자기화하는 인식에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바쳐지는가? 이것은 삶의 의미, 구원의 문제이다. 그 말이 종교적인 의미이든, 세속적인 의미이든, 그것은 내 삶의 우리의 삶의 이유,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질문이다. 


" 자신의 존재의 권리에 대답해야 하는 것, 이것은 익명적인 어떤 법적인 추상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crainte pour autrui 안에 존재한다. 나의 "세계 안au monde", 혹은 나의 "태양 아래 자리place qu soleil", 나의 집은 이미  나에 의해 억압되고 굶주리게 된 다른 인간에게 속해야 할 장소들에 대한 탈취가 아닌가? 다시 한번 파스칼을 인용하면, "C'est ma place au soleil, voilà le commencement et l'image de l'usurpation de toute la terre."여기 태양 아래 나의 자리, 이것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탈취의 시작이고 그것의 이미지이다." 나의 무고한 지향적, 의식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나의 존재함에 대한 두려움crainte pour ce que mon exister은 폭력과 살인으로 끝날 수 있다. 두려움은 나의 "자기에의 의식" 뒤로,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좋은, 건전한 의식으로, 존재 안에서 순수한 자기존재의 존조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려움, 그것은 타인의 얼굴로부터 온다. 이웃의 얼굴의 최상의 정직함droiture extrême은 현상의 인공적인 형식들에 상처를 낸다. Droiture d'une expression à la mort, sans défense; et, avant tout langage et avant toute mimique, une demande à moi adressée du fond d'une absolue solitude; demande adressée ou ordre signifié, mise en question de ma présence et ma responsabilité. 어떤 방어도 없이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이 정직함; 그리고 모든 언어와 모든 모방 이전에, 절대적인 고독의 바닥으로부터 나에게 전달된 요구; 전달된 요구 혹은 의미작용으로부터 온 명령, 나의 현전에 대한 질문 그리고 나의 책임."


위에서 레비나스는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무고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그 자기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 무고한 지향적 의식이 이를 수 있는 폭력과 살인에 대해서 말한다. 하이데거의 Sorge, 나의 죽음, 나의 존재의 궁극적인 가능성으로서 나의 죽음을 통한 자기동일화의 시도와 대비해서 여기서 레비나스는 crainte pour la mort d'autrui, non pas pour ma mort, 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Crainte et responsabilité pour la mort de l'autre homme, même si le sens ultime de cette reponsabilité pour la mort d'autrui était reponsabilité devant l'inexorable et, à la dernière extrémité, l'obligation de ne pas laisser l'autre homme seul en face de la mort . Même si, face à la mort - où la droiture même du visage qui me demande révèle enfin pleinement et son exposition sans défense et son faire-face lui-même - même si, à la dernière extrémité, le ne-paz-laisser-seul-l'autre-homme ne consiste, dans cette confrontation et cet impuissant affrontement, qu'à répondre "me voici" à la demande qui m'interpelle. Ce qui est, sans doute, le secret de la socialité et, dans ses ultimes gratuité et vanité, l'amour du prochain, amour sans concupiscence." " 두려움과 책임은 다른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대한 책임이다: 비록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이 책임의 궁극적인 의미가 기도로도 굽힐 수 없는 것, 최후의 극단 앞에서 책임, 즉 타인을 홀로 죽음 앞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이 의무라고 할지라도,  비록 죽음에 직면해서 - 여기에 나를 부르는 얼굴의 정직성 그 자체는 결국 충만하게 그의 방어 없는 노출과 그의 정면 그 자체를 드러낸다 - 비록 최후의 극단에서, 다른 인간을 홀로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 정면으로 부딛치기, 이것을 막닥트릴 수 없는 무능 안에서, 나를 부르는 요구에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해야 하는 데에만  놓여 있다고 할지라고. 확실히 사회성의 비밀 - 그것의 궁극적인 무상성과 허영에도 불구하고 - 은 이웃에 대한 사랑, 욕정이 아닌 사랑 안에 존재한다."


