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Le psychisme s'épuise-t-il à déployer l'"énergie" de l'essance, de la position des étants?
의식의 삶은 본질의 에너지를 전개하는 데에서, 즉 존재자들을 정립하는 데에서 자신의 힘을 다 고갈하는가?
- 이 문장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인용한 것처럼, 레비나스는 두 종류의 의식의 혹은 정신의 삶을 구분한다: psychisme de l'inquiétude et de l'éveil, le psychisme de la connaissance, 즉 불-안과 각성으로서의 의식의 삶과 인식으로서의 의식의 삶의 구분. 이러한 질문은 레비나스 철학의 질문으로 "l'intelligibilité" 즉 "알려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지성체"에 대한 질문으로, 철학의 시작에서부터 철학자들이 물은 질문이다.
l'inquiétude는 l'absence de quiétude, de repos, de tranquillité를 의미한다. quiétude는 많은 불어가 기독교의 라틴어에서 나왔듯이 "영혼의 신비적인 평화의 상태", béatitude라고 말해지는 지고한 마음의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앞의 글에서 그치지 않고 레비나스가 말하는 인식의 repos, 휴식, 안정, 보장, 그로부터 삶의 조용함, 아무도 아무 것도 나의 조용한 삶을 방해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특히 스토이시즘의 전통이 강조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에게 신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편안하지 않음, 끊없이 나의 안정과 휴식을 방해하는 자이다. 물론 성당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곳에서 갈구하는 것은 아마도 마음의 평화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보다는 이 불행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 힘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다시 선으로, 지고의 행복으로 전이되지 않는 - 레비나스에게 이 이행은 불가능하며 - 악과 고통의 문제와 부딪친다. 진실로 그 이름으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이름을 부르자마자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은 무엇인가?
철학의 조용함, 휴식은 나에게 철학에의 유혹이었다. raison, 나의 현재의 상태, 나의 현실에, 나의 불안에, 나의 불행에, 나의 죽음에, 나의 존재에, 나의 실존에 하나의 이유, 설명을 줄 수 있을 때, 나는 휴식과 마음의 조용함에 도달한다. 그 때에 비로서 나는 편안할 수 있다. 그것의 불가능성은 어디서 오는가?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는 일상의 경험은 어디에서 그 근원을 가지는가?
Énoncer une telle question, ce n’est pas s’attendre à ce que l’en-soi des étants ait un sens plus fort que celui qu’il recueille de la conscience identifiante. C’est se demander si le psychisme ne signifie pas autrement que par cette "épopée" de l’essance qui en lui s’exalte et se vit; si la positivité de l’être, de l’identité, de la présence – et par conséquent si le savoir – sont l’ultime affaire de l’âme.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존재자들의 즉자가 의식의 삶이 동일한 의식으로부터 모으는 의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의식의 삶이 본질의 이러한 "서사"와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가를 묻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 동일자, 현전의 실증성 그리고 결국 지식이 영혼의 궁극적인 일인지를 묻는 것이다.
Non pas qu’il y ait lieu de s’attendre que l’affectivité ou la volonté soient plus signifiantes que le savoir. L’axiologie et la pratique – Husserl l’enseigne – reposent encore sur la re-présentation. Elles concernent donc les étants et l’être des étants et ne compromettent pas, mais présupposent la priorité du savoir.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정서성 혹은 의지가 지식보다 더 의미있고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가치론과 실천 - 후설에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 - 은 여전히 재-현(표상)에 의존한다. 즉 이것들은 존재자와 존재자들의 존재와 관계하며, 지식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우선성을 전제한다.
- 그렇다고 해서, 지식을 문제 삼는다고 해서, 그것의 우선성을 문제 삼는다고 해서, 우리가 기다리는 것,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지식보다, 실증성보다 더 중요한, 더 의미있는 정서성과 의지의 지배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레비나스가 logos를 문제 삼는다고 해서, 이성을 문제 삼는다고 해서 그가 언술의 질서를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말해진 것, 진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부정 신학자가 아니다. 무수한 "그렇다 oui". 무수한 진술, 무수한 긍정 affirmation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기의 초월성은 말해진 것과의 관계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그는 "이성, 아주 오래된 이미 늙어버린 그럼에도 아름다운 이름, un nom usé mais beau: raison"(Le cas Spinoza" in Difficile liberté, 153)이라고 말하는 이성의 새로운 정의를 시도한다. <전체성과 무한>의 아름다운 한 구절을 읽어보자.
