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레비나스, 비-지향적 의식(1)

aurorepark 2010. 12. 29. 00:54

레비나스의 "비-지향적 의식"은 1983년 베른에서 발표된 글로 <우리 사이>에 실려있는 글이다. 레비나스의 후설에 대한 거의 모든 글들이 지향성과 환원에 대한 글이듯이 레비나스의 현상학과의 관계는 후설의 현상학의 방법론과 긴밀한 연결을 가진다. 레비나스가 유일하게 현상학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끌어내는 것은 현상학이 가진 방법의 풍요로움이다. 그는 이 현상학적 방법론으로부터 자신의 철학, 그 자신의 방법론을 끌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글쓰기의 기원은 후설에 있다고 고백한다. 또한 하이데거에게도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


1. 방법


레비나스는 이 글의 서두에서 철학을 시작하던 자신을 되돌아본다. 철학의 길은 여럿이고 여러갈래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길을 선택했는가? 라고 묻는다. 어떤 길을 선택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정지"를 가질 수 있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원천으로서 하나의 정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로부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후설은 나의 글쓰기의 기원"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특히 "내가 그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의식에 생명을 부여하는 지향성의 개념, 특히 "의미의 지평의 이념horizons de sens"이라고 말한다. 레비나스 철학의 여정 자체는 그 자신이 이 글에서 말하듯 바로 이 의미의 지평으로부터 감춰진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다.


"...des horizons de sens qui s'estompent lorsque la pensée s'absorbe dans le pensé lequel a toujours la signification de l'être. Horizons de sens que l'analyse, dite intentionnelle, retrouve quand elle se penche sur la pensée qui a oublié, dans la réflexion, et fait revivre ces horizons de l'étant et de l'être."


"사유가 사유된 것에 흡수될 때, 의미의 지평은 감춰진다. 여기서 사유된 것은 항상 존재의 의미작용을 가진다. 지향적이라고 불리는 분석은 사유가 자신이 잃어버렸던 사유로 기울 때 반성 안에서 이 의미의 지평을 발견하며, 분석은 존재자와 존재의 이 지평을 다시 살게한다."   


레비나스는 어떻게 이 지평을 발견하고 어떻게 그것을 찾는 지를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배웠다고 말한다. 현상학의 근본적인 철학사 안의 기여는 "le pensé - objet, thème, sens - en appelle à la pensée qui le pense, mais déterminé aussi l'articulation subjective de son apparaître: l'être détermine de ses phénomènes." "사유된 것 - 대상, 주제, 의미 - 은 그것을 생각하는 사유에 호소하며, 또한 주체의 자신의 나타남과의 논리적 관계를 규정하며, (주체의) 존재는 자신의 현상들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불러내는 "지향적 분석"은 후설의 <데카르트 성찰>의 § 20 "지향적 분석의 독창성"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


현상학의 이러한 기여는 현상학의 구체성이다. 사유된 것에서 그것을 생각하는 사유로,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두 번째 개념의 새로움이 앞선 개념에서 끌어내지지 않는  이러한 이행은 경험론으로도 연역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종합적이지도 변증적이지도 않은 현상학의 환원, 과장의 방법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런데 후설의 이러한 분석은 존경스런 서양 철학의 전통을 따라서 이론적인 것과 표상과 지식에 우위를 부여한다. 그로부터 존재의 존재론적 의미의 우위가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작품 안에서 이러한 것에 대립된 것, 비이론적인 지향성, 삶의 세계(Levenswelt)의 이론, 고유한 신체 (le corps prorpe)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메를로-퐁티는 이것들에 가치를 부여한다. "Là - mais aussi dans les événements qui se sont déroulés 1933-1945 et que le savoir n'a su ni éviter ni comprendre - est la raison pour laquelle ma réflexion s'écarte des derniers positions de la philosophie transcendantale de Husserl ou au moins, de ses formulation." "여기 - 그런데 또한 1933-1945년 사이에 일련의 사건들에서 그리고 지식이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사건들에서 - 는 바로 나의 반성이 후설의 최후의 초월론적인 철학의 입장과  적어도 그의 공식들과 분리되는 이유가 있다."


더 이상 지식이 책임질 수 없는 지식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앞에서 레비나스의 반성은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으로 향한다. 후설의 탁월한 방법이 하이데거의 놀라운 철학적 통찰이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재난을 불행을 설명할 수도, 그것을 막을 수도 없다면 그것의 그 학이 가진 무능에서 일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우선 수년 동안 내가 전념했던 타인과의 관계의 우선성을 열어보이는 이론적 전망을 지시할 것이다. 더 이상 여기서 후설이 상호주관성을 연구하면서 개입한 지향성에 일치하는 지식의 구조는 중요하지 않게된다. 그리고 끝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의 사유가 요청되는 의미sens의 관념을 밝히는 것으로 끝낼 것이다.


2. 현상학과 지식


"우리에게 전달된 철학이 의미있는 것(le sensé)의 자연스런 기원과 장소를 위치시키고 정신을 알아차리는 곳은 바로 지식으로서의 의식(정신)의 삶 le psychisme comme savoir- 자기 의식에까지 이르는 - 안에서이다."


