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해석학과 너머(10)

aurorepark 2010. 12. 22. 06:28

<해석학과 너머>의 5장 나머지 단락들(5개)이다. 레비나스의 "세속주의 sécularisation"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75-76년 솔본느 강의록인 <신, 죽음, 그리고 시간> 중에 76년 2월 6일과(초월성, 우상, 세속화) 13일(동기호테, 현혹(ensorcellement), 배고픔) 강의를 참조할 수 있다. 그의 건전한 의식(la bonne conscience), 혹은 아래서 말하는 bon sens, 상식 혹은 양식에 대한 la mauvaise conscience, 불행한, 불건전한 의식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는 글이다.


La transcendance à Dieu - ni linéaire comme la visée intentionnelle, ni téléologique pour aboutir à la ponctualité d'un pôle et s'arrêter ainsi à des étants et à des substantifs, ni même initialement dialogue nommant un tu - ne s'est pas déjà produite de par la transcendance éthique pour que  désir et amour se soient faits plus parfaits que la satisfaction? Il serait opportun cependant de demander ici s'il s'agit d'une transcendance à Dieu ou d'une transcendance à partir de laquelle un mot tel que Dieu révèle seulement son sens. Que cette transcendance se soit produite à partir de la relation(horizontale?) avec autrui, ne signifie ni que l'autre homme soit Dieu, ni que Dieu soit un grand Autrui.


신으로 향하는 초월성 - 지향적 지향처럼 직선적이 아닌, 한 극에 도달하기 위한, 존재자들과 실체적인 것에 정지하기 위한 목적론적도 아닌, 처음부터 를 부르는 대화도 아닌 - 은 욕망과 사랑이 만족보다 더 완벽해지기 위해 산출된 윤리적인 초월성에 의해 이미 산출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신으로 향하는 초월성 혹은 신이라는 이름이 신의 의미를 드러내는 초월성인지 묻는 것은 아주 적절할 것이다. 이 초월성이 타인과의  (지평적인?) 관계에서 산출된다는 것은 다른 인간이 신이라는 것을 신이 이 대타인(대타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레비나스에게 언어의 기원, 언어의 토대가 윤리적 관계에서 나오듯이, (그 반대가 아니라) 신으로 향하는 초월성 또한 신의 이름으로서, 그의 초월성, 그의 완벽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욕망, 가장 진지한 욕망 배고픔과 사랑, 그것을 채우는 구체적인 줌이 신의 신성의 향유보다 더 나은, 더 완벽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가장 위로 향하는 운동은 가장 바닥으로 내려가는 추락과 일치한다. 위에서 레비나스가 말하듯, 신으로 향하는 초월성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산출된다면, 다른 인간 = 신, 혹은 신 = 대타자가 자동적으로 성립하는가를 질문한다. 자주 해석가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레비나스에게 신은 타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관하지도 않다. 앞서 말했듯이 신의 초월성은 타인을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의 초월성과의 관계성이 3자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 절대적인 타자, il 제 삼자와 너, 타인, 그리고 나, 자아가 있다. 이것은 레비나스에게 자기-촉발, 신의 육화가 불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의 육화 안에서 자기, 나는 그 자기 안에서 익명적인 자기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신과 타인(타자, 혹은 소타자) 사이에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 최소한의 간격이 레비나스에게 내적 초월성을 가능하게 한다. 이 최소한의 간격이 없을 때에만, 우리는 신과 타인을 일치시킬 수 있다. 여기에는 만족은 없다. 


Désir qui se fait perfection? La pensée de la satisfaction en a jugé autrement.  Et c'est, certes, le bon sens même. Diotime a disqualifié l'amour en le déclarant demi-dieu, sous le prétexte que, aspiration, il n'est ni accompli, ni parfait. Ce bon sens est, certes, infaillible dans le relation au monde et aux choses du monde pour le manger et le boire. Le contester dans l'ordre du monde est signe de déraison.


욕망은 완벽성이 되는가? 만족의 사유는 이것과 다르게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상식(좋은 의미) 그 자체이다. 디오팀은 사랑, 영감은 완성도 완전도 아니라는 이유로, 그것을 반-신으로 선언하면서 그것을 신의 자격에서 기각한다. 이 상식은 확실이 세계와 먹고 마시는 세계 안의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반박되어질 수 없다. 세계의 질서 안에서 이것을 반박하는 것은 광기의 징후이다.