"Aborder Autrui dans le discours, c'est accueillir son expression où il déborde à tout instant l'idée qu'en emporterait une pensée. C'est donc recevoir d'Autrui au-delà de la capacité du Moi; ce qui signifie exactement: avoir l'idée de l'infini. Mais cela signifie aussi être enseigné. Le rapport avec Autrui ou le Discours, est un rapport non-allergique, un rapport éthique, mais ce discours accueilli est un enseignement. Mais l'enseignement ne revient pas à la maïeutique. Il vient de l'extérieur et m'apporte plus que je ne contiens. Dans sa transitivité non-violente se produit l'épiphanie même du visage. L'analyse aristotélicienne de l'intellect, qui découvre l'intellect agent, venant par la porte, absolument extérieur, et qui cependant constitue, sans la compromettre aucunement, l'activité souveraine de la raison, substitue déjà à la maïeutique une action transitive du maître, puisque la raison, sans abdiquer se trouve même de recevoir."(TI, 43-45)
"담론 안에서 타자에 접근하는 것, 그것은 사유가 타자에 대해서 가지는 이념을 매순간 넘어서는 그의 표현을 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능력을 넘어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히 의미하는 것은 무한의 이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배우는 것이다. 타인과의 혹은 담론과의 관계는 비-알레르기적 관계, 즉 윤리적 관계이다. 그런데 이 받아들여진 담론은 가르침이다. 그런데 가르침은 산파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오며, 내가 내 안에 지니고 있는 것 이상을 가져온다. 비-폭력적인 전이성 안에서 얼굴의 현현 그 자체가 산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에 대한 분석은, 문을 통해서(나의 강조) 도래하는, 절대적으로 외적인 능동지성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것은 이성의 지상적 활동을 위험에 빠트림이 없이, 그것을 구성하며, 이미 스승의 전이의 활동은 산파술을 대신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포기함이 없이, 받아들임 그 자체로부터 발견된다(나의 강조)."
la raison à même de recevoir. 받아들임, 환대로부터 유래하는, 그것으로부터 오는 이성. 이런 이성은 받아들이는 힘, 가능성(pouvoir recevoir)으로서의 이성이다. 레비나스가 "à même de recevoir"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위의 문장 안에는 또한 가르침과 배움이 말해진다. 타인으로부터, 그에 대한 나의 이념을 항상 넘어서는 그의 담론으로부터 배우기, 그 안에서 존재의 전이성과 다른, 플라톤의 상기와 연관된 산파술적인 전이성과는 다른 비폭력적인 전이성 안에서 얼굴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레비나스가 얼굴이라는 관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같은 책에서 말한다: "얼굴이라는 관념은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앞섬(l'antériorité philosophique de l'étanr sur l'être), 힘과 소유를 요청하지 않는 외재성, 플라톤처럼 기억의 내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외재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것을 환대하는 나(자아)를 보존한다(qui cependant, sauvegarde le moi qui l'accueille). 이러한 환대의 사유는 하이데거의 희랍에 로고스에 대한 해석에서 "모음, 채집(Versammlung, colligere)"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해석을 전복한다. 이러한 채집, 모음, 표상은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타인의 환대를 조건으로 한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에서 "집"에 대한, "나의 집"에 대한 분석의 근간을 이룬다.
