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간 사이의 질서
- "쓸데없는 고통"의 마지막 장이다.
1. 인간 사이의 전망(상호 인간적인 전망)에서 고통을 생각하는 것은 - 나에게 의미있는, 타인에게는 쓸데없는 sensée en moi, inutile en autrui - 고통은 상대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영역에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영역 밖에서 의식 내의 이 고통의 악의 내재적이고 야만적인 구체성은 다만 추상일 것이다. 인간 사이의 전망에서 사유하는 것은 다원적인 의식의 공존 안에서, 혹은 단순한 지식으로서 인간들 사이의 고통의 운명과 유사성을 가진다는 사회적 결정론 안에서 그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 사이의 전망은 시민의 법이 지배하는 정치 안에서는 지속될 수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고유한 의미에서 인간 사이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책임 안에서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비인격적인 법 안에 기입된 이런 책임의 상호성이 나로서의 나의 윤리적인 자리 안에 기입된 이 책임의 순수한 이타주의에 위에 놓이기 전, 상호성의 계기인 모든 계약, 그 안에서 순수한 이타주의, 탈-존재사건(dés-interessement)은 계속될 수도, 그런데 그것은 완화되고 사라질 수도 있는 그런 계약 전, 그 앞섬을 의미한다. "사회계약"으로부터 시작한 정치적인 질서 - 사후적 윤리, 전-윤리 - 는 윤리를 위한 불충분한 조건도 그것의 필연적인 종착지도 아니다. 윤리적인 입장에서, 자아는 시민국가(Cité)로부터 나온 시민과 구분되며, 자연적인 에고이즘에서 모든 질서에 선행하는 개인과도 구분된다. 그런데 홉스 이래로 모든 정치적인 질서는 이 개인으로부터 나오며, 이로부터 시민국가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세우고자 했으며, 세우는 데 성공한다.
- 시민과도 개인과도 구분되는 윤리적 주체인 나, 자아는 나의 유일성(unicité)이라고 불린다. 이 말은 unique, 유일한,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대체할 수 없는, 단독성singularité을 의미한다.
2. 인간 사이의 관계는 또한 하나의 도움의 요청에 다른 하나의 구조 안에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은 타인의 타자성이 도덕적 규범 안에서 "인간 사이의 장사"처럼 세워지는 단순한 교환으로 상식화되거나 변질되기 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고유하게 윤리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나와 타자(le moi et l'autre), (혹은 자아와 타자)의 형태들은 우리가 자연의 상태나 시민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에서 취하는 것과는 구분된다. 우리가 쓸데없는 고통의 현상을, 상호성에 대한 염려 없이 다른 인간을 위한 나의 책임이라는 인간 사이의 관계의 전망 안에서, 그리고 나의 그의 무상의 도움에 대한 요청에서, 그리고 하나의 다른 하나에 대한(l'un à l'autre) 비-대칭적인 관계 안에서 분석하고자 했다.
- 이 글이 실려있는 논문집의 제목은 Entre nous 『우리 사이』이다. 그는 공동체주의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어떤 종류의 공동체, 그것이 인간과 신의 공동체이든, 민족 공동체이든, 모든 종류의 공통체에 거리를 취한다. 하나와 다른 하나의 관계, l'un à l'autre, 나와 타자, 혹은 다른 나와의 관계, 그것은 <사이>, 우리 사이이다. 이 사이는 우리가 아닌 사이이다. 이 사이는 시간 "사이"(entretemps)이기도 하다. 그 안에, 그 사이, 그 장소에, 장소가 아닌(non-lieu) 그 장소에, 유토피아에서, 나의 주체성 안에서 다른 인간을 위한 인간주의의 가능성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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