- 욕망, 혹은 사랑(Eros)은 그 결핍(pauvreté, penia)으로 인해(에로스는 Penia(결핍)와 Poros(자원, 길, expédient)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플라톤의 <향연>의 여사제 디오팀은 에로스를 un grand démon(202d)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첫 문장은 앞선 단락에 "... désir et amour se soient faits plus parfaits que la satisfaction" "욕망과 사랑이 만족보다 더 완벽해지기 위해" 마련된 윤리적 초월성과 관계된 질문이다. 여기서 le bon sens와 déraison이 대비된다. 디오팀, 즉 소트라테스, 플라톤의 사랑과 욕망에 대한, 결핍으로서의 사랑과 욕망에 대한 사유는 서양의 만족의 사유에 비하면 아주 건전한 아주 상식적인 사유이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광기로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레비나스 사유의 한 특징은 욕망을 결핍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서양 사유의 한 특징은 욕망을 결핍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서양 사유의 초월성에 대한 사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초월성은 유한한 인간의 결핍을 초월적인 완전한 존재와의 합일에의 욕구이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레비나스의 에로스에 대한 사유는 <전체성과 무한>의 뒷부분의 차지한다. 에로스와 초월성과 관계된 몇몇 구절을 다른 곳에서 인용한다. 


"서양의 철학은 절대서 너머로 간 적이 없다. 존재주의(l'ontologisme)와 투쟁하면서도 서양철학은 탁월한 존재, 우리들과 세계 사이의 조화, 혹은 우리의 고유한 존재의 완벽화를 위해 투쟁했다. 서양 철학의 평화와 균형의 이상은 존재의 충분성(la suffisance de l'être)을 전제한다. 인간 조건의 불충분성은, "유한한 존재"의 의미를 생각함이 없이 다만 존재의 한정(limitation)과 다르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 한계의 초월, 무한한 존재와의 완벽한 일치(communion)는 그들의 유일한 걱정거리였다."(De l'évasion, 93)


레비나스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사랑을 배고픔에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은 본질적이고 꺼지지 않는 배고픔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친구의 손을 붙잡는 것은 그에게 우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우정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영원한 욕망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랑의 긍정성은 그것의 부정성 안에 존재한다. 불꽃에 연료를 제공하는 잔목은 소진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존재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떨림은 우리가 경제적인 용어로 소유라고 부르는 것을 앞설 뿐만 아니라, 소유 그 자체 안에서 다시 발견된다. 애무의 무질서 안에는, 불가능한 접근, 실패에서의 폭력, 거부된 소유에 대한 고백이 있다. ...타인은 정확히 이 대상 없는 영역이다. 육체적 욕망(volupté)은 항상 그 이상의 것의 약속을 따르는 것이며, 배고픔의 더함으로 이뤄지며, 그것은 모든 존재를 비우는 것이다. 목적도 예상된 끝도 없다. 이 욕망은 한계지워지지 않은 미래 안에, 텅빔 안에, 현기증나는 것에 던져진다. 이 욕망은 어떤 대상도 채워질 수 없는 순수한 시간을 소비한다. "만족"은 이 "너머"(l'au-delà) 안에 거주하지 않으며, 그것은 한목소리의 현재하는 세계 안으로, 자기로의 회귀 안에서만 존재한다."(EE, 66)


사랑의 결핍, 그것의 변덕, 그것의 악덕들, 그것의 부정은 레비나스에서 사랑의 긍정성으로 변화한다. 에로스를 통한 타자에의 접근의 대담성은 플라톤의 에로스에 대한 논의와의 단절을 전제한다. 특히 타자, 타인의 이방성, 이타성, 탁월한 이타성은 다른 성, 여성성féminité에서 드러난다. 종종 그가 다루는 여성성에 대한 논의가 남성성에 기반해서 말해진다고 비판받는다. 남자인 그가 남자의 입장에서 여성의 타자성을 바라보는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한계 그 자체는 이질적인 성성의 극복할 수 없음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중성적인 입장에서, 혹은 여성이 될 수 없는 한에서, 그는 남성성에서 말고는 그 자리에서 말고는 말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남자가 아닌 한에서 그의 욕망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에로스는 우리에게 탁월한 타자를 엿보는 것을 허락한다. 그것은 여성성féminin이다. 플라톤의 사랑, 필요의 자식은 결핍의 특질들에서 보존된다. 그것의 부정성은 다만 필요의 "덜함"의 가치를 지시한다. 그것은 타자성으로 향하는 운동을 모른다. 여성성의 역할에 적적으로 무지한 플라톤의 사랑의 해석과 분리된 에로스는 빛의 고독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결국 현상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철학의 주제이다."(EE, 145)