- 레비나스의 분리의 사유의 기원들 중의 하나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질료에 대해 유비적으로 존재하는 능동지성의 분리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의 능동지성 편과 형이상학 Λ, 동물 생성론의 (II, 3, 736b 27)를 참조할 수 있다. 특히 후자는 위의 레비나스가 인용하는 "par la porte"라는 표현이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Se demander si le psychisme se limite à la confirmation des étants dans leur position, c’est suggérer que la conscience se retrouvant la même, s’identifiant jusque dans l’extériorité de son objet intentionnel, demeurant immanente jusque dans ses transcendances, rompt cet équilibre d’âme égale et d’âme pensant à son échelle, pour entendre plus que sa capacité; que ses désirs, ses questions, sa recherche, au lieu de mesurer ses vides et sa finitude, sont des éveils à la Dé-mesure; que dans sa temporalité qui la disperse en moments successifs – lesquels cependant se synchronisent dans la retention et la protention, dans la mémoire et l’anticipation et dans le récit historique et la prévision – une altérité peut défaire cette simultanéité et ce rassemblement du successif en présence de la re-présentation et qu’elle se trouve concernée par l’Immémorial.
의식의 삶이 존재자들의 정립에서 그들의 (자리의)확인에 제한되는지를 묻는 것은 자신을 동일자로 발견하는, 자신의 지향적인 대상의 외재성에서 조차 자신을 동일화하는, 자신의 초월성에서 조차 내재적으로 머무는 의식이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을 듣기 위해 동등한 영혼과 자신의 사다리로 생각하는 영혼의 균형이 깨진다는 것을 제시한다; 의식의 욕망들, 질문들, 그의 탐구들은 자신의 공허와 유한성을 측정하는 대신에 그 척도의 넘어섬에서 각성들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연속적인 계기들로 의식을 분산하는 의식의 시간성 안에서 - 이 계기들은 그런데 과거지향과 미래지향 안에서, 기억과 예시 안에서, 역사적인 서사와 예측 안에서 공시화(종합)된다 - 어떤 타자성이 이 동시성과 이 모음을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을, 이 타자성이 기억불가능한 것에 의해 상관된다는 것을 제안한다.
- dia-chronie로서의 시간성.
Notre sagesse nous pousse à ne prendre au sérieux que la transcendance de l’intentionnalité qui pourtant se convertit en immanence dans le monde. La pensée éveillée à Dieu – ou éventuellement vouée à Dieu – s’interprète spontanément en termes – et selon les articulations – du parallélisme noético-noématique de la perception de la signification et de son remplissement. L’idée de Dieu et jusqu’à l’énigme du mot Dieu – que l’on trouve tombé on ne sait d’où ni comment , et déjà circulant, é-norme, en guise de substantif, parmi les mots d’une language – s’insère pour l’interprétation courante dans l’ordre de l’intentionnalité.
우리의 지혜는 우리를 지향성의 초월성이 세계 안에서 내재성으로 전이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취급하는 것을 방해한다. 신에서 깨어난 사유 - 혹은 신에게 바쳐진 사유 - 는 즉각적으로 의미작용과 그것의 지각적 채움이라는 지각의 의식작용-의식대상적 평행론에 의해 해석된다. 신의 이념, 그 말의 수수께끼에 이르기까지 - 어디서 어떻게 우리에게 떨어졌는지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 사이에서 이미 통용되는, 척도를 벗어난, 실체적인 것에 의해서 지시되는 그 이념 -은 일상적인 통상의 해석을 위해 지향성의 질서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La dé-férence à Dieu qui revendiquerait une différence autre que celle qui sépare le thématisé ou le représenté du vécu et se réclamerait d’une autre intrigue du psychisme, se récupère dans l’intentionnalité. on a recours à la notion d’une religion horizontale, demeurant sur la terre des hommes et qui devrait se substituer à la verticale qui s’en va vers le Ciel, pour se référer au monde, car c’est à partir du monde que l’on continue à penser les hommes eux-mêmes.
명제화된 것 혹은 표상된 것과 체험된 것을 분리하는 차이와 다른 차이를 요구하는 그리고 의식의 삶과는 다른 구상을 주장하는 신에 대한 경외는 지향성 안에서 회복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 그 자체를 생각하는 것은 세계로부터이기 때문이다.
Substitution qui peut sembler simple confusion : de quel droit, en effet, l’homme perçu à mes côtés viendrait-il prendre la place de l’"objet intentionnel" correspondant au mot Dieu qui le nomme ou l’appelle? Mais cette confusion des termes, dans son arbitraire, traduit peut-être la nécessité logique de fixer l’objet de la religion conformément à l’immanence d’une pensée qui vise le monde et qui, dans l’ordre des pensées,s erait l’ultime et l’indépassable.