레비나스의 질문은 인간의 정신, 의식의 삶은  이 지식에 제한되는가이다. 이 지식 안에서 어쩌면 "비밀, 무의식적인 것, 억압되고 혹은 변질된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의식에 의해 - 그것들이 잃어버린, 혹은 의식이 잃어버린 그것들 - 측정되고 그것에 의해 치료된다."


"모든 체험은 경험이라고 합법적으로 말해진다. 그 체험의 영역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의 양태가 무엇이든지 간에 - 명상, 의지, 정서성, 혹은 감성, 오성, 혹은 외적 지각, 자기의식, 자기에 대한 반성, 혹은 객관적인 주제화와 드러나지 않는 친밀성, 혹은 일차적 이차적 성질, 내적 운동감각 등등 - 이 모든 것들은 지식의 단일성으로 수렴한다." 이것은 바로 후설의 철학의 "야망"이었다. 모든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 이전에 철학의 영역 밖에 놓여있었던 것 - 모든 인간의 체험, 인간의 정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그것이 수학이든, 그것이 인간의 감정이든, 그것이 신에 대한 체험이든, 타자에 대한 타인에 대한 체험이든 모든 것을 지식으로 수렴하는 것이다.


"이웃, 사회집단 그리고 신과의 관계도 집단적이고 종교적인 경험들일 것이다. 살다vivre, 순수히 실존하다pur exister, 순수한 존재pur être에 대한 뮤규정적인 것으로 환원되었을 때조차, 의식의 삶은; 마치 살다 혹은 존재하다가 타동사인 것처럼, 그리고 이것 저것이 그것의 목적어인 것처럼, 이것 혹은 저것을 봄의, 체험의 양태 위에서 체험한다vit. 이러한 지식은 코기토의 경험을 함축한다. 자아의 단일성이라고 말해지는 일인칭 주어의 이 동사cogito, 이 안에서 모든 지식은 만족된다."


살다 존재하다 실존하다, vivre être exister이 모두는 자동사이다. 그런데 이 동사들은 마치 타동사처럼 이런 저런 것들을 살고, 존재하게한다. 이것과 저것은 마치 이 자동사의 목적어인 것처럼 사용된다. 후설의 철학의 위대한 발견, 하이데거의 천재성은 바로 이 자동사의 타동적 성격의 발견이다. 마치 존재가 그 자신 안에 이동할 수 있는 타동적 모터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대상에의 의존은 후설과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그리고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로 이어지는 현상학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레비나스는 이 동사들의 transitivité, 타동성, 전이성에 바리케이트를 놓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타동성, 전이성을 전적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것을 다른 방향으로, 다른 의미에서의 전이성으로 길어낸다. 이 전이성은 현상학의 지향성과 다른 이름이 아니며, 현상학의 초월성과 다른 이름이 아니다. 비지향적인 의식을 말하는 것은 비전이적인 의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다른 의미에서의 전이적인 이행적인 초월적인 운동을 말한다. 존재의 전이성, 타동성과 다른 초월성, 이것은 그가 자신의 철학의 목적으로 세우듯이, 그의 철학의 주제이다. 왜 그가 후설과 하이데거의 타동성, 전이성에 반대하는 지는 다음의 진술에서 말해진다.


"지식으로서 사유는 생각할 수 있는 것에, 존재라고 불리는 것에 의존한다. 존재에 의존하면서, 사유는 자기 밖에 놓인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그 자신 안에 머문다. 혹은 자신으로 되돌아 온다. 외재성 혹은 자기의 타자성은 내재성 안에서 다시 파악된다. 사유가 인식하는 것 혹은 "경험" 안에서 사유가 배우는 것은 사유의 타자l'autre이면서 사유의 고유한 것le propre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déjà 아는 것만을 알며, 그것은 불러낼 수 있는 표상할 수 있는 기억에 의해 사유의 내재성 안으로 개입된다. 상기와 상상은 시간에 복종하는 경험 안에서 잃어버린 것 혹은 올 것들을 그것들의 공시성과 단일성으로서 보증한다."


서양철학이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것,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은 초월적인 운동이 내재성으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타자성, 초월성은 결국 자기의 운동 안에서 자기 밖으로 한발도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밖으로의 운동은 항상 돌아옴을 전제한다. 돌아옴이 없는 운동은 자기동일화의 운동이 아니다. 지향성은 자기가 아닌 것으로 향하는 탁월한 운동이다. 그런데 그 운동은 자신으로 돌아옴 안에서만 작동한다.이러한 의식의 운동, 삶은 시간의 삶인 의식의 시간 안에서 보증된다. 시간의 종합은 바로 이 의식의 자기동일화의 운동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후설에서 현전과 현재와 표상의 우위성을 발견한다." 