현상학이 빛으로부터 나오지 못하는 한에서, 빛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에로스를 통한 타자에의 접근은 현상학의 한계를 넘어간다. 왜냐하면 "현상학적 기술은 그 정의상 빛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인간은 홀로 자신의 고독에, 고민(l'angoisse)에, 죽음-끝에 갇혀있기 때문이다."(EE, 145)


"이 이질성과 여성과 남성(genres) 사이의 관계, 이로부터 사회와 시간은 이해되어져야 한다. ...에로스 안에서 초월성은 근본적인 방식으로 사유되어질 수 있으며, 존재에 사로잡힌 나에게, 숙명적으로 자기로 되돌아가는 나에게 이 돌아감(회귀 retour), 자신의 그림자의 제거와는 다른 것을 가져온다."(EE, 164)


이 외에도 에로스와 관계해서 <시간과 타자>의 "에로스" (77쪽 이하)부분을 참도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체성과 무한>의 "에로의 애매성"(281쪽 이하)을 참조할 수 있다.

  

De Platon à Hegel qui parle avec ironie de la belle âme! Mais quand Kierkegaard reconnaît dans l'insatisfaction une accession au suprême, il ne retombe pas, malgré les avertissement de Hegel dans le romantisme. Il ne part plus de l'expérience mais de la transcendance. C'est le premier philosophe qui pense Dieu sans le penser à partir du monde. La proximité d'autrui n'est pas un quelconque "décollement de l'être par rapport à soi", ni "une dégradation de la coïncidence", selon les formules sartiennes. Le désir ici n'est pas pure privation; la relation sociale vaut mieux que la jouissance de soi. Et la proximité de Dieu dévolue à l'homme est, peut-être, un sort plus divin que celui d'un Dieu jouissant de sa divinité. Kierkegaard écrit: "Dans le cas des biens terrestres, à mesure que l'homme en éprouve moins de besoin, il devient plus parfait. Un païen qui savait parler des biens terrestres disait que Dieu était heureux parce qu'il n'avait besoin de peu. Mais dans la relation entre l'homme et Dieu, le principe est inversé: plus l'homme éprouve le besoin de Dieu, plus il est parfait". Ou: on doit aimer Dieu non pas parce qu'il est plus parfait, mais parce qu'on a besoin de lui"; ou "Besoin d'aimer - suprême Bien et félicité suprême".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름다운 영혼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는 불만족 안에서 완전한 최상의 것에 이를 수 있는 접근의 방식을 알아차렸다. 그는 헤겔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경험에서 더 이상 출발하지 않는다. 그는 초월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세계로부터 신을 생각함이 없이 신을 생각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타인의 근접성은 "자기와의 관계에 의한 존재의 분리"가 아니며, 사르트르의 정의를 빌리면 "불일치로의 추락"도 아니다. 욕망은 여기서 순수한 결핍이 아니다; 사회적인 관계는 자기의 향유보다 낫다. 그리고 인간에 바쳐진 신의 근접성은 아마도 자신의 신성을 향유하는 어떤 신의 운명보다 더 신적일지도 모른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지상의 자산이 문제가 되는 경우, 인간이 그것의 필요를 덜 느끼는 것에 따라서, 신은 더더욱 완벽해진다. 지상의 자산을 말할 줄 아는 무신론자는 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 신은 행복하다고 말한다"라고 쓰고 있다. 혹은 "우리는 신이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혹은 "사랑의 필요 - 이것은 최상의 선이며 가장 칭찬할 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 신이 필요없는 세상에서 신은 가장 행복할 것이며, 인간이 필요를 덜 느낄 때 신은 가장 완벽할 것이다. 사실이다.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신을 누가 부르는가? 행복한 인간은 신을 찾지 않는다. 성당이 성스러워야 하는 이유는 불행한 이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 이외에는 그 곳에 성스러워야 할 이유를 가지지 않는다. 예루살렘,  그것은 한 지리학적인 장소를 지시하는 고유명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피난민들을 박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그것이 파리이든, 베를린이든, 서울이든 어디든지 간에 모두 예루살렘이다.


"인간에 바쳐진 신의 근접성은 아마도 자신의 신성을 향유하는 어떤 신의 운명보다 더 신적일지도 모른다" : 레비나스에서 욕망이 결핍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욕망을 결핍으로 해석한다. 결핍은 만족을 찾고 이 만족의 찾음은 향유의 찾음으로 이어진다. 필요에 의한 사랑, 사람들은 이것을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세속의 신, 레비나스사 부르는 신은 신과의 합일을 위한 마음의 평화를 찾지 않는다. 그는 이 세속의 신 안에서 환각으로부터 환상으로부터 깨어난다.