대체는 단순한 혼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떤 권리로, 내 입장에서 지각된 인간이 그를 명명하고 혹은 그를 부르는 신의 이름에 일치하는 "지향적 대상"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용어들의 혼동은, 그의 자유 안에서, 세계를 지향하는 그리고 사유의 질서 안에서 궁극적이고 극복되어질 수 없는 것인 사유의 내재성에 일치해서 종교의 대상을 확정하는 논리적인 필연성을 해석할 것이다.
- 레비나스는 후설은 완벽한 무신론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말한다. 왜 라캉에게 대상이 "joyau" 인지는 위의 레비나스의 진술에서 예감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고유성은 이 완벽한 무신론에서 유신론을 길어내는 것이다. 향유로부터, 표상으로부터, 실증성으로부터 그것을 넘어서는, 그것과 다른, 존재의 실증성과 다른, 존재와 다르게를 길어내는 것이다. 그의 글쓰기는 이 과정들을 보여준다. 그의 <전체성과 무한>이 그리고 그의 <존재와 다르게>가 그렇다. 그는 그것이 아닌 것에서 그것을 근거짖고자하지 않는다. 그는 초월론적인 논리, 무엇을 무엇이게 하는 근거지움의 논리, 놀이를 벗어난다. 이 근거지움의 놀이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후설의 초월론적인 경험론의 경험에서, 칸트의 초월론적인 경험론의 경험에서 길어진다. 그의 탁월한 철학사 읽기는 비판이 아닌 그들이 지닌,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게 하는 능력이다. 현상학의 대상의 문제는 특히 칸트로 거슬러 올라가고, 더 멀리는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에서 "대상성과 초월성의 차이는 이 책의 모든 분석을 이끄는 가장 일반적인 지시이다"(41)라고 말했을 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대상의 대상성(대상 일반)과 구분되는 초월성이다: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이념의 idéatum, 대상성(데카르트), 초월론작인 자아로 환원되지 않는 대상 일반(칸트), 정합성과 일치하지 않은 사유의 필증성 안에서 드러나는 대상의 대상성(후설)이 바로 끊없는 환원을, 그치지 않는 반복, 회귀를 부른다.
Postuler une pensée structurée autrement, jetterait un défi à la logique et annocerait un arbitraire de la pensée – ou de la réflexion sur cette pensée – plus tolérable que cette substitution d’objets. L’athéisme mais aussi le théisme philosophiques se refusent à admettre jusqu’à l’originalité du psychisme prétendant au-delà du monde, jusqu’à l’irréductibilité de son linéament noétique. Dans le propos sur l’au-delà on soupçonne une métaphore emphatique de la distance intentionnelle.
다르게 구조화된 사유를 요청하는 것은 논리에 도전하는 것이며 이 대상들의 대체보다 훨씬 용납할 수 있는 사유의 - 혹은 이 사유에 대한 반성 - 자유를 알리는 것일 것이다. 철학적 무신론 그런데 또한 신론은 세계 너머를 주장하는 의식의 삶의 독창성까지, 그것의 의식작용적 연결의 환원불가능까지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너머에 대한 제안에서 사람들은 지향적 거리에 대한 과장적 메타-포를 의심한다.
- <우리 사이>에 실린 이 글에는 "intolérable"이라고 <이념으로 오는 신>에 실린 같은 글에는 <tolélable>이라고 적혀있다. 어느 것이 맞는가? 후자가 레비나스 사유에 일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이 문장에서 méta-phore를 은유라고 옮길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이 문장에서 레비나스가 au-delà = méta가 사라진다. 다시 말해 너머의 메타포, 너머의 은유.
Même si dans ce soupçon on risque d’avoir oublié que le “mouvement” au-delà, c’est la métaphore et l’emphase elles-mêmes, et que la métaphore, c’est le langage, et que l’expression d’une pensée dans un discours n’équivaut pas à un reflet dans le milieu indifférent d’un miroir, ni à une quelconque péripétie dédaigneusement appelée verbale, et que le dire présuppose, dans le vécu de la signifiance, des relations autres que celles de l’intentionnalité, lesquelles précisément, sur un mode non récupérable, concernent l’altérité d’autrui : que l’élévation du sens par la métaphore dans le dit est redevable de sa hauteur à la transcendance du dire à autrui.