"타자를 위한 두려움, 이웃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나의 두려움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를 위한 두려움이 아니다. 따라서 이 두려움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제시하는 정감성affectivté에 대한 현상학적인 분석과 구분된다: structure réfléchie où l'émotion est toujours émotion de quelque émouvant, mais aussi émotion pour soi-même, où l'émotion consiste à s'émouvoir - à s'effrayer, à se réjouir, à s'attrister, etc. - double "intentionnalité du de et du pour participant de l'émotion par excellence: de l'angoisse; être-à-la mort où l'être fini est ému de sa finitude pour cette finitude même. 재귀적 구조 안에서 감동은 항상 감동스러운 어떤 것에 대한(의한) 감동이면서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한 감동이다. 그리고 여기서 감동은 스스로를 감동시키는 데, 스스로를 두렵게하는 데,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데, 스스로를 슬프게 하는 데 놓인다 - 감동의 참여자에 대해 그리고 그를 위한 탁월한 지향의 이중적 구조: 불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을-향한-존재 안에서 유한 존재는 이 유한성 그자체를 위해 자신의 유한성에 대해(의해) 감동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정감성을 재귀적인 지향성의 이중적인 반성구조를 밝힌다. 즉 무엇에 대한de 감동은 언제나 자신으로 돌와와서 자기 자신을 위한pour 감동이다. 바로 이 구조 안에서 하이데거의 모든 정조들 - 불안, 권태 등등 - 대한 분석일 일어난다. 이러한 보냄 renvoi,Verweisung의 구조는 다만 정감성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도구성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무엇인가를 제작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자신을 위한 것이다. "ce en vue de quoi 무엇인가에 대한(위한)"은 항상 "en vue de soi-même, 자기-자신에 대한(위한)"것으로 보내진다. 


"La crainte pour l'autre homme ne retourne pas à l'angoisse pour ma mort. Elle déborde l'ontologie du Dasein heideggérien. Trouble éthique de l'être, par-delà sa bonne conscience d'être "en vue de cet être même" dont l'être-à-la-mort marque la fin et la scandale, mais où il n'éveille pas de scrupules. 다른 인간을 위한 두려움은 나의 죽음을 위한 불안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다자인의 존재론을 넘어선다. "이 존재 그 자체를 위한" 존재의 건전한 의식을 너머, 존재의 불안한 윤리, 사실, 죽음을 향한 존재는 이 건전한 의식의 종말이고 추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존재는 의심으로부터 깨어나지 않는다."


"Dans la "naturel" de l'être-en-vue-de-cet-être-même, par rapport auquel toutes choses, comme Zuhandenes - et même l'autre homme - semblent prendre sens, l'essentielle nature se met en question. 이 존재-그-자체를-위함이라는 이 자연스러움 안에서, 이것과 관계해서, 손으로 다루는 모든 존재들과 같은 모든 것들은, 그리고 심지어 다른 인간도 여기서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자연스러움 안에서, 본질적인 본성은 자신을 문제 삼는다. 타인의 얼굴로부터 방향의 전향이, 그 안에서, 현상의 빛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나를 부르고 나를 명령하는 영광gloire과 같은 것으로 지시할 수 있는 의미의 이상의 것le surplus de signifiance이 의미를 발한다. 우리가 신의 말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를 부르고 나를 요청하는 요구demande 안에서 나에게 오지 않는가? 그리고 모든 대화의 초대 이전에, 자신을 다른 인간의 얼굴로 만들기 위해 나를 닮은 개인이 나에게 나타나고 다만 드러나는 일반적인 형식을 파괴하지 않는가?"


마지막 문장에서 레비나스는 avant toute invitation au dialogue, déchire la forme de généralité sous laquelle l'individu qui me ressemble m'apparaît et se montre seulement, pour se faire visage de l'autre homme? 라고 말한다. 대화의 초대는, 신과의 대화를 말한다. 그것 이전에, 그것에 앞서서, 우리가 신이라는 부르는 어떤 것은 자신을 다른 인간의 얼굴로 만든다고 말한다. 신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어떤 것, 그것은 직접적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레비나스에게 자기-촉발은 없다. 그에게 신은 다른인간을 통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내 안의 신의 이념이 나를 깨우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을 통해. 그의 얼굴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나를 깨운다.   


"Par rapport à toute affectivité de l'être-au-monde - nouveauté d'une non-indifférence pour moi de l'absolument différent, autre, non représentable, non saisissable, c'est-à-dire l'Infini, lequel m'assigne - déchirant la représentation sous laquelle se manifestent les étants du genre humain -pour me désigner, dans le visage d'autrui, comme sans dérobade possible, l'unique et l'élu. 세계-내-존재의 모든 정감성과의 관계에서, 절대적으로 다른 것, 다른, 표상불가능한, 잡을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무한에 대한 나의 무관심하지-않음의 새로움은 나의 자리를 정해주고 무한은, 타인의 얼굴에서 나를 모든 가능한 도망이 불가능한 것으로, 유일한 것으로 그리고 뽑힌자로 나를 지정하기 위해, 인간 존재자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표상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세계-내-존재의 정감성과의 관계에서 레비나스는 non-indifférence pour moi de l'aboslument différent, 즉 절대적으로 다른 것에 대한 나에 대해 무관심하지-않음으로서의 정감성에 대해서 말한다. 