Même renversement de l'absence en suprême présence, dans l'ordre du savoir: "Si j'ai la foi, écrit Kierkegaard, je ne peux arriver à en avoir une certitude immédiate - car croire, c'est précisément ce balancement dialectique qui, quoique sans cesse en crainte et tremblement, jamais pourtant ne désespère; la foi c'est précisément cette préoccupation infinie du soi qui vous tient éveillé à tout risquer, cette préoccupation intérieurre de savoir si l'on a vraiment la foi". Transcendance qui n'est possible que par la non-certitude! Dans ce qui par rapport au monde est échec, jubile un triomphe: "Nous ne dirons pas que l'homme de bien triomphera un jour dans un autre monde ou que sa cause l'emportera une fois ici-bas, non, il triomphe en plein vie, il triomphe en souffrant de sa vie viviant, il triomphe au jour de son affriction." 


지식의 질서 안에서 부재의 최상의 현전으로의 전복에서 조차, 키에르케고르는 "만일 내가 믿음을 가진다면, 나는 그것에 대한 즉각적인 확실성을 가질 수 없다 - 왜냐하면 믿는 것, 그것은 정확히 끝없이 불안과 전율 안에서조차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 변증적 진동이기 때문이다"라고 "믿음은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당신에서 깨어있는 이 자기의 무한한 사로잡힘이"라고 말한다. 초월성은 비-확실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세계와의 관계에서 실패인 것에서 승리가 있다: "우리는 선한 인간이 다른 세계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혹은 그의 대의가 다시 한 번 이 세상에서 이길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그는 충만한 삶에서, 살아있는 삶의 고통 안에서, 잴 수 없는 고통 안에서 승리할 것이다.


D'après les modèle de la satisfaction, la possesion commende la recherche, la jouissance vaut mieux que le besoin, le triomphe est plus vrai que l'échec, la certitude plus parfaite que la doute, la réponse va plus loin que la question. Recherche, souffrnace, question, seraient de simple décroîtes de la trouvaille, de la jouissance, du bonheur,  la réponse: d'insuffisantes pensées de l'identité et du présent, d'indigentes connaissances ou la connaissance à l'état d'indigence. Encore un fois, c'est le bon sens? c'est aussi le sens commun.


만족의 모델에 따라서, 소유는 탐구를 명령하며, 향유는 필요보다  더 나은 것이고, 승리는 실패보다 더 진리이며, 확실성은 의심보다 더 완벽하며, 대답은 질문보다 더 멀리 간다. 탐구, 고통, 질문은 재발견, 향유, 행복, 대답의 단순한 저하일 것이다: 동일성과 현재의 사유의 불충분성, 인식의결핍, 혹은 결핍의 상태의 인식일 것이다. 다시 한번, 이것은 상식인가? 그것은 또한 양식이다.    


Mais l'herméneutique du religieux peut-elle se passer de pensée dés-équilibées? Et la philosophie elle-même ne consiste-t-elle pas à traiter avec sagesse de "folles" idées ou à apporter la sagesse à l'amour? La connaissance, la réponse, le résultat serait d'un psychisme encore incapable de pensées où le mot Dieu prend signification.


종교적 해석학은 불-균형한 사유 없이는 일어날 수 있는가? 그리고 철학은 지혜를 가지고 "정시나간" 이념들을 다루는데 있지 않는가? 혹은 사랑에 지혜를 가져오는 것에 있지 않은가? 인식, 대답, 결과는 신이란 단어가 의미를 가지는 사유들을 생각할 수 없는 의식의 삶을 가질 것이다.


- 인식, 대답, 결과, 균형, 만족 대신에, 과정, 질문, 불-안, 불균형, 욕망의 이념을 가지고 철학을 지혜를 말하는 것은 레비나스가 말하듯, 건전하지 않은 상식적이지 않은 정신나간, 혹은 어디가 아픈 사람이나 그렇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l'amour de la sagesse, 지혜에 대한 사랑, 철학에 대한 정의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지혜를 가져오는것, 사랑의 지혜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 "Rencontre un homme, c'est être tenu en éveil par une énigme." (EDE, 125)

"한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것은 수수께끼에 의해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나는 레비나스의 감동스런 여러 말들 중에 이 말을 항상 간직하고 산다. 사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수수께끼에 의해, 그 사람의 신비에 의해, 그 사람의 타자성에 의해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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