이 의심 안에서 (우리가 다음의 것들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한다) 너머의 운동이 은유이며 과장 그 자체라는 것을, 은유는 언어이며, 언술 안에서 사유의 표현은 거울의 무차별한 환경 안에서의 반사와도, 불신 안에서 말해지는 변천과도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는 의미의 체험 안에서, 지향성의 관계와 다른 관계를 전제한다는 것을 - 이 다른 관계들은 확실히 회복 불가능한 양태 하에서, 타인의 타자성과 관계한다 - 말하기 안에서 메타포에 의한 의미의 고양은, 그것의 높이에서 보면, 타인에게 말하기의 초월성에 의존한다는 것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은유에 대한 레비나스 사유는 체계적으로 발표된 글이 없다. 그의 <다른 인간의 인간주의> 안에 "signification et sens, 의미작용과 의미"(Beudeutung und Sinn, meaning and sense)에서 레비나스는 단 한번 은유와 의미작용과 의미에 대해서 말한다. 이 글은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런데 그의 전집 I권이 발표되면서 우리는 그가 전쟁포로 당시 적은 노트들 중에 "Liasse(유고) Aa" (liasse는 종이들을 묶어 놓은 종이뭉치를 말한다.)로 분류되는 노트에서 16페이지에 해당되는 메타포에 대한 소중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다. 후설의 언어학, 의미론과 연관된 레비나스의 메타포 이론은 후설의 의미론으로 그가 어떻게 넘어가는 가를 잘 보여준다. 특히 레비나스의 철학이 후설의 의미론으로부터 출발한다면 더더욱 이 메타포에 대한 그의 이 유일한 글은 소중하기 않을 수 없다.
- "의미작용과 의미"의 1장: <의미작용과 수용성>에서 레비나스는 수용성에 주어진 실재와 그 실재에 옷을 입힐 수 있는 의미작용의 구분으로부터 시작한다. 더 쉽게 말을 하면 실재와 그것을 지시하는 언어의 구분이다. "수용성에 주어지는 실재와 그것에 옷을 다시 입힐 수 있는 의미작용은 서로 구분되는 듯이 보인다. 마치 경험이 우선 내용들을 - 형식, 견고성, 색, 소리, 맛, 냄새, 무게, 더움 등등 - 제공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어서 이 모든 내용들이 메타-포들에 의해 생명을 얻고 주어진 것을 너머au-delà 그 내용들을 짊어지는 이상의 무게(surcharge)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일어난다. 이 메타포는 마치 지각의 결핍에서 혹은 그것의 탁월성에서 길어지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17) 바로 이 현상학의 지각의 이론, 즉 후설의 직관의 이론의 핵심적인 자기 모순, 그것이 아니라면, 현상학의 지각의 이론의 이중구속으로부터 레비나스가 제기하는 내기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메타포, 은유가 이상의 것,너머를 실어 나른다면(메타포, meta-phore,는 말 그대로 옮기면, 이상의 것을 실어 나름, 운반, transport 전이 transfert 라는 의미이다) 이 너머는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현상학의 지각의 이론에 의하면 보이는 것의 이면으로서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지평이라고 말하는 부재로부터, 즉 결핍으로부터, 무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길어진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메타포는 어떤 탁월성으로부터 길어지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레비나스의 내기이다. 무엇에 따라서 결핍과 탁월함이 갈라지는가? 메타포의 메타, 즉 너머는 지각의 제한된 장의 부재하는 것으로서, 즉 보이는 않은 것으로서 다른 내용들을 데려오든가, 아니면 너머는 소여와 내용의 질서와의 관계에서 초월적인 것일 수 있다. 즉 전체의 부분으로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소여 그 자체, 내용 그 자체와의 관계를 벗어난 전체 밖에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전체의 밖, 세계의 밖을 말하는 것은 위에서 레비나스가 말하듯, 그 존경스러운 서양철학의 역사 안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요청이다. 그런데 그런 너머를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만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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