"Appel de Dieu, il n'instaure pas entre moi et Lui qui m'a parlé un rapport; il n'instaure pas ce qui, à un titre quelconque, serait une conjonction - une co-existence, une synchronie, fut-elle idéale - entre temes. 신의 부름, 그것은 나와 그, 어떤 관계를 말했던 그 사이에 세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이름으로도, 관계들 사이의 공-존, 공시성 - 물론 이런 것들은 아주 이상적일 것이다 - 과 같은 결합을 세우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보통 "tu"너라고 부르는 신이 아니다. 그에세 신은 3인칭 il로 불린다. Lui qui  m'a parlé un rapport, 그는 나에게 "어떤 관계"에 대해서 말했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런데 그 관계, 레비나스가 "관계가 아닌 관계"라고 말하는 이 관계는 나와 그 사이에 직접적으로, 전체 안에서 함께 존재하고 함께 모이는 결합의 관계를 세우지 않는다. 그와의 결합은 결국 "나"를 그 안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와의 간격 없는 자기-촉발과 같은 것은 레비나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그의 무한의 의미가 생겨난다. 


"L'infini ne saurait signifier pour une pensée qui va à terme et l'à-Dieu n'est pas une finalité. C'est, peut-être, cette irréductibilité de l'à-Dieu ou de la crainte de Dieu à l'eschatologique par laquelle s'interrompt, dans l'humain, la conscience qui allait à l'être dans sa persévérance ontologique ou à la mort qu'elle prend pour la pensée ultime, que signifie, au-delà de l'être, le mot gloire. 끝에 이르는 사유에 대해 무한은 의미를 형성할 수 없다. 신으로 향함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신으로 향함 혹은 종말론에서 신에 대한 두려움의 환원 불가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종말론에 의해, 인간 안에서, 존재론적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 안에서 존재로 혹은 의식이 자신의 궁극적인 사유(가능성)(으)로 생각하는 죽음으로 향하는 의식이 중단된다. 여기서 존재 너머, 영광이라는 말이 의미를 형성한다."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은 궁극적인 기준이 아니다. 신으로 향함 l'à-Dieu은 존재의 과정이 아니다:  부름 안에서,  나는 다른 인간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그에 의해서 이 부름은 비로소 내가 두려워해야 하는 이웃에서 의미를 가진다."


신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다만 그의 나의 부름, 나와 어떤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그와 관계아닌 관계를 맺는 것은 그가 나를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타인에서, 이웃에서, 그것이 친근한 이웃이든, 나의 적이든, 자주 아주 자주 적인, 이방인인, 내 집에 들여놓기를 내켜하지 않는 이방인에게로, 다른 인간에로 보내짐 안에서만 신, 그 이름은 의미를 가진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보냄의 구조, 위에서 말한 정감성의 구조, 그의 도구성의 보냄의 구조와 일치하는 이 보냄의 구조에 근본적인 변형을 가한다.


"존재 안에서 분석적으로 - 동물적으로 - 지속하는 존재의 자기긍정 뒤에 - 여기서 동일성의 이상적인 강렬함은 개인들의 삶 안에서, 실존하기 위해 그들과 투쟁하면서, 자기를 동일화라고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견고히 한다."


"Dans la déposition par le moi de sa souveraineté de moi, dans sa modalité de moi haïssable, signifie l'éthique mais probablement aussi la spiritualité même de l'âme: l'humain ou l'intériorité humaine, c'est le retour à l'intériorité de la conscience non-intentionnelle, à la mauvaise conscience, à sa possibilité de redouter l'injustice plus que la mort, de préférer l'injustice subie à l'injustice et ce qui justifie l'être à ce qui l'assure. Être ou ne pas être, ce n'est probablement pas là la question par excellence. 나의 증오스러운 양태 안에서, 나의 의한 나의 지상권의 박탈은 윤리를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영혼의 정신성 그 자체를 의미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 혹은 인간의 내면성, 그것은 비-지향적인 의식의 내면성으로, 나쁜 의식으로, 죽음보다 그 이상으로 부정의를 두려워할 수 있는 의식의 가능성으로, 부정의보다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선호할 가능성으로, 존재를 보장하기보다, 존재의 정의를 선호할 가능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존재하느냐 혹은 존재하지 않느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는 철학의 탁월한 질문이 아닐 것이다.


다른 곳에서, 레비나스는 철학의,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의 탁월한 질문은 "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ai-je droit à l'être?"라고 묻는 것이다. 자연의 합목적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의미있는 질문은 삶의 의미에 대한 인간 우리의 이상한 언술 안에서 지속된다. 여기서 삶은 인간성 안에서 깨어난다.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질문, 우리가 때때로, 아주 가볍게, 이라고 부르는 것의 극단으로 올라가는 질문."("Notes sur le sens", in DQVI(이념으로 오는 신), 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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