"La dia-chronie du temps est présque toujours interprétée comme une privation de la synchronie." "시간의 통-시성은 거의 항상 시간의 종합의 결핍으로 해석되었다." dia -, syn-, 은 다른 운동의 방향을 보여준다. dia는 희랍어에서 "분리séparation, 구분" 혹은 "관통해서à travers"를 의미한다. syn은 "종합"을 의미한다. 하나가 지평을 그린다면, 다른 것은 수직을 그린다. "미래의 도래는 미래지향으로 이해된다. 마치 미래의 시간화는 일종의 파악prise en main으로, 회복récupération의 시도처럼 존재하며, 마치 미래의 도래는 현재의 입구처럼 존재한다."


"apprendre, 배우다, 배우는 것으로서 사유는 un prendre, une saisie, une prise ce qui est appris et une possession, 취하는 것, 잡는 것, 배운 것을 잡는 것, 소유이다. 배움의 파악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기술 이전에 이미 모든 배움은 육화된 실천pratique incarnée으로 "손으로 잡음 mainmise"이며, 현전présence은 바로 이 잡음의 유지, 지금 maintenant이다."


사실 배우는 것은 획득, 자기것으로 하는 것, 손으로 거머쥐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불어에서 그 말의 쓰임에서 끌어내는 그 말의 의미의 저변은 우리의 손의 전적인 파악과 관계한다. ap-prendre, 배우다, 그것은 prendre 잡다, 쥐다, saisir 거머쥐다이다. "reçons reçues", 획득된 배움, 그것은 손에 잡음mainmise, 손에서 유지하는 것 maintenant, 지금, 현재, 현전이다. maintenir=유지하다, main=손, maintenant = 지금, 현재, 현전. maintenant은 그 말을 말 그대로 풀면 손으로 유지하는 것, "지금"이다.


"인식의 자아에게 나타나는 존재는 자아를 교육할 뿐만 아니라, 사실 그 자체로 자아에게 주어진다ipso facto se donne. 이미 파악된 지각이다: Begriff는 이 전적인 파악l'emprise의 의미를 보존한다. "se donner주어지다'는 - 목적과 그것의 실현 사이의 거리(잔과 입술 사이의 거리)를 메꾸려는 노력이 무엇이든지 간에 - 사유의 사다리로 그것의 초월을 통해 소유, 향유, 만족을 약속한다. 마치 사유가 자신이 생각한 것과 결합할 수 있다는 -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incarné 믿는 - 그 사실에 의해 자신의 척도를 따라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유와 내재성의 의식의 삶, 자기에의 충분성suffisance à soi의 내재성이다. 이것은 정확히 세계의 현상이다: 생각할 수 있는 것le pensable과 생각하는 것le pensanr 사이의 일치는 파악le saisir 안에서 확인되고 보증된다는 사실, 세계의 나타남은 se donner 주어진다는, 존재가 자신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의 인식은 만족이라는 사실. 이것은 아마도 후설이 사유와 세계 사이의 상호관계라고 말한 것일 것이다. 후설은 이론적인 지식 - 객관화하고 주제화(즉 대상화)하는 지식 - 을 지향visée의 가치를 완성하고 공허한 지향성을 채우는 것으로 기술한다."


"모든 서양의 사유의 흐름이 자신을 던지는, 모든 수준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헤겔의 저작은 절대적인 지식과 동시에 만족한 인간의 철학이다. 이론적 지식의 이러한 의식의 삶은 자신의 척도를 따라서, 생각될 수 있는 것과의 일치 안에서 사유하는 사유를 구성하며, 자기 자신과 일치하며, 자기에의 의식일 것이다. 동일성은 타자 안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C'est le Même qui se retouve dans l'Autre."


이성의 이성성은 바로 자신의 타자성 안에서 동일성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L'activité de la pensée a raison de toute altérité et c'est en cela, en fin de compte, que réside sa rationalité même. 사유의 활동은 모든 타자성의 이유를 가진다. 바로 여기에 이성성 그 자체가 자리한다." "종합과 개념적인 파지는 타자로서, 이전으로서 혹은 이후로서 주어지지 않는 분산과 비교할 수 없음보다 더 강하다. 이것들은 주체의 단일성과 나는 생각한다je pense의 초월론적인 통각의 단일성과 관계한다."


"나는 생각한다의 단일성은 지식으로서 정식의 궁극적인 형태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면서 나는 생각한다의단일성으로 수렴된다.결국 알려질 수 있는 것의 체계는 자기의식이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제기된다: "사유하는 자의 척도를 따른 사유는, 이것이 적어도 신을 생각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한에서, 명백한 진리truisme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질문한다: "지향성은 항상 - 후설과 브렌타노가 긍정하는 것처럼 - 표상 위에 근거하는가? 혹은 지향성만이 유일한 "의미의 증여"의 양태인가? 의미있는 것은 항상 대상화thématisation와 표상과 상관적인가? 의미있는 것은 항상 다multiplicité와 시간적 분석의 모음으로부터 유래하는가? 사유는 처음부터 정합성과 진리에 바쳐지는가? 사유는 소여를 그것의 동일성 안에서만 파악하는가? 사유는 본질적으로 그것과 동등한 것과 관계하는가?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 무신론적인가?" 


이어지는 글에서 레비나스는 다음의 요구와 질